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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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ublic tzdy
 

테스데이/ a bit of freaks

현대에 살아가는 두 사람이 기묘한 사건을 마주치는 이야기


4. 그림자의 거울상 이성질체


핼러윈 불청객 방문기



두 대의 차가 도로를 질주하고 있다. 레이스를 응원하는 관중은 없다. 경기장을 가득 채우는 것은 함성이 아니라 엔진이 울부짖는 소리뿐이다. 짐승의 울음소리와도 닮은 그것이 고막을 찢을 기세로 거세게 울려 퍼진 것과 동시에, 검은 레이스 카가 새빨간 것을 앞지른다. 그대로 선두를 달릴 것 같았던 검은 차는 불꽃을 뿜으며 따라오는 붉은 차에게 금방이라도 따라잡힐 것 같다. 마지막 코너에 다다랐을 때, 검은 차는 깔끔하게 드리프트에 성공하며 다시 간격을 벌린다. 이제 골인 지점까지는 직선 코스밖에 남지 않았다. 승자가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순조롭게 속도를 올리던 검은 차가 갑자기 트랙에서 벗어나는가 싶더니 가속하던 그대로 벽에 충돌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뒤따라오던 붉은 차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휘청이다가 중심을 잃고 빙글빙글 돌며 그 옆 벽에 부딪혔다. 이내 차체가 폭발하는 굉음이 들리며 온 시야가 진동하고, 맥 빠지는 배경음이 나오면서 화면에는 커다랗게 GAME OVER 글자가 나타났다.



데이비트와 테스카틀리포카는 자동차 핸들을 각자 한 손에 들고 황망하게 선 채 거실 한가운데를 보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정말로 자동차에서 핸들을 뽑아오는 짓을 한 건 아니며, 이는 어느 유명 일본 게임 회사에서 만든 레이싱 게임의 컨트롤러일 뿐이다. 그들은 다음 달 식사 당번을 정하기 위해 내기를 하는 중이었다. 실제 운전 실력으로 따지면 데이비트가 압승이었겠지만, 주위 안전을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게임이 되면 테스카틀리포카와는 좋은 승부가 된다. 그리하여 앞선 경주에서 그들은 사이좋게 한 번씩 승리를 따낸 상태였고, 이번 한 판으로 꽝이 결정될 예정이었다. 난데없이 들이닥친 불청객만 아니면 그럴 예정이었다.

그것은 굉장히 구식 텔레비전이었다. 구체적으로 연도를 추정하면 1950년대 정도에 만들어졌을 법한 텔레비전이다. 브라운관 아래에 다리가 달린 그런 것 말이다. 요즘은 골동품 가게를 뒤져서 찾아내려 해도 찾을 수 없을 모델이다.

텔레비전은 골인까지 마지막 몇 초를 남긴 순간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다. 아니지, 사실 하늘에서 떨어졌는지까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옆집에서 집어 던진 것이 이곳까지 날아온 것일지 그들이 어찌 알겠는가. 어쨌든 그들이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지붕을 뚫고 들어온 뒤의 일뿐이기 때문이다. 그랬다. 어느 오래된 텔레비전은 그들의 집 지붕을 뚫고 거실 한가운데에 완벽하게 안착했다. 지구에서 발사된 우주왕복선이 달에 착륙할 때도 이렇게까지 요란하지는 않을 것이다. 텔레비전이 네 다리로 똑바로 선 채 자리를 잡은 뒤에도, 부서진 지붕의 잔해는 한참이나 거실로 떨어져 내렸다. 머지않아 찾아올 겨울에 대비하며 대청소를 한 것이 바로 얼마 전의 일이었다.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하게 정리되었던 거실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하지만 정작 집을 이렇게 풍비박산 낸 불청객은 흠집 하나 없이 말끔하다. 이제 막 새로 사들인 텔레비전이라고 해도 누구나 믿을 것이다. 소동 속에서 먼저 정신을 차린 테스카틀리포카는 정말 정신을 차린 것이 맞는지 의심되는 질문을 했다.

“원래 TV라는 게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였던가?”
“아무래도 아니지.”
“산타클로스의 선물이라고 하기에도 시기가 이른데 말이야.”
“굴뚝이 없어서 지붕으로 들어온 거라고 해도 말이 안 되지.”
“어떡하지. 일단 밖에 둘까?”
“그래.”

그렇게 말하고 데이비트는 시험 삼아 텔레비전을 슬쩍 들어보았다. 다행히도 그 자리에 박혀서 움직이지 않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무게도 일반적인 텔레비전과 같았다. 건드린다고 해서 갑자기 폭발하지도 않았으며, 데이비트의 스캔에 의하면, 평범한 텔레비전이 아닌 것도 맞았다. 집에 불쑥 들이닥쳤다는 점에서 공격성이 없다고 하기는 어려웠으나, 그 외에 특별한 변화는 현재로선 없어 보였다. 텔레비전을 들어 올린 상태 그대로 데이비트는 성큼성큼 현관을 향했고, 테스카틀리포카는 눈치껏 문을 열어주었다.



그들의 마당은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로 이미 번잡했다. 때는 핼러윈이다. 잭오랜턴 두어 개로 끝내려고 했던 데이비트의 계획과는 달리, 축제는 화려할수록 좋은 것이라며 장식을 늘려가던 테스카틀리포카 덕분에 마당은 어느덧 세계 각국의 핼러윈 풍습을 모아두기라도 한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문 앞을 큼지막하게 차지하고 있는 해골 조형물(머리는 호박이다.)은 핼러윈이 끝난 뒤에도 처치 곤란으로 인해 그 자리를 유지할 예정이었다.

현관 옆, 수북이 쌓인 호박들 사이에 텔레비전을 적당히 놓은 뒤, 데이비트는 작은 호박 몇 개를 주워서 텔레비전 위에 올려두었다.

“이 정도면 나름 핼러윈 장식으로 보이지 않을까?”
“퍽이나.”

텔레비전에서 귀신이 튀어나오는 영화도 있지 않던가. 제법 핼러윈에 어울리는 분위기가 연출되었다고 데이비트는 생각했다.



태평하게 생각한다 한들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다시 돌아와 거실을 보며 그들이 선택한 것은 우선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었다. 아직 점심 식사를 해결하지 못해 텅 비어버린 뱃속은 밥을 달라며 큰 소리로 아우성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텔레비전이 수직으로 내리꽂힌 탁자는 반 토막이 나 있었고, 지붕에 뚫린 구멍으로는 하늘을 빙빙 돌다가 날아가는 새가 보인다.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다시 한번 뱃속에서 소리가 울린 뒤, 테스카틀리포카는 굶주린 배를 붙들고 물었다.

“우리 집에 먹을 거 있던가.”
“파낸 호박이랑 김빠진 콜라는 있어.”
“일단 그걸로 때우자.”

여유가 있다면 파이라도 구웠겠지만, 급한 대로 호박은 모조리 걸쭉한 수프가 되었다. 아쉬운 대로 쏟아 넣은 크루통은 덤이었다. 수프인지 반죽인지 구분도 안 될 무언가를 해치운 뒤, 창문을 열어 집안 가득한 호박 냄새를 빼내며 청소를 시작한 것이 대략 오후 3시경의 일이었다.





데이비트가 청소를 끝내고 쓰레기를 마당에 내다 놓을 즈음엔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들리는 까마귀 울음소리는 분위기를 더욱더 청승맞게 해주었다. 데이비트가 바닥을 치우기 위해 진공청소기를 찾으러 간 사이, 테스카틀리포카는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지고 없었다. 말없이 외출하는 것은 언제나 있는 일이지만, 이렇게 일이 쌓였을 때 없어지면 그 나름대로 불만이 생긴다. 돌아오면 불평을 하리라고 데이비트는 다짐했다.

망가진 가구와 쓰레기봉투를 마당에 내놓을 때도 텔레비전은 처음에 둔 그 자리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다행히 어딘가로 다시 날아가 버리지는 않았다. 텔레비전의 정체가 무엇인지, 왜 갑자기 이곳에 날아왔는지는 이제부터 알아보아야 할 일이다. 그동안 여기저기서 일에 훼방을 놓고 다닌 이들의 정체를 찾아내고 복수를 하러 보낸 것일 수도 있다.

겉으로 보았을 때 텔레비전에 전원을 연결하는 곳은 보이지 않는다. 적당히 마력을 주입해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외부의 힘으로 작동되는 것은 아닌 듯싶었다. 일정 조건이 맞아떨어지면 저절로 움직일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렇다면 그 조건이 무엇인지가 문제인데, 어쨌든 텔레비전이라는 형태가 힌트일 것이다. 텔레비전은 신호를 받아 방송을 보기 위한 매체다. 그렇다면, 이 텔레비전은 무엇을 보여주는 거지?

“데이비트. 와서 도와.”

나갈 때와 마찬가지로 테스카틀리포카는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나더니 마당으로 들어섰다. 양손에는 어디서 구한 건지 널빤지 몇 개와 공구 상자를 들고 있었다. 뼈 빠지게 청소하는 동안 어디를 갔나 했더니, 지붕을 수리할 생각이었다는 걸 데이비트는 그제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데이비트는 고개만 끄덕인 뒤 창고에서 사다리를 챙겨 테스카틀리포카를 따랐다.

“나는 내일 해가 뜨면 수리공을 찾아갈 생각이었어.”
“그럼 밤새 이러고 두자고?”
“비가 새는 것도 아닌데 괜찮지 않나?”
“비 내리게 하기 전에 빨리 이거나 들고 있어.”

데이비트로서는 논리에 흠이 없다고 생각했으나 여기서 반박했다간 정말로 국지성 호우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잠자코 널빤지를 받아들었다. 집 안에 홍수가 일어나서 살림을 망가뜨리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의외로 데이비트는 지금 집이 제법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지름 50인치 정도로 뚫린 구멍 너머로는 검푸르게 변하기 시작한 하늘이 보인다. 하늘을 찢어다 천장에 발라둔 듯한 모습이다. 이대로 밤이 되면 불이 꺼진 거실로 달빛이 쏟아져 장관을 이룰 테지만, 테스카틀리포카의 의견에 따라 임시방편으로 구멍은 조금씩 메워졌다. 이런 일을 직접 할 일은 드물었을 텐데도 테스카틀리포카의 못질은 의외로 쓸만했다. 뭐든지 가능하게 하는 신이라더니 실은 본인의 손재주도 좋은 것일지 모른다.

사다리 아래에서 널빤지를 하나씩 넘겨주며 점차 메워져 가는 구멍을 바라보는 데이비트의 눈에는 조금 이른 시각임에도 별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금쯤 밖에 나가면 서쪽 하늘에서는 샛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더는 그들의 신호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그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138억 광년 너머를 볼 수 없어도 보이는 별은 있었다. 보아라. 별이 하나, 둘,

“데이비트!”

아득해지는 의식 속에서 조금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들린다. 시야의 끝에는 답답하다는 얼굴을 한 테스카틀리포카가 있다. 표정으로 추측건대 이미 여러 번 부른 모양이다.

“뭘 넋 놓고 있어. 못이 부족해. 거기 뚜껑 열어보면 있을 거야. 2개만 더 줘.”
“어 그래.”

아직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어정쩡한 모습으로 상자를 뒤지는 모습을 테스카틀리포카는 가만히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건지는 몰라도 대수롭지 않은 것이 틀림없었다. 데이비트 본인은 그렇지 않다고 하겠지만, 테스카틀리포카가 보기에 그는 쓸데없는 생각이 너무 많았다.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까지 신경 쓴다. 천문학적인 배수만큼 넓은 그의 시야가 그를 그렇게 이끈 것인지, 태생이 그런 것인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그런 주제에 다음 날이 되면 다 잊어버리는 것이 이전까지의 삶이었을 것이다. 정말이지 성가신 인생 방침이었다.

나사를 건네받은 뒤, 테스카틀리포카는 앞머리에 반쯤 가려진 이마에 딱밤을 날려주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데이비트는 당황했지만, 별로 아프지는 않았다. 테스카틀리포카도 그다지 화나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웃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데이비트도 그저 웃어넘기기로 했다.

현관 초인종이 울린 것은 그때쯤이었다.

“내가 나가볼게.”

테스카틀리포카가 사다리 위에 있었기 때문도 있지만, 대체로 방문객이 왔을 때 맞이하는 역할은 데이비트의 몫이었다. 어느 소심한 이웃께서 문을 벌컥 열고 나타난 테스카틀리포카의 모습에 기겁하고 도망가버린 뒤부터는 항상 그랬다. 무표정한 얼굴의 데이비트를 보고 겁을 먹는 사람도 간혹 있었으나 그 빈도는 굳이 비교할 필요도 없었다.

현관을 향하기 전에 데이비트는 부엌 식탁에 미리 마련해두었던 바구니를 챙겼다. 바구니 안에는 알록달록 다양한 색상의 포장지로 쌓인 과자가 가득 담겨 있다. 오늘을 위해 얼마 전 쇼핑에서 종류별로 사다 모은 것이었다. 데이비트는 지금 자신의 표정이 지나치게 굳어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며 문을 열었다.

“Trick or treat!”

현관 앞에 서 있던 건 5명의 아이였다. 저마다 분장 솜씨를 뽐내는 코스튬 중에는 고전적인 뱀파이어와 유령 분장도 있었으며, 최근 개봉한 영화의 유명 히어로(테스카틀리포카가 해피밀 세트에서 이 히어로의 피규어를 뽑았으나, 조금 전의 TV 소동으로 인해 그 피규어도 박살이 났다) 분장도 있었다.

“안녕, 데이비트!”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것은 바로 소피아였다. 고양이 사건 이후로도 소피아는 데이비트를 찾아오는 일이 종종 있었고, 데이비트는 그것이 고양이를 만나고 싶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소피아가 더는 아저씨라고 부르지 않고 데이비트라고 불러오기 시작했을 때에야 비로소, 데이비트는 소피아가 원한 것이 고양이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소피아에게 마을 친구가 많아진 것도 그 무렵이었다.

아이들이 잃어버릴라 꼭 쥐고 있는 바구니에는 앞서 들린 집에서 받았을 과자로 가득했다. 데이비트는 이미 가득한 바구니들에 아낌없이 과자를 더 얹어주었다. 이런 건 아낄수록 손해라는 테스카틀리포카의 의견에 지금만큼은 동의할 수 있었다. 사탕, 초콜릿, 젤리 등 여러 종류가 섞인 간식거리 중에서도 아이들은 지구 모양 젤리가 가장 신기했는지 눈을 반짝이며 받아들었다.

마지막으로 소피아에게 과자를 주었을 때였다. 신나게 재잘거리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별안간 멈췄다. 얼굴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데이비트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 서 있는 건 새까만 재규어 전사의 가면을 쓴 테스카틀리포카였다. 가면만 쓰고 있었다면 그나마 나았을 수도 있지만, 파워드 수트까지 갖춘 완전무장 상태다. 그야말로 전투에라도 나갈 기세다. 데이비트가 할 말을 잃은 채 쳐다보고만 있자 테스카틀리포카는 뭐가 문제냐며 물어왔다.

“원래 애들은 이런 거 좋아하는 거 아냐? 변신 히어로 같은 거.”
“그건 맞지만, 지금 네 모습은 히어로라고 하기엔 조금 거리가 있긴 하지.”
“거참 까다롭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테스카틀리포카는 그런 건 언제 또 만들어 두었는지, 칼라베라 사탕을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주었다. 같은 모양은 하나도 없는 수제 사탕이었다.

“옜다 받아라. 남한테 주지 말고 꼭 혼자서 먹어. 아주 귀한 거니까.”

아이들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해골 모양을 이리저리 돌리며 신기하게 보더니 “고맙습니다!”라고 하며 자신의 바구니에 담았다. 해골에 담긴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그 안에 깃든 신의 축복은 확실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다음 여정을 떠나는 아이들을 배웅하면 오늘 일정도 막을 내릴 예정이었다. 하지만 길을 나서던 소피아는 두고 온 것이라도 있는 것처럼 친구들에게 무어라 말을 하는 듯하더니 쪼르르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데이비트. 저 TV는 산 거야?”

분명 호박들 사이에 잘 숨겨놨다고 생각했는데, 용케 그걸 알아보고 물어왔다. 설마 그 카메라도 이런 식으로 찾아낸 건가? 데이비트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눈썰미를 가지고 있다면 본인이 의도치 않아도 주위에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좋은 것이 될지 나쁜 것이 될지는 소피아 자신의 몫이 될 것이다. 어쩌면 머지않아 마술에 관한 지식을 알려주어야 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이 지금은 아니었다.

“아니. TV가 제 발로 찾아온 거야.”
“하하하. 보기보다 말 재밌게 하는구나.”

자세한 내용은 숨기며 적당히 둘러대자 소피아는 그 말을 농담으로 취급했다. 굳이 따지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지만, 더 의심하지 않는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실은 요즘 학교에서 떠도는 소문이 있거든. 한밤중에 학교 뒷산을 오르면 어딘가에 버려진 TV를 찾을 수 있는데, 날이 바뀌는 자정에 그 TV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내가 언젠가 잃어버렸던 걸 볼 수 있게 해준대.”

흔히 있을 법한 괴담이었다. 학생이 모두 떠난 밤중에 홀로 학교를 찾으면 움직이는 동상을 볼 수 있다거나 하는 그런 부류의 이야기였다. 그런 이야기는 대부분 인간의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허구일 뿐이다. 하지만 아주 드물게, 그중에 섞여 있는 ‘진짜’가 바로 데이비트가 맡는 영역의 일이다. 그 진위를 구분하는 일 또한 마찬가지였다.

“애들이 겁먹어서 산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려고 만들어진 괴담이겠군.”
“그런가? 그치만 그런 얘기를 들으면 난 궁금해서 더 가볼 거 같은데.”

겁이 없다고 해야 할까, 호기심이 강하다고 해야 할까. 저번 일도 그렇고, 소피아는 사실 이런 일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체질일지도 모른다. 데이비트가 이 아이를 마술 세계로 이끌지 않는다고 해도, 언젠가 스스로 이곳에 발을 담그리라는 것을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시계탑에는 몇몇 지인이 아직 남아있을 것이다. 그의 부탁이라면 그들은 기꺼이 받아줄 것이다. 데이비트는 새로운 결심을 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래서, 그걸 실제로 경험해본 사람은 있어?”
“에이 설마. TV를 직접 봤다는 사람도 아직 못 봤는걸. 그래도 혹시나 그 얘기가 사실이라면, 한 번쯤 보고 싶기는 하다.”
어째서지?”

비밀. 소피아는 웃으며 그렇게만 말하고 먼저 떠난 친구들을 뒤따라갔다. 데이비트는 소피아가 잃어버렸을 것이 금방 떠올랐지만, 바로 생각을 떨쳐버렸다. 그걸 되짚는 것은 소피아 본인도 원하지 않을 일이었다.





소피아가 떠난 뒤에도 데이비트는 소피아가 들려준 괴담에 대해 생각했다. 지금으로선 소피아의 말이 사실인지도, 그 괴담 속의 텔레비전이 이 집에 들이닥친 물건과 같은 것인지도 알 수 없다. 다만 평범한 물건은 아니라는 것이 확실한 이상 시험해볼 가치는 있었다. 그렇다면 자정에 텔레비전을 마주할 사람은 자신이어야 한다. 자신이 텔레비전 속에서 잃어버린 것을 보게 된다면 과연 무엇을 볼 것인가. 데이비트는 그것을 예상해보려 했으나, 곧 자신은 잃은 것이 너무 많으므로 특정 지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잃었다는 것조차 모른 채 잊어버린 것도 많을 것이다. 그걸 전부 꺼내려 했다간 오히려 텔레비전이 과부하로 폭발할지도 모른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밥상에 앉아서 말없이 루꼴라만 씹고 있는 데이비트를 보고, 그가 이번에도 복잡한 사색에 빠진 것을 알아차렸다. 이미 접시를 비운 테스카틀리포카와 달리 데이비트는 아직 샐러드 말고는 손도 대지 않은 상태였다. 이대로 가다간 다음 날 아침까지 저 빌어먹을 풀떼기를 씹고 있을 것 같았다.

“신경 쓰이냐?”

테스카틀리포카는 그렇게만 말했지만, 그 말에 담긴 진짜 뜻은 ‘뭘 볼 수 있을지 직접 확인하고 싶냐’는 것이었다. 원래 그의 성격대로라면 아이들이 떠난 직후에 텔레비전은 부서졌을 것이다. 하지만 데이비트가 아직 확인해볼 것이 남아있다고 하여, 우선 거실에 들여두는 것으로 조치는 마무리되었다. 지금도 텔레비전은 마땅한 계획 없이 거실에 방치된 채 있다.

보다 못한 테스카틀리포카는 결국 포크를 들어다가 소시지를 찍어서 데이비트의 입에 쑤셔 넣었다. 입이 틀어막힌 데이비트는 뭐라 하지도 못한 채 소시지를 씹어 삼킬 수밖에 없었다. 불만 가득한 눈으로 보는 데이비트에게 테스카틀리포카는 삶은 브로콜리도 억지로 먹이면서 말을 이었다.

“핼러윈은 죽은 사람이 돌아오는 날이라고도 하지. 멕시코에서는 내일이 되면 망자의 날을 기념할 거야. 그러니 오늘 자정이 되면 너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잃어버린 것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리지.”

솔직히 말하면, 데이비트가 무엇을 보게 될지 궁금한 쪽은 테스카틀리포카였다. 이런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아쉬운 것도 아무것도 없다’는 듯이 살아가는 남자에게도 마지막 남은 미련이라는 것이 있다면 두 눈으로 확인해두고 싶었다.

“그러니까 속는 셈 치고 기다려보는 건 어때?”
“지나친 참견이군.”
“새삼스럽게 그러네.”

설거지는 내가 해줄 테니까 잘 생각해봐. 그런 말만 남기고 테스카틀리포카는 그릇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나서서 마무리를 해주겠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이미 지나간 일을 되돌아본다는 선택을 할 일이 없던 데이비트가 평소 같지 않게 망설인 것은, 때때로 어리광을 과하게 받아주는 신의 잘못이다. 데이비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 식어서 굳어가는 마카로니에 포크를 꽂았다.





낮에 미처 끝장내지 못한 마지막 내기 한 판을 마무리하고 채널을 지상파 방송으로 돌렸을 때는 핼러윈 기념 애니메이션을 방영하고 있었다. 해골 모습을 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크리스마스 영화였다. 묘하게 계절감이 맞지 않는 설원을 보며, 그들은 잠시 한숨을 돌리기로 했다.

승부는 간발의 차로 데이비트가 승리하였다. 한동안 테스카틀리포카와의 약속으로 인해 식사 당번 독박을 쓰고 있던 데이비트는 드물게도 진심으로 기뻐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뭘 주든 군말 없이 먹으라고 했지만, 그 자신의 까다로운 입맛으로 인해 아무 음식이나 만들지는 못할 것을 데이비트는 알고 있다.

영화가 끝나고, 샤워까지 마치고 나오자 시간은 어느덧 자정에 가까워져 있었다. 데이비트는 불이 꺼진 거실에서 조용히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아직 텔레비전에 특별한 변화는 보이지 않는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어느새 권총 한 자루를 챙겨서 곁에 와 있었다.

“혹시나 수상한 낌새가 보이면 네가 하지 말라고 해도 쏴버릴 거야.”
“그다지 안심이 되진 않는걸. 네 사격 실력을 고려하면 말이야.”
“가만 안 둔다, 진짜.”

인상을 쓰며 귀를 잡아당기는 손을 데이비트는 그저 내버려 두었다. 오히려 더 장난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조금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바깥은 진즉에 어둠에 잠기고 적막이 흐른다. 이곳은 퍼레이드도 진행되지 않는 한적한 마을이다. 아이들이 귀가를 끝낸 집은 문을 걸어 잠그고 잠이 들었을 시간이었다.

데이비트는 텔레비전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테스카틀리포카는 큰 보폭으로 걸어가 소파에 걸터앉는다. 어둠 속에서 꺼내 문 담배에 붙는 불은 망망대해 너머로 보이는 등대의 불빛을 닮았다. 희미하게 거실로 퍼지는 연기는 의식을 치르며 피우는 향이 된다. 이곳은 이미 제단이었다.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을 느끼며, 데이비트의 머릿속에는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 그건 자정까지 얼마 남지 않은 순간의 일이었다.

5초 전, 데이비트는 테스카틀리포카 곁에 있던 권총을 집어 들었다.
4초 전, 데이비트는 권총을 장전했다.
3초 전, 텔레비전에는 방송 조정 시간이라도 된 것처럼 노이즈가 낀 흑백 화면이 나왔다.
2초 전, 데이비트는 텔레비전 화면을 향해 총구를 겨눴고,
1초 전, 연달아 발사된 총알에 의해 화면은 산산이 박살 났다.

모든 동작은 테스카틀리포카가 숨을 한 번 뱉는 동안에 끝났다. 길고 가늘게 이어지던 담배 연기가 끊어지자, 이번엔 텔레비전 내부에서 힘없이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나며 연기가 피어오른다. 그제야 데이비트는 권총을 소파 위로 가볍게 던졌다.

“진짜인지 궁금한 건 아니었나 보네.”
“궁금한 건 맞아. 하지만 내가 모르는 내 기억을 보고 싶은 건 역시 아니야. 이미 기억하지 못하는 시점에서 그건 당시의 내가 필요 없다고 판단하고 버린 거야. 그걸 지금에서야 알게 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어. 잃어버린 걸 되새길 시간에 새로운 것을 거머쥐는 게 훨씬 이득이지. 만일 실제로 이것을 통해 뭔가를 봤다고 해도, 그건 원본을 흉내 낼 뿐인 가짜에 불과해.”

그것이 데이비트가 내린 결론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테스카틀리포카는 다시 한번 숨을 길게 내뱉었다. 이상할 정도로 짙어진 담배 연기는 안개처럼 시야를 부옇게 만들었다. 데이비트는 바로 옆에 있을 테스카틀리포카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도 어려웠다.

“원본을 흉내 내는 가짜라. 그렇다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기준은 뭘까. 만약 그게 TV 속이 아니라 실제로 형태를 갖추고 나타났다면 그건 가짜가 아닌가? 의지를 가지고, 원본과 다르지 않은 가치관으로 행동한다면 그건 진짜가 될 수 있나? 어떻게 생각하시나? 데이비트 젬 보이드 씨.”
너는 정말 성질 나쁜 신이야.”
“하하. 웃자고 한 소리야. 애초에 나는 그런 거나 따지는 속 좁은 녀석이 아니거든.”

다 타버린 담배꽁초를 비벼끄며 그는 짧게 웃었다. 그는 이 상황이 진심으로 즐거운 듯했다. 쓸데없는 것까지 생각하는 주제에 고집은 꺾지 않는 이 남자가 정말로 재밌다고 생각한 것이다.

“무서우면 무섭다고 하지 그랬어. 넌 네가 뭘 보게 될지 알았던 거지?”
“무섭지 않아. 싫을 뿐이야.”
“그래그래.”

달래듯이, 혹은 약 올리듯이 그는 대답했다. 이렇게 달력의 한 페이지가 또 넘어갔다. 계절은 어느덧 겨울로 변해가고, 한 해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밤이 깊어 오면 난방이 되지 않는 거실은 서늘하게까지 느껴진다. 세상이 잠든 어둠 속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거울은 묻는다.

“이봐, 데이비트. 너는 이런 상상해 본 적 없어? 거울 속에 보이는 세상이 실은 현실을 비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상상. 그럼 과연 그들의 세상은 가짜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가 사는 곳이 가짜인 건 아닐까? 이미 어느 한쪽에 속해 있는 우리는 어느 쪽이 진짜고, 어느 쪽이 가짜인지 구분해낼 수 있을 것인지, 그 구분에 의미는 있을지에 대한 것 말이야.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어?”
“진위는 중요하지 않아. 그곳에서 무엇을 해내는지가 중요한 거다.”
“역시 너는 말이 잘 통해서 좋아.”

그렇게 말하며 거울은 낮은 소리로 웃었다. 마치 동굴 깊은 곳에서 메아리치는 듯한 소리였다.

데이비트는 발치 어딘가를 내려다본다. 어둠 속에 섞인 그림자는 그 형태를 구분해낼 수 없다. 크리스마스의 진저 쿠키 같은 모양을 했을 그림자는 어딘가에 숨어서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다.

그리고 데이비트는, 어딘가의 얼룩으로 남아있을 소년을 생각한다. 자신은 소년의 대체품이 될 수 없다. 세상에 형체를 갖추고 나타난 순간부터 소년과 자신은 별개의 존재가 되었다. 그렇다면, 소년이 걸었어야 하는 길과 같은 길을 반드시 걸어야 할 이유는 없다. 지금의 자신이 해낼 수 있는 것을 해내면 충분한 것이다.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 해도 멈추지 않는다. 그건 앞으로도 다르지 않았다. 만일 그 끝에 함께해주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건 그것대로 충분했다.

“Happy Halloween, Daybit.”

그러므로, 데이비트는 조금 늦어버린 인사를 기껍게 받아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