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여기는 세계가 일주일 안에 멸망하는 마당에 영업을 하는 얼마 안 되는 식당이다. 둘째, 그 중에서도 내 사적인 인맥을 동원해 예약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지.”
“셋째는 없습니까?”
“셋째?”
스티븐이 팔짱을 끼고 전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프의 눈에는 다분히 고의적인 제스처였다.
“아니, 중요한 게 빠졌다고요!”
“목소리를 낮춰.”
재프가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소리를 질렀다.
“왜 오늘도 제가 당신이랑 같이 나왔냐가 없잖슴까!”
스티븐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흉터의 면적이 미세하게 넓어졌다.
“설마 오늘도 선약이 있었나?”
그럴 리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있었지만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정말 있었기 때문에 재프는 억울했다.
혜성이 충돌해 지구가 멸망하는 마당에 재프와 하루를 보내주겠다 약속한 여자의 이름은 사만다가 아니라 메리였다. 날개뼈 밑까지 넘실대는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인 그녀의 집—정확히는 작은 아파트지만—이 없어지지만 않았어도 그는 이런 살벌한 곳에 와 있지 않았을 터다. 그렇다. 더 엄밀히 말해 약속이 없어진 건 아니다. 메리의 집이 없어진 거니까. 재프가 아침에 메리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곳엔 사우스이스트 우드 아파트 대신 거대한 크레이터가 있었다. 구획 뽑기는 아니었다. 구획 뽑기였다면 자리가 바뀐 건물이 꽂혀 있었을 테니까. 재프는 며칠 전에 본 메리의 얼굴을 떠올렸다. 머리를 귀로 넘겨주면 부끄러워하면서도 좋은지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나이에 비해 어리고 순수한 소녀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제는 만날 수 없겠지만.
재프는 공연히 창밖을 보았다. 같은 높이에 있는 하늘은 별 일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따금 구름이 아래의 소란에 영향을 받은 것처럼 들썩거렸다. 아마 맞을 것이다. 세계가 멸망한다고 하니 하늘로 자기 자신을 쏘아올리는 진풍경이 뉴스에 흘러나오고 있었다. 로켓은 철이지만 생물의 몸은 그 정도 기압차를 견디지 못하는데 말이다. 신종 자살법이로군. 재프가 오는 길에 들은 말을 떠올렸다. 저건 자살법이 아니라 살자법이라는 우스갯소리였다. 본인은 살고 싶어서 하는 거라지만 대기권에 가까이 가면 자살에 가까워지니 말이다.
마천루 고층에 자리한 레스토랑 내부의 분위기는 어제처럼 평화로웠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여기까지는 닿지 않을 것 같았다. 이곳을 크레이터로 만들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심지어 혜성조차도.
“있었나?”
“……아뇨.”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은 얼굴인데.”
“맛있다고요.”
“그렇지. 이 시기에 이 정도로 음식의 질을 유지할 수 있다니 놀라운 가게야.”
재프는 스티븐이 시킨 음식을 전부 다 먹었다. 스티븐은 그 모습을 보고 접시에서 고기를 절반 정도 잘라서 넘겨 주었다. 재프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을 때 이렇게 말했다.
“잘 먹으니 보기 좋다 싶어서.”
정작 듣는 재프는 체할 것 같았다. 이렇게 여유를 부려도 되는 건가? 하지만 못 부릴 게 뭐가 있을까. 세상이 멸망한다는데, 그리고 그걸 막을 수도 없다는데 꿋꿋이 고객을 받고 요리를 내주는 식당 주인이 여유를 부리는 스티븐이나 재프보다 훨씬 미친 사람인 것이다. 본인딴에는 이 도시에서 태연히 성업하는 비비안처럼 무슨 의미가 있기야 하겠지만.
전 인류가 소행성 충돌에 덜덜 떨던 옛날에 비해 훨씬 진보한 초상 과학 기술이 혜성이 오고 있다고 말한다. 몇 광년 떨어진 곳에서부터 오는지 모든 방송사에서 방송 한구석에 틀어 놓고 있다. 무슨 크리스마스 카운트다운도 아니고. 덕분에 천문학계는 역사적으로 유례 없는 호황과 관심을 누리고 있었다. 초신성처럼 말이다.
중요한 건 시간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귀중한 시간을 이틀이나 재프에게 할애하다니. 그는 처음으로 스티븐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그동안 그럴 필요가 없었다. 도시는 바쁘게 돌아갔고, 재프가 스티븐과 같이 있는 시간은 겨우 사무실에 있는 몇 시간—그것도 일이 없을 때나 가능했다—이고, 단둘이 대화한 적도 거의 없었다. 더군다나 스티븐은 그에게 특별한 용건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생각보다 같이 시간을 보낼 사람이 없는 건가? 문득 동질감이 느껴졌다. 재프는 떠돌이였다. 누구도 그에게 정말 각별하고 유일하지 않았기에 그도 누구에게도 각별하고 유일하지 않았다. 그렇게 절절하게 전화기를 붙잡고 통곡에 통곡을 하던 후배처럼.
그때 재프는 그와 스티븐이 결정적으로 다른 점을 찾아냈다.
“가족은 어쩌구요.”
이제와.그런 사적인 얘기는 못할 것도 없다. 뭘 감추고 있든 5일 뒤면 다 박살이 날 텐데.
스티븐은 재프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라앉은 다갈색 눈동자 위로 검은 곱슬이 살랑거려 그늘을 만들었다. 꿰뚫어 보려는 것 같았다. 그래봐야 보일 게 뭐가 있겠냐마는. 재프는 생각했다. 스티븐은 포크로 접시를 톡톡 치며 차분히 말하기 시작했다.
“어제 이미 전화했어. 당장 여기로 올 수 있는 사람도 없고 내가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대신 약속이나 하자고 했지.”
“약속?”
“그래. 약속. 가능하면…….”
포크 소리가 멎었다.
“살아서 종말을 보자고 말이야.”
“그게 끝이에요?”
“응.”
“하고 싶은 건요?”
“마지막을 눈물로 보내줘야 할 만큼 서로에게 못하고 살진 않았지.”
스티븐이 식기를 탁 내려놓았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게 없다는 뜻은 아니야.”
재프는 눈을 반짝였다. 드디어 해방의 실마리가 잡혔다. 솔직히 죽을맛이었다. 약속은 없다. 평소엔 그런 얘긴 쥐뿔도 하지 않고 내버려두더니, 오늘은 어딜 가는지 GPS로 확인하겠다는 소리를 해서 어제와는 달리 제 발로 끌려왔다. 호시탐탐 노리던 해방의 순간을 기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