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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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다마슈/ 여명

구다는 나오지 않는 2부 이후 시점의 마슈 이야기


아주 가끔, 그런 날이 있습니다. 분명 매일 같이 보는 하늘인데, 오늘따라 유난히 푸르게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눈물이 날 것 같은 그런 날입니다. 하지만 울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서 눈물을 흘리면 제 안의 무언가를 배신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눈을 질끈 감기도 하고 억지로 웃기도 하면서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넘겨버렸습니다. 그래도 마음속에 풀리지 않는 응어리가 남은 느낌은 사라지지 않아서, 저는 이 기분이 대체 무엇일지 고민하는 것을 멈출 수 없었습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데자뷔일까.”
“그런 생각도 해봤지만, 저는 다른 분들 같은 감성을 지니지 못해서 그런지 책을 읽어봐도 그게 어떤 느낌인지 실감이 잘 안 와요.”
“너무 성실한 것도 탈이야, 마슈. 꼭 남과 같은 감성을 지닐 필요는 없으니까. 네가 느낀 감정은 너만 표현해 낼 수 있는 거야. 하지만 그렇지. 마음속 응어리라면 나도 있을지도 몰라.”
“오필리아 씨 같은 분도 그런 감정을 느끼시나요?”
“나를 뭐로 보는 거람. 나도 평범한 사람인걸. 가끔은 슬퍼하기도 하고, 마슈가 말한 것 같은 응어리를 느낄 때도 있어.”
“응어리라면 역시 저번에 키르슈타리아 씨에게 거절당했을 때인가요?”
“아! 이런 데서 이름을 그렇게!”

시계탑 빌리지의 한 구석, 학생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만들어진 야외의 어느 벤치. 지나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오필리아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오필리아를 놀란 듯이 보고 가는 사람만 있을 뿐, 둘의 대화를 들은 사람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오필리아는 다시 앉을 수 있었다.

“그, 그 왜, 그 사람은 능력이 좋으니까, 방학에도 바쁠 테고, 인기도 많으니까
“하지만 제안을 들었을 때 정말 기뻐 보이셨어요. 가능하면 꼭 참여하고 싶다고 하셨고요. 어쩌면 나중에 몰래 찾아오실지도 몰라요.”
“마슈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고문서 해독 같은 거, 굳이 남이랑 같이 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건데, 역시 너무 어린애 같은 짓을 했다는 생각만 들어.”
“그래도 저는 부러워요. 소중한 것을 위해 용기를 낸다는 건 저에겐 상상도 못 할 일이어서 저도 언젠가 운명의 상대라는 걸 만날 수 있을까요.”

첫눈에 반한다든가, 시대를 초월한 사랑이라든가 하는 건 마슈에게 소설 속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감정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슴 설레는 이야기를 읽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고, 언젠가 자신에게도 그런 미래가 찾아오는 것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지는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다. 떠올리지도 못하는 일을 꿈에서 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마슈는 오필리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웠다. 내심 동경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만큼은 자신도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빛나는 미래가 조금은 가깝게 느껴졌다.

“그런데 말이야, 실은 내가 말한 응어리는 조금 다른 거야.”
“네?”
“막상 말하려 하니 나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은 모르겠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불꽃 같은 거야. 아주 추운 겨울날 희미하게 피어난 불꽃 같은 것이 자꾸 어딘가를 맴돌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그러게. 나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데자뷔하고는 뭔가 다른 느낌이구나.”

그 말을 끝으로 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언제부터 있었던 건지 알 수 없는 마음속 그늘. 그 안에 숨어있을 것이 틀림없는 무언가를 그들은 알아낼 방도가 없었다. 탐구심이 많은 마슈에게 이는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답을 구할 수 없는 문제를 끊임없이 반복하는 것은 추리 소설을 좋아하는 그녀에게 있어 그야말로 지옥과 다를 바 없었다. 처음부터 범인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던 사건 현장에 홀로 남겨진 것이다.

“그럼,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때?”
“아! 페페 씨?”

발걸음 소리를 내지 않고도 다가올 수 있는 기묘한 능력을 갖춘 그들의 친구는 어느새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듣기로는 지구상에 가보지 않은 나라는 없다고 한다. 세계지도의 빈칸 채우기가 끝나면 다음은 우주에라도 진출할지 모른다.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현실로 만드는 게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마슈에게 새로운 출발을 권유하고 있었다.

“마슈, 아직 이 나라를 나가 본 적 없지? 가끔은 새로운 시야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인생의 큰 교훈이 되거든.”
“잠깐만, 페페. 아무리 성인이 됐다고 해도 아직 마슈는 몸이 약한데 그렇게 무작정 나갔다간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해요.”
“마슈?!”
“역시 그렇지~”

마슈 본인도 놀랄 정도로 단호하게 튀어나온 각오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니무스피어 가문을 뒤집어 놓게 했다. 여행을 떠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아니무스피어의 젊은 당주는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자신의 핏줄이 남긴, 자신의 평생에 걸쳐 속죄해야 할 것으로 여겼던 어린 동생은 어느덧 어엿한 한 명의 인간으로 자라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녀는 마슈가 홀로 떠나는 것을 순순히 허락할 수 있었다. 자랑스러운 동생의 새로운 출발을 응원해 줄 수 있었다.

인간 한 명이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이 필요한지,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하며 마슈는 처음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역시 결심하길 잘했다. 마슈는 그렇게 생각했다. 고작 이 짧은 기간에만 해도 마슈는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면 평생 알지 못했을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짧은 시간이라고 해도 가족 같은 사람들과 헤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 얼마나 쓸쓸한 일인지, 그럼에도 자신의 여행을 축복해 주는 사람들이 이리도 많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이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일이었다.

난생처음 만든 여권을 손에 쥐고 여행을 출발하는 날 아침, 마중을 나서겠다는 언니를 애써 말리고 마슈는 홀로 공항에 도착했다. 출국 수속도, 입국 수속도, 완벽히 공부했습니다! 마슈 키리에라이트, 다녀오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것까지는 좋았지만, 뭔가 붕 뜬 것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마슈에게 있어서 처음 보는 사람으로 가득한 혼잡한 공항은 마음이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 공간이었다. 빠듯한 시간에 쫓기며 급하게 지나치는 사람들 틈에서 겨우 정신을 부여잡던 마슈의 손에서 잠시 힘이 풀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과 부딪히며 바닥에 떨어뜨린 여권을 멍하게 바라만 보다가, 마슈는 뒤늦게 여권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자신보다 먼저 여권을 주워 들어 내미는 손을 마주했다.

“일본.”

여권을 받으며 감사의 인사를 할 틈도 없이, 마슈의 머리 위로 그런 말이 떨어졌다.

“일본으로 가라. 동아시아에 있는 나라야. 경유지를 한 번 거쳐서 가는 걸 추천한다. 여행을 출발하는 장소로는 도쿄역이 좋을 거야.”

경직된 말투에 무거운 목소리였지만, 마슈에게는 어째선지 그 말이 따뜻하게 들려서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려고 했다. 그러나 올려다보았을 때 그 사람은 이미 멀어져 가고 있어서, 마슈가 볼 수 있었던 건 짙은 금발을 가진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

저 사람은 나를 아는 걸까.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사람일까. 시계탑에서 인맥이 넓은 편은 아니지만, 어쩌면 같은 강의를 들었던 걸지도 모른다. 상대는 나를 기억해 주는데 나는 알지 못한다는 건 죄송한 일이다. 그러고 보면, 감사하다는 인사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마슈가 뒤늦게 따라가 보려 했지만, 남자는 이미 사람들 틈에 섞여 사라진 뒤였다. 이제는 정말로 얼마 남지 않은 이륙 시간 때문에 아쉬움을 뒤로 하고 마슈는 출국장을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 마슈가 원래 목표로 했던 남극과는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다.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다. 어떤 곳인지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벚꽃이 가득 핀 잔디밭에서 피크닉을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지는 않았다. 일본. 일본.

마슈는 한 번 정해둔 계획을 갑자기 바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계획을 짜내려 가는 과정도 좋아하며, 그 계획을 실천해 가는 과정도 좋아한다. 하지만,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생각으로 시작된 여행이다. 가끔은 예정에 없던 돌발행동을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덧 비행기는 안정 궤도에 접어들어 아래에는 새하얗게 펼쳐진 구름이 보인다. 지식으로만 접하던 성층권이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구름 너머로는 새벽을 맞이하며 희미하게 떠오르는 여명이 보인다. 하얀 구름 위에 비치는 햇빛이 마치 앞으로의 미래처럼 느껴진다. 새하얀 백지에는 무엇이든 그려나갈 수 있다. 이 앞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누구를 만나서 무슨 일을 하게 될까. 내 운명을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마슈는 따뜻한 꿈속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