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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ple) 그늘진 심장에 불을 질러라

아키토&미즈키, 좀아포au



1. 휴리스틱 스텝


문을 열면,

거기에는 눈부신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마네킹이 사람처럼 누워있다.

“아, 미친, 깜짝이야…….”

시노노메는 탄식처럼 중얼거렸다.

생각해 보면 일반적인 가정집에 마네킹 따위가 누워 있을 리가 없잖아. 일반적인 가정집이라도 재난 상황에 마네킹 따위를 눕혀 두는 일은 없다. 그런데도 마네킹이라고 착각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는데. 첫 번째로는 누워 있는 자세가 너무나 딱딱하고 인공적이었다. 두 번째로는 마네킹의 몸처럼 골격이 곧고 발라서. 세 번째로는 프릴과 리본이 덕지덕지 붙은 원피스의 옷태가 너무 정직했다.

하기야 일반적인 가정집에 마네킹이 누워 있는 것보다는야 사람이 누워있는 게 훨씬 더 자연스럽다. 그런데도 순간 마네킹이라고 착각했다. 누워 있는 풍경이 너무 이질적이고 안 어울려서. 그리고 이 상황과 도무지 안 맞아서.

사실 마네킹인 편이 더 낫다. 밖에는 미인류라는 것들이 득시글거리며 인간을 뜯어먹느라 난리다. 그리고 이런 재난 상황에서는 같은 인간이라도 믿을 게 못 된다. 그런데도 마네킹이 아니라 사람인 편이 나았다. 이상하잖아. 빈집을 털려고 들어왔는데 거기에 마네킹이 떡 하니 있으면 괴담 같고. 시노노메는 한 번 더 한숨을 쉬면서 골프채를 고쳐잡았다. 가까이 다가가니까 비로소 시체가 아니라 사람이었다는 게 실감 난다. 그런데도 사람 같지 않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채도가 낮고 탁한 머리칼은, 어렸을 때 죽도록 먹기 싫어했던 시럽형 감기약이 떠오르게 한다. 생동감이 전혀 없는 핑크색. 그리고 그보다 더 진한 핑크색의 속눈썹은 인공적인 감미를 물씬 풍긴다. 화장이 두꺼워서가 아니다. 화장이 두껍기로 치면 시노노메의 누이도 만만찮다. 이 얼굴에서 인공적인 위화감을 느끼는 이유는…….

눈꺼풀이 갑자기 열리고,

웍.

딸기시럽을 올린 것 같은 입술에서는 낮은 소리가 났다.

“왁!”

잠들어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시노노메는 발을 뒤로 헛디디며 넘어졌다. 완충재가 전혀 없이 딱딱한 거실 바닥에 그대로 엉덩이를 찧었다. 엉덩방아만 찧은 게 아니라 꼬리뼈도 정통으로 눌린 것 같다.

시체는, 아니 마네킹은, 아니 그러니까 사람은, 시노노메가 비명을 지른 뒤에도 그 자리에서 꿈적하지도 않는다.

그러니까 이거 진짜 미친 상황인 거지.

정체 모를 것들이 밖에 득시글거리면서 사람을 뜯어먹는 사상 최대 최악의 초특급 재난 상황에서 빈집 털이를 하러 온 나도 할 말 없지만. 이런 사상 최대 최악의 초특급 재난 상황에서 빈집털이범이 쳐들어왔는데도 평온하게 누워 있는 사람도 제정신은 아니다. 시노노메는 골프채를 고쳐 잡았다. 아무도 소리 내지 않고 아무도 움직이지 않은 채로 정적이 흘렀다.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한 번 더 소리가 났다.

……푸하하.”

지금 저 자식 웃었지?
분명 웃은 거야.

아까 웍, 하고 소리를 낸 것도 일부러다. 잘못 본 것도 아니고 환청을 들은 것도 아니고. 녀석은 분명하게 의도를 가지고 시노노메를 놀려 먹고 있었던 것이다. 베란다 창문 너머로 해가 꾸물꾸물 진다. 지금이라도 다른 집을 찾아볼까. 여기서 시간을 쓸데없이 더 지체한다면 오늘도 꼼짝 없이 노숙자 신세다.

호신용으로 들고 다니는 골프채는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상대로 쓴 적 없다. 되도록 쓸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여차하면 최악의 상황에 써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정도는 한다. 시노노메는 슬슬 뒷걸음질 치면서 집안을 빠르게 스캔했다. 집주인처럼 적당히 알록달록하고 장식품으로 잔뜩 꾸며놓았다. 중요한 건 인테리어가 아니라 냉장고와 옷장 정도인데, 이 사람의 차림새가 꽤 깨끗하고 정돈된 걸 보아하니 집안 물건도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겠지. 필요한 건 금방금방 찾을 수 있을지도. 여차하면 욕실도 쓸 수 있을 것 같고.
……그전에 저 집주인을 어떻게 해결할지 봐야겠지만.

타이밍 좋게도 집주인이 비척비척 일어났다. 생긴 것과 달리 관절의 움직임과 동세가 부드러워서, 시노노메는 그제야 시체도 마네킹도 아니고 살아있는 사람이 맞구나 실감한다. 집주인은 제 집에 든 도둑을 위아래로 한 번 훑었다. 무단 침입자를 스캔하는 것 치고 시선에 성의가 없다.

“난 또 뭐라고. 그냥 빈집털이범이잖아…….”

뱉은 감상조차도 담백하기 그지없다. 밖에서는 정체 모를 것들이 득시글거리면서 사람을 뜯어먹고, 사람끼리도 살아남으려고 서로 뜯어먹는 사상 최대 최악의 초특급 재난 상황에서. 뭐가 언제 어떻게 쳐들어올지도 모르는데. 태평하게 그런 말이나 한다. 아니, 집에 도둑이 들었다니까. 초파리 말고 도둑이 들었다고.

“하핫, 근데 빈집은 아니지. 주인 있는 집 털이범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더니 다시 벌렁 제자리로 눕는다. 이번에는 양발 끝을 모아서 붙이고, 양손을 배 위에 단정히 올리고. 유리관에 예쁘장하게 담긴 백설 공주라도 될 것처럼. 상식을 파괴하는 이 규격 외의 비범함이란. 시노노메는 헛웃음도 안 나와서 경악할 뿐이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글쎄……. 네가 보기엔 어떤 것 같은데?”

집주인은 눈도 뜨지 않고 대답한다. 입술은 거의 안 움직이는데 입에서 소리가 나는 게 기묘했다.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 맞네.”

시노노메는 매고 있던 백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 집을 나갈 타이밍은 놓친 지 오래다. 해가 다 지고 어스름이 올라와서, 이 이상 이동하는 건 무리다. 신고 있던 운동화를 뒤늦게야 은근슬쩍 벗었다. 집주인도 맨발이었기 때문이다.

신발 벗는 기척이 들리자 비로소 집주인이 눈을 뜨고는 시노노메를 노려봤다.

“아아, 짜증 나. 어디 미국에서 살다 왔어?”
“미국에서 놀다 오긴 했는데. 지금 그게 중요해?”
“남의 집에 신발을 신고 들어왔잖아. 네가 다 청소하고 나갈 거야?”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지금 신발이 문제야?”
“남의 집에 신발 신고 들어오는 건 죽어도 싫어.”
“그래서 방금 벗었잖아.”

흙 묻은 바닥에 눕는 거, 진짜 싫어. 집주인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나가라는 말은 하지 않는구나.

시노노메는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열었다. 당연하지만 전기가 다 끊겨있어서, 건질 거라곤 생쌀과 생수 정도뿐이었다. 원래도 집밥을 성실하게 해 먹는 타입은 아니었는지, 시들시들한 샐러드와 소스 몇 종류가 전부였다. 뻔뻔하게 냉장고며 세간 살림을 뒤적거리는 시노노메를 보고도 집주인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뒤에 서서 팔짱을 끼고 지긋이 구경할 뿐.

이 녀석 진짜 바보인가. 아니면 정말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어느 쪽이든 지금의 시노노메에게는 반가운 상황이지만.

다섯 개들이 라면이 두 개, 컵라면이 세 개. 봉지라면은 유통기한이 두 달 정도 지났지만, 이 정도면 감지덕지 다. 심지어 국물까지 한 번에 들어있어서, 해동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게 되어 있다. 재난 만세. 재난 대비 식품도 만만세다.

“여기 가스는 들어와?”
“글쎄.”
……안 되네. 가스버너 같은 거 있어?”
“라이터는 빌려줄 수 있지만.”

시노노메 혼자서만 이 상황이 심각하고 다급한 것 같아 보여 웃겼다. 제대로 씻지 못해서 꼬질꼬질하고, 옷에도 뭐가 좀 묻어 있고. 백팩을 메고 골프채로 중무장을 한 꼴은 누가 봐도 조난자고 재난당한 사람이다. 이 집 밖에서는 이게 평균인데 이 집과 집주인은 전혀 이 재난을 타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니까, 마네킹이라고 착각한 것도 아주 터무니없는 게 아니었다. 도무지 생활감이 없고 생동감이 없으니까. 세상을 타지 않은 이곳은 인형의 집처럼 아기자기하고 조용하다. 찬장에서 라면이 나오고 냉장고에 쌀이 들어있는 게 신기할 지경. 가스버너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오늘은 뭐라도 먹어야 하는데.

“여기 전기 언제부터 끊겼어?”
“잘 모르겠는데……. 안 쓴지는 한 일주일 정도 되었나.”

지금 날씨에 일주일이면 솔직히 자신 없다. 아침저녁으로는 추워도 아직 낮은 좀 덥다. 상했을지도 몰라. 국물까지 한 번에 포장된 해동 라면은 포기. 대신 컵라면 포장지를 뜯었다.

“그거 먹을 거야?”
“너는 안 먹어?”
“하하, 다이어트하려고 했는데.”

정도 이상으로 엉뚱한 소리를 하는 녀석에게는 오히려 딴지도 걸고 싶지 않다. 시노노메는 집주인의 역할놀이에 적당히 어울려주기로 했다.

“난 밥 굶고는 못 살아서. 이미 뜯은 건 내가 먹어도 되지?”
“빨리도 물어본다.”
“배가 너무 고파서. 오늘 이게 첫 끼거든.”

첫 끼라는 말은 진짜였다.
집주인은 팔짱을 풀고 킥킥 웃었다.

“도둑질 하기는 글렀네, 너. 주인한테 허락받고 훔치는 도둑이 어디 있어?”
“원래 도둑 체질 아니야. 이것도 다 먹고 살려고 하는 거고.”

그러자 집주인은 이번에 더 크게 웃었다. 으하하학, 하고. 그건 푸하하, 나 킥킥, 같은 것보다 훨씬 더 듣기 좋았다.

“그럼 나도 하나 해 줘.”

가스버너는 없지만……. 뭐, 너라면 어떻게든 식용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 낼 것 같거든.

그건 오늘의 무전 숙박에 대한 허락처럼 들렸다.

시노노메는 용기 속 라면 사리를 몇 조각으로 으깼다. 표시선보다 조금 낮게 생수를 붓고 수프를 물에 잘 개었다. 벌건 라면 국물 위로 녹지도 않은 덩어리들이 둥둥 떠 있다.

“이대로 먹는다고?”
“어차피 배에 들어가면 다 똑같아.”

집주인은 혀를 차면서도 시노노메가 내민 컵라면을 얌전히 받아 들었다.

“태어나서 이런 라면은 처음 먹어봐.”
“나도 이런 상황 아니었으면 이딴 거 안 먹었어.”
“이딴 거라고까지는 안 했어?”
“그래. 그럼, 입 닫고 밥이나 먹어.”

집주인은 또 킥킥대면서 면 덩어리를 입에 집어넣었다. 입을 오물거리면 과자 씹듯이 빠사삭 소리가 났다.

“그동안은 뭐 먹고 살았는데?”
“말했잖아. 다이어트 중이었다고.”

신경 끄라는 말이다.

“아아, 맞다. 그랬었지.”

당연하지만 이쪽도 딱히 신경이 쓰여서 물어 본 건 아니다.

라면을 다 먹을 때쯤 되니 집 안이 완전히 캄캄해졌다. 시노노메는 온 집안의 커튼을 끝까지 내리고 창밖을 몇 번이나 확인한 뒤에야 손전등을 꺼냈다. 그마저도 조그만 담요로 감싸놓았다.

“이럴 거면 손전등은 왜 쓰는 건데?”
“행동 강령 안 들었어?”

정말 안 들었을 것 같아서, 집주인이 대답하기 전에 설명을 덧붙였다.

“쟤네 야행성이잖아. 태양광은 못 보는 주제에 반짝거리는 건 환장하고 달려든다고.”

쟤네들, 이라고 하면서 턱끝으로 창밖을 가리킨다. 그러면 집주인은 알아들었다는 듯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제아무리 생존 감각이 없어도 ‘쟤네들’이 뭔지는 알고 있는 눈치다. 상식은 없지만 최소한의 인정머리는 있기 때문에, 집주인은 ‘쟤네들’이 바깥에 득시글거리는 걸 알아서 시노노메를 내쫓지는 않았다.

‘쟤네들’이라는 말을 들은 집주인은 아까보다 좀 더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너 쟤네들 본 적 있어?”
“있지. 여기 오는 길에도 한 놈 조지고 왔는데.”
“일 대일로 붙으면 할 만 해?”
“딱히.”

집주인의 시선이 골프채로 간다. 그걸 쓰면 ‘쟤네들’을 잡을 수 있느냐는 물음 같았다.

“이건 호신용.”
“성능 좋아?”

시노노메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직 안 부러진 거 보면 괜찮은 것 같아.”
“헤에, 재미있겠네.”

뭐가 재미있겠다는 건지 전혀 납득가지 않지만. 시노노메는 일일이 따지고 싶지 않았다. 일단 너무 피곤했고, 이 수상쩍기 그지없는 집주인에게 쓸데없이 더 캐물어서 역풍을 맞더라도 지금 상황에서 맞는 건 곤란하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고운 법이다.

물론 난 죽어서 귀신이 되는 건 절대 사양이지만.

기왕이면 이 집에서 누릴 수 있는 건 최대한 누리고 난 다음에 척지고 싶단 말이지.

일단 무단 침입자를 내쫓지 않고 라면을 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아까 보니까 욕조에 물도 받아놓았던데, 여차하면 욕실까지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설령 집주인이 진짜 사이코패스라서 뒤통수 친 다음 날 살해할 계획으로 이런 호의를 베푸는 거라면. 그럴 거면 그 전에 여기서 세수도 하고 밥도 더 먹고 통조림이라도 하나 더 챙기고 나서 싸우는 게 낫지 않은가. 뭐 그런 생각이었다.

“그런데 우리 빈집, 아니 주인 있는 집 털이 청년은 이름이 뭐야?”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시노노메는 골프채를 고쳐 잡았다. 아직은 손에 땀이 나지 않는다. 승산 있을지도.

……아키토.”
“아아, 좋아. 그럼……, 아키토 군.”

캄캄한 사위. 노란 손전등의 영역 안. 무기질적이고 인공적인 감미를 물씬 풍기는 탁한 홍채가 붉게 번뜩인다.
시노노메는 마른침을 삼켰다.

“처음에 우리 집 들어올 때 문 제대로 잠갔어? 문고리 따고 들어왔잖아. 창문은 열심히 확인하던데 현관은 그냥 지나치길래. 하하.”

……아뿔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