케케묵은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심야 영화란 대체로 지루한 법이다. 이야기가 단조롭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참신하여 그 의도를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상당수를 차지할 때도 있다. 개중에는 충격 요법에라도 사용하려는 것인지 성인 등급으로도 부족할 정도의 파격적인 전개가 난무하는 것 또한 있다. 피만 낭자하면 다행일 것이다. 인간의 몸에서 쏟아져 나오는 건 생각보다 다양하다는 것을 우리는 몇몇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배울 수 있다.
하품하며 객석에 구겨져 있던 테스카틀리포카는 손잡이에 걸어둔 컵을 집었다. 모처럼 콜라에 팝콘도 사 들고 왔건만,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입맛 덕분에 손도 대지 못한 콜라는 진작에 김이 빠지고 얼음이 녹아 밍밍해졌다. 싱거운 캐러멜 맛이 나는 액체를 대충 삼키면서, 테스카틀리포카는 스크린 속에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눈알의 개수가 몇 개인지 눈으로만 세기 시작했다.
이런 것도 예술이라고 하나? 요즘 인간들은 어렵구먼. 테스카틀리포카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마침 스크린의 다음 장면에서는 오물로 범벅이 된 채 사랑을 나누는 인간들이 나오고 있었다. 여기서 인간들이라 함은 단 두 사람이 아니라, 두 손으로도 셀 수 없을 정도의 인원을 말한다. 대중의 이해를 거부하는 이런 부류의 영화를 칭송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론 거북하게 느끼는 사람도 있다. 한편, 잔인무도한 전개마저 일상과 다를 바 없는 그에게 자극적이기만 한 연출은 단순한 장면의 나열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기왕이면 만든 이의 철학이 담긴 작품이 좋았다. 굳이 따지자면 막대한 예산을 들이부어 화려한 CG와 웅장한 음악이 장식된 블록버스터 영화가 마음에 들었지만(4D 영화관을 처음 경험하고 온 날은 어떻게 해야 그 시설을 집에도 갖출 수 있을지 한참을 업자와 씨름하기도 했다) 이는 어디까지나 개인 취향의 영역이며, 충분히 흥미로운 내용이기만 하다면 그에게는 아동용 애니메이션도 훌륭한 걸작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번 영화는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졸작이라고 테스카틀리포카는 판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따분함을 견디면서까지 객석에 앉아 있는 이유는, 최근 들어 데이비트가 시작한 일 때문이었다. 어째 한동안 컴퓨터를 하는 시간이 늘었다고는 생각했다. 집에서까지 온종일 영화를 보는 날도 제법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도 있겠거니 하며 개의치 않아 하던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데이비트는 어느 날 통보했다. 일자리를 구했어. 그렇게 말하며 보여준 메일에는 합격 통보와 함께 계약에 대한 안내 사항이 첨부파일과 함께 적혀 있었다. 듣자 하니 칼럼니스트라는 듯하다. 그는 데이비트가 쓴 글을 읽어볼 일은 없었지만 영화를 본 뒤에 혼자 제멋대로 풀어내는 감상은 재밌다고 생각했으니 썩 잘 어울리는 직업이라고 해주었다.
다음 호에 투고될 영화는 출판사에서 지정해 줄 때도, 데이비트 본인이 선정할 때도 있었으며, 간혹 짧은 기간 내에 여러 편을 관람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연하게도 아직 극장에서 상영 중인 영화를 봐야 할 때도 있었는데, 이런 건 대체로 출판사에서 티켓을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서비스 정신이 투철한 출판사의 관계자께서는 친절하게도 매번 티켓을 두 장씩 보내주었다. 당연히 동행이 있을 것을 가정한 배려를 신기하게 여긴 데이비트였지만, 생각해 둔 동행이 있던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감사히 받아두기로 한 기억은 머릿속에 계속 남아있었다.
데이비트가 일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되었을 무렵, 그들은 식당에 앉아 진한 바비큐 소스가 발라진 폭립을 뜯고 있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데이비트가 설명해 주는 최근 박스오피스 상황을 들으며 뼈를 말끔히 발라내는 작업에 몰두했다. 유난히 질긴 힘살에 나이프를 써가며 겨우 먹기 좋게 손질이 끝났을 때, 데이비트는 보란 듯이 티켓을 내밀었다. 이게 다음 영화야. 설명은 그게 전부였다. 잘 발라낸 고기와 티켓을 몇 번 번갈아 본 뒤에 테스카틀리포카는 떨떠름하게 티켓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데이비트의 반응을 통해 이 행동이 정답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티켓을 손에 쥔 채 무슨 반응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다. 그걸 보러 가는 건 네 일이지 내 일이 아니지 않냐? 나한테도 일정이라는 게 있는데? 내 사업 아이템은 그렇게 구박했으면서? 너무 오냐오냐해줬나?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기에 결국 그는 토 달지 않고 제안을 받아주었다. 어련히 재밌는 영화겠거니. 그런 가벼운 마음이기도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데이비트가 기고하는 잡지의 컨셉이 불후의 B급 영화를 발굴하는 것이었으며, 대부분의 영화는 테스카틀리포카의 취향에서 아득히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건 조금 뒤의 일이다.
한번은 테스카틀리포카가 이렇게 물은 적도 있다. 너 이게 진짜 재밌다고 생각하냐? 데이비트는 대답했다. 아니. 그렇게만 대답하고 데이비트의 시선은 바로 스크린으로 돌아갔다. 그때 테스카틀리포카는 혹시 자신이 놀림당하고 있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
지금도 그는 이 시간에 성경이나 다시 읽는 편이 낫지 않았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객석은 대부분 비어 있어서, 저렴한 가격에 영화관을 대여한 것이라고 퉁치며 애써 위안 삼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데이비트는 영화가 시작한 뒤로 단 한 번도 꼼짝하지 않고 스크린만 보고 있다. 눈을 깜박이고 있는 건 맞는지 물끄러미 보고 있으니 기다란 속눈썹이 풀썩이며 내려앉았다가 다시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이번엔 1분에 눈이 몇 번이나 깜박이는지 세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할 무렵, 영화는 어느새 마지막 시퀀스로 넘어가며 총격전에 들어갈 준비를 했다. 영화 맥락으로 따지면 역시나 뜬금없는 전개였으나 테스카틀리포카는 드디어 영화가 재밌어지려는 건지 기대하며 자세를 고쳐잡았다. 무언가가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영화관을 가득 채운 것은 그 직후의 일이었다. 소리는 스피커에서 난 것이 아니었다.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릴 틈도 없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는 하얀 물체를 그들은 눈앞에서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작고, 하얗고, 조금은 울퉁불퉁하고, 먹음직스럽게 생겼다. 팝콘이었다. 별안간 쏟아져 내리는 팝콘은 꼭 늦가을에 예고 없이 찾아온 첫눈 같았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요즘 날씨에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팝콘을 몇 개 주워들어 스크린 불빛에 비춰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입에 털어 넣었다.
“영화관에서 만든 것보다 이게 더 맛있는 거 같은데? 여기 주인장들은 분발해야겠어.”
“바닥에 떨어진 거 함부로 먹는 거 아니야."”
데이비트는 여전히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다. 영화에서는 이미 전투가 한창이다. 영화 속 비명과 현실의 비명이 섞이며 주위에서는 소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엔딩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그들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 조사에 협력해야 한 지 3시간 만에 그들은 풀려날 수 있었다. 외모로 인해 수상하다는 눈길을 받는 것에도 나름 익숙해진 참이었으나, 역시 이런 일이 생기면 번거롭게 느껴진다. 선글라스라도 바꿔보면 어떻겠냐는 말을 들은 적도 있지만, 테스카틀리포카는 깔끔하게 무시하고 현재 스타일을 고수했다.
바깥세상은 어느새 해가 뜨기까지 머지않았다. 아직 가게에 불을 밝히려면 몇 시간이고 남은 어두운 상점가에는 두 사람의 발소리만 멀리 퍼져나갔다. 별다른 말 없이 걸어가던 테스카틀리포카는 크게 한 번 하품을 한 뒤 마찬가지로 침묵을 유지 중인 옆 사람에게 조금 전의 사건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왜 굳이 팝콘이어야 했다고 생각하냐?”
“팝콘은 옥수수로 만드는 것이고, 옥수수는 신의 육체로부터 유래된 것이니까, 머리가 터져서 팝콘이 되는 건 단계를 조금 건너뛰었을 뿐이지 나름 타당해 보이는데.”
“그런데 저 녀석은 신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만약 터진 게 네 머리였다면 아주 완벽했을 거야.”
“소름 끼치는 소리를 하는군.”
길 반대편에서는 새벽부터 우유 배달을 시작하는 소년이 자전거를 몰며 나타났다. 서툰 솜씨로 부는 휘파람은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 소리와 닮아서 괜히 공기가 더 춥게 느껴진다. 방금 건 음정을 틀렸군, 그런 생각을 하며 테스카틀리포카는 계속 마음에 남아 있던 의문점을 되새겼다. 팝콘, 영화관, 머리, 펑! 마침 그때 자전거가 급하게 커브를 돌며 바구니에 들어 있던 우유병들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온다. 우유병이 제자리를 찾으며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여전히 삑사리가 섞인 휘파람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될 무렵, 테스카틀리포카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조금씩 밝아지면서 푸른빛을 되찾기 시작하는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다가 테스카틀리포카는 말했다.
“내 생각엔, 원래 노리던 건 내가 맞아.”
왜 그러고 있냐고 말하려던 데이비트는 방금 들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테스카틀리포카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해는 했으나 근거를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왜 너를? 그런 표정으로 보는 것을 알아챘는지 못 알아챘는지, 테스카틀리포카는 신경도 쓰지 않고 말을 마저 이어갔다.
“그런데 대마력 때문에 튕겨 나간 거지. 뒤에 있던 녀석은 운이 나빴을 뿐이고.”
“하지만 왜…”
“다른 녀석들이라고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됐겠어? 나도 마찬가지겠지. 아니면 뭐, 맘대로 인간 세상에 쳐들어와서 훼방만 놓고 다니는 게 꼴 보기 싫었나 보지.”
데이비트는 이곳에 그들이 온 뒤로 겪었던 몇 가지 사건들을 떠올렸다. 순순히 사실을 인정하자면, 대부분은 굳이 그들이 나서지 않아도 문제를 감지한 누군가가 나타나서 해결했을 사건이었다. 그런데도 왜 직접 손을 대야 했냐고 한다면, 그건 데이비트가 데이비트로 존재하는 이상 마땅히 취해야 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언제 어디서든 인간으로 살아가는 한 멈추지 않을,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행위였다.
“그러니까 내 말은, 다음에 피해를 보게 되는 건 너일 수도 있다는 거야. 내 옆에 제일 많이 있는 건 너니까. 너도 머리가 팝콘이 되는 꼴은 당하기 싫잖아? 그래서…”
“떠나겠다고?”
중간 과정을 지나치게 생략한 결론이었으나 테스카틀리포카가 고려하고 있던 선택지를 정확하게 먼저 꺼내버리자 더 이어갈 말이 사라지고 말았다. 어, 하고 짧은 긍정 표현만 한 뒤에도 데이비트는 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데이비트는 감정 표현이 적은 편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티가 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는 오히려 지나치게 알아보기 쉬울 지경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여길지 모르겠으나 최소한 테스카틀리포카에게는 그러했다. 그리고 조용히 데이비트의 반응을 살피던 테스카틀리포카는 그 표정을 통해 아마 지금까지 본 것 중에 가장 많이 화가 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차, 잘못했다.
“그럼 너는, 내가 문제를 해결 못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 그런 소리가…”
“큰코다치게 해주겠어.”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만 말한 뒤 데이비트는 원래 가던 방향이 아닌 다른 곳으로 몸을 틀더니 빠른 속도로 멀어지기 시작했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러도 들은 척조차 하지 않는다. 몇 번이고 불러댄 덕분에 그 일대에 사는 사람들은 데이비트라는 얼굴도 모르는 청년의 이름을 다 알게 되었을 것이다. 데이비트가 빠르게 걷는다고 해봤자 테스카틀리포카가 쫓아갈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물론 그것은 데이비트도 알고 있다. 그러니까 데이비트는, 어느 순간부터 전속력으로 달려가 버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이제 아무것도 듣지 않는다. 망했다. 길바닥에 혼자 남겨진 테스카틀리포카는 떠오르는 아침 해를 보며 하품이 아닌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매정한 녀석. 얼마 뒤 게재된 칼럼을 보며 테스카틀리포카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런 것이었다. 누가 보아도 기분이 상했다는 티를 내며 사라진 데이비트는 열흘이 지나도록 문자 한 통 없었다. 원래도 먼저 연락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으나 그들이 이곳에 정착한 후로 이렇게 장기간 생존 확인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은 말 그대로 처음이었다. 어쩌면, 그들이 이문대의 그곳에서 만난 이래로 따져도 처음일지 몰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해야 할 일은 제대로 한다는 것인지, 칼럼은 예정된 날짜에 맞춰서 확실히 실려 있었다. 웹으로도 발간되어 스마트폰으로 간편하게 볼 수 있게 편집된 잡지의 특집 페이지에는 데이비트의 필명이 적혀 있다. 칼럼의 내용은 언제나 그랬듯이 정확한 사실의 나열과 그에 관한 소감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결론만 말하자면 데이비트의 평점은 10점 만점에 2.5점이었다. 역시 그 녀석한테도 이번 영화는 재미 없었구나. 그래도 이렇게 글이나 쓰고 있는 걸 보면 잘 지내고는 있나 보구나. 테스카틀리포카는 그렇게 감상을 끝내며 아직 화면이 켜져 있는 핸드폰을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집어 던졌다.
텔레비전에서는 재미 없는 아침 토크쇼의 패널들이 자기들끼리만 재밌는 얘기를 하며 시답잖게 웃고 있다. 방청객 웃음소리로 들리는 효과음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다가 그마저도 거슬리게 느껴진 테스카틀리포카는 던져진 핸드폰과는 반대편에 놓인 리모컨을 들어 전원을 꺼버렸다. 그 와중에도 버튼이 제대로 눌리지 않아 서너 번은 눌러야 겨우 꺼지는 텔레비전에 화풀이 겸 신경질을 낸 것은 덤이었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거실에서 그는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익숙한 손놀림으로 바지 뒷주머니를 뒤져 담뱃갑을 꺼냈다. 그리고 납작하게 눌린 담뱃갑을 대충 펴서 털어내다가 또 한 번 신경질을 내며 핸드폰 옆으로 던지고 말았다. 담뱃갑은 진작에 텅 빈 상태였다. 마치 모든 상황이 그를 놀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있는 대로 찌푸려진 미간을 누르며 그는 애써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쨌든 데이비트는 해결하고 말겠다며 종적을 감췄다. 해결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생각을 해보자. 범인(으로 추정되는 존재)의 공격을 멈추게 할 방법은 범인이 목적을 달성하게 하거나, 범인 자체를 없애는 것, 둘 중 하나다. 범인이 목적을 달성한다는 건 테스카틀리포카를 제거하는 데에 성공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안 되지, 하고 테스카틀리포카는 첫 번째 선택지를 제외했다. 죽은 척 위장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그건 테스카틀리포카가 아직 살아있다는 걸 알아채는 순간 의미가 없어지므로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실제로 한 번 죽고 다른 몸으로 돌아온다는 선택지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두 번째, 범인을 없애는 것. 이게 가능했다면 지금처럼 이야기가 복잡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어디에 사는 어떤 녀석들인지도 알 방법이 없다. 아마 데이비트의 체질과 관련된 그런 녀석들일 확률이 높겠지만, 그럼 없애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그러므로 기각.
그렇다면 마지막. 멈출 수도 없고, 없앨 수도 없다면, 남은 건 피하는 것뿐이다. 이는 테스카틀리포카가 처음에 제안한 방법에 해당하는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인간의 모습을 없애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아쉽지 않냐고 묻는다면 그야 물론 아쉬운 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는 애초에 반칙의 연장선 같은 것이었으므로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순순히 떠나줄 생각이었다. 데이비트의 결사반대가 아니었다면 그럴 예정이었다. 그럼 다른 방법은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무엇보다 지금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는 불특정 다수에게 괜한 피해가 가게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데이비트는 떠나기 전에 테스카틀리포카에게 한 가지를 당부했다. 절대 집 밖에 나가지 마라. 이는 추가 피해가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한 최소한의 예방책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테스카틀리포카는 남의 말을 그다지 따르지 않는 편이었으며 실제로 그는 잠깐이라면 괜찮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외출을 강행했다. 집안에 틀어박혀 있기만 해선 성에 안 차는 타입이었던 것이 한몫했다. 다행히도 한동안은 별 문제 없이 평소와 다름 없는 일상을 보낼 수 있었다. 거봐, 괜찮잖아. 그는 데이비트가 돌아오면 그렇게 말해줄 심산이었다. 그러나 사건은 언제나 방심하고 있을 때 일어나는 법이다.
이번 주의 상영 스케줄을 확인하기 위해 시내에 있는 큰 시네마에 들렀을 때였다. (이때 테스카틀리포카는 혹시라도 스케줄에 맞춰 데이비트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얄팍한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간만에 초대형 예산의 할리우드 영화가 개봉한다는 걸 확인한 후 뒤를 돌자, 그는 이번에야말로 눈앞에서 머리가 폭발해 흩날리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다. 딱딱한 껍질이 거꾸로 뒤집히며 하얀 속살이 부풀어 오르는 팝콘처럼 형체를 잃어가는 인간의 머리는 여느 B급 영화보다 우수한 연출이었다.
당연히 현장에 있었던, 심지어 코앞에 있었던 테스카틀리포카는 이번에도 경찰의 조사를 받아야 했고, 역시나 이번에도 수상한 인물로 찍혀 데이비트도 없이 홀로 본인의 무죄를 입증해야 했다. 현장에 출동한 인물 중에 지난번에 마주친 경찰이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연달아 일어난 괴상한 사건에서 누가 봐도 수상한 인물이 두 번 다 자리에 있었다고 하면 그건 틀림없이 유력한 용의자였다. 그리고 실제로 반은 그가 원인인 것도 맞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날 이후로 테스카틀리포카는 고집을 버리고 얌전히 집에서 기다리는 것을 선택하고 말았다. 어느새 수북이 쌓여버린 페이퍼 컴퍼니 몇 군데를 정리하기도 했고, 사다 두기만 하고 방치하던 골동품들을 손질하기도 했다. 오늘은 눈을 뜨자마자 자동차를 개조하기 시작하여 콘솔박스를 뜯어내다가 부품이란 부품은 전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때려치운 참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완전히 해체된 자동차를 발견한 데이비트에게 무슨 말을 할지는 나중에 생각할 일이었다.
여기서 다시 조금 전의 고찰로 돌아가자. 결국 지금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공격의 방향이 다른 곳으로 틀어지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우수한 대마력으로 인해 튕기는 게 문제라면 튕기지 않게 만든다? 대마력을… 없앤다……?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그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튕기지 않게 붙들어두는 방법을… 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뱃속에서 시끄럽게 울리는 소리가 생각을 비집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아직 일어나서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은 상태였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아주 오랜만에 인간의 몸이 상당히 귀찮게 만들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집에 틀어박히기 전에 식재는 충분히 구비해두어 꼴사납게 굶주릴 걱정은 없었으나, 지금의 테스카틀리포카는 제대로 된 요리를 할 의욕도 잃은 지 오래였다. 부엌에 들어설 때면 언제부턴가 반찬 투정이 심해진 녀석의 얼굴이 떠오르며 허전함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전엔 흙을 퍼먹어도 신경 쓰지 않을 놈이었는데, 언제 이렇게 된 거지? 그는 새삼스레 자신의 방침이 잘못되었는지 고민하며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에는 데우기만 해도 먹을 수 있는 간편식은 거의 없고, 한 번이라도 조리 과정을 거쳐야 하는 재료가 대부분이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냉장고 내부를 위에서 아래로 한 번 훑은 뒤, 냉장고에 대충 쑤셔 박아 질겨진 바게트를 집었다. 썰지도 않은 빵을 입으로 물어 뜯으니 익히지 않은 생고기를 씹는 기분이 든다. 어쩌면 생고기가 더 맛있을지도 모르는 맛이었다. 그렇게 껌이라도 씹는 것처럼 질겅질겅 빵을 씹으며 거실로 돌아왔을 때, 그는 들고 있던 바게트를 떨어뜨리지 않은 자신을 칭찬하고 싶었다.
“다녀왔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겠던 지인이 조금 전에 나갔다가 금방 돌아온 것처럼 인사를 하고 있으니 당연했다. 사실상 귀신을 보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벽에 단단히 고정되어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열린 문을 통해 하얀 알갱이가 집안에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눈이었다. 낭만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올해의 첫눈이었다. 그 하얀 눈이 머리 위에 소복하게 쌓인 채로 데이비트가 현관에 서 있었다.
“너 왜 이제야…!”
“시계탑에 다녀왔어.”
“뭐?”
데이비트는 집에 들어오기 전에 현관에 서서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그 모습이 꼭 첫눈을 보고 신나서 마당으로 뛰어나가 놀다 들어온 강아지 같다. 어깨에 쌓인 눈까지 대충 털어낸 뒤에야 데이비트는 거실로 들어왔다.
“너, 거기는 이제 안 간다고 했잖아.”
“물론 연구원으로서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지만, 도움이 필요할 때 외면할 만큼 나도 멍청하지 않거든.”
데이비트의 설명은 테스카틀리포카가 거친 사고의 흐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쨌든 공격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틀어야 한다는 결론까지 같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지금 문제는 공격의 방향을 특정할 수 없다는 거야.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면 좀 더 편했겠지만, 그건 역시 지나친 욕심이지. 그렇다면 방법은, 인위적으로 방향을 만드는 것밖에 없어. 그때 나는 생각한 거야. 내 체질은 애초에 블랙홀과 비슷한 거니까, 약간의 보조만 있다면 얼마든지 나에게 향하도록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이쯤에서 테스카틀리포카는 간절하게 담배를 피우고 싶었다. 서랍장 어딘가를 뒤지면 남은 담배를 찾을 수 있겠지만 지금은 그럴 틈도 없다. 일단은 눈앞의 녀석이 하는 헛소리를 마저 들어야 했다. 그러니까, 지금 뭐라고? 네가 당하면 안 되니까 떠나주겠다고 한 건데 이러면 주객이 전도된 거 아닌가? 그러니까 뭐... 죽지만 않으면 단 줄 아나?
“교신하는 방법을 응용하면 신호를 보내듯이 공격을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것도 가능하게 돼. 그게 최종적으로 어디로 가는지는 나도 알 수 없게 되지만, 최소한 관측 우주 내에는 아무 피해가 없다고 내가 증명할 수 있어. 그렇다면 방식은 어떤 것을 이용할지 고민한 결과, 도구를 사용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이었지만 그건 도구를 잃어버리거나 망가뜨리면 무용지물이 돼. 그러니까…”
거기까지 들었을 때 테스카틀리포카의 손은 이미 데이비트의 옷을 붙잡고 있었다. 순식간에 겉옷을 벗기고 빠르게 단추를 풀어내는 손을 데이비트는 그저 내버려두었다. 절반 정도만 풀어헤쳐진 셔츠 사이로 보이는 반창고는 교체한 지 오래되지 않은 것인지 아직 깨끗한 상태였다. 눈에 거슬리는 반창고까지 뜯어내자 비로소 가슴팍의 울퉁불퉁한 흉터가 보인다.
“너무 건드리지는 마. 상처가 아문 지 얼마 안 돼서 덧날 수도 있어.”
“너 그런 소리를 잘도… 아니다. 너라면 그렇게 하겠지. 그러지 않으면 네가 아니겠지. 그렇지.”
결국 본인 몸을 뜯어 고쳐서 써먹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예나 지금이나 몸을 아무렇게나 취급하는 태도가 싫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정도 되는 일은 역시 사전에 의논해 주었으면 한다. 그런 심정을 알기는 하는지 데이비트는 이걸로 문제는 해결이라는 소리나 하고 있다. 그 말을 대충 흘려듣다가, 테스카틀리포카는 뒤늦게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근데 그렇게 되면, 나는 항상 너랑 같이 외출해야 한다는 소리가 되지 않냐?”
“그렇지. 그게 문제라도 되나?”
정말 새삼스럽다는 듯한 뻔뻔한 태도에 말도 안 나온다. 그러거나 말거나 옷을 마저 벗더니 구급상자는 원래 자리에 있냐고 물으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런 멍청한 상자 따위 건드린 적도 없으니 당연히 고스란히 있을 것이다. 배고프니 밥이나 먹자고 하는 말이 방에서 들려왔을 때는 그나마 있던 기운마저 빠져나가고 만다.
예고도 없이 내린 첫눈은 신고식이라도 치르겠다는 건지 벌써 몇 센티미터나 쌓이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치료받고 있던 사람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아무렇지 않게 눈을 쓸고 돌아오는 데이비트를 보며 테스카틀리포카는 저녁에 소고기를 가득 넣은 스튜를 끓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데이비트, 내가 저번에 물어봤지? 왜 굳이 팝콘이어야 했을 거 같냐고.”
테스카틀리포카는 데이비트에게서 빗자루를 받아 들며 그가 없었던 동안 추가로 일어났던 사건을 털어놓았다. 그 과정에서 말을 듣지 않고 맘대로 외출한 것에 타박을 받았으나 그건 사소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통해 데이비트의 추론에서 한 가지 빠져있던 점을 보충했다.
“내 말은, 생각보다 그 팝콘에 의미가 컸던 건 아닐까 하는 거야. 너라면 팝콘을 어디서 주로 먹을 거 같아?”
그 말까지만 들었음에도 데이비트는 테스카틀리포카가 하고 싶은 말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군. 세부 조건이 더 있었다는 거구나.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영화관… 다시 말하면 영화를 보기 위해 마련된 공간에서만 작동하는 게 아닌가 하는 거지.”
“지금까지의 경험상 타당하다고 생각해.”
“그렇지?”
“그래.”
“그럼 내가 영화를 보러 가는 것만 아니면, 외출에도 큰 지장은 없겠지. 마음 내킬 때 영화를 보러 가지 못하는 건 좀 아쉽긴 하지만, 다음 현계의 재미로 남겨둬도 상관없어.”
“…내가 곤란해.”
“뭐?”
“나는… 앞으로도 너랑 같이 영화를 보러 갈 생각이었어. 그러니 이건 반드시 필요한 절차였어.”
그렇게 말하며 데이비트는 옷 위로 가슴팍을 문질렀다. 본인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영화를 같이 보고 싶다고 말할 때의 그는 눈에 띄게 속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그냥 넘길 수 없었던 테스카틀리포카는 줄곧 신경 쓰이던 점을 결국 입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너, 나를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냐?”
데이비트는 소리 없이 다시 쌓여가는 눈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그런 데이비트를 조용히 관찰하며 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머지않아 생기라곤 없는 눈이 크게 떠지며 빛이 번뜩이는 순간을 목격할 수 있었다.
“뭐야, 왜 그런 반응…”
“그렇군. 내가 너를 좋아해서 그런 거구나. 참고해야겠어.”
저거 지금 진지하게 하는 소리인가? 물론 진지하게 하는 소리였다. 눈과 귀를 의심하게 하는 소리를 하는 데이비트를 보며 테스카틀리포카는 지금까지 거쳐 온 그 수많은 밤은 대체 무엇이었는지 생각하고 말았다. 한편 데이비트는 마음이 개운해지기라도 한 것처럼 가볍게 웃으며 먼저 집안으로 향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이번에도 한 방 먹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 나도 한 가지 사실을 정정할게. 너는 노려지는 대상이 너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아니야.”
문을 열기 직전에, 데이비트는 마지막 남은 하나의 오류를 언급했다.
“처음부터 노리는 건 나였겠지. 너는 그저 총신에 불과해. 너를 통해 나를 맞추는 게 목표였겠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들도 조준 실력이 그다지 좋지 못했던 모양이야. 아니면… 빗나간 것도 네 영향이라는 건가…….”
“은근슬쩍 무례한 말을 하는군.”
그 말에 데이비트는 소리 내어 웃으며 집으로 들어갔다. 어째서 그들이 데이비트를 노리는지에 대해서는 두 명 모두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아무렴, 정말로 노리는 게 어느 쪽이든 이제 와선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래봤자 그들은 내일도 새로운 영화를 볼 예정이었고, 이번에야말로 끝내주게 맛있는 팝콘을 사 들고 즐길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