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손에 미지근한 물을 담아 얼굴을 씻고 수건으로 적당히 닦아낸다. 부드러운 면도 크림을 충분히 두껍게 바르고 습관처럼 거울을 본다. 흉터를 제외하면 제법 깔끔한 인상의 남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다. 스티븐은 그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눈을 내리깐다. 세면대를 잡고 상체를 받치는 두 팔이 보인다. 뭐라도 받쳐줄 것이 없으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이 위태로워 보이는 팔이.
스티븐이 퇴원한 후 전과 같은 일상이 이어졌다. 그가 사무실에서 기절한 사건은 금방 잊혔으며, 일에 몰두하지 않는 시간 내내 스티븐의 머릿속에 재생되는 예언의 영상은 아무도 모른다.
세상에는 미래의 일을 알게 되는 ‘예언자의 체질’이 있다. 스티븐의 가문, 스타페이즈 가에서 몇 세대에 걸쳐 한 번씩 예언자의 체질을 가진 사람이 나오곤 했다. 오래 전 에스메랄다식 혈동도의 창시자, 즉 이 가문의 시조는 대붕락을 예언했다고 한다. 대붕락처럼 세계의 균형에 큰 영향을 미치는 재난에 대한 예언은 송곳니 사냥꾼이 보유한 문헌에 수도 없이 많았다. 그 해의 그 계절, 심지어 월과 일까지 정확하게 맞춘 예언까지도 있었다. 시조의 예언은 논문의 참고 문헌 중 하나 정도로 취급되었다. 날짜와 시간까지 맞춘 불가사의한 예언에 비하면 해까지만 맞춘 예언은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만 그마저도 보통 매스컴에서 떠받드는 예언가 대부분보다 정확도가 뛰어났기에 가문에서는 이 일을 두고 공식적으로 체질이 인정된 사례로 여기고 있었다.
다만 예언가의 체질을 타고난 선조는 모두 여자였다. 여성의 예리한 직감과 유전적으로 영기에 예민한 성질을 한계까지 갈고닦은 끝에 무언가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과학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기 때문에 가문에서는 에스메랄다의 신비로 여기는 체질이며, 대외적으로는 비밀에 부치고 있었다.
면도 크림이 점차 수분을 잃고 말라가는 것을 느끼며 생각한다. 만약 연구가 진행되었다면 큰일이다. 분명 본가에서 사람이 와서 그를 관찰하려고 했을 테니 말이다.
어째서인지 남자인 스티븐이 예언자의 체질을 발현한 모양이었다.
과로한 탓에 헛것을 보거나 한 모양이라고 둘러대며 쓰러질 당시의 일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척 했다. 비밀을 늘리고 싶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심지어 그의 수족으로 일하는 사설부대조차 이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예언의 내용을 누군가 알게 할 수는 없었다. 그것은 반은 라이브라에, 반은 스티븐의 사생활에 걸친 일이며, 미래는 바꿀 수 없기에.
미래는 정말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바꾸려고 최선을 다해도 결코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본가의 서고 구석에 예언자였던 선조의 일기가 보관되어 있는데, 말년 즈음에 헛도는 페달임을 알면서도 밟을 수밖에 없는 심정이라고 토로한 기록이 있었다.
그 말대로다. 스티븐은 세면대 왼쪽 면도기함에 담긴 두 개의 면도기를 보며 생각했다.
하나를 꺼내면 하나가 남는다. 쓴 흔적이 많이 남은 면도기는 어떻게 봐도 여분이 아니다.
비틀거리듯 한 발 물러서자 시야가 넓어진다. 세면대 반대편에는 두 개의 양치용 컵이 볼을 맞대고 있다. 더 위에는 두 개의 칫솔이 벽에 나란히 누워 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린다. 조명이 제대로 비치지 않는 배수구에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걸려 있다. 애써 거울을 본다. 눈을 마주치는 대신 머리카락을 관찰한다. 조금 젖어도 곱슬곱슬한 검은 머리다. 다시 배수구를 본다.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간다.
배수구에는 곧게 뻗은 은색 머리카락이 걸려 있다.
모든 것이 여기에 없는 한 사람의 존재를 주장하고 있었다.
이 공간은 언제부턴가 스티븐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면도날이 턱과 각도가 맞지 않아 상처를 남기지만, 스티븐은 면도날을 계속 민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혹은 그보다 더한 고통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무감하게.
예언자는 미래를 볼 때 코마에 가까운 착란에 빠지며 미래의 한 장면과 그 장면이 불러올 감정을 고스란히 느낀다고 한다. 그는 몸이 오그라드는 두려움을 느꼈다. 심장이 저며지는 슬픔을 느꼈다.
그런 감정을 느끼게 만드는 아주 큰 변화가 가까운 미래에 찾아온다. 반드시.
창백한 팔이 누구의 것인지 모른다. 다만 두 팔이 안은 사람이 누군지는 확실히 안다. 쓰러진 채 움직이지 않는 그 사람은 바로 재프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재프 렌프로였다.
재프 렌프로는 라이브라의 우수한 전투원인 동시에 스티븐의 집을 에워싼 보안 시스템을 정식으로 해제할 권한이 있는 유일한 외부인이었다. 그는 자주 스티븐의 집에서 밤을 보냈으며 두 사람은 그만큼 몸을 섞었다. 그건 대가가 따르는 계약 따위가 아니라 서로의 눈 깊은 곳에 도사린 잔잔한 불꽃이 서로의 것을 만나 타오르며 하나로 뒤섞이는 것이었다. 입을 맞추고, 서로의 몸을 만지고, 하나가 되어 경계를 잊어버리는 황홀한 체험은, 제법 자주 있는 일이었다.
침실에 딸린 화장실에 사적인 물건을 둘 만큼.
그렇다 해도 두 사람은 정식으로 사귀는 것이 아니다. 이름 붙지 않은 감정의 열기는 언외의 몸짓으로만 서로에게 전달된다. 이대로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떠나보낼 수 있도록.
면도 크림을 씻어내려 틀어둔 물이 찰랑찰랑 차오른다. 물을 끄자 잠시 일렁이다 잔잔해진 수면 위로 창백한 팔에 안겨 움직이지 않는 남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수건으로 물기를 걷어낸 마른 턱을 습관적으로 문지른다. 그새 아물어 상처를 딱딱하게 덮은 죽은 피가 만져진다.
분명, 죽는 거겠지.
갑자기 턱을 문지르는 손이 떨려온다.
죽는다고?
조절되지 않은 힘에 딱지가 뜯겨나가고, 새 피가 손끝에 묻어난다.
누가?
머리가 핑 돌고,
재프가?
스티븐의 두 팔은 다시 세면대 양쪽을 붙잡고 있다.
스티븐은 그가 지나친 숱한 죽음을 떠올렸다. 어떻게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죽음의 무게를 떠올렸다. 그 무게가 재프를 짓누르는 것을 상상했다.
돌연 호흡이 불안정해지더니 토기가 확 치밀어 올랐다. 내장이 역류하는 것처럼 격렬하게 기침하고 구역질했다. 몸을 뒤흔드는 기침이 멎었을 때 스티븐은 실망했다. 차라리 시원하게 뱉어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세면대는 희고 깨끗했다.
뒤에서 쿵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타페이즈 씨! 괜찮습니까?
정신을 차리고 사레가 들렸을 뿐이야, 괜찮아, 곧 나가지……. 그렇게 대답하던 스티븐은 문득, 아직도 재프가 그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