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니 아키만은 참지 못한 재채기를 연거푸 쏟아내며 더 이상 여밀 것도 없는 옷깃을 애써 붙들어 맸다. 일본의 겨울이란 이리도 추운 것이었구나. 일본이 이 정도라면 인리보장기관이 있다고 하는 남극은 얼마나 추울까. 어렴풋한 실루엣만 기억에 남은 그곳을 떠올리며, 로마니는 숨을 내쉴 때마다 만들어지는 하얀 입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입김이 공기 중에 흩어지면서 한적한 공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지극히 평화로운 오후의 풍경이다. 얼마 전까지 이 근방에서 전쟁이라는 이름의 의식이 이루어졌다고는 상상할 수도 없다. 그 모든 재해는 분명 자신의 손으로 이루어낸 것일 텐데, 어쩐지 로마니에게는 일련의 과정이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자. 따뜻한 카페오레에, 이번에는 저번보다 시럽을 한 펌프 추가해 봤어. 맛을 비교해 주면 좋겠는데.”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자 언제 가까이 온 것인지 바로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입김보다도 하얗고, 하얗고, 하얀 사람. 마리스빌리 아니무스피어였다. 테이크아웃 컵을 양손에 들고 온 그는 조금 더 큰 쪽의 컵을 로마니에게 내밀었다. 하얗고 멀건 얼굴과 컵을 번갈아 본 뒤, 로마니는 두 손으로 컵을 받아 들었다.
종이 소재로 만들어진 아이보리색 일회용 컵. 현대의 지구 인류는 간편함을 중시하며 한 번 쓴 뒤 정리할 필요 없이 버리기만 하면 되는 도구를 끊임없이 만들어냈다. 머지않은 미래에 인류는 자원 고갈과 환경 파괴를 눈앞에 놓인 가장 큰 문제로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일어난 붕괴가 아닌,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하는 순간부터 예정된 결말이다.
‘그렇다면 그 멸망의 원인도, 무분별한 자원의 오남용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로마니는 꿈에서도 되풀이되는 어느 광경을 떠올렸다. 인류사의 멸망. 지구의 멸망과는 다르다. 인류가 사라진다 해도 지구에는 다른 생명이 깃들며 새로운 문명을 자아낼 것이다. 그래도 지금의 로마니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인류였다. 기왕이면 더 오래,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랐다. 그랬기에 응한 소환이었다. 그리고 그 끝은 절망적인 최후였다. 언젠가 다가올 최후는 그런 좋지 못한 것이어선 안 됐다. 그들은 좀 더 걸맞은 임종을 맞이해야 한다. 그들에게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이 또다시 막다른 길에 접어들고 나서야 로마니는 현실로 의식을 돌릴 수 있었다. 마리스빌리의 컵은 어느새 텅 비었다. 이래서는 무엇을 마셨는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로마니는 뒤늦게 뚜껑을 열어 커피 표면에 대고 입김을 불었다. 표면이 몇 번 찰랑이고 난 뒤 입을 갖다 대자 커피는 먹기 좋은 온도로 식어 있었다. 마리스빌리는 대견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제 식혀서 먹는 법은 배웠구나.”
“나도 어린애는 아니야. 한 번 크게 데이면 그 정도는 학습할 수 있어.”
로마니가 ‘로마니 아키만’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참으로 우스꽝스럽게도, 로마니가 인간이 되어 처음으로 느낀 것은 추위와 허기였다. 세계가 멸망하는 순간을 보았다고 해서 인간으로서 느껴야 할 감각이 마비되지는 않았다. 옷 한 벌 제대로 걸치지 못한 육체는 한겨울의 바람에 싸늘하게 식어갔고, 이제 막 만들어져 텅 빈 위장에서는 먹을 것을 달라며 거센 항의가 빗발쳤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자신의 행색에 로마니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런 로마니에게 마리스빌리가 처음으로 건넨 것은 막 끓여진 뜨거운 우유 한 잔이었고, 멋모르고 그것에 입을 댄 로마니는 한동안 입이 아린 느낌에 시달려야 했다. 로마니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마리스빌리라고 해도 그런 인간적인 표정을 지을 줄 아는구나. 이는 자신의 한심한 행태를 보고 진심으로 당황한 마리스빌리를 보았을 때의 감상이었다. 이제는 그 또한 전생의 일처럼 느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