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_morrie
2026-06-17 20:36:18
8608文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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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그루의 사과나무

stzp






안 그래도 높았던 천장이 더 높아졌다. 아니 없어졌다. 두 사람은 거리에 나와 있었다. 놀랍게도 이 사태에도 불구하고 고요한 길거리였다. 주택가의 주택들은 벽이 좀 헤졌지만 기반은 무너지지 않았다. 머리가 조금 아래로 휘어 있어도 가로등은 바닥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서 있었다. 바닥도 이가 좀 빠졌을 뿐 잘 누워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을 제외하면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텅 빈 거리였다.

스티븐이 이곳을 찾은 이유를, 재프로서는 그가 부자에 비밀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이라고밖에 추측할 수 없었다. 겉이 화물 컨테이너여도 쥐새끼 한 마리 엿듣지 못할 것 같고, 혼자만 쓸 수 있다고 하면 돈을 붓는 게 뒤 구린 부자들이었는데, 스티븐은 두 가지 특징에 모두 부합하는 사람이었다. 스티븐에게는 비밀이 많다. 조금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니 느낄 수 있다. 그러니 조용한 곳에 오고 싶어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이 마당에 재프하고만 공유할 비밀이 뭐가 있을까? 재프는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깊이 캐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캐내면 뭐가 달라질까? 적으로 돌리면 밤에 잠도 못 잘 만큼 무서울 이 남자는 재프가 라이브라에 헌신하는 한 든든한 우군이 되어줄 테고, 재프도 라이브라의 삶에 만족하고 있는데.

재프가 스티븐을 흘끗 보았다. 그리고 저렇게 매너 좋아 보이는 얼굴을 하고 저런 운전을 할 수 있다고 감탄했다.

십 미터쯤 떨어진 곳에 이 거리에서 가장 이질적인, 어제도 세차를 한 듯 새것같은 흰 세단이 있었다. 주차장에 놓기도 조심스러워지는 번쩍번쩍한 차는 주인이 없는 것처럼 시든 잡초들 사이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얼마나 탔다고 벌써 탑승감이 익숙해진 그것은 몇 분 전까지 세계 멸망을 앞두고 우르르 몰려나온 인파를 뚫고 질주하고 있었다. 가로막는 모든 것을 치고 지나가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보일 정도로 난폭하게 이리저리 차선을 바꿔가며 내달렸고 그렇게 도착한 곳은 의외로 재프도 아는 곳이었다. 제법, 잘.

큰 공원이 있었다. 분수대의 물은 말랐고 잔디는 비틀어졌다. 머리 위의 구름 말고는 전부 멈춰버린 것 같아 일부러 연기를 가열차게 뿜어냈다.

스티븐은 그 침묵이 기껍기라도 한지 흩어지는 연기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다 말했다.

“여긴 나름 추억이 있는 곳이지.”

“음.”

재프가 불편하게 신음했다. 평범한 세계 균형에 균열이 갈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과 극적인 극복이 뒤따른 추억이었다. 다른 사람 앞이었다면 재프는 그의 위업을 두고 조금 까불어봤을 테지만 스티븐 앞에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물론 혜성 충돌&세계 멸망이라는 빅 이벤트의 영향도 있었다. 이 도시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종말론과 비관론이 누구도 간과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게 부풀어오른 상태였다. 재프의 마음을 좀먹는 것은 스티븐이 말하는 그 추억이었다. 재프는 벤치에 더욱 늘어지며 시가 연기를 하늘로 피워 올렸다. 침묵이 이어졌다. 스티븐은 기어이 재프가 뭐라도 대답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대놓고 혼나는 것보다 더 불편한 침묵. 재프는 어딘가로 닿지 못하고 흩어지는 연기를 보며 말했다.

나고 말고요.”

재프의 성질머리가 말했다.

“하고 싶은 일이란 게 고작 이런 데 오는 겁니까?”

스티븐이 물끄러미 재프를 바라보았다. 재프는 거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혜성이 충돌하는 것 자체보다도 분명 존재하는 미래가 고작 자신이 저주로부터 벗어난 것으로 없어져버린 것일까 하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막연히 시간을 보내려고 온 건 아니야. 그러기엔 너무 아깝지.”

스티븐이 말했다.

“갈 곳이 있어.”

“갈 곳이요?”

재프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페이크 맨하탄은 도시 최외곽에 위치해 있다. 멸망을 앞둔 세상의 소란이 전부 저 멀리 떨어진 것처럼 고요한 이유였다. 여기까지 와서 더 갈 곳이 있다고?

“따라와.”

스티븐이 일어났다. 그는 차를 지나쳐 곧 쓰러질 것 같은 건물 사이로 거침없이 발을 옮겼다. 여러 번 와본 것 같았다. 재프는 발에 걸리는 돌부리에 몇 번 허우적거리기도 했지만 스티븐은 어떤 건물 앞에서 멈출 때까지 휘청거리지도 않았다.

스티븐은 다 무너진, 건물이라 부르기도 어색한 돌벽 주변에 늘어진 기다란 천을 옆으로 걷어냈다. 세로 줄무늬가 그려진 천은 본디 차양이었는지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계단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두웠다. 잘 보니 어느 정도 내려가면 둥글게 꺾여 나선형 계단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기분 탓인지 아래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 오는 것 같기도 했다. 지나온 길과는 다른 의미로 음산했다. 페이크 맨하탄의 거리는 텅 비어서 꺼림칙했다면 이 계단 끝에는 무언가가 있다는 강렬한 예감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재프가 스티븐을 쳐다보았을 때, 스티븐이 계단에 한 발 내디디며 말했다.

“여기가 오늘의 진짜 목적지다.”

스티븐은 곧장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갔다. 재프는 잠시 불안한 눈으로 황량한 공터를 돌아보았다가, 서둘러 따라 내려갔다. 뒤를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