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잡했던 마트를 빠져나오자 바깥 공기가 폐를 가득 채우며 흐려졌던 정신을 깨운다. 등 뒤로 자동문이 닫히면 매장 곳곳에서 울려 퍼지던 경쾌한 음악 소리도 사라진다. 도로를 질주하는 자동차 소리와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는 소리만 들리는 황량한 주차장을 바라보며 데이비트는 숨을 크게 두 번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심호흡하는 사이 다시 열린 문을 통해 나온 두 가족이 마트를 떠날 즈음이 되어서야 데이비트는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식료품을 구매한 덕에 짐은 양손을 가득 채웠지만, 데이비트는 요령 좋게 짐을 왼손으로 옮겨 들고 오른쪽 바지 주머니에 넣어둔 차 열쇠를 꺼냈다. 열쇠에 달린 리모컨 버튼을 누르자 넓게 펼쳐진 주차장 구석에서 차량 하나가 불을 깜빡이며 주인을 부른다. 굳이 힘들여 찾을 필요 없이 멀리서도 보일 만큼 커다란 사륜구동차다. 애초에 필드워크를 위해 장만한 차량이다. 이런 곳에서는 눈에 띌 수밖에 없다.
직선거리로 차에 도착하여, 마찬가지로 용하게 한 손으로 조수석 문을 열고 짐이 쏟아지지 않도록 가지런히 정리한다. 순식간에 꽉 차버린 조수석과 테스카틀리포카의 주문으로 구매한 커다란 피자 박스를 번갈아 본 데이비트는 뒷좌석 문을 열어 피자 박스를 놓으려 했다. 조수석을 닫고 뒷좌석을 연 그 순간이었다. 야옹. 어디선가 들려온 고양이 울음소리에 데이비트는 주변을 살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소리의 근원지는 바로 눈에 들어왔다. 주차장 옆 화단에서 고개를 내민 검은 고양이였다.
데이비트는 성질상 동물에게 꺼려지는 편이다. 야생에 가까운 동물일수록 그 정도는 더해진다.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것이다.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길고양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최소한 데이비트가 ‘데이비트’로 만들어진 이후로는 호의적인 태도로 동물과 접한 적이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데이비트는 갑자기 나타난 고양이도 자신을 경계하며 곧 떠나리라 생각했다. 화단에서 사뿐히 내려온 고양이가 발치까지 다가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사냥이라도 하듯이 조심스럽게 다가온 고양이는 데이비트의 구두코 바로 앞에 주저앉더니 앞발을 들어 핥기 시작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고양이는 몸 전체가 검은 것이 아니라 가슴팍 한가운데에 하얀 점처럼 생긴 무늬가 있어, 마치 작은 펜던트를 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순간 데이비트의 머릿속에는 누군가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전능신이 이런 식으로 나타나지는 않을 것 같았기 때문에, 괜한 착각은 접어두고 얌전히 고양이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안타깝게도 오늘 산 식료품 중에 고양이가 먹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조수석에 쌓인 보따리에서 저지방 우유를 꺼내 종이컵을 찢어 만든 그릇에 찰랑일 정도만 담아주자, 그 일련의 과정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고양이는 작은 혀를 내밀어 우유를 삼켰다. 덩달아 주차장에 쭈그려 앉게 된 데이비트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어쩌면, 지금이라면, 손을 대도 도망가지 않을지 모른다. 만약 도망간다 해도, 그 정도의 인연이었다는 거겠지. 데이비트는 그런 생각을 하며 아주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고양이 머리 위로 올렸고, 여전히 우유를 마시고 있는 고양이는 손길을 신경 쓰는 기색도 없어 보였다. 데이비트가 기억하는 한 약 15년 만에 처음으로 만져본 고양이었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 있을 새도 없이, 그릇이 동나자마자 고양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뿌리치고 순식간에 자리를 뜨고 말았다. 고양이는 단지 배가 고팠을 뿐이며, 이전에도 사람에게서 먹이를 얻은 경험이 있어 접근해온 것일 수 있겠다고 데이비트는 추론했다. 그리고 여태 열려있던 뒷좌석에 놓인 피자 박스를 뒤늦게 마주하며 시간을 너무 지체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라스베이거스 남쪽에 위치한 데이비트의 자택은 월마트로부터 차로 10분 정도 걸린다. 원래라면 피자가 식기 전에 도착하고도 남을 거리였다. 하지만 지금 상태로는 아무리 서두른대도 도착했을 즈음엔 식어 빠진 피자를 대접하게 될 것이 눈에 선했다.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데이비트는 소리 내 한숨을 쉬고 말았다.
변명거리를 미처 생각해내지 못한 채로 데이비트의 차가 마당에 들어섰을 때, 데이비트를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어디선가 쏟아져 나와 사방으로 흩어지는 고양이들이었다. 시발점을 되짚어가면 마당 한구석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테스카틀리포카가 있다. 아직 갈피를 못 잡고 있던 고양이 몇 마리도 차가 완전히 멈추자 이내 집 밖으로 도망치듯이 사라졌다. 테스카틀리포카가 고양이를 상대하는 모습은 종종 목격된 적 있지만, 오늘은 유난히 그 수가 많았다. 고양이 집회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 모임의 대장은 테스카틀리포카인가? 데이비트는 그런 생각이나 하며 차에서 내렸다.
“장 보고 온다더니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중간에 일이 좀 생겨서.”
“흠, 그래?”
차가 멈추어 서자마자 테스카틀리포카는 자연스럽게 조수석 문을 열어 데이비트가 정리해둔 짐을 집어 들었다. 다행히도 늦은 이유를 자세히 캐묻지는 않았지만,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을 무시하며 데이비트는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양손이 가득 찬 테스카틀리포카를 대신하여 조수석 문까지 닫은 데이비트는 뒷좌석을 열어 피자 박스를 손에 들었다. 그때까지도 말없이 데이비트를 보고만 있던 테스카틀리포카는 무언가에 만족한 것처럼 웃더니 한발 앞서 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보아하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보군.”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나?”
“오냐. 얼굴에 다 쓰여 있거든.”
테스카틀리포카는 시원스럽게 말하더니 이내 멈춰 서곤 턱짓으로 현관문을 가리켰다. 손이 부족하니 열어달라는 뜻이다. 아직 얼떨떨한 채로 서 있던 데이비트는 그제야 빠른 걸음으로 현관에 도착해 문을 열었다. 테스카틀리포카를 먼저 들여보내며 살짝 만져본 피자 박스에서는 아주 약간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날 밤, 씻으러 들어간 샤워실에서 데이비트는 하염없이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평소랑 다른 점이 얼굴에 있는지 유심히 찾아봤지만,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얼굴만으로 좋은 일이 있던 걸 알아챈 걸까? 뭘 보고 알았냐고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물어도 그는 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 건 직접 생각하라고!” 같은 소리나 할 게 뻔하다. 물론 데이비트도 정답지를 바로 펼쳐보는 짓은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건 혼자서 찾아내야 성이 차는 성격이다. 하지만, 왜 이렇게 오래 걸리냐며, 신을 얼마나 기다리게 할 셈이냐고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끌려나가기 전까지도, 데이비트는 뚜렷한 답을 찾지 못한 채 그날 하루는 막을 내렸다.
데이비트는 알람을 따로 설정해두지 않아도 매일 같은 시각에 눈을 뜬다. 오전 6시. 일출 시각과도 관계는 없다. 본인 말에 따르면 몸이 기억하고 있는 습관이지만, 놀랍게도 다른 지역에서도 시차와 관계없이 같은 시각에 일어나는 것은 믿거나 말거나다.
이날도 데이비트는 정확하게 오전 6시에 눈을 떴다. 신체구조만큼은 평범한 인간과 다름없는 데이비트의 몸은 아침부터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렀다. 비명을 무시하고 일으켜 세운 몸에는 전날 밤의 흔적이 어김없이 남아있다. 보통은 이전에 남긴 자국이 없어지기도 전에 새로운 자국을 남기곤 하니 이번엔 제법 오래 참은 것이었다. 몸살이 나게 만든 장본인은 아직 옆에서 자고 있다. 데이비트는 굳이 그를 깨우지 않은 채 조용히 방에서 빠져나왔다.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 알아서 일어나 있을 것이다. 아침 일찍 외출한다고 미리 말해두었으니 집에 없다고 이상하게 여기지도 않을 것이다. 기왕이면 식사도 알아서 챙겨두었으면 하지만, 그 점은 크게 기대하지 않는다.
현재 데이비트의 직책은 굳이 표현하자면 칼데아의 미국 파견원에 가깝다. 어디로 가든 함께 가겠다며 따라나선 테스카틀리포카와의 상의 끝에 미국을 향하기로 정한 것과 동시에 맡겨진 역할이다. 데이비트의 출신지는 미국이 맞지만 실제로 미국에서 지낸 기간을 따지면 그리 길지 않다. 그는 철이 들기 전부터 아버지를 따라 런던에서 거주하였고, 칼데아에 소속되기 직전까지도 런던을 벗어날 일은 거의 없었다. 보낸 시간으로만 따지면 그의 집은 런던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그가 미국으로, 네바다주로 오길 선택한 것은 ‘돌아간다’는 감각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아무리 런던이 익숙한 곳이라 해도 그는 단 한 번도 런던에서 아늑함을 느껴본 적이 없다. 10살 이후의 모든 시간 속에서 그는 언제나 무언가에 속박당하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앞으로의 시간에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 해도 그는 자기 발로 그곳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돌아갈 ‘고향’에 반겨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도, 익숙하지만 낯선 땅에서 생활을 시작하고 싶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온 지구에는 그가 어린 시절부터 모아온 상당한 금액의 예금이 온전히 남아있었고(데이비트는 돈을 쓰기 전에는 미리 말하라고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일러두었다.), 이는 성인 남성 둘이 살 만한 집과 자동차를 사들이는 데에 충분했다. 그렇게 집과 차만 덜렁 들고 시작한 생활에서 그들이 하는 일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메리카 대륙에서 조사할 것이 생기면 현장으로 출동하여 탐색하고, 얻은 정보를 본부로 보낸다. 추가로 시행할 임무가 생기면 명령에 따른다. 그게 전부였다. 오히려 지금까지 해온 일들에 비해 너무 시시하여 군사 기지를 이용해 전쟁을 벌이고 싶어 하는 테스카틀리포카를 제어하는 것이 데이비트의 가장 큰 임무일 정도였다.
그런 느긋한 일상 속에서도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오늘 아침에 예정된 ‘대관식’이다. 이는 ‘물건’을 전달하는 데 있어 그들 내에서만 사용되는 암호다. 조사한 내용을 전할 때 서류만이라면 전용 통신망을 통해 전송해도 괜찮지만, 업무 특성상 실물을 보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또한, 당연하게도 일반 우체국을 이용하기엔 위험 부담이 크다. 따라서 본부 측에서는 정기적으로 관계자를 보내 물건을 받아오도록 한다. 이때 그들은 물건을 ‘왕관’으로 칭하며 ‘대관식’을 행할 약속을 잡는다. 물론 만나는 장소와 시간은 항상 불규칙적이고, 오늘처럼 이른 아침에 나가야 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은 데이비트와 테스카틀리포카가 함께 가곤 한다. 그럼 오늘은 어째서 홀로 길을 나섰냐 하면, 재규어가 야행성 동물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증명이라도 하듯 테스카틀리포카는 아침이 되면 영 쓸모없는 상태가 되어 오히려 짐이 되기 때문이다.
오늘 장소는 집으로부터 곧장 남쪽으로 가면 나타나는 네바다와 캘리포니아의 경계 부근이다. 약속 장소에 도착했을 땐 이미 사람들이 한창 활동할 시간이 되어있었고, 정해진 시간보다 일찍 도착한 데이비트보다도 먼저 와 있던 관계자 덕분에 ‘대관식’은 금방 끝났다. 이대로 바로 집으로 돌아가면 아슬아슬하게 아침 식사라고 부를 수 있을 시간에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하는 허기에 데이비트는 곧장 차로 돌아갔다. 그러나, 후진할 방향에서 주위를 서성이고 있는 웬 남자아이 덕분에 데이비트는 차에 올라타는 대신 차 뒤쪽으로 향해야 했다. 아이는 세워진 자동차들의 아래쪽을 일일이 확인하며 데이비트가 있는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데이비트는 아이를 부르며 말했다.
“뭔가 잃어버리기도 한 건가?”
“그게… 고양이가 없어져서요. 아침에 일어났더니 집에 없어서 혹시 밖에 나갔나 하고 찾으러 나왔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아요.”
데이비트의 말에 아이는 혹시 본 적 있냐며 핸드폰을 꺼내 고양이 사진을 보여줬다. 회색 털을 가진 스코티시 폴드였다. 이곳에 도착한 지 10분도 되지 않은 데이비트로서는 당연히 행방을 알 리 없었지만, 그는 고양이에 관해 몇 가지를 추가로 물어보았다. 5분 남짓한 대화 속에서 개운치 않은 기분을 느낀 데이비트는 아이로부터 고양이 사진과 주소를 받은 뒤 겨우 집으로 출발할 수 있었다. 방금 막 일을 끝낸 참인데, 새로운 일이 생기고 말았다.
데이비트가 집에 도착했을 때 테스카틀리포카는 서부 보안관을 주인공으로 한 연속극을 보고 있었다. 대낮에 방영하기엔 다소 잔인한 장면이 없잖아 있으나 코믹한 연출로 이를 중화시키는 상영물이다. 지금 화면에 나오는 전투 장면도 형형색색으로 흩뿌려지는 피가 가히 예술이었다. 흡사 팝아트를 연상시킨다.
부엌 식탁에는 랩으로 싸인 채 접시에 담긴 샌드위치 두 조각이 놓여 있었고, 개수대에는 씻지 않은 식기가 쌓여 있다. 웬일로 본인 식사를 하며 데이비트의 몫까지 만들어둔 모양이다. 대화는 배를 채운 뒤 시작하고 싶었지만, 운전하는 내내 궁금점이 머리를 가득 채웠던 데이비트는 여전히 TV만 보고 있는 뒤통수에 대고 인사 대신 질문을 던졌다.
“테스카틀리포카, 얼마 전에 고양이들과 얘기하고 있었지?”
“응? 아아, 그 녀석들이라면 서열 정리를 위해 부른 거야.” 데이비트가 애초에 집을 떠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테스카틀리포카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받았다. “주제를 모르고 감히 나에게 덤비려 들길래 본때를 보여줬지.”
“그렇다면 이 근방의 고양이는 전부 네 소관으로 보아도 되는 건가?”
“일단은 그런 셈이지.”
“오는 길에 고양이를 잃어버린 남자아이를 만났어.” 샌드위치에 곁들일 커피를 준비하며 데이비트는 핸드폰을 꺼내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사진을 첨부한 메시지를 보냈다. “방금 막 네 계정으로 사진을 전송했다. 이름은 루시. 스코티시 폴드고, 암컷이야.”
테스카틀리포카는 소파 옆에 던져두었던 TV 리모컨으로 음량을 줄인 뒤 그 반대편에 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각도로 찍힌 사진 몇 장을 유심히 관찰하며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듣도 보도 못한 면상이군.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녀석인가? 어지간한 녀석들은 입소문이라도 들었는데 말이야.”
“어, 고양이치고도 밖에 나가는 걸 싫어해서 꽤 속을 썩였다고 해. 그래서 더욱 이상하지. 집에만 있었을 고양이가 어떻게 사라질 수 있을까?”
“……즉, 네가 나서야 할 일인 거 같다는 거지?”
“그래.”
데이비트는 커피를 내린 머그잔과 샌드위치 접시를 양손에 들고 소파로 갔다. 연속극이 끝난 TV에서는 세탁 세제 광고 따위가 나오고 있다. 소파 옆자리에 앉자 테스카틀리포카는 접시를 받아들며 랩을 벗겨주었다. 오늘 샌드위치는 빵 한 면에만 머스터드를 바르고, 로스트 치킨을 주재료로 하여 몇 가지 채소를 곁들인 것이다.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며 샌드위치를 씹기 시작하는 데이비트를 보고 테스카틀리포카는 못 말린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여간, 일을 사서 하는 놈이라니까.”
그들이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이 지역에 사는 고양이를 파악하고 그중에 추가로 실종된 고양이가 없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데이비트는 가정에서 기르는 고양이를, 테스카틀리포카는 길을 떠도는 고양이를 조사하는 것으로 분담하여 정보를 모으기 시작한 지 3일이 지났을 무렵, 그들은 반경 100km 내의 고양이를 전부 파악할 수 있었다. 다행히 네바다는 라스베이거스 부근을 제외하면 거주자가 거의 없는 지역이다. 조사할 범위가 특정 구역에 몰려 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또한, 비교적 조사가 수월했던 이유 중 하나는, 의외로 데이비트가 이 근방에서 제법 신뢰를 얻고 있기 때문이었다. 본부로부터 받은 일이 없을 때 데이비트가 하는 일은 이른바 마을의 해결사다. 딱히 수상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고장 난 물건을 고쳐주는 수리공 역할이다. 사실을 말하면 이는 마술의 도움을 받은 작업이지만, 이것을 아는 것은 테스카틀리포카뿐이다. 너무 오래되어 고칠 수 없게 된 물건이나 거액의 비용이 부담되어 수리센터를 찾기 어려운 경우를 대상으로 한 일이었다. 덕분에 데이비트에게 도움을 받은 사람이라면 그의 조사에 기꺼이 어울려주었고, 그의 됨됨이에 대한 소문을 들은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의 데이비트는 마술사로서 익힌 기술은 여전히 사용할 수 있지만, 우주와의 교신은 기능을 상당히 상실한 상태다. 특히 수신하는 기능은 거의 남아있지 않아 사실상 일방적으로 신호를 송출할 뿐인 단말이나 마찬가지다. 수신 기능에 관해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라디오 주파수를 돌리다 우연히 신호가 잡혀도 잡음만 들릴 뿐 내용을 알아들을 수는 없는 것과 비슷하다. 현재 본인의 상태에 대해 데이비트는 기쁨도 슬픔도 느끼지 않았으나, 간혹 방대한 조사를 할 때면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곤 한다. 어찌 되었든 그들로부터 받는 신호는 위험을 감지하는 데에 있어 꽤 유용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번 일도 이전의 ‘데이비트’였다면 바로 원인을 찾아내어 해결했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지금 가능한 방식을 최대한 이용해야 했다.
조사 결과, 그들은 사라진 고양이 수가 두 손으로도 셀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기상 처음 사라진 것으로 보이는 고양이는 벌써 열흘 전부터 실종 상태였고, 아마 실종은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다. 사라진 고양이 간에 공통점이나 규칙성은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사는 곳을 지도에 표시했을 때 3마리를 제외하면 큰 원 안에 들어갈 수 있는 지역으로 한정되는 것을 알아낸 건 큰 수확이었다. 데이비트는 원의 중심을 기준으로 구역을 나눠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전달했다. 이후로 데이비트는 3일간 얻은 정보를 정리하여 문서를 작성하기 시작했고, 그동안 테스카틀리포카는 고양이를 잡아갈 만한 수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은 없는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탐색하기 시작했다.
테스카틀리포카 또한 데이비트만큼이나 이전과 같은 힘을 쓸 수 없는 것은 사실이었다. 위치상 출신지와 가깝다 해도 북미는 그의 주무대가 아니다. 좋게 말해도 권능을 행사하기 수월하다고는 할 수 없었던 믹틀란과 비교해도 쓸 수 있는 힘의 범위가 축소된 상태다. 연달아 저지른 ‘반칙’에 의해 신격을 상당 부분 상실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 해도 A랭크의 마력은 어디 가는 것이 아니다. 마술적인 힘에 있어서는 비교하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데이비트를 앞선다. 그건 마력을 감지하는 능력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데이비트가 문서 작업을 완료할 이틀 동안, 아무런 수확도 얻지 못했다며 누가 봐도 기분 나빠 보이는 표정으로 돌아온 테스카틀리포카를 보고 데이비트는 계획이 쉽게 풀리지는 않을 것을 예감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고용주에게 중간 보상을 요구한다고 시위하면서 돌아온 뒤로 데이비트에게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묵묵히 문서 인쇄를 마친 데이비트가 테스카틀리포카의 얼굴 곳곳에 입맞춤해주고 나서야 그는 휘적거리며 떨어져 나가 소파에 드러누워 버렸다.
엎어진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완성된 자료 뭉치를 건네주며, 데이비트는 내일부터는 함께 탐색하겠다고 얘기했다. 혼자 편하게 앉아 있었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었으나 테스카틀리포카에게서는 그런 걸 요구한 게 아니었다는 기운 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본인 선에서 해결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눈치였다. 데이비트는 본인이 직접 움직이는 편이 직성이 풀리는 성질이었으므로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지만, 그 사실이 테스카틀리포카에게는 그다지 위로가 되지 못했다.
새롭게 맞이한 다음 날 아침, 테스카틀리포카는 이틀간 서쪽 구역 탐색을 마친 상태였기 때문에 남은 동쪽 구역으로 향했다. 데이비트는 그와 동행하는 대신 이미 한 바퀴 확인이 끝난 서쪽을 다시 한번 검토하기로 했다. 데이비트의 시점에서 보면 새로운 것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차는 끌고 나가지 않았다. 조사할 범위가 넓긴 하지만 직접 발을 들이며 조사할 곳이 많은 경우에 큰 차는 오히려 짐이 될 수도 있다. 빠르게 행동반경을 정한 뒤, 그들은 해가 질 무렵 다시 보자고 약속하며 집 앞에서 헤어졌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데이비트가 얻은 것이 있었냐고 하면, 아주 깔끔하게, 아무것도 없었다. 최근 들어 목격된 수상한 사람, 없다가 생긴 낯선 물건. 이러한 것들에 대한 목격담은 종종 들을 수 있었지만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현장을 가보면 흔한 괴담에 불과한 것뿐이었다. 테스카틀리포카가 그렇게나 기분이 안 좋던 것도 이해가 됐다. 이 정도로 갈피가 잡히지 않으면 무슨 일이든 갑갑해질 것이다. 어느새 하늘에는 노을이 걸려 있다. 발끝에서부터 길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데이비트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얼마 전에 만난 작은 생명과 마주했다.
데이비트는 테스카틀리포카처럼 고양이의 얼굴을 하나하나 구분할 수는 없지만, 가슴의 하얀 점이라는 확실한 특징이 있으면 도저히 착각할 수 없다. 우유를 얻어먹고 떠나버린 그 고양이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고양이는 아주 천천히 데이비트에게 다가왔다. 이번에도 배가 고픈 것일까? 그러나 지금 데이비트에게 먹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그나마 들고나온 에너지바도 이미 동난 뒤다. 고양이는 저번처럼 자리를 잡고 앉는 대신 주위를 맴돌며 울음소리를 낸다. 무어라 말이라도 거는 것 같다. 데이비트는 우주의 언어는 알아들을 수 있을지언정 지구상에 사는 생물이라 해도 동물의 언어는 알지 못한다. 이럴 때 테스카틀리포카가 있다면 고양이가 뭐라고 한 건지 물어봤을 텐데, 같이 행동하지 않은 것에 조금 아쉬움을 느낀다. 고양이는 몇 번 울음소리를 내더니 계속 뒤를 돌아보며 조금씩 걸어가기 시작했다. 따라오라고 하는 건가? 이미 해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가고 있었지만, 데이비트는 속는 셈 치고 고양이 뒤를 따랐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몇 번이나 모서리에서 꺾고 건널목도 두 번이나 건넌 뒤, 데이비트가 걷는 속도에 맞춰 걷던 고양이는 갑자기 근처에 있던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반응하지 못한 데이비트는 뒤늦게 고양이가 들어간 수풀 너머로 들어가 보았지만, 고양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환상이라도 본 것 같았다.
“아저씨, 혹시 까만 고양이 못 봤어?”
데이비트는 이 목소리 또한 환청일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하지만 환청이라 하기엔 확실한 방향에서 들려왔다. 수풀 옆 길가였다. 힘들여 찾을 필요도 없이 목소리의 주인은 엎어지면 닿을 거리에서 데이비트를 보고 있었다. 아저씨. 난생처음 들은 아저씨라는 호칭이 데이비트에게는 적잖은 충격을 주었지만, 그는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어린아이다. 그 말에 큰 뜻은 없을 것이다. 아이가 찾는 고양이는 아마도 방금까지 데이비트가 따라오던 고양이다. 고양이를 못 봤냐는 말은 오히려 데이비트가 하고 싶었다.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는 아이에게 데이비트는 솔직하게 사실을 전했다.
“어쩌지. 나도 방금 놓친 참이야.”
“힝, 엄청 이쁘게 생겼었는데…….”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한 길이의 갈색 단발을 한 아이는 머리에 파란 야구모자를 쓰고 있어 얼굴이 반쯤 가려져 있었다. 목에는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필름 카메라가 걸려 있다. 어린아이가 들고 다니기엔 크고 무거울 물건을 두 손에 꼭 쥔 채 아이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아직 고양이를 포기 못 한 듯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는 어떤 말부터 하면 좋을까. 간단한 칭찬을 건네는 건 괜찮을까. 데이비트에게 가장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은 고전적인 카메라였다. 그는 덤덤한 목소리로 카메라에 대한 호평을 전했다.
“멋진 카메라구나.”
“그치! 아빠가 사준 거야. 실은 카메라가 아니라 고양이를 사달라고 했는데, 엄마한테 알레르기가 있어서 안 된댔거든. 그래서 대신에 선물 받은 카메라로 고양이 사진을 잔뜩 찍고 있어. 나중에 더 친해지면 아저씨한테도 내 비장의 앨범을 보여줄게.”
Critical hit! 2연속 아저씨 호칭은 생각보다 타격이 컸다.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겨우 참으며 데이비트는 소녀를 배웅했다. 방향을 보아하니 최근에 이주자를 새로 받은 곳이다. 어쩌면 여자아이는 이곳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수 있겠다고 데이비트는 막연히 추측했다.
해가 지고 거리의 가로등으로도 어둠을 완전히 밝힐 수 없는 시간이 되어서야 데이비트는 귀가할 수 있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진작에 돌아왔을 것으로 생각했건만, 어째선지 바깥에서 본 집은 온통 불이 꺼진 채였다. 이를 의아하게 여기며 집에 들어선 뒤에야 데이비트는 부엌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빛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녀왔어.”
“어, 왔냐.”
테스카틀리포카는 부엌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온 집안의 불을 다 끄고 식탁 위에 달린 작은 조명만 켜둔 상태였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뭔가 집중할 일이 생기면 조명 하나만 달랑 켜둔 채 보는 습관이 있다. 인간의 몸인 이상 시력을 소중히 하는 게 좋다고 데이비트는 몇 번이나 잔소리했지만, 이렇게 보는 것이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나 다를 게 뭐냐는 답이 돌아온 뒤로는 지적하는 걸 포기한 상태다.
말로만 데이비트의 인사를 받아준 채로 테스카틀리포카의 시선은 여전히 식탁 위에 고정되어 있다. 식탁에는 데이비트가 정리해둔 고양이들의 신상 정보와 사라진 시기가 적힌 자료가 펼쳐져 있었다. 워드 프로세서로 정리된 표 아래쪽에는 펜으로 휘갈긴 글씨가 여러 줄 적혀 있다. 데이비트가 조사한 것 외에도 테스카틀리포카가 개인적으로 조사한 길고양이들의 정보일 것이다. 재떨이에 꽤 많은 꽁초가 쌓인 걸 보아 이 자리에서 꽤 오래 자료를 훑어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재떨이 옆에는 이미 비워진 맥주캔 두 개가 나뒹굴고 있다. 서로 다른 상표에, 둘 다 최근에 본 적 없는 것이다. 처음 본 상표의 맥주가 궁금해서 종류별로 집어온 것이리라. 상황을 대강 파악한 데이비트는 테스카틀리포카의 맞은편 의자를 꺼내 자리에 앉았다.
“테스카틀리포카.”
“응?”
“난…… 그 정도로 노안인가?”
아마 데이비트는 테스카틀리포카가 그 정도로 크게 웃는 것을 처음 봤을 것이다. 잠시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듯 데이비트를 쳐다본 테스카틀리포카는 금세 신나게 웃어젖히기 시작했다. 돌아오자마자 대뜸 한다는 소리가 이런 거라니. 꽤 오래 함께하며 볼 꼴 못 볼 꼴 다 본 사이라고 생각했건만, 지금 발언은 그 이상으로 우스꽝스러웠나 보다. 한참을 숨이 넘어가도록 웃은 테스카틀리포카는 눈물까지 고이려고 하는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왜, 누가 노안이라고 하냐?”
“뭐…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만 해두지.”
“나만큼은 아니니까 걱정 말라고.”
“너랑 비교당하는 것부터가 문제라고 생각한다만…”
제법 예의 없는 소리가 튀어나왔지만, 테스카틀리포카는 신경도 쓰지 않고 깔깔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새로 꺼내기 위해서였다. 역시나, 이번에 꺼낸 캔도 데이비트가 처음 보는 상표다.
“농담은 그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테스카틀리포카는 캔 뚜껑을 따며 말했다. 데이비트는 나름대로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었으나 더 물고 늘어지기엔 왠지 지는 기분이 들어 자제하기로 했다. 신은 그런 것조차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자리로 돌아와 맥주를 한 모금 삼키고 말을 이었다.
“존재를 없애는 방법에는 대표적으로 세 가지가 있지.” 테스카틀리포카는 왼손으로 턱을 괸 채 오른손을 들어 새끼손가락부터 하나씩 펼쳐나간다. “하나, 아예 소멸시켜버리는 것. 둘, 다른 존재로 변형하는 것. 셋, 다른 공간으로 전이시키는 것. 가두는 것도 하나의 분류로 만들 수 있겠지만, 이건 크게 보면 세 번째에 속한다고 볼 수 있어.”
마지막으로 펼쳐진 검지가 다시 접히고, 세 손가락만 펼쳐진 손이 허공에서 가볍게 흔들린다.
“여기서 이번 실종사건이 첫 번째에 해당한다면 원인을 해결하는 건 가능할 수 있어도 사라진 녀석들을 되찾는 건 어려워. 방법이 있다면 내가 권능을 써서 사건의 순서를 뒤바꾸는 수준의 사상 조작을 하는 것 정도야. 하지만 그건… 알지?”
“어. 네가 한다고 해도 말릴 거야. 없어진 장기를 이식받는다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소리니까.”
“그런 이유로 지금 우리는 이번 사건이 두 번째나 세 번째이길 바라는 수밖에 없어. 가장 좋은 건 세 번째지. 다시 원래 있던 차원으로 되돌리기만 하면 되니까. 그리고 세 번째인 경우엔 대체로 전이시킨 쐐기를 제거하면 원래대로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방법도 어렵지 않을 가능성이 커.”
“만약 두 번째라면 가능성은 반반이겠군. 변형된 것을 원래대로 돌릴 방법이 모든 조건에서 존재한다면, 그 소년도 아버지도 원래대로 돌아왔을 테니.”
“……그래.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말란 소리야.”
“그 정도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하지만 설령 실패한다 해도, 지금 할 일은 달라지지 않아.”
그 말을 끝으로 테스카틀리포카는 식탁 위에 두었던 맥주캔을 집어 들이켰다. 목울대가 위아래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길 몇 차례 반복한 후에야 캔은 제자리로 돌아왔다. 다시 식탁에 놓인 캔에서는 빈 깡통 소리가 났다.
“그래서 오늘 얻은 수확을 말하자면, 우선 제로라고 하마. 종일 동쪽 지역을 돌아다녔지만 뚜렷한 마력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어. 이 정도면 내가 확인할 수 있는 곳은 전부 돌았다고 봐도 돼. 그런데도 찾지 못했다는 건 애초에 여기 존재하지 않거나, 너무 약해서 느낄 수 없는 거겠지. 후자라면 아주 가까이 가지 않는 한 찾을 수 없어. 섬세함으로 따지면 난 너보다 아래야. 약하지만 정교한 장치라면 네가 감지해내는 게 빠를 수 있어.”
“그렇군……. 정보 고맙다.”
지금 추세라면 데이비트가 발견하기도 어렵겠지만 아직 포기하기엔 일렀다. 아직 피해 범위가 고양이로 한정되기 때문에 눈에 띄지 않은 것일 뿐, 얼마든지 큰 사건으로 이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진실의 행방까지 이어진 경로에 뚫린 거대한 구멍은 자신으로선 해결할 수 없다고 테스카틀리포카는 인정했다. 남은 일은 데이비트의 몫이었다. 데이비트는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데이비트가 두통을 감지한 것과 다리에 닿아오는 집요한 움직임을 느낀 것은 거의 동시였다. 다리에 느껴지는 감각의 정체는 식탁 밑을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맞은 편에 뻔뻔하게 앉아 있는 전능신이다. 발목 근처에 닿았던 발끝이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며 점점 올라오는 것을 데이비트는 애써 무시했다. 어떤 의도로 접근하는 스킨십인지는 금방 알 수 있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조금 전부터 데이비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다. 생각해보면 사건을 조사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잠자리를 가지지 않고 있었다. 둘 다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오늘은 이만하고 쉬는 게 어때.”
“미안하지만 거절할게. 사건을 해결하기 전까진 괜히 집중을 흩트리고 싶지 않아.”
“잠깐 딴짓하는 것 정도론 집중에 영향 없어.”
“잠깐만 하지 않을 거잖아.”
“쳇.”
여기서 부정하지 않는 점이 난감한 부분이지만, 의외로 테스카틀리포카는 순순히 포기하며 몸을 일으켰다. 정말 떠보기만 하고 끝난 것에 데이비트는 내심 놀랐다. 이대로 억지로 끌려가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씻는다.”라고 하며 등을 돌리는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데이비트는 한 가지 사과의 표현을 하기로 했다.
“테스카틀리포카.”
“왜.”
데이비트는 테스카틀리포카의 왼팔을 붙잡고 돌려세우더니 여전히 뾰로통한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입술만 맞닿고 떨어지는 가벼운 키스였다.
“굿나잇 키스야. 오늘은 이걸로 봐줘.”
“하… 너, 나중에 두고 보자.”
사건에 집중하고 싶다는 건 빈말이 아니었으며, 굳이 따지면 데이비트는 테스카틀리포카와의 섹스를 좋아한다. 하기 싫어서 거절한 것은 아니었다. 테스카틀리포카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물러나 준 것이리라. 그와 별개로 서운한 것 또한 사실이었기에, 그는 분한 기색을 숨기지도 않으며 샤워실 문을 닫았다.
테스카틀리포카가 나오는 걸 기다리는 동안 데이비트는 가볍게 빈속을 채우기 위해 냉장고를 열었다. 밖을 돌아다니며 먹은 것이라곤 에너지바 몇 개가 전부였다. 냉장고를 가볍게 훑어본 뒤 데이비트는 우유 한 잔을 따르고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이 한 잔이 얼마 전에 산 우유의 마지막 한 잔이었다.
오늘 밤은 괜히 건드리지 않을 것을 알지만, 데이비트는 굳이 거실에서 수면을 취했다. 잠들기 전까지 오늘의 기억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집중하는 데에는 어느 정도 불편한 환경이 도움 된다. 부엌의 조명까지 꺼진 어둠 속에서 데이비트는 테스카틀리포카가 한 말을 곱씹었다.
이번 일은 피해 범위가 넓으나 정도는 약하다고 할 수 있다. 미약하지만 다수의 존재를 없앨 수 있는 힘. 그렇다면 테스카틀리포카가 제시한 첫 번째는 아닐 가능성이 크다. 이 정도로 불특정 다수를 완전소멸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면 데이비트가 얘기를 꺼내기도 전에 테스카틀리포카가 감지하여 해치우고 돌아왔을 것이다.
두 번째나 세 번째라면 어딘가에 증거가 남아있을 것이다. 두 번째라면 고양이가 변형된 형체가, 세 번째라면 고양이를 다른 차원으로 보내는 통로가 있어야 한다. 이는 테스카틀리포카의 힘으로는 찾아낼 수 없으며, 방법이라고는 지역 곳곳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확인하는 것뿐이다. 지난 며칠간 그들이 확인할 수 있는 범위에서는 모든 곳을 확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은 곳이라면 각 가정의 내부다. 집 안 어딘가에, 이를테면 지하실 같은 곳에 숨겨져 있다고 하면 직접 그 안에 들어가지 않는 이상 찾을 수 없다. 그런 경우라면 차라리 테스카틀리포카가 뱀으로라도 변신해서 집을 돌아다니는 게 나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데이비트는 쏟아지는 잠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그러고 보면 그 여자아이도 고양이를 찾고 있었지. 고양이 사진을 찍는다고 했는데, 어쩌면 사라진 고양이들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애의 이름이라도 물어봐 두면 좋을 뻔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데이비트의 의식은 조금씩 가라앉았다.
문제의 여자아이를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쉬웠다. 전날 일이 못내 신경 쓰여 그 아이를 만난 곳 근처에 다다른 데이비트에게 아이 쪽에서 먼저 다가와 인사를 건넨 것이다.
“또 보네, 아저씨!”
붙임성 좋게 인사한 아이는 오늘도 분신처럼 카메라를 지니고 있다. 티셔츠는 어제와 다른 옷이었지만 파란 야구모자는 그대로다. 테스카틀리포카가 매일 같은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것과 비슷한 감각으로 애용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이는 데이비트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마음대로 말을 이어갔다. 오늘 찍은 사진이라며 보여준 카메라 액정 속에는 각양각색의 고양이가 담겨 있다. 데이비트는 카메라에서 시선을 떼고 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이 정도 또래의 여자아이가 낯선 남성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아이의 성격을 보아 가정에 불화가 있을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자세한 가족 구성원은 모르나 같이 지내는 식구들과의 사이는 좋을 것이다. 더불어 아이가 사는 곳으로 추측건대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러한 정보를 조합하여 데이비트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한다.
“너 혹시 친구가 없는 건가?”
“아, 아냐! 나 친구 많아!”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젓는 아이의 반응에 데이비트도 덩달아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라면 아닌 거지, 그렇게 놀랄 일이었던가? 조금은 화나 보이기까지 한 아이는 데이비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저씨야말로 친구 없는 거 아냐?! 맨날 혼자 돌아다니기나 하고.”
단호하게 부정했던 아이와 달리 데이비트는 그 말에 차마 아니라고 답할 수 없었다. 우선 테스카틀리포카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본인과 의논이 필요하다. 설령 그를 친구로 칭한다 해도 최소한 이 지역에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존재는 한 명밖에 되지 않는다. 그렇구나, 난 친구가 없구나. 썩 좋은 기분은 아니구나. 데이비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의 반응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한 방 먹여줄 생각으로 반격했던 아이는 데이비트에게서 답이 돌아오지 않자 영 마음에 걸렸는지 우물쭈물 말을 이었다.
“뭐야, 왜 아무 말도 없어…….”
“아니, 네 말을 듣고 생각해봤어. 아무래도 나는 친구가 없는 게 맞는 것 같아.”
“어!? 그, 그래? 아… 그럼, 어쩔 수 없지! 아저씨나 돼서 친구가 없는 건 불쌍하니까 내가 친구 해줄게!”
친구가 되어주겠다는 건 아이 나름의 위로였다. 솔직히 말하면 데이비트는 친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나 거절할 이유도 없어 기꺼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이는 친구가 되었다는 의미로 악수를 권하고 있다. 이제 와서 말해 무엇하겠냐만 데이비트는 타인과의 접촉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신과 닿은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데이비트 자신도 확신할 수 없으니 당연했다. 비교적 평범한 인간의 형태가 된 지금도 그것은 여전했다. 그럼에도 데이비트가 내민 손을 잡은 것은, 어디까지나 이 배려심 많은 아이를 실망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작은 접촉이 사건의 단서가 될 거라고는, 데이비트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지구의 시간으로 따지면 1초도 안 될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느껴진 감각은 ‘데이비트’가 탄생할 때의 기분을 상기시켰다. 뭐였지? 착각이 아니라면 방금 데이비트가 느낀 것은 위험 감지 신호였다. 이 감각을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벌써 아득히 옛날처럼 여겨졌지만, 기억은 아직 선명하다. 절대 잊을 수 없는 교신의 감각은 딱 한 번 느껴진 후로 손을 놓기 직전까지도 두 번 다시 느껴지지 않았다.
손을 놓은 뒤 데이비트는 소녀의 모습을 찬찬히 훑었다. 그리고 치명적인 사실을 깨닫는다. 누군가에게 해를 끼친다는 행위는 반드시 의도적으로 행한 것일 필요가 없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현대 문명에서 흔하디흔한 일이다. 그건 아무리 작고 연약한 생물일지라도 마찬가지다.
“너, 이름은 어떻게 되지?”
“엄마가 모르는 사람한테 그런 거 함부로 알려주면 안 된댔는데.”
“정말 새삼스럽군…….”
엉뚱한 점에서 경계심이 많은 아이였다. 오히려 이런 편이 어린아이로서는 더 맞는 행동이긴 하다. 데이비트는 뭐라 하는 대신 자신이 먼저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데이비트 젬 보이드라고 한다. 아미고 스트리트에 살고 있어. 더 궁금한 게 있다면 물어봐도 돼.”
그 말에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데이비트에게 몇 살인지, 좋아하는 건 뭔지, 뭐 하는 사람인지, 고양이는 좋아하는지 등등 질문을 쏟아냈다. 개중에는 대답을 시원찮게 여긴 것도 몇 개 있었지만, 지극히 사실대로 대답한 것일 뿐이라 하자 아이는 투덜거리면서도 더는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마디의 문답을 주고받은 뒤에야 아이는 이름을 말해주었다.
“나는 소피아… 소피라고 불러도 돼.”
“그렇군. 소피, 알다시피 나는 친구가 없어서 내일도 할 일이 없거든. 아마 계속 이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을 거야. 그래서 말인데, 괜찮다면 내일도 여기서 만날 수 있을까?”
소피아라고 이름을 댄 아이는 이번엔 수상하다는 듯이 데이비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는다. 맙소사. 친구라고 허물없이 대하던 건 뭐였단 말인가. 어린아이란 원래 이렇게 알기 어려웠던가. 데이비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았으나 그다지 참고가 될 만한 기억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새 탐색을 끝낸 소피아는 아량이라도 베풀 듯이 말했다.
“좋아! 근데 엄마가 일하러 가면 나올 수 있어서 아침에는 안 돼.”
“상관없어. 네가 편한 시간으로 해.”
“음… 그럼 3시!”
“알겠어. 그럼 내일 보자.”
“어? 어, 응. 내일 봐!”
갑자기 작별 인사를 하더니 자리를 뜨는 데이비트의 모습에 소피아는 조금 당황했다. 당연히 어제처럼 배웅해줄 줄 알았던 것이다. 물론 평소 같았으면 배웅해주었겠지만, 지금의 데이비트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데이비트의 머릿속은 한탄으로 가득했다. 이 정도는 처음 보았을 때 눈치채야 했다. 그런 생각뿐이었다. 데이비트는 자신의 감이 얼마나 둔해졌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미지근한 평화에 물드는 것도 마냥 좋다고 할 수 없었다.
내일은 테스카틀리포카도 동행해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필요하면 그 자리에서 파괴해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아마 소피아는 슬퍼하겠지. 데이비트는 친구가 되어주기로 한 소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데이비트로서는 오래전에 잃은 감정이지만 소피아는 아직 그 감정을 소중히 여겨줬으면 하는 바람을, 그는 자기도 모르게 품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데이비트는 소피아가 보여준 사진 속 고양이들이 살고 있을 집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고양이들이 빠짐없이 갑자기 사라져 소동이 일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소피아는 눈앞의 남성을 보고 도망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새까만 옷에 선글라스, 록 밴드에서나 볼 법한 긴 금발, 불을 붙이지도 않은 채 입에 물고 있는 담배. 어제 막 새로 사귄 친구가 데려온 것은 어딜 봐도 수상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소피아에게 마피아에 대한 지식이 있었다면 분명 그를 보고 마피아 보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소개가 늦었군. 이쪽은 같이 사는 식구야.”
“테스카틀리포카다, 꼬맹아. 들어본 적은 있냐.”
“테… 포……?”
어린아이가 한 번에 기억하기엔 분명 어려운 이름이었다. 게다가 실제 이름을 알려줄 필요도 없었지만, 아이를 상대로 정체를 속일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테스카틀리포카는 굳이 가명을 대지 않았다. 고개를 갸우뚱하던 소피아는 아직은 좀 더 친근한 데이비트에게 물었다.
“같이 사는 거면 가족이야?”
“비슷한 거야.”
데이비트의 말에 테스카틀리포카는 ‘내가 네 가족이라고?’라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데이비트는 그 얼굴을 마주 보며 ‘괜한 소리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고 마찬가지로 표정으로만 말했다.
오늘도 소피아의 목에는 카메라가 걸려 있다. 데이비트가 새로 찍은 고양이는 없냐고 묻자 소피아는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내밀었다. 이렇게 말하면 소피아에 질책을 받겠지만, 사실 어제는 사진에 큰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소피아가 넘겨주는 대로 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카메라를 직접 보고 싶다고 하자 소피아는 흔쾌히 데이비트에게 카메라를 넘겨주었다.
데이비트는 정석적인 마술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이상 현상을 해석하는 데에 있어서는 여느 명망 있는 마술사 못지않다. 오히려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소피아에게 카메라를 받은 데이비트는 두 손으로 카메라를 들고 빠르게 내부를 스캔했다. 작업은 고작 몇 초만에 끝났다. 카메라 자체는 마술적인 회로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다고 일반적인 카메라의 구조를 갖추고 있지도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공학적인 설계 자체는 카메라가 맞지만, 내부의 골자는 카메라로서 마땅히 갖춰야 할 형태가 아니었다. 어떤 물체든 그 내부에는 그 물체 고유의 특정 회로가 만들어져 있다. 일종의 사람의 지문 같은 거다. 그리고 이 카메라는 그 지문이 있어야 할 자리에 이진법 숫자가 나열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테스카틀리포카, 너도 봐줘.”
데이비트가 카메라를 확인하는 동안 테스카틀리포카는 그 모습을 옆에서 말없이 보고만 있었다. 그는 자신에게 벌벌 떠는 여자아이를 본 순간 이번 사건의 범인을 확신했음에도 데이비트가 증거를 손에 넣을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데이비트로부터 도움을 청해오는 말은 확증이 생겼다는 신호였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데이비트의 어깨 너머로 카메라를 훑었다. 굳이 만져볼 필요도 없었다.
“아, 틀림없어. 이 녀석이 범인이야. 살아있는 것이라면 숲을 통째로 가두는 것도 가능할걸. 인간 정도의 생물을 포착할 힘은 없지만, 고양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하지만 고양이 중에서도 신비의 힘이 강하면 튕겨낼 수 있을 정도로 약해빠졌어. 이러니 내가 못 찾는 것도 당연하지.”
테스카틀리포카의 확인까지 받았다면 더 의심할 것도 없다. 소피아가 지닌 카메라야말로 이번 사건의 원인이다. 물론 소피아는 그걸 모를 것이다. 하지만 몰랐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최소한 ‘원인’은 제거해야 한다. 그리고 소피아의 말에 따르면, 소피아는 지금까지 찍은 사진으로 앨범을 만들었다. 없앤다면 앨범도 마찬가지다. 데이비트는 한쪽 무릎을 꿇어 소피아와 눈을 맞추고 말했다.
“소피, 이건 어디서 산 거지?”
“어, 그게, 골동품 가게였는데…”
“이 근처에 있는 곳인가?”
“아니… 이사 오기 전에 LA에서 산 거야. 길 가다가 우연히 들른 곳이라 정확히 어딘지는 몰라.”
과연 그곳은 평범한 골동품 가게일 것인가? 수수께끼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정황상 물건의 출처를 조사하는 것도 필요할 테지만, 지금은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다. 문제의 근원이라 해도 일단은 주인이 있는 물건이다. 물건을 마음대로 하기 위해서는 주인에게 양해를 구해야 했다. 과연, 얼마나 받아들여 줄지는 모르겠다만.
“소피, 잘 들어. 이 카메라는 평범한 카메라가 아니야. 아마,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물건일 거야.”
“엥?”
“이 카메라는 사진에 찍힌 물체를 없애버리는 물건이야. 그동안 고양이 사진을 찍었다고 했지? 실은 요즘 들어 이 동네에 사는 고양이들이 없어지고 있어. 지금으로선 이 카메라가 원인으로 보여.
네가 잘못했다고 하는 건 아니야. 물론 너희 아버지가 잘못한 것도 아니야. 이 카메라를 가진 사람이 네가 아니었다면, 더 큰 일이 났을 수도 있어. 그렇다고 해서 이 카메라를 계속 쓰는 건 안 돼. 이대로 계속 가지고 있는 것도 안 돼. 카메라를 그대로 두면 사라진 고양이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우린 이 카메라를 부숴야만 해. 그리고 네가 가지고 있을 앨범도.”
“싫어…….”
아직 어린 소피아가 모든 걸 이해하길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다. 한 번에 설득할 것이라 기대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게 위험한 물건이며 없애야 한다는 것만 전해져도 충분했다. 아마 소피아에게는 전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소피아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남자가 자신의 보물을 빼앗으려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소피,”
“그치만… 이건 아빠가 마지막으로 준 선물이란 말이야!”
소피아는 결국 데이비트가 들고 있던 카메라를 낚아채고 달아났다. 어린아이가 뛰는 속도라 해도 빨리 뒤쫓아야 할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얼마 가지 못해 소피아가 발을 삐며 바닥을 굴렀기 때문이다. 넘어지면서 놓친 카메라는 몇 번이나 바닥에 부딪히며 멀리 날아가고 매일 쓰고 다니던 야구모자는 벗겨져 옆에 떨어졌다. 소피아의 눈에는 기어이 참고 있던 눈물이 고였다. 빨리 도망쳐야 했다. 다시는 소중한 걸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소피아의 마음과 달리 상처투성이가 된 팔다리는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살며시 다가온 데이비트는 소피아를 일으켜주고, 바닥에 떨어진 모자의 먼지를 털어 머리에 씌어주었다. 소피아는 상처를 살피는 손길을 한 번은 뿌리치기도 했으나, 아랑곳하지 않는 데이비트의 모습에 그마저도 바보같이 느껴져 그만두기로 했다. 신기하게도 데이비트의 손이 지나간 자리마다 상처가 나았지만, 소피아는 그것이 마술이라는 것은 알 수 없었다.
“…안 아파.”
“마법이야. 아프지 않게 해주는 마법.”
“아저씨, 마법사였어?”
“그 정도는 아니야. 흉내만 내는 수준이지.”
데이비트보다 한발 늦게 따라온 테스카틀리포카는 멀찍이 날아간 카메라를 집어 왔다. 꽤 멀리 날아갔음에도 카메라는 깨진 곳 없이 멀쩡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카메라를 한 손에 들고 말했다.
“데이비트, 이런 건 처리 순서도 중요해. 만약 이 물건으로 인해 생긴 현상이 남아있는 채로 물건만 없애면, 후에 발생할 사고는 막을 수 있지만 이미 일어난 일은 되돌릴 수 없어. 현상이 그대로 고정되어 버리는 거야. 카메라를 부수는 건 쉬워. 내 힘이라면 존재의 정의 단계에서부터 파괴할 수 있어. 하지만 카메라만 없애면 그 사진 속의 고양이들은 영원히 그 안에서 벗어나지 못해. 사진을 없애고, 그 뒤에 카메라를 부순다. 그게 정당한 순서야.”
신은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정 안 되면 그들은 협박해서라도 소피아의 집을 찾아내고, 그렇게 해서 찾아낸 사진을 없앤 뒤 카메라까지 없애면 사건 해결이었다. 그 과정에 소피아의 의견은 필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최선인가? 지금까지 데이비트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답만을 추구했다. 그것이 옳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에게는 그 외의 경우를 선택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지금도 그는 효율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받은 선물을 소중히 여기는 아이를 외면할 만큼 매정한 사람도 아니었다.
“테스카틀리포카, 부탁이 있어.”
“뭔데.”
“……이 아이에게 친구를 만들어줘.”
사고였다고 한다. 카메라를 사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불행한 사고로 소피아의 아버지는 세상을 등졌다. 고작 한 달 전의 일이었다. 어머니와 단둘이 낯선 땅에 도착한 아이는 의젓하게도 홀로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친구를 찾아다녔다. 사진은 어린아이가 친구를 사귀기 위해 선택한 수단이었다. 그것이 혼자만의 만족에 그치는 수단이었다 해도 헛되이 만들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사람의 영역을 벗어나 버린 그들로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고양이라면? 형편 좋게도 데이비트의 곁에는 고양이와 대화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 그가 개입해준다면 친구 한둘 정도 사귀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그렇게나마 이 작은 아이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다면, 이 또한 세상을 이롭게 만드는 한 걸음이 될 것이라고 데이비트는 믿었다.
“……우리 집에선 고양이 못 키워.”
“응.”
“그치만 난 고양이가 좋아.”
“응.”
“나도, 고양이랑 친해지고 싶어. 동네 애들하고도, 친구가 되고 싶어.”
“할 수 있어.”
“아빠도… 만나고 싶어.”
“…….”
“실은 이사 가는 것도 싫었어. 친구들은 다 거기 있는데 혼자 떠나기 무서웠어. 그치만 엄마가 앞으로는 여기서 일해야 한다고 하니까, 엄마를 힘들게 하면 나쁜 아이니까, 그래서 참았어. 엄마가 일하러 가면 무섭고 쓸쓸했지만, 그래도, 카메라랑 같이 있으면 아빠가 같이 있어 주는 것 같아서, 혼자가 아닌 것 같아서 참을 수 있었어.”
어느새 소피의 눈망울에서는 굵은 눈물이 떨어지고 있다. 데이비트는 차마 그 눈물을 닦아줄 수 없었다. 자신에게 그럴 자격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입에 발린 말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말로만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면 세상일이 이토록 복잡하게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이런 세상 속에서도 허울 좋은 말이 필요한 순간 또한 있는 법이다.
“너에겐 아직 어려울 수 있지만,” 데이비트는 그렇게 운을 뗐다. “사람은 누구나 소중한 것을 잃는 순간을 겪게 돼. 그게 무엇인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예외는 없어. 그건 분명 슬프고 힘든 일이야. 하지만… 그걸 잃는다고 해서 함께했던 시간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야. 네가 그것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기 위해 애쓰는 한, 그건 계속 네 곁에 있어. 보물을 뺏으려고 하는 나쁜 아저씨들이지만 믿어주면 좋겠어.”
“모르겠어… 아무것도 모르겠어. 모르겠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은 슬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도 슬프지 않아도 돼.”
먼 옛날의 소년에게 말하듯, 눈앞의 소녀에게 그렇게 말했다.
“너도 행복해져도 괜찮아.”
소피아는 그대로 한참을 엉엉 울었다. 길가에 사람이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울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와 검은 옷을 입은 남성 2인조라니. 이런 모습이 눈에 띄었다간 꼼짝없이 신고당했을 것이다.
얼마나 울었을까, 겨우 울음을 그친 소피아는 앨범을 방에 두었다고 알려주었다. 소피아는 집까지 가는 길을 기꺼이 알려주긴 했지만, 아파서 못 움직이겠다고 억지를 부린 덕에 집에 가는 길 내내 데이비트의 등에 업힌 채 말로만 설명할 뿐이었다. 관대하게도 카메라는 테스카틀리포카가 들고 가도록 허락도 해주었다. 하지만 집에 도착하자마자 소피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하게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당연했다. 데이비트의 치료 마술 덕에 상처는 물론이거니와 통증도 진작에 없어진 뒤였으니까.
“여기, 앨범. 지금까지 찍은 사진은 전부 여기 있어.”
소피아가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손에는 A4 용지보다 조금 더 큰 크기의 앨범이 있었다. 소피아의 말대로 두툼한 앨범을 채운 것은 전부 고양이 사진뿐이었다. 앞장은 전부 데이비트의 기억에 없는 고양이인 것으로 보아 이사 오기 전에 찍은 사진일 것이다. 몇 장 넘기자 페이지 한가운데에 회색 스코티시 폴드가 눈에 띄었다. 집 안에서 창가를 내다보는 모습이었다. 밖에 나가기 싫어하던 고양이의 수수께끼도 해결되었다. 실종된 것으로 파악된 고양이가 전부 앨범에 있는 것을 확인한 뒤, 데이비트는 앨범을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넘겼다.
“부탁할게.”
“보수는 제대로 받을 줄 알아라.”
“물론이지.”
테스카틀리포카는 앨범을 받아들고 뜻 모를 주문을 읊었다. 마술과 관련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평생 접할 일 없을 나우아틀어로 된 주문이다. 몇 마디의 주문과 함께 앨범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더는 연기가 나지 않게 된 뒤 다시 펼친 앨범에 남은 것은 텅 빈 백지뿐이었다. 다음은 카메라 차례였다.
테스카틀리포카가 사진을 없앨 동안 카메라를 꼭 끌어안고 있던 소피아는 테스카틀리포카를 한 번, 데이비트를 한 번 번갈아 본 뒤 품에서 카메라를 떼어놓았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카메라를 받아들더니 모자가 삐뚤어지도록 소피아의 머리를 벅벅 쓰다듬어주었다. “장하다.”라는 말은 덤이었다.
이번에는 사진이 사라질 때보다 조금 더 긴 주문이 이어졌고, 점점 형체가 흐려지던 카메라는 어느새 연기처럼 사라졌다.
“잘 가. 고마웠어.”
소녀의 입에서 나온 짧은 작별 인사도 연기를 타고 하늘 저편으로 떠나갔다.
“……소피?”
“어? 엄마!”
엄마? 소피아의 말에 데이비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 서 있는 건 아직 세상의 풍파에 시달리지 않아 보이는 앳된 여성이었다. 어쩌면 실제로도 데이비트와 나이 차이가 크게 나지 않을 수 있다. 소피아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이 낯선 남성들과 함께 있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며 다가왔다.
“소피, 이분들은 누구니……?”
“친구야!”
다행히도 소피아는 그들을 친구로 칭했다만, 데이비트 혼자였다면 모를까 테스카틀리포카의 외모는 처음 보는 사람에겐 오해받기에 십상이다. 데이비트는 유괴범으로 여겨지기 전에 나서서 자기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데이비트 젬 보이드라고 합니다. 아미고 스트리트에 살고 있습니다만, 이 근방에서는 해결사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할 줄 아는 것은 많이 없지만,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오셔도 좋습니다.”
시늉으로 만들어둔 명함까지 건네자 소피아의 어머니는 엉겁결에 받아들었다. 아직 상황 파악을 못 한 사이 자리를 뜨는 것이 상책이다. 그들은 이대로 “그럼 이만.”이라는 말과 함께 빠르게 떠나려 했다.
“아저씨!”
걸음을 멈추고 소피아를 보자 어머니의 옷자락을 꼭 쥔 채 반대쪽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까보다는 훨씬 좋은 얼굴이었지만 여전히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이다. 하지만 소녀는 울지 않았다. 아마 그들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뒤에도 울지 않을 것이다. 이건 소녀가 자기 스스로와 한 다짐이었다.
“약속 꼭 지켜야 해?”
“어, 물론이야.”
그러니 어른으로서 아이의 각오에 보답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확답을 듣진 않았지만, 테스카틀리포카라는 신 또한 결국 약속을 지키리라는 것을 데이비트는 알고 있다.
소피아의 집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지고 나서야 테스카틀리포카는 줄곧 물고만 있던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깊게 들이쉬었다 내쉬며 만들어진 연기가 부옇게 흩어진다.
“넌 정이라는 걸 없앴다면 훨씬 편하게 살았을 거다.”
“그러게. 하지만 더욱 혹독한 상황을 만드는 건 네 취향이잖아?”
“하, 말은 잘해요.”
“확실히 성가신 일이 됐지만, 그래도 분명 이렇게 하는 게 옳을 테니까.”
테스카틀리포카는 한 번 더 연기를 내뿜었다. 연기가 흩어져 가는 걸 보며 데이비트는 소피아 앞에서는 차마 꺼내지 못한 질문을 입에 담았다.
“그러고 보니 소피아의 아버지 말인데.”
“음, 그거라면 카메라랑 관련 없을 거다. 정말로 운 나쁜 사고였겠지. 그 정도의 힘은 없는 물건이었어. 하지만 그걸 팔아넘긴 녀석은 어떨지 모르지. …찾으러 갈 거냐?”
“글쎄. LA라고는 해도 어딘지 확실하게 모르고, 안다고 해도 지금 그 자리에 가봤자 아무것도 없겠지.”
“그렇지. 그런 녀석들은 한곳에 오래 있지 않으니까. 혹시 알아? 그 녀석 쪽에서 먼저 우릴 노리고 찾아올지.”
“그건 별로 기쁘지 않은데.”
그런 별것 없는 대화를 하며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익숙한 레스토랑에 들러 끼니를 때웠고, 이온 음료와 몇 가지 간식거리를 사 들고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집안일에 쓸 체력도 비축해둬야 했다. 또한, 사건 조사를 핑계로 잠자리를 거절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오늘 밤은 각오해야 했다.
언제나처럼 데이비트는 6시에 눈을 떴으나, 도무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 상태를 느끼고는 그대로 다시 눈을 감았다. 몸살 기운이 느껴지는 것도 있지만, 데이비트를 힘껏 부둥켜안은 채 잠든 전능신이 문제였다.
한숨을 한 번 쉬고 다시 눈을 뜬다. 옆을 보면 시트 위로 펼쳐진 긴 금발이 보인다. 그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고 들어 올리자 한 올도 엉키지 않고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은 방안으로 새어 들어온 햇살보다 더 눈부시게 빛난다. 데이비트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조용히 손을 내렸다. 지금 깨웠다간 한 번 더 하자고 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됐다간 절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런 혹사, 당분간은 사양이라고 데이비트는 마음속으로 몰래 되뇌었다.
그렇게 나란히 늦잠을 자고, 점심이 다 되어서야 마주한 식탁에서 데이비트는 땅콩버터를 바른 토스트를 씹으며 습관대로 메일함을 확인했다. 몇 개의 광고 메일을 삭제하고 남은 메일 하나는 노움 칼데아로부터 온 새로운 의뢰다. 그들이 비로소 한가해졌다는 것을 멀리서 보기라도 한 듯한 타이밍이다. 첨부된 지도를 열자 차량으로 2시간 거리에 있는 고원이 나온다. 식사를 끝낸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지도를 보여주자 알겠다는 표시로 짧게 휘파람을 분다. 장거리 조사를 위한 짐은 항상 준비되어 있다. 언제든 출발할 수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그들이 집을 나선 것은 약 30분 뒤의 일이었다. 차를 빼내기 위해 테스카틀리포카보다 앞서 밖에 나온 데이비트를 마주해준 건, 이제는 낯이 익어버린 검은 고양이었다.
“너는…”
“오, 한동안 안 보여서 이 녀석도 당한 건가 했는데, 그새 아는 사이가 된 거냐?”
“아… 몇 번 마주친 적은 있어.”
데이비트가 문 앞에서 멈칫하는 사이 따라 나온 테스카틀리포카도 고양이를 보더니 아는 척을 한다. 따지고 보면 이번 일을 해결한 것은 이 고양이 덕분이다. 어쩌면 고양이는 생긴 것만이 아니라 영적인 면에서도 테스카틀리포카를 닮았을지도 모르겠다. 고양이는 데이비트의 주위를 몇 번이고 빙빙 돌며 울음소리를 냈다.
“고맙단다, 친구들을 구해줘서.”
뭐라고 한 건지 알려달라고 하기도 전에 테스카틀리포카는 고양이의 전언을 통역했다. 그 말에 조금 놀라 데이비트가 고양이를 보자 제대로 알아들었다고 하는 것처럼 다시 야옹, 하는 소리를 낸다.
“천만에.”
데이비트는 등에 잔뜩 짊어지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 쭈그려 앉아 고양이를 조심스레 쓰다듬었고, 이번에도 고양이는 도망가지 않았다.
찰칵. 옆에서 들려온 셔터 소리에 데이비트는 본능적으로 소리가 난 방향을 봤다. 그런 사건이 일어난 직후다. 사진을 찍는 행위에 경계하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하지만 시선이 간 곳에 있는 범인은 다름 아닌 테스카틀리포카였다. 반응을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그는 카메라를 흔들며 웃었다.
“걱정 마, 이건 평범한 사진기니까. 신인 내가 장담하지.”
“언제 그런 걸 산 거야.”
“산 게 아니라 내기에서 얻은 거야. 그 왜, 내 단골 가게 있잖아. 거기 녀석들이랑 야구 경기로 내기를 했거든. 보기 좋게 내가 이겼지.”
“……혹시나 해서 묻는 거다만, 넌 뭘 걸었지?”
“아? 그거라면 네가 저번에 산 스피커였을걸. 어차피 내가 이길 거였으니 뭐든 상관없었지만.”
그건 데이비트가 며칠간 가격과 성능을 비교한 끝에 구매한 블루투스 스피커다. 집에서도 고음질로 영화를 감상하기 위해 들인 물건이 까딱하면 남의 손에 넘어갈 뻔했다는 사실에 데이비트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황당해하는 데이비트는 안중에도 없는지 테스카틀리포카는 그 손에 맘대로 사진을 쥐여 주었다.
“옜다, 신의 선물이다. 소중히 간직하라고.”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촬영된 사진은 아직 인화되지 않아 새하얀 종이 상태였다. 공중에서 몇 번 힘주어 흔들자 점점 형체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사진을 데이비트는 뚫어져라 보았다.
“왜 그렇게 봐. 맘에 안 들어?”
“아니, 그러고 보면 증명사진이 아닌 사진은 꽤 오랜만이다 싶어서.”
“빨리 익숙해지는 게 좋아. 앞으로는 더 많이 찍게 될 테니까. 다음엔 나와 함께 찍는 영광을 주도록 하지.”
그렇게 말하고 테스카틀리포카는 먼저 차에 올라탔다. 흐릿하던 사진에는 어느새 데이비트와 고양이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데이비트는 사진 속에서 고양이를 보며 웃고 있는 자신이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