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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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슈릴리/ 저항하는 인간

2부 종장 진입 전 칼데아의 릴리스 이야기


단순한 과로라고 한다. 아니, 웃기고 있네. 그냥 과로면 과로지, 단순한 건 뭐람. 그럼 뭐 복잡한 과로라도 있나? 이미 쓰러지고 난 후에 과로였다는 말을 해봤자 늦는 건데. 그런 건 애초에 관리를 잘해야 하는 거 아냐? 그런 말을 하다가 지나가던 너스에게 조금 혼이 났지만, 여전히 내가 틀린 말을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쓰러진 사람이 누구냐면, 그 녀석이었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워서 가증스럽고 불쾌하기 짝이 없는 우리의 후배 키리에라이트.

정의의 집단이라고 하는 칼데아의 여러분께서는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바쁘시다는 모양이다. 누구 하나 여유 부리는 사람이 없다. 어슬렁거리며 식당을 찾으면 비상식량 준비에 바쁜 주방 담당들, 복도를 거닐면 마주치는 자원 관리 담당들. 관제실은 가봤자 재밌는 얘기라고는 하나 없으니 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가끔은 나에게도 힘을 빌려달라며 찾아오지만 그다지 내키지는 않는다. 원래 이럴 때일수록 느긋해져야 하는 건데 말이야. 그래도 귀여운 마스터가 나에게 부탁하는 모습을 보는 건 나름 기분 좋았으니까, 굳이 거절하지는 않았다.

그 얘기를 들은 건 임무에서 돌아온 직후였다. 평소 같으면 관제실에서 내비게이터를 맡고 있었을 모습이 보이지 않자, 이를 의아하게 여긴 마스터가 다 빈치에게 물어본 것이다. 은근슬쩍 넘기려고 했던 다 빈치는 “역시 못 숨기나~”라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기계장치처럼 살아온 주제에, 아플 줄도 아는구나.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곧바로 의무실을 향해 달려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샘이 나지 않았냐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근데 뭐, 그게 당연하니까. 나 같은 악마에게도 손을 내밀어주는 마스터가 소중한 후배를 못 본 척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렇게 생각해도 역시 기분이 좋지는 않으니까, 조금 골탕 먹이고 싶을 뿐이었다. 잠깐 놀려주고, 그러고 방으로 돌아가야지. 그 정도 마음으로 슬쩍 발길을 돌렸을 뿐이었다.

칼데아에 소환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해도 이런 재미없는 인테리어는 금방 익숙해질 수밖에 없다. 어딜 가나 비슷한 구조, 비슷한 풍경. 의무실도 이미 몇 번이나 가봤다. 나도 다치지 않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까, 그 작은 방을 보면서 특별한 감정을 느낄 일이라고는 있을 턱이 없었다. 매일 같이 반복되는 단조로운 일상에서 권태를 느끼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의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나는 더 이상 그 안에 발을 디딜 수 없었다.

온통 새하얀 방, 새하얀 이불과 새하얀 침대, 그리고, 그 위에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새하얀 여자아이.

보자마자 구역질이 났다. 나는 이 모습을 본 적 있다. 아주 오래전, 이곳에 소환되기 훨씬 전에 본 모습이다. 그건 지옥의 밑바닥에 두고 온 기억이다. 그 지옥에서 나의 마스터가 되어 준 남자를 통해서만 볼 수 있었던 환상이다. 그 기억에는 이미 아무 의미도 없다. 굳이 떠올려내고 싶지도 않다. 지금의 나에게 지옥이 있다면 그건 끓어오르는 불구덩이가 아니라 강박적일 정도로 깨끗하고 하얀 작은 방일 것이다. 이런 방에 한시라도 더 있을 수 없었다. 그래, 돌아가자. 나는 오늘 여기에 온 적도 없었던 거야. 나는 마스터랑 완벽하게 임무를 끝내고, 지루한 관제실을 지나서, 매일 같이 보는 내 방에 돌아간 거야. 그게 전부야. 그밖에 아무 일도 없었어. 그래.

……선배?”

……아, 최악이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저거 설마 나한테 하는 말인가? 정말로? 와 아무리 몸이 안 좋아도 그렇지, 그렇게 좋아한다는 선배도 못 알아봐? 정말 한심하네. 안 그래? 키리에라이트.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눈은 나를 향하고 있었지만, 나를 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새 다음 임무를 위해 떠나버린 누군가에게 닿아야 했을 시선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것을 보다가, 조금씩, 하지만 너무 가깝지는 않은 거리로 다가갔다.

“죄송해요. 나이팅게일 씨가 말씀하시기로는, 열이 조금 있다는 것 같아요. 저는 괜찮다고 말했는데, 다들 쉬는 편이 좋다고 하셔서.”

착한 척하는 거 그만둘래?

“마슈는 너무 성실해서 탈이라니까. 그러지 말고 오늘은 푹 쉬는 게 좋아.”

누군가의 탈을 쓰고, 누군가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한다.

“하지만, 모두 바쁘게 일하고 계시는데 저만

역겨워.

“이럴 때는 쉬는 게 돕는 거랍니다. 걱정 말고 오늘은 잠이나 잘 것.”
“감사해요, 선배. 빨리 복귀할 수 있도록 할게요. 제가 괜히 붙잡아 버렸네요. 저는 혼자서도 괜찮으니 어서 돌아가세요. 릴리스 씨랑 가셔야 하는 임무도 있으니까요. 너무 늦으면 화내실 거예요.”

네가 뭔데 나를 신경 쓰는 거야? 그런 임무 같은 거, 네가 퍼질러 누워 있는 동안 다 끝났다고. 아니면 뭐야. 내가 너를 싫어하니까, 마스터가 너만 챙기고 있으면 내가 마스터도 싫어할 거로 생각하는 거야? 웃기시네. 내가 너를 싫어하는 거랑 마스터를 좋아하는 건 별개의 문제야. 내가 싫은 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너 하나뿐일 거야.

……마슈는, 릴리스가 싫어?”
…….”

왜 대답을 안 하는 거야. 빨리 싫다고 해. 너는 나를 싫어하잖아. 네 선배 앞에서는 그런 말 못 하겠다는 거야? 내숭이라도 부리려고?

열에 달아올라 살짝 붉어진 얼굴에 박힌 맑은 두 눈이 아주 느리게 두 번 깜빡이더니 소리 없이 감겼다. 한동안 이어지는 침묵에 견디지 못하고 금방이라도 공격할 기세로 손을 들어 올리자 억지로 쥐어짜 낸 듯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역시 저는, 가능하면 아무도 미워하고 싶지 않아요.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 나름의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그걸 제가 마음대로 판단하는 건 좋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기분 나빠. 기분 나빠. 기분 나빠. 기분 나빠. 기분 나빠. 기분 나빠.

“하지만, 별다른 이유 없이 누군가를 꺼리는 것이 나쁜 건 아니라는 생각도 하고 말아요. 죄송해요. 이상하죠, 이런 건?”

아, 나는 역시 너를 용서할 수 없다.

딱히. 괜찮지 않아? 그 정도쯤은.”

투명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잠시 보이는가 싶더니, 금세 다시 사라진다. 살짝 떨리는 눈꺼풀 아래로는 희미하게 웃고 있는 입꼬리가 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 뒤로 목소리는 더 들려오지 않았다. 비겁한 자식. 혼자 잠들어버리면 다냐고. 아, 정말 마지막까지 최악이다. 역시 괜히 왔어. 키리에라이트가 웃고 있는 걸 봐 봤자 나만 기분 잡칠 뿐인데. 조금은 세게 바닥을 딛으며 뒤를 돌아 밖으로 걸어 나선다. 제법 큰 소리가 났지만 여전히 깰 생각은 없어 보인다. 아마 열이 완전히 내릴 때까지는 다시 눈을 뜨지 않을 것이다.

지금 나에게 남아있는 건 싫어한다는 감정뿐이다. 이유는 진작에 잊어버렸다. 인간의 감정이라는 게 뭔지도 모른 채 인간이 되어야 했던 어떤 여자애를 보며 내가 무슨 생각을 했든, 그건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일이다. 싫어해야 했던 원인도 이미 없어져 버린 지 오래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상관없다. 나에게 중요한 것은 증오심 그 자체니까.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게 태어난다? 바보 같은 소리다. 인간인 이상 누구에게나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고, 그 차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증명이다. 그건 나한테도, 그 녀석한테도 마찬가지인 거다. 나는 그 누구보다 너를 증오함으로써, 너는 나를 증오함으로써, 인간이라는 증명을 하는 거야.

일어나. 빨리 일어나라고. 일어나서 싸워. 인간으로 살고 싶으면, 팔다리가 뭉개져서 다시 일어날 수 없게 되어도, 추하게 기어가면서라도 싸우라고. 울고 웃고 화내고 소리 지르면서 싸우는 거, 그게 인간이니까. 나를 이기고 싶으면 네가 인간이라는 걸 증명해. 그럼 나도, 얼마든지 너한테 져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