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0일 오락관에 나온 페이트 그랜드 오더 데이비트 젬 보이드x테스카틀리포카 개인지를 웹공개합니다. LB7 이후의 가까운 미래에 데이비트가 믹틀람파를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이하의 사항에 대한 개인적인 설정이 다량 포함되어 있습니다.
- 데이비트를 욕망이 강한 인격체라고 해석합니다.
- 데이비트와 테스카틀리포카 이외의 등장인물들의 인간관계
- 믹틀람파의 메커니즘, LB7 이후 믹틀란의 주민들 여럿이 믹틀람파에 당도했다는 설정
- 보다임이 다른 별의 신에게 자신의 동료들을 살려달라고 주문했고, 다른 별의 신이 그 요망에 응하기 위해 크립터들을 살릴 에너지를 얻기 위해 제5마법 靑을 사용했으며, 보다임은 가상세계에서 크립터들과 함께 여행을 함으로서 제5마법의 연료로 사용할 현실 세계에서는 카운트되지 않는 시간을 벌었다는 독자적인 설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 데이비트와 테스카틀리포카 사이에 육체관계가 있었던 설정입니다. 자세한 묘사는 거의 생략되어 있습니다.
서적 버전과 편집 방식이 달라졌으므로 이해를 돕기 위한 텍스트가 조금 추가되었습니다.
서적판의 후기는 빠졌고, 웹공개판의 후기를 새로 썼습니다.
(믹틀람파의 기본지급품인 재생지로 된 스프링 노트. 12천상은 근본적으로 개념적인 공간이므로 딱히 재생재료를 사용할 필요는 없다. 신이 자신의 낙원의 향유자들에게 익숙한 구성을 요구했기에 그것이 선택되었을 뿐이다)
(펜으로 쓴 글을 여러 번 지우고 다시 쓴 흔적이 있다. 몇 번 찢어낸 흔적도 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변명 같은 말이지만, 사실 잘못을 저지른 뒤 변명하는 글을 써본 적이 거의 없다.
이 사실을 근거로 들어 나는 실수를 거의 저지르지 않는 우수한 존재라 주장할 생각은 없다. 아마도 저것은 소속 인원들을 수없이 많은 미지의 위험 앞에 예사일처럼 떠밀고, 살아서 돌아오면 좋고 목숨을 잃었다고 하면 잠시 묵념을 한 뒤 간혹 유가족에게 보상금을 주거나 뒤를 봐 주는 식으로 해결하는 게 당연한 분위기였던 내 최초의 직장 탓일 것이다. 그곳에서 발을 빼고 옮겨간 직장 또한 기본적으로 하라는 일만 수행하면 마음대로 하라고 방임하는 분위기였으므로, 나는 지금도 변명하는 글을 어떤 식으로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고민에 빠져 있다. 유감스러운 일이야.
근본을 따져 보면 변명이란 좋은 것이건 나쁜 것이건 큰 리스크를 받을 만한 일을 저지른 뒤 자신에게 오는 불이익을 최소화하려 하는 행동이다. 변명을 통해 지키려 하는 것은 재산이나 사회적 지위처럼 현실적인 것일 때도 있고 명예처럼 자기만족을 위한 것일 때도 있고, 그 이외의 무언가일 때도 있다. 내가 얻고자 하는 것은 분류하자면 맨 마지막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딱히 사과하는 글이 될 필요는 없겠지.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밝히면 그만이다.
그러니 결론부터 말해두겠다. 나는 이 글을 끝낸 뒤 너의 낙원에서 나갈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네 역량이나 관리방식에 미비한 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이 글을 읽는 동안 그 점을 잊지 말아 주길 바란다.
또다시 변명 같은 이야기지만, 나는 상당히 오랫동안 내가 욕망이 약한 존재라고 믿어왔다. 그것은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데 기여한 셈 일족의 후손 되는 이들의 경향성 탓이기도 하고 나의 출신 탓이기도 하다.
13년 전, 나를 구성하는 리소스와 데이터만을 남기고 지구상에서 사라진 지구인 소년의 경향성을 지니고 깨어난 나는 자신을 지구에서 태어났고 지구에서 살기로 마음먹은 생명체로 자신을 정의했다. 그와 동시에 나는 우주인류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구인 소년의 후속존재이지만, 그래도 나의 근본은 140억 광년 밖에서 지구에 파견되어 온 지구라는 행성을 포함하는 은하 한켠의 관측을 담당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140억 광년 바깥의 존재들의 의지로 지구에 발생한 관측 담당이다. 지구에서 발생하기 전의 기억은 없다. 합리적인 판단이다. 지구 밖의 생명체의 가치관과 경향성을 가지고 있으면 지구의 생태를 내부인의 시점에서 관측할 수 없게 되니까. 아무튼, 그들은 발생 뒤 무엇을 할 것인가로 헤매던 내게 관측 이외에 무엇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자연스레 내게 경향성과 외견을 물려준 지구인 소년의 가치관 쪽으로 기울어진 채 성장하게 되었다.
소년의 아버지는 어머니 없이 커야 할 아들을 가능한 한 좋은 아이로 키우고 싶어 했고, 아들에게 동경할 만하고 멋진 사람으로 비춰지고 싶기도 했을 것이다. 인간이 선행을 하는 것은 벌레가 광원에 다가가는 것처럼 당연한 세상의 이치라는 표현은 조금 시니컬하지만 고작 열 살밖에 안 된 소년의 가슴에도 꽤 와닿는 데가 있었을 것이다. 그 아버지가 불어넣어 준 멋진 문장을 가슴에 품고 살던 소년은 내게 바통터치를 하고 사라져 버리고 말았지만.
‘좋은 일을 한다’ 는 개념적인 목적은 어린애가 생각하기에도 가슴을 벅차오르게 하는 데가 있었다. 그전까지 소년의 아버지가 일하던 직장의 방향성과도 시너지가 좋았다. 그러니까, 지나치게 규모가 크고 개념적인 목적이라서 우주인이면서 지구인인 내가 보람 있고 멋진 일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끔 해 주었다. 지구인류의 육체의 용량은 140억 광년 밖의 주민들에 비해 유약하고 미천해서 내가 내 기준으로 하루에 5분 분량의 기록밖에 남겨둘 수가 없었다는 것 또한 내가 이런저런 사소한 일에 지나치게 몰두할 겨를이 없게 만들었다. 좋은 집이나 음식도 물건도 취미도 인간관계도 연애도 전부 나름의 가치를 가진 것들이지만 그것들은 나의 목적 이상의 우선순위를 획득하지는 못했다. 이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쭉 잘 해왔다고 생각한다. 그건 너도 동의하겠지.
그러니까, 나는 오랫동안 내가 생각하기에 인생을 바칠 만한 커다란 욕망을 위해 일해 왔으므로 사소한 욕망에 애태울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내 욕망은 그다지 격렬하지도 강하지도 않다고 생각했다. 욕망은 시야와 지식의 크기에 비례해 그 몸을 불린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마리스빌리 아니무스피어는 시계탑의 로드치고 소탈한 느낌을 주는 기묘한 부류였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사적인 잡담을 하는 것 같았다. 지금 말하고 있는 화제는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고, 그 제안을 선뜻 받아들여도 나쁠 것 없는 여상한 이야기를 하는 듯한 묘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마리스빌리가 ‘인리보장기관 칼데아’ 의 출범을 위해 마술사회의 이런저런 인간들을 스카웃하는 것을 쭉 관찰했고 그 방향성에서 위기감을 느꼈다. 나의 첫 직장에서 자주 상대하던 것들과는 다른 방향의 위험이었다. 그는 현대 마술사회에서는 사실상 탁상공론밖에는 되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마술을 대물림하는 가문의 가주인 자신의 위치를 이용해 마술사회의 타산적인 인간들 사이에 숨어들었고, 끝이 없는 것 같은 금전으로 남들이 바라는 것을 주어서 자신이 바라는 것을 이끌어 내는 방식으로 일했다. 나는 빠르게 깨달았다. 그가 내가 무너뜨리기 벅찬 부류의 위협임을.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쓰러뜨릴 수 없다는 것을.
내게 전승과를 떠나겠다는 통보를 받은 로드 브리시잔은 난처한 듯 웃기만 했다. 사실 지금도 가끔 궁금하다. 그는 천체과의 로드의 위험성을 간파했을까. 그도 많이 늙었으니 알아채지 못했을까. 움직이려다 내가 먼저 움직였기 때문에 고맙게 생각했을까. 아니면, 이기적인 지구인 마술사로서 그의 목적이 이루어져도 나쁠 것 없으니 방치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을까. 너는 알겠나?
길게 할 필요 없는 이야기를 너무 길게 해 버렸다. 나는 그런 이유로 칼데아의 일원이 되었고 마리스빌리의 진짜 목적을 알았다. 나는 정말로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최소한의 희생으로 그것을 막으려 했지만 이 시도는 너도 알다시피 보기 좋게 실패했다. 내가 평생토록 겪어온 것 중에도 손에 꼽히는 완전하고 명백한 패배였다.
마리스빌리의 목적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상태였고, 그는 소중한 직원을 잃을 생각이 없었다. 나는 내가 한 일을 적극적으로 숨기지는 않았지만, 마리스빌리는 적극적으로 집무실에 이런저런 예장과 술식을 남겨두어 내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증거를 지워 없앴다. 덕분에 아버지의 자연스럽고 상냥한 외면으로 평생 주눅 든 채 살아온 마리스빌리의 딸은 그녀의 의사결정과 관계없이 모두에게 주목받는 위치로 올라가야 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유능했으므로, 겪지 않아도 되었을 불행을 겪으면서도 죽은 아버지의 그림자에게 인정받고 싶어 아버지가 남겨둔 일을 하나하나 해 나갔다. 가엾은 올가마리 아니무스피어.
A팀은 마술사회에서 출세할 수 없는 결격사유가 있는 자로만 이루어진, 얼핏 보이는 스펙은 대단해 보여도 실상은 남극대륙 구석의 물리우편이 2주에 한 번 꼴로 배달되는 촌구석에라도 와야 할 이유가 있는 아웃사이더들의 모임이었다. 마리스빌리는 넓은 마술세계에서 용케도 그런 인간 ─ 이 아닌 것이 몇 섞여 있지만 ─ 들을 잘 골라내어 남극대륙으로 이끌고 왔다. 감탄스러운 재주였다. 그가 A팀을 어떻게 소모하려 했는지 처음부터 알던 입장으로서는 저것을 좋게 생각해야 할지 나쁘게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고마운 마음이 더 크다. 그치들과 함께한 시간들은 나름대로 즐거웠다. 너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때울 때 화젯거리로 사용할 정도로.
가문에서 전승하는 마술이 낡아서 현대에는 쓸 데가 없어져서, 성정이 온화하고 심약해 마술사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괴로워서. 인간종이 아니라는 이유로 인간종에게 오래도록 배척받아서, 원치 않는 이름과 역할을 버리는 과정에서 가족을 죽여 없앤 일에 죄책감을 느껴서, 현대의 지구에서 이루기 어려운 꿈을 가지고 있어서, 반사회적인 경향성을 지닌 혼혈요정으로서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며 살다 보니 있을 곳이 없어져서, 수명이 한정된 디자인베이비로 태어나 데미 서번트 실험에 동원되었으나 실험이 실패해서 등의 이유로 마리스빌리의 쓰고 버리는 말이 되기 위해 모여든 다양하게 고독했던 마술사들은 위험한 팀 미션이나 비인도적인 실험이 벌어지는 칼데아에서도 비슷한 부류의 인간들과 함께 나름대로 재미나게 지냈다. 그래도 그 생활은 그들의 근본적인 고독을 해결해주지는 못했다. 나도 그랬으니까.
일본 모처에서 소실된 마법을 되찾기 위해 벌어진 다소 많은 인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최후의 발버둥Heaven's Feel에서, 영령이 갖는 역할은 싸움을 위한 무기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성배를 채워 기동시키는 동력원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틀만을 빌려다가 영령소환 시스템을 구축한 인리보장기관 칼데아에서는 딱히 성배를 채워 넣을 필요가 없었다. 칼데아에서 소환한 영령은 온전히 뛰어난 무기이자 자문 담당으로만 기능해도 되었다.
그러므로 자신들이 본격적으로 업무에 투입될 때 협력자로서 인리의 수호자인 영령을, 서번트를 소환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A팀의 일원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들떴다. 대체로 들뜰 만한 화제가 나와도 투덜거리며 발을 빼는 카독조차 자신은 어떤 클래스가 좋다며 말을 길게 쏟아냈다. 그 떠들썩한 자료실 안에서, 데미 서번트 실험의 실패작인 마슈 키리에라이트만은 묵묵하게 자기 할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마슈의 업무와 아무 관련도 없는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부러 마슈에게 일 이야기를 했고 그 사실을 기록에 남겨두었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사실 별 기대는 없었다. 내가 발생한 순간부터 쭉 이어져 온, 세상에 하나뿐인 개체로서 살아가는 삶을 고작해야 나와 잘 맞는 서번트를 불러내어 함께 부대끼는 경험 따위가 바꾸어 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 즈음의 내가 살아가는 방식을 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너를 제외한 남들이 믿어 줄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딱히 지구 자체를 위해 살지는 않았지만 지구를 나름대로 좋아했다. 별 시답잖은 것까지 다 관측할 수 있는 시야는 생애의 초창기에 훅 늘어난 시야와 정보량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던 내가 생활방식을 보통의 인간과 비슷한 방식으로 조정하는 데 꽤 큰 도움이 되었다. 가능하다면 나의 학습과 취미에 본의 아니게 협조하느라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한 시계탑의 거주자들, 칼데아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칼데아의 거주자들에게 심심한 사과를 보내고 싶다. 아직 네 단말이 노움 칼데아에서 일하고 있다면 전달해 줬으면 좋겠어.
인간 사회에서 약간 시야가 넓고 특수한 능력이 있어 역량이 뛰어난 마술사로 살며, 별 의미도 없지만 당사자들에게는 중요한 사회적 예절과 정치적 알력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사회적 수단을 동원한다. 신체의 구성요소가 조금 다르고 조금 위험한 일을 할 뿐, 보통의 지구인과 다를 바 없는 삶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24시간의 말엽에는 어쩔 수 없이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저들은 지금 우주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른다고.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위협을 홀로 알아채고 한밤중에 뛰쳐나갈 수 없다고. 그것을 알아채고 대응할 수 있는 것은 나뿐이라고.
나는 내가 선택한 존재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보통의 지구인이 아님에도 이렇게 살아가는 자신을 좋아했다. 지구인류이자 우주인류로서 선한 일과 악한 일을 자신의 가치관으로 판단하고 위협을 저지하고 틀어막는 삶을 사랑했다. 나의 의지로 지구에 하나뿐인 존재로 살아가는 삶을 선택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고작해야 소속감과 연대감을 손에 넣고 싶어 나의 지성과 이성이 빚어낸 숭고한 가치관을 버릴 수 없다. 이것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하지만.
가치는 남의 손에 있는 것이 내 손에 없다는 사실을 자각한 순간에 생겨나니까. 결핍을 깨닫고 탐욕을 학습하는 건 욕심을 가진 인격체의 근본이니까.
온전히 지구에 사는 지구인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어떤 영령을 부를까 가슴 설레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질투가 났기 때문에, 그즈음의 나는 비인도적인 실험의 결과로 불려온 마슈의 안에서 잠든 채 완전한 침묵을 고수하는 영령조차 조금 부럽다고 생각해 버렸던 거다.
나는 그때 명백하게 당황하고 있었다. 질서의 유지를, 선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수행하는 자아를 지닌 자연법칙 같은 존재라 생각했던 내게 남이 귀중한 것을 가지면 부러워하고 같은 것을 가지고 싶다고 원하게 되는 욕심이라는 기능이 남아 있었다니. 하지만 드물게 동료 모두가 들떠 하며 공통된 스몰토크 소재를 향유하며 즐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제대로 된 지구인류가 아니라서 너희들처럼 지구의 억지력의 수호자인 서번트를 소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그래서 이 대화는 나를 곤란하게 만든다고 밝힐 수는 없었다. 상식이 있으면 분위기를 맞춰 적당히 대답해야지.
그래서 당시의 나는, 내게도 질문을 할까 말까 고민하는 것 같은 카독을 흘깃 보고 기존의 나의 습성을 답습하는 답변을 적당히 둘러댔다. 매직미러 너머에서, 만능인Uòmo Universale을 포함한 스태프 여럿이 나와 동료들의 대화를 귀담아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버서커가 좋겠군. 살던 시대가 다른 영령과는 가치관 차이도 이런저런 의견 차이도 클 거고, 그러면 아무래도 소통이 번거로워지기 마련이야. 그렇다면 소통이 필요 없는 도구처럼 사용할 수 있는 클래스가 효율적일 테니까.’
그날 밤, 나는 이 대화를 그날 분량의 기록에 넣고야 말았다. 그건 곤란한 상황을 회피하기 위한 적당한 핑계이니 버리는 게 맞지 않느냐고 주장하는 자존심의 의견을 묵살하고.
레프 라이놀 플라우로스는 한 걸음 앞까지 다가온 위기를 회피하기 위해 칼데아에 근무하는 마술사가 낸 것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고 합리적인 수단을 동원했다. 가능하다면 칭찬해 주고 싶군. 이 나도 육체를 재생하고 접촉해 온 상대와 교섭하는 데 꽤 시간이 걸렸으니까.
폭파 사고에서 살아남은 칼데아의 생존자들과 졸지에 인류 최후의 마스터가 되어버린 48번째 마스터 후보는 그로부터 일 년 정도의 그들 기준의 관측시간 동안 지구를 구하려 필사적이었다고 한다. 지구와 A팀의 일원들의 시간은 인간의 이치人理가 불타는 그 순간에 멈춘 상태였지만, 유감스럽게도 내 표준시는 지구의 것이 아니라 우주의 것이었으므로 코핀 안에서 본의 아니게 주어진 안식 비슷한 것을 만끽할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보다임이 자신의 동료들을 구하고자 푸른색 마법Five Timeless Words의 연료가 될 시간을 벌고자 그 누구도 모르는 장소에서 모험을 다섯 번이 넘게 반복하는 동안, 나는 홀로 자기 분량의 모험을 끝낸 뒤 불확정 원리로 밀봉된 코핀 안에서 시간을 때워야만 했다. 140억 광년 안쪽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무엇이라도 보고 들을 수 있는 나다. 그런 내가 훔쳐볼 것이 없어 무료해지는 경험은 오랜만이었다. 넘치는 개념의 시간 속에서 나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사고를 반복했다. 온갖 가능성을 고찰하기도 했고 앞으로 벌어질 전투를 시뮬레이션하기도 했다. 이미 벌어진 일을 다시 생각하기도 했다.
가능성 세계의 모험길에서, 나는 끝끝내 서번트를 소환하지 못했다. 나는 그래도 괜찮았다. 인리소각은 그 뒤에 올 것이 문제일 뿐 서번트 없이도 홀로 처리할 만한 과업이었다. 나는 그만큼 힘 있는, 시야가 좁고 허약한 지구인류를 대신해 우주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싸울 수 있는 존재니까. 내가 인류로 카운트되지 않아 서번트를 부를 수 없는 것은 게임으로 치면 밸런스 조정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나처럼은 할 수 없겠지. 필시 칼데아의 생존자들은 A팀의 구성원들이 겪을 것이라고 상정한 수치 이상으로 고생하고 있을 것이다. 서번트가 있어도 힘든 여행을 하고 있겠지. 나는 그들이 가련하여 응원했다. 그러면서도 쭉 어떤 싸움을 시뮬레이션하는 데 집중했다.
인리소각이 저지되고 A팀이 보다임의 분투로 부활하고 그와 동시에 마리스빌리 아니무스피어의 야망도 부활한다면, 그때까지 살아남았다면 역전의 마스터가 되어 있을 48번째 마스터는 어떤 서번트를 데리고 있을지. 그 마스터와 서번트와 싸울 때 어떤 방책을 택해야 하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자신의 치졸함에 넌더리가 난다는 점을 제외하면, 생전의 나의 삶에서 제일 평온한 시기였다.
A팀의 일원들이 향할 파견지역을 정할 때 보다임은 자연스레 내게 중남미로 향할 권리를 양도했다. 보다임은 천성적으로 솔직했으나 지나치게 뛰어난 역량과 타인이 가진 어둠을 짐작하지 못하는 선량함 탓에 남에게 오해받고 불신당하기 쉬운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보다임은 그에게 사업을 의뢰한 클라이언트에게도 불신당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보다임에게 감사인사를 하지 않았다. 눈짓을 한 번 했을 뿐이다. 그는 내 행동양식을 해독하는 데 성공한 몇 안 되는 마술사였다. 그러니 그는 내 속내를 알아챘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지구에서 살아왔고 제대로 교육받은 마술사라면 중남미에 공상수가 꽂혀있다는 사실을 들은 순간부터 다른 별의 신이 ORT를 원한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겠지. 코핀 안에서 했던 수많은 추측들 중 하나가 정말 다행히도 맞아들어갔기 때문에 안도한 기색을 숨기느라 고생했었다.
이문대 믹틀란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만큼 인상적인 공간이었다. 다른 별의 신이 공상수를 꽂아둘 장소를 고를 때 그곳으로 향할 자가 누구인지 미래시로 훔쳐본 것 같다는 의심이 들 만큼이나.
공룡인류Dinos는 호기심이 많고 지혜로우며 온순하지만 나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강함을 겸비한, 전 우주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완성도가 높은 지성체였다. 선량하고 상냥하며 뭔가를 차별하지 않았지만 차갑고 이성적이었다. 전투에 특화되지 않은 서번트라면 압도해낼 만한 강함을 가졌으나 궁극적으로는 서로 상처입히지 않는 것이 사회 전체에 훨씬 효율적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비폭력을 추구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살아남고자 하는 의지가 옅었다. 순리를 거스르지 않았고 멸망이 찾아온다면 받아들일 뿐이라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자신들의 세계는 곧 멸망한다고, 그러니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면 당신도 이곳을 빠르게 떠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솔직하게 고백할 정도였다.
내가 이 사실을 들었을 때 무엇을 느꼈을 것 같지? 연민? 안타까움? 둘 다 어느 정도는 느꼈다만 정답과는 거리가 멀다. 이 녀석들에게 내 사업의 내용을 말하고 협조를 구하기는 힘들겠다고, 그러니 다른 협력자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범인류사의 스포츠와 닮은꼴인 디노스의 제의의 규칙을 정리할 때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합리적이고 올바른 방향으로 행동할 때만 느낄 수 있는 평온을 느꼈지만, 디노스들이 내가 사용하는 음성언어를 흔쾌히 받아들여 주었기에 그들과 영어로 대화할 수 있게 되었고, 그들과 대화할 때는 내가 인간 사회에 숨어 살기 위해 익힌 어설픈 사회적 기술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고 나는 거기에 꽤 큰 위안을 받았지만, 그래도 이 선량하고 이지적인 생물들은 내가 하려는 일에 협력해주지는 않으리라. ORT를 깨워 그 힘으로 남극에 있는 극소 사이즈의 천체 하나를 파괴하기 위하여 본의 아니게 지구를 함께 파괴하는 일을 방해하지는 않겠지만, 거기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주지는 않으리라. 왜냐하면 나의 일을 돕거나 혹은 나와 맞서 싸울 의욕을 지닌 인류는 이미 옛날에 믹틀란에 한 번 발생해 번영하다가 ORT를 막은 뒤 멸망했고, 그 마지막 생존자는 살아 있는 유령이 되어 흑색선Yayauqui ─ 지금 생각해 보면 믹틀란의 마지막 ‘전사’ 였던 그가 네 식별명칭이 붙은 장소에 둥지를 튼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 같다 ─ 을 떠돌고 있었으니까.
믹틀란은 마야가 자기들 때문에 한 번 멸망할 뻔했던 지구의 생물종들을 마지막까지 책임지기 위해 만들어낸 바이오스피어였다. 정말로 본의 아니게 폭력이라는 요소를 완전히 끊어낸 결과 완성된 선량하며 차갑고 자기완결된 세계였다. 용각류를 닮은 아키타입은 그 이야기를 별 유감도 없다는 듯 잘도 늘어놓았다. 내 속내를 알아채고 그런 일을 정말로 꼭 해야겠느냐며 투덜댔지만 그로 인해 초래될 자신의 죽음에는 아무 유감이 없는 태도로.
싸움이라는 요소가 필요해졌다. 그 세계에서 배제된 요소.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도 죽을 수도 없어 외로움에 허덕이는 옛 왕국의 마지막 생존자가 간혹 베풀고 가는 자연재해 같은 폭력이 아니라, 정말로 필사적인 상황에 처해 피로 피를 씻는 싸움을 벌여줄 존재들이.
전승과의 주적은 대체로 지구 밖에서 온 무언가였지만, 그런 것들과 싸우려면 먼저 지구에 속한 것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했다. 그래서 전승과에 갓 들어간 내가 마술기초 다음으로 배운 것은 각국의 신화체계였다. ORT가 잠들어 있다는 중남미 땅의 신화체계는 전승과에서 상당히 중요하게 다뤄졌다. 어린애들은 잔혹하고 멋진 것에 끌리기 마련이니 어린 날의 나는 네 땅에 전해지는 이야기를 흥미롭게 읽었고 기록에도 꽤 자세하게 넣어두었다. 척박하고 자연재해가 잦은 땅에 어울리는 선혈과 시신이 낭자하고 결말 부분이 유독 모호한 이야기. 세계는 멸망 정도로는 끝나지 않는다는 기묘한 믿음을 주는 이야기.
이문대 믹틀란에는 중남미 신화를 이루는 요소가 수효를 세기 어려울 만큼 많이, 짙게 반영되어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주 중요한 구성물이 하나 빠져 있었다. 세계의 멸망을 몇 번이나 초래한 자. 인간관계부터 전쟁까지 크고 작은 갈등을 몰고 다니는 트러블메이커. 사막에서 전래된 유일신 종교의 영향으로 만능이었으나 전능이라 불리게 되어버린 이가.
그때 나는 문득 이문대 믹틀란이 시한부가 되어버린 이유를 멋대로 짐작해 냈다. 제 1의 태양 없이 성립한 세계가 오래갈 리가 없지 않은가.
미안해. 분위기에 취해서 부끄러운 문장을 써 버렸다. 부탁이니 웃지 말아 주길 바란다.
눈치가 좋은 디노스라면 내게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챘겠지만 ─ 실제로 당시 치첸 이차에서 신관직을 맡고 있던 익룡 디노스는 나를 쭉 경계했다 ─ 디노스들은 내가 개인적인 흥미로 믹틀란 하부를 탐방하고자 한다고 밝히자 ‘명계행’을 하려는 거냐며 즐거운 듯 준비를 도와주었다. 하층에 다녀온 적이 있는 디노스들은 자기가 갔을 때는 이런 느낌이었다고 조언도 해 주었다. 그치들은 내가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선량했지만, 다행히도 내가 흑색선에 발을 디디자 바로 달려온 카마소츠가 나를 죽지는 않을 만큼 ─ 그는 살아 있는 인간형 지성체를 사무치게 그리워했다 ─ 두들겨 팼으므로, 믹틀란을 멸망으로 몰아넣으려는 이에게 베풀어져야 하는 폭력은 제대로 정산되었다. 실로 인류의 전사답고 영웅적인 행동이었다. 재생하느라 걷지도 못하는 내게 범인류사 이야기를 해달라고 할 때는 좀 화를 내고 싶었지만 말이야.
생각에 빠진 카마소츠가 자기 둥지로 돌아가고, 잠시 우주방사선이 멎었을 뿐인 믹틀란의 하층을 걷는 동안 수집한 정보를 정리했다. ORT는 죽지 않았고 활동을 정지했을 뿐이다. 믹틀란의 태양이 된 ORT의 심장은 ORT를 어느 정도 유도할 수 있다. 디노스는 대부분 마술회로를 갖추고 있고, 그들이 보유한 마력량은 나 따위와 비교도 되지 않는다. 칸 왕국은 카마소츠를 남기고 멸망했지만 긴 세월이 지나면서 믹틀란의 생물종은 자연스럽게 진화해 유인원을 다시금 발생시켰다. 그들은 일반적인 디노스와 무지성 디노스를 구분할 줄 알고 도구를 사용하며 단체생활을 한다. 정보를 검토하고 재조립해 계획의 얼개는 최하층의 유적을 향해 걷는 동안에 완성했다. 남은 것은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뿐이었다.
칸 왕국의 유적을 개인적인 흥미를 담아 꼼꼼하게 둘러보면서 영맥을 찾아다녔다. 소환진을 그리는 동안 나는 쭉 자신을 설득하고 있었다. 신대 특유의 농도 높은 마나. 치첸 이차를 어째서인지 알몸으로 날아다니는 마야의 인간형 단말의 이름은 ‘쿠쿨칸’. 이 정도 조건이라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고.
계획은 대강대강이었지만 깔끔했다. 혼자서도 할 수는 있다. NFF는 크립터를 꽤 좋은 고객으로 취급해주었고 나는 평생 서로 이해할 수 없고 말도 잘 안 통하는 인류와 소통해 왔으니까. 그렇지만, 이 세계의 형태에서는 뭔가의 필연성이 느껴졌다. 폭력을 거부하는 듯한 형태로 조성된 세계. 중남미 신화체계에서 제일 중요시되는 ‘어떤’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 그 사실을 알아채고 들떴다. 그러자 평생 긍지로 여겨온 합리적인 가치관이 속삭였다. 그것은 네가 상황을 지나치게 자기본위적으로 판단한 것이라고. 고작 그런 일에 향후 귀중하게 사용할 수 있는 마력자원을 소모할 것이냐고. 이 땅의 아키타입조차 네가 무슨 짓을 할지 간파했는데 땅의 발언권을 빌릴 수 있겠냐고. 자신이 원하는 서번트를 확실하게 소환하려고 성유물을 준비해도 다른 서번트가 튀어나와서 골치를 썩는다는데, 고작 그 따위 이유로 신화체계의 주신쯤 되는 존재를 불러낼 수 있겠냐고.
하지만 의사결정을 하는 순간의 인격체를 지배하는 것은 언제나 불합리한 선호와 호불호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합리성에게 일갈했다. 나도 서번트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데 지금 그딴 게 중요하냐고.
그러므로 나는 기분 좋게 굴복했다. 변명할 수 없을 만큼 불합리한 충동에. 남들이 가진 귀한 것을 나도 가지고 싶다는 어디에나 흔한 욕망에.
네가 내려온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자.
소환마술의 마력광이 꺼지고 눈이 마주쳤을 때는 암석 사이에 고인 샘Cenote의 밑바닥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빛이 비치면 흐릿한 동틀녘의 푸른 하늘 같았고, 보기에는 좋지만 보석마술의 촉매로 사용하기는 애매한 가능한 한 얇게 세공한 남옥藍玉같았다. 어느 수식어구가 적절한지 견주어볼 여유가 없음을 그 수식어구를 떠올렸을 때에야 깨달았다. 그 매직미러 너머를 들여다보는 듯 투명한 눈동자가 나를 포착했기 때문이다. 눈이 마주친 찰나에 깨우쳤다. 숨겨 봤자 헛일이다.
금발에 흰 피부지만 인종은 애매했다. 알고 있는 모든 인종의 특징을 검토해도 교차점이 없다. 복잡하게 섞인 메스티소일지도 모른다. 긴 머리이고, 가슴보다 약간 밑까지 온다. 불순물 없는 금색 머리카락은 소유자의 움직임에 따라 뭉치지 않고 가볍게 흩날렸다. ─머리카락은 온전한 자연의 물리법칙을 따를 경우 저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이것은 퍼포먼스다. 너는 당첨 제비를 뽑았다고 말없이 증명해주기 위한.
너는 ORT에 침식된 이문대 믹틀란의 최하층이라는 시대착오적이고 인간형 지성체가 지속적으로 활동하기 곤란한 공간에서도 런웨이를 걷듯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평온한 움직임이라서 깜짝 놀랄 만큼 노출이 심한 옷차림이라는 사실을 한발 늦게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그날의 나는 너를 구성하는 정보를 수집하는 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내 나름대로 노력은 해봤지만 내 기록을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의 글로 표현해낼 만큼 다양한 어휘를 수집해두지 못했다. 너는 사랑받는 것도 찬양받는 것도 좋아하니까 내 어설픈 문장을 보고도 즐거워할지 모르지만, 사실 그래서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제일 시적인 문장을 쓰려 노력했지만, 역시 그만두는 게 낫겠다. 너를 소환한 순간의 내가 네게 시선을 완전히 빼앗겼고, 정신없이 너를 바라보는 데 내 모든 인식능력을 사용하는 중이었다는 사실을 이렇게 길게 풀어서 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하면 엄청나게 부끄럽다. 그러니 이건 이 정도로 끝내지. 아마 너는 이미 간파했겠지만, 네게 지적당하기 전에 먼저 말해 보고 싶었다. 상호소통이 아니라 일방소통을 전제한 기록매체는 이런 점이 좋군.
아무튼 그때 너는 내게 이렇게 물었다. ‘서번트 룰러, 진짜 이름은 검은Yayauqui 테스카틀리포카다. 네가 나의 마스터냐’고.
살면서 규모가 크고 개념적인 목적 이외의 무언가를 온 마음을 다해 원해본 적이 거의 없다. 그런 사소한 것에 지나치게 마음을 쓰면 번거로워지니까 원하는 마음이 커지기 전에 마음을 접거나 다른 데로 시선을 돌리는 것을 반복해 왔다. 나는 기억을 선별해낸 뒤 보관하기 때문에 그렇게 살아도 딱히 힘들다고 느끼진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그럴 수가 없었다. 너는 내가 목숨을 걸고 이루기로 한 사업의 일부분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그 욕망에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너는 충격적이었다. 나의 사소하고 일차원적인 욕망의 결과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 내가 갖기에 과분하고 지나친 것. 나 따위의 욕심에 응답해준 인류의 육신에 갇힌 세계를 유지하는 이치. 살면서 그만큼 귀한 것을 가져본 적이 없다. 오직 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인격체 같은 건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때 네게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네가 나의 마스터냐는 말이 질문의 형태를 한 재확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멍청한 얼굴로 이런 대답을 해버린 거다.
‘그래도 되나?’
기억한다. 너는 미간을 살짝 좁히고 나를 바라보다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입을 막은 채 웃음을 참던 너. 내가 마나농도가 높은 공간에서 겪기 쉬운 가벼운 현기증을 참으며 너의 입꼬리나 미간의 움직임, 머리카락의 흔들림 등의 움직임을 미크론 단위로 관측하는 것을 알면서도 대답하던 너.
‘당연하지. 네 소망대로 너의 도구가 되러 왔다. 열심히 생각해서, 잘 써라.’
가슴 한 켠에서 어떤 충동이 피어올랐다. 그때는 그것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 수 없었으므로 성공할 거라 기대하지 않았던 소환이 성공해 가슴이 벅차오른 것이라 생각했었다.
지금은 안다. 그것은 탐닉의 충동이었다. 내 손에 들어온 이 귀한 것을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방식으로 누리고 싶다는 욕망.
내 계획의 전말을 들은 네가, 매우 흥미로운 제안이기는 한데 어쩌다 그딴 생각을 했느냐고 내게 물었을 때, 지구인류가 그런 메스꺼운 짓을 하면 내가 지구에 거주하는 우주인류로서 수치스러워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고백했을 때 폭소하던 너를 이후에도 간혹 떠올리고는 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가 개인적인 욕심으로 하는 짓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해 주었으니까.
어쨌든 너는 빠르게 나의 목적을 이해했고 훌륭한 협력자가 되어주었다. 믹틀란에서 다시금 발생한 유인원들에게 이대로면 1년 하고도 며칠 후에 태양이 수명을 다해 멸망할 운명인 믹틀란의 상황을 알린다, 그러니 ORT를 깨움으로서 멸망할 세계를 지켜야 한다는 목적을 불어넣어 아군으로 삼는다는 구상을 해낸 것은 나였지만, 기본적인 틀은 그대로 두되 스케일을 확 키워서 도시를 만들고 통치자도 세워서 유인원들의 문명의 발전수준을 더 크게 끌어올리자는 제안을 한 건 너였다. 그러니 적절한 협력자를 더 소환하자고 네가 제안했을 때 나는 약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너 그때 나를 무슨 기초적인 전략전술도 모르는 문외한 보듯 바라보던데, 애초에 나는 너를 만나기 전까지 서번트를 더 소환해서 협력자로 쓰자는 생각을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단 말이다.
사실 그것보다도, 그런 구미도 당기고 완성도도 높은 제안을 해놓고 뒤늦게 그걸 실현하려면 네 육체의 일부를 리소스로 써야 한다고 통보한 건을 사과받고 싶다. 그런 건 처음부터 이야기하란 말이다. 그토록 원하던 서번트를 갖게 됐는데 서번트의 육체의 일부를 제물로 쓰자는 얘길 들은 내 심정이 어땠을지 생각은 해 봤나? 애한테 장난감 주자마자 빼앗는 것도 아니고. 너는 툭하면 내가 서번트를 막 다룬다고 투덜댔는데, 내 생각에는 너도 마스터를 막 다루는 놈이었단 말이야.
그래도 그 말을 완전히 부정하진 못하겠더군. 네가 처음부터 육체를 리소스로 사용할 생각으로 인간의 육체를 만들어서 소환에 응했다고 밝힌 뒤, 그러니 네 육체를 대가로 내 대신 ORT에 행동강령을 입력해줄 녀석을 소환하겠다고 순서를 바꿔 말했어도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거다.
당연하다. 나는 이 일에 목숨을 바칠 각오를 했다. 그래도 나도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생물이니까, 죽을 필요가 없다면 죽기 싫은 게 당연하잖아. 그러니 내가 네 제안을 받아들이는 건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네 성격이 나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하고 흥미로운 듯 상대의 반응을 지켜보는 고약한 취미를 가진 교섭인이란.
내가 너를 부르는 데 쓰고 남겨둔 소환진을 네가 발끝으로 지우고 일부를 고쳐 그린 뒤, 내가 식사용으로 챙겨간 믹틀란 원생종 옥수수를 ─ 덕분에 모든 용무를 마치고 위층으로 귀환하는 동안 배고파서 죽을 것 같았다 ─ 소환될 협력자의 육신으로 삼아 소환마술을 행하는 동안. 나는 아카식 레코드에서 특정한 영혼을 끌어내는 대가로 너의 육체의 어느 부분이 사라질지 생각하고 있었다.
너는 가치는 유동적인 것이므로 확실하게 어느 부분이 사라질지 특정도 장담도 할 수 없다고, 하지만 소환될 영혼에 어느 정도 커스터마이즈가 가해질 테니 대가는 비교적 클 거라고 말했었지. 네가 소환영창을 하는 동안 나는 홀로 그것을 가늠해보았다. 일단 심장은 아니다. 중남미 신화에서 심장은 정신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으니까. 나는 서번트가 없어도 자기 몸을 지킬 수 있다만 그래도 너는 엄연히 싸움을 위해 소환된 서번트이니 시력이나 청력, 이동능력에 기여하는 부위도 아니겠지. 시간을 때우는 소일거리 삼아 최대한 그럴싸한 답을 내보려 했다. 하지만 추론을 쭉 이어갈 수가 없었다. 역시 싫었다. 너를 이루는 어느 부분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살아남고 싶으면 너의 일부분을 포기해야 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받아들여야만 했다. 너는, 내가 너를 소비재로서 소모하는 것을 전제한 상태로, 마술적으로 뛰어난 소비재로 기능하는 육신을 입은 채로 나를 찾아왔다는 것을. 신성으로서 세계를 유지하는 룰을 준수하면서 나를 도우려면 그 소비재로서의 존재방식이 최적해였다는 사실을.
욕망이란 가치에서 기인하며, 가치는 욕망의 대상을 바로 손에 넣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한 순간에 생겨난다. 그날 분량의 나머지 시간들은 온전히 내가 그 사실을 실감하고 받아들이는 데 소비되었다. 내가 협력자의 육체의 형태를 본 순간부터 그 진짜 이름을 알아챘으나 너는 그 진짜 이름을 함구했을 때도, 네가 성취감을 느끼는 것인지 그리움을 느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협력자를 내려다보며 ‘이름은 이미 정해 뒀어. 이스칼리Izcalli라고 부를 생각이다’ 라고 말했을 때도.
믹틀란 최하층이 칸 왕국의 ‘도시’였고 서번트를 하나 더 부를 만큼의 마력이 축적되어 있어서 다행이었다. 네가 테노치티틀란과 이스칼리를 부르느라 장기를 처음부터 둘이나 소모해야 했다면, 아직 너를 소비하는 행위를 즐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나는 짜증이 나서 나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눈치인 테노치티틀란에게 제대로 예의를 차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파랑靑/Xoxoauhqui이 나타난 건 우리가 지상으로 올라온 다음날, 네가 테노치티틀란과 함께 도시를 ‘집어넣기’ 좋은 장소를 찾는다고 자리를 비웠을 때였다. 나는 아직 육신에 영혼이 완전히 정착하지 않아서 20시간 이상은 잠만 자는 상태였던 이스칼리를 돌보고 있었다. 그날 너는 분, 초 단위로 스케줄을 짜는 건 자기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처사니까 제일 바빠지기 직전의 휴식이라고 생각하라고 했었지. 합리적인 제안이라고 생각했으니 받아들였지만, 나는 그날의 네가 테노치티틀란과 함께 외출할 때 눈에 띄게 즐거워 보였던 것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미안하군. 나는 뒤끝이 길다.
당시 캠프로 쓰던 테노치티틀란이 대강 만든 가옥에 네가 한 것 이외의 방호조치는 되어 있지 않았다. 너는 나보다 뛰어난 마술 사용자였고 나는 디노스 한두 명 정도는 쓰러뜨릴 힘을 갖추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를 하나 더 들자면, 네가 한 명 더 나타나는 사태는 나도 예상 못 했다.
‘태평하기는. 그게 전쟁 중인 전사의 태도냐?’
푸른 테스카틀리포카는 뻔뻔하게 건물 안으로 들어와 그런 말을 했다. 그치가 혀를 쯧쯧 차며 네가 두고 간 방어용 호부에 손을 뻗는 것을 몇 초 정도 멍청하게 바라보던 나는 최대한 기민하게 행동해 불청객을 제압했다. 바닥에 엎드린 채 손발을 짓눌려 결박당한 소년 형태의 무언가는 불한당처럼 ─ 너처럼 ─ 웃었다.
그의 피부나 체모의 색, 용모, 언동 모두가 수상할 정도로 너를 닮아 있었기에 나는 빠르게 추론했으나 결론내리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이 녀석의 목을 졸라 의식을 빼앗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할 때, 그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에 겨우 확신했다.
‘궁금하지?’
‘뭐가.’
‘뭘 하러 왔는지 궁금하지?’
내가 오셀로틀에게 무기를 주어 무장시킬 생각이라고 말했을 때, 너는 그럼 당분간은 무기상인 노릇을 해야겠다고 말했었지. 그는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처해서도 상대가 자기 밑천을 궁금해하게끔 꼬드길 줄 아는 뛰어난 상인이었다. 너처럼.
‘그야 네가 검정을 오셀로틀Ocelotl의 신으로 만들었으니까 그렇지. 테스카틀리포카는 모두에게 공정한 존재야. 어떤 테스카틀리포카가 오셀로틀 편을 든다면, 어떤 테스카틀리포카는 디노스 편을 들어야지.’
‘오셀로틀… 그런 이름이 붙는 건가.’
‘그래. 네 음모는 성공할 거다. 기쁘지?’
예언이라 믿기 힘들 정도로 평이한 말투였다. 너는 불친절하고 가혹하다. 남의 상황을 전혀 배려하지 않은 상태로 신탁을 내리며 타인을 위해 무언가를 해 준다. 그것은 파랑 쪽도 같았다.
나는 파랑을 일으켜 세우고 간이 의자를 양보해 주었다. 파랑은 내게 제압당했을 때 짓눌린 부위를 손으로 두들기며 투덜거렸다. 나는 자업자득이라고 말하고 홀로 아껴두었던 코코아를 주었다. 파랑은 현대인 녀석들은 이래서 안 된다, 쇼콜라틀 주제에 달콤하기만 하지 않냐고 투덜대면서도 코코아를 잘 받아 마셨다. 나는 파랑에게 되물었다.
‘디노스는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하에 폭력을 거부하는 방향으로 진화한 지성체다. 꼭 필요한 폭력도 저지르기 싫어 주저하지. 너는 디노스를 위해 싸울 생각인가?’
‘그럴 리가. 전투와 관련된 기능은 여기 내려올 때 검정 쪽이 싹 챙겨 가서 이 단말에는 마술적인 지식이나 죽지 않는 기능밖에 못 넣었어. 봐라, 리소스 부족해서 체적도 부족한 거.’
파랑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두 팔을 들어 올려 보였다. 열서너 살 정도 된 듯한 용모. 가늘고 하얀 팔다리. 우습게도 나는, 그치의 덜 자란 몸에서 너와 닮은 부분을 열심히 찾고 있었다. 그걸 지켜보는 파랑은 웃음을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너처럼 다리를 꼬는 대신 다리를 쩍 벌리고 앉은 파랑은 뻔뻔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내가 여기 온 시점에 그 녀석들에게도 전사가 될 가능성이 발생했다. 당분간은 느긋하게 기다려야지. 마지막 때까지 디노스가 멸종하지 않게 지키려면 너희들의 침략을 적당히 막아낼 필요도 있고.’
‘유언은 그게 끝인가?’
‘포커페이스 하나는 훌륭하군. 유감이다. 지금의 너는 나를 못 죽여.’
‘근거는?’
‘너는 그 녀석을 지나치게 마음에 들어 하거든. 그래도 걱정 마라. 너는 네 목적을 위해 그 녀석을 머리카락 한 올부터 영핵 한 조각까지 전부 써 버릴 훌륭한 낭비가니까.’
당시의 나는 그 예언을 듣고 모든 연산기능을 동원해 이후의 청사진을 덧그리기 시작한 상태라서, 파랑이 나를 지나쳐서 잠들어 있는 이스칼리를 보고 폭소를 터뜨리는 것을 저지하지 못했다.
‘검정다운 넌센스로군! 전사의 남창 노릇이나 하는 주제에 감성적인 머저리! 하, 이 녀석에게 자비를 베풀 생각이었으면 좀 더 빠르게 했어야지! 그랬으면 악신이나 전능신 같은 웃기는 이름으로 불릴 필요도 없었는데!’
파랑은 매도인지 한탄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을 발작적으로 흘리면서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그러다 조용해져서, 돌아온 네가 대체 뭘 하고 있었냐고 내게 잔소리를 할 때까지 이스칼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기묘할 정도로 자비로운 얼굴로.
돌아온 네가 ‘파랑은 치첸 이차로 갈 거다. 디노스 측의 사령관 노릇을 할 생각일 거야. 이번엔 룰을 지켜야 하니 그대로 보내줬다만, 다음에 만나면 제대로 죽여’라고 말했을 때, 내가 멍한 표정으로 말을 흐렸기 때문에 네가 정신 차리라며 몇 번이나 나를 타이른 것을 기억한다. 그건 오해다. 나는 네 말을 귀담아 듣고 있었다. 이후 내가 파랑과 대면할 일이 없어서 그를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한 게 유감스러울 정도다.
당연하잖아. 그는 내 것도 아닌데.
지금 생각하면 무엇 하나 쉽지 않았다. 오셀로틀들을 설득하고 교육하는 것, 도시를 만드는 것, 최하층의 ORT까지 쭉 이어지는 마술회로 공급로를 만드는 것 모두를 나 혼자서 한다고 가정했을 때는 궤도에 올리기까지 못해도 반년은 걸릴 거라고 각오했었다. 테노치티틀란과 이스칼리는 네가 그들을 소환하겠다고 제안했을 때 내가 망설인 게 미안하게 느껴질 정도로 좋은 협력자였다. 하지만 그들의 협력을 얻어 모든 것을 유지한 것은 너였다. 도시를 조성하고, 유지하고, 나의 동료들이 모두 실패할 경우 칼데아의 생존자들이 공상수를 벌채하러 올 테니 명계로 가는 루트를 여러 가지 마련해야 했고, 오셀로틀이 디노스를 사냥할 전술을 만들어야 하니 몇 번이나 서번트만큼이나 강한 디노스와 싸워 이기고, 이 기술이나 전술을 누구든 연습하면 따라할 수 있는지 여부를 확인해야 했다. 내가 그런 일거리들을 가져올 때마다 너는 대체로 ‘뭐? 알았다’ 라고만 대답하고는 일을 하나하나 해결하고 매듭지으며 모든 잡음을 조절했다. 얼핏 보면 너는 일방적으로 수다를 떨거나 싸움을 반복하며 한가롭게 돌아다니는 한량처럼 보였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너는 항상 바빴다. 그래서 너와 하려던 일을 테노치티틀란이나 이스칼리와 함께 하게 되어도 뭐, 싫어한 적은 없다. 그들이 나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을 뿐.
테노치티틀란 ─ 그 때는 ‘틀랄록’ ─ 은 애초에 부동산이라서 태생적으로 보수적인데, 꽤 옛날에 전성기를 보냈기 때문에 더더욱 보수적인 방향으로 진화한 인격체였다. 너를 따르기는 해도 좋아하지는 않으면서도, 내가 너와 현대인 기준으로 편하게 이야기하는 걸 볼 때마다 무엄하다며 싫어했다. 나 같은 무엄한 인간(처럼 보이는 것)이 그녀와 신들을 극진하게 모셨을 신관을 자칭하는 것도 그녀의 심기를 거슬렀겠지. 이해는 가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맨바닥에서 문명을 만들어내고, 싸움을 꺼리면서도 서번트만큼이나 강한 디노스 이외에도 죽여도 죽지 않는 이나 지성을 잃은 이 등등이 활보하는 이문대에서의 삶은 빈말로도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너를 사용할 일은 생각보다 자주 일어났다. 너는 그럴 때마다 시험이라도 치르듯 묘하게 웃으면서 내 대답을 재촉했지. 고약한 녀석.
나는 언제나 망설였다. 있을 때 소중하게 여겨도 생겨나고 사라진 뒤의 허무를 안타깝게 여겨도 생겨나는 것이 가치였다. 그러므로 어쩌면 아낌없이 사용하는 것이 정답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꽤 자주 생각해 왔다. 사용하고 싶지 않다는 의지를 보이는 게 정답일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대답은 언제나 예스였다.
너는 강하고 지혜롭다. 그런 네가 내게 이끄는 자로서의 자신이 아니라 소비재로서의 자신을 빌려주러 왔다. 자신을 사용할 권리를 양도했다. 나는 너에게 최적해를 선택하는 존재임을 인정받았다. 나는 그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당시의 나는 너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 두려운 것만큼이나 너를 실망시키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므로 나는 소비를 멈출 수 없었다. 너는 가혹했다. 시대에 발맞춘 방향으로 변화해 무절제한 소비를 강요하는 지독한 장사치. 손 안에 있는데도 손 안에 둘 수 없는 지고의 사치품을 일방적으로 팔아 치우는.
부드럽고 결 좋은 머리카락과 피부가 상하고 손톱이 갈라지고 깨진다. 하나쯤 줄어들거나 없어져도 리스크가 없는 장기를 사용한 뒤에는 소화기를 조금씩 야금야금 사용했다. 이스칼리를 부르면서 제일 중요한 호흡기의 절반을 잃었으니 달리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고, 간혹 오른쪽 다리의 마력까지 사용해서 오른쪽 다리의 의태가 풀리기도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어 네 육체의 십 분의 일의 기능이 약화되거나 사라졌을 즈음부터, 나는 언제나 네게 시야의 한구석을 할애했다. 나는 언제나 너를 보고 있었고 너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조용히 자랑스럽게 여겨왔다. 너는 웃겠지만.
테노치티틀란은 믹틀란에 도시를 ‘가져올’ 때 근방에서 제일 좋은 영맥을 골라냈고 영맥의 마력을 살뜰하게 긁어모아 도시의 유지에 사용하고 있었다. 그녀와 이스칼리의 소환자는 너였고, 네 현실을 조작하는 능력은 가격대성능비가 매우 좋지 않았다. 믹틀란은 신의 시대의 마력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세계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는 언제나 굶주려 있었다. 그리고, 영령의 좌와 땅을 상대로 반쯤 사기를 쳐서 너를 빼내기는 했지만, 나는 엄연히 너의 마스터였다.
언젠가 네게 오른쪽 다리를 유지할 마력도 남지 않아서, 상황을 파악하고 달려간 내게 안겨 메히코 시티로 귀환해서 신전의 제일 깊은 방에서 절대 안정하게 되었을 때, 아무리 긴급사태라 해도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는 부상자에게 성적인 행위를 하는 건 다소 인간쓰레기 같은 느낌이라 망설이던 내게, 네가 신경질적인 표정으로 ‘내가 네게 안기는 게 아니라, 네가 내 침상을 데우는 거니 착각하지 말라’고 말한 일을 간혹 떠올린다. 나는 그 때 네가 내 죄책감을 덜어줄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닐까 지금도 의심하고 있다. 그즈음의 나는 네가 근본적으로는 꽤 상냥하고 온정적인 신격임을 천천히 알아채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소 인간적인 형태로 너를 사용하는 건 기묘한 느낌이었다. 본래의 내 방향성이 규모가 크고 형이상학적이었다면 그건 알기 쉽고 일차원적이었다. 크게 거북하지는 않았다. 시계탑은 좁은 듯하면서 넓은 사회라 연애도 성행위도 할 만큼은 해봤다. 둘 다 내 삶에서 우선순위가 높지 않은 것이라 크게 탐닉할 수 없었을 뿐이다. 그전까지 만났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밝히면 실망했고 내게서 떠나갔지만 너와의 관계에서 그런 걸 찾을 이유는 없었으므로, 꼭 먹어야 하는 약을 먹이듯 몸을 맞대고 체액을 교환하는 것은 일상 속의 사건으로서는 죄책감을 자극하는 일이었지만 성행위로서는 오히려 편안한 느낌이었다.
유혹을 관장하며 전사의 휴식을 위해 욕망을 파악하고 채워주는 자로서의 네가 네 고객을 만족시키지 못했고, 개선이 필요하다는 의미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냥 내가 책임감을 좀 강하게 느끼는 인격일 뿐이다. 그건 확실히 알아줬으면 좋겠다.
외출에서 돌아온 네가 샤워를 하던 내게 다가와서 달라붙었던, 그러니까 내가 용무를 마친 너를 욕실에서 내보내자 네가 나더러 젊은 주제에 성욕이 약해서 재미없다고 했던 날 일이다.
내가 머리를 다시 감는 동안 너는 샤워부스 옆에 앉아서 이스칼리 녀석은 긴장하면 실수하기 쉬운데 내가 볼 때면 자꾸 긴장한다고, 결과물을 확실히 봐야 다음 단계의 커리큘럼을 짤 텐데 난감하게 되었다고 푸념을 했다. 나는 이스칼리 성격이면 어쩔 수 없지 않냐고 대꾸했다.
긴 적응기간 이후 눈을 뜬 이스칼리는 명민하고 인내심이 많고 행동력이 좋아 시킨 일은 어떻게든 해내는 좋은 인력이었다. 하지만 네가 지켜보고 있을 때면 너를 지나치게 의식했다. 네가 이스칼리에게서 영혼에 새겨진 분노 이외의 모든 것을 지워두었다고 장담했음에도 이스칼리는 너를 볼 때 큰 잘못을 한 사람처럼 굴었다.
이스칼리는 네게 불려와 교육을 받는 몸이므로 나보다도 너와 자주 접촉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돌볼 오셀로틀들이나 테노치티틀란에게 보다 크게 의지하며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래서 내가 너를 편하게 대하면 불경하다며 투덜대기는 했지만 정말로 보수적인 테노치티틀란처럼 나를 계속 지켜보며 뭐라뭐라 토를 달지는 않았다. 내게는 다행이었다. 그가 이스칼리가 아니라 모테쿠소마 쇼코요친이라 자칭하는 존재였다면 그는 높은 확률로 테노치티틀란보다도 격렬하게 나를 들들 볶았겠지. 하지만 네게는 어땠을까.
범인류사의 지식을 지닌 이 모두가 ─ 내게 범인류사 이야기를 뜯어 간 카마소츠조차 ─ 이스칼리의 진짜 이름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네가 그 짐작을 사실로 확정해주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확실한 진실이 되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나는 네게 떠보듯 물었다. 대책을 모색해야 한다는 생각 절반, 개인적인 흥미 절반이었다.
‘네가 이스칼리에게 정확히 무엇을 바라는 건지 모르겠어.’
‘말하면 좀 믿어. 네 대신 ORT를 움직이게 하려고 불렀다니까?’
‘그는 너를 지나치게 의식해. 잘못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긴장한 어린애 같다.’
‘누가 너더러 감정이 없다고 그랬는지, 참….’
너는 드물게 입을 다물었다. 나는 홀로 안심하고 짐작을 입에 담았다.
‘너는 이스칼리가 언젠가 네게 반항하고 반기를 들기를 바라나?’
‘그 녀석의 운용은 내게 일임한다면서?’
‘그래. 네가 어련히 잘하겠지. 단순한 호기심이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분쟁을 일으키는 것이 네 기능이지만 보통 인간은 네 방식을 쉽게 이해하지는 못해. 너를 곤란하게 여기고 불신하던 그가 네게 반기를 들게 만들고 싶은가 생각했을 뿐이야.’
‘네가 보통 인간을 자칭하다니 개가 웃겠구나.’
‘개는 원래 잘 웃는다. 재규어만큼이나.’
‘너는 왜 기억용량도 부족한 놈이 그런 걸 관찰하고 다니는 거냐. 어?’
나는 샤워기를 틀고 물을 맞으면서 내 시야로 네 안색을 살폈다. 말투는 툴툴거렸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다. 너를 만난 날, 나는 네가 왜 하필 테노치티틀란과 이스칼리를 불렀는지 묻지 않았다. 그들도 너도, 침략자들 때문에 버림받거나 죽임을 당하거나 모욕당한 것으로 유명한 존재였으니까. 그런 한편, 너는 자비가 없으며 가혹하고 가능한 모든 자원을 동원해 싸움을 일으키는 존재로도 유명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궁금해졌던 것이다. 네가 그들에게 적재적소 이외의 무언가를 바라는지. 너는 내가 짐작한 대로 기묘한 방식으로 자비로운 존재인지.
그날, 너는 나 말고 내 개인실의 문을 보면서 대답했었다.
‘그래. 개인적인 흥미야. 그 녀석의 원본은 외적 요인 때문에 자기 선택을 끝까지 이어갈 수 없었지. 그러니 선택할 수 있게 해 주면 어떤 선택을 할지 궁금할 뿐이야. 지금은 네 목적이 우선이니까 어느 정도 안전조치는 취해뒀지만.’
‘이스칼리가 내 목적을 저지하려 하더라도?’
‘그럼 막아야지. 그건 제대로 할 거니까 걱정 마.’
너는 어느 틈에 담배를 물고 있었다. 진짜 담배는 아니었다. 마력으로 구성한 예장 같은 것으로, ‘연기를 뿜는’ 개념을 덧입어 자신을 강화하는 용도라고 네가 그랬었지. 하지만 나는 거기에서 자기강화 이외의 용도를 알아챘다. 담배를 피워물면 필연적으로 입이 막히게 된다. 그러니까, 길게 끌기 싫은 대화를 적당히 얼버무릴 수 있다.
나는 생각에 빠진 듯 연기를 뿜는 너를 모든 감각기관으로 지켜보며 샤워기를 껐다. 그래서 들었다. 내가 타월로 머리카락의 물기를 대강 훔쳐낼 때, 네가 속삭이듯 한 혼잣말을.
‘나 참. 나를 버릴 땐 재밌는 녀석이었는데…’
이스칼리가 ORT의 시신 앞에서 네 기대를 거슬렀을 때, 네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쭉 알고 싶었다. 네 기분이 상하지 않는 방식으로 물어볼 자신이 없어서 쭉 생각만 하고 있었어. 미안하게 됐다.
묘렌지를 만나러 갔을 때가 떠오른다.
묘렌지를 만난 순간부터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억해둘 생각으로 거기에 갔으므로 오래 머무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네 눈썰미를 속일 수는 없었다. 묘렌지가 평생을 싸워온 네가 인정할 만한 전사이며 그의 생애가 이번으로 마지막임을 간파한 네가, 묘렌지가 죽은 뒤 살짝 네 낙원으로 빼돌릴 수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었지.
묘렌지 아로는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형태의 죽음을 원했다. 그래서 그리도 사랑을 원하면서도 사랑을 떠나 고통스러운 길을 택할 정도의 긍지를 지닌 존재였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일방적으로 신경써 주고 호의를 떠넘기는 것을 평생토록 즐겨 왔다. 모든 것이 끝난 후 ─ 이스칼리가 ORT에 목적지를 입력하는 데 성공해 내가 죽지 않더라도, 당시의 내 육체로 우주단독항행을 하려면 우주감로주 같은 준비물이 필요했으니 ─ 내 욕심을 위해 그가 선택한 끝을 망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네 제안을 거절했다. 묘렌지는 미학에 크게 구애되는 존재였으니까. 묘렌지가 나를 소중히 여긴다 해도 내 욕심으로 그가 지향하는 아름다움을 망친다면 묘렌지를 다시 볼 면목이 없었으니까.
음, 지금 생각하면 배앓이를 하는 상태로 할 얘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좀 더 나중에 얘기해도 된다고 말했잖아. 묘렌지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였으니 이해는 간다만….
시간은 계속 쌓인다. 내 사업은 자연스럽게 믹틀란의 일부가 된다. 훈련받은 오셀로틀들이 디노스를 사냥하고, 믹틀란 전역의 디노스들이 치첸 이차로 귀환하거나 피난한다. 이제는 옷을 입게 된 마야의 단말이 간혹 메히코 시티에 물건을 사러 나타난다. 이제 내 무례함에 화를 낼 기력도 남지 않은 테노치티틀란이 나를 한 번 노려보는 행동으로 잔소리를 대신하게 된다. 이스칼리가 높은 성취를 이룬 오셀로틀에게 보상으로 이름을 지어주고는 한다. 내 목적 때문에 자신이 하지 않아도 되는 싸움을 하는 오셀로틀의 시신과 그 즈음에도 나를 알아보고 잘 지내느냐고 안부를 묻던 디노스의 시신이 메히코 시티를 거쳐 그들이 있어야 할 곳으로 간다.
시간은 저녁이었고, 나는 내 방의 침상 위에 앉은 채 몇백 미터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오셀로틀의 장례 제의를 보고 있었다. 그러자 옆에 누워 있던 네가 물었다.
‘안타깝냐?’
‘안타깝지. 그래도 그 감정이 내 목적보다 우선시되진 않아.’
‘그러냐. 잘됐구만.’
그즈음의 너는 경구섭취를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너는 정말 식사를 하듯 꼬박꼬박 내 방을 찾아왔다. 자기 방에 돌아가기 귀찮다고 내 방에서 잠든 너는 열에 셋 정도 확률로 코피를 쏟으며 중간에 깨어났고, 열에 하나 정도 확률로 뭐가 어떻게 망가진 건지 알 수도 없는 방식의 트러블을 일으켜서, 내가 너를 그렇게 만들었음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너는 담요를 끌어당겨 덮었다. 나는 네 맨발에 눈길을 고정한 채 전날 훔쳐본 요정국 브리튼의 붕락崩落을 생각했다. 불꽃 이후에 온 것을, 바닷물과 황혼과 불꽃을, 그 땅이 낳은 과오도 아름다운 것도 평등하게 집어삼켜 탐욕스럽게 포식하는 섭리의 검정 속에서 날아오르는 하얗고 우아한 배를 생각했다. 노움 칼데아가 길어야 한 달이면 이 땅에 도달할 것임을 어떤 식으로 알려야 할까.
하지만 당시의 내가 입 밖에 낸 것은 다른 말이었다.
‘네 잔여분을 어떻게 써야 제일 잘 쓴 것일지…쭉 생각하고 있지만 여전히 확신이 안 서서.’
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 상황 전후의 너를 기억해둬야 해서 자세한 디테일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혼잣말처럼 정리되지 않은 말을 늘어놓았던 것 같다. 이미 사용할 자원과 사용하지 않을 자원을 모두 정리해 두었고 플랜 A와 B도 정해 두었다. 전력도 제대로 갖춰두었다. 소모할 자원 목록에 너는 없었다. 너는 비대칭 전력이니까. 하지만, 이 일 년간 너를 계속해서 사용해 왔으니 어떤 식으로든 마지막 용도를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그래서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지만 어느 것이 제일 만족스러운 방식일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아마도.
어느새 너는 일어나 앉아 나를 보고 있었다. 네가 내 뺨을 어루만졌다. 나는 나보다 약간 체온이 낮고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바닥의 감촉을 모든 인식능력을 끌어모아 기록했다. 그러자 네가 말했다.
‘멍청아. 작전이란 원래 시작한 직후부터 붕괴하기 마련이야. 그런 걸 생각할 시간이 있으면 플랜 B의 B라도 생각하던가.’
‘그건 알아. 그래도…나는 거의 확실하게 짐작할 수 있으니까. 고민은 해 보고 싶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 지구부터 외우주까지를 아우르는 지켜보고 통찰하는 눈도, 나를 위해서 죽어가고 있는 누군가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는 것이 보다 좋은 것인지, 그리고 그 결론을 너는 어떻게 생각할지는 알려주지 못했다. 그래서 근본적인 쪽으로 눈을 돌렸을 뿐이다. 욕망이 시키는 대로, 내 손에 마지막 남은 너의 잔여물을 어떻게 써야 네가 더 만족스럽게 여길지 고민했을 뿐이다.
너는 실수를 하고 사죄하는 어린것을 달래듯 웃었다. 그리고 서늘한 손으로 내 눈을 가려주었다. 내 인식능력이 시각 따위에 묶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편안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나를 신경 써서 무의미한 일을 해 줄 때의 즐거움.
‘확률을 조정하는 자로서 삶의 즐거움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지. 뭐냐면…일을 망치는 걸 너무 신경 쓰지 않도록 조심하는 거야.’
‘하.’
‘이제 자라.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운에 자신의 거취를 맡기는 건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야. 너한테도 나한테도.’
너는 말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자신이 바라는 바를 친절하게 설명하는 인격체는 아니었다. 미식을 즐기는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다양한 맛을 한없이 즐겨왔으면서도 자신의 인식범위를 벗어난 허를 찌르는 아이디어를 즐기는. 이 요리사가 어떤 예상을 벗어나면서도 맛있는 음식을 자신에게 내어줄지 눈을 빛내며 기대하는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운 미식가 같다고.
그날은 조금 빠르게 잤다. 중간에 일어나서 기억을 선별할 때, 너와 침상에서 뒹군 일이나 내가 중언부언 늘어놓은 이야기를 버리고 저 순간의 감각을 골랐다. 만족스러운 선별이었다.
가까운 미래, 내가 너의 마지막 사용처를 정하기도 전에 네 힘이 다해서,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퇴거해버린 것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내 탄생에는 지구인 두 사람이 소모되었고, 나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의 인격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는 사별이란 막연히 굉장히 무겁고 슬픈 느낌일 거라고 생각해 왔다. 죄다 선입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도 정말 그럴 생각은 없었다. 아니, 사후세계란 게 그 정도로 코 닿을 거리에 있을 줄 어떻게 알아.
칼데아의 48번째 마스터는 세계를 여섯 곳 멸망시킨 이에게 어울리는 살고자 하는 의지와 끈기와 인연 그리고 행운을 지니고 있었다. 자아가 식물처럼 옅어 다소 폭력적인 방식의 애정표현조차 피하지 못하는 것이 흠이었던 마슈 키리에라이트는 식물을 잘 가꾸지만 다소 요정 혼혈다운 경향성을 지닌 내 동료의 진심을 진심으로 거절할 수 있게 되었다. 지구에서 제일가는 성능의 훔쳐보는 눈Peeping Tom의 소유자로서 솔직히 걱정이 많았다만, 그들과 실제로 싸워보고 나니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네 데이터가 노움 칼데아의 영기 기록에 남으면서 노움 칼데아에 네 단말이 파견될 것이라는 사실 또한 내 정신건강에는 꽤 도움이 되었다. …령주를 되찾아 떠난 칼데아의 마스터와 마슈가 탑승한 전함이 믹틀란을 출항할 때, 네가 이렇게 물었었지.
‘아쉽냐?’
‘응.’
너는 또다시, 그 탐욕스러운 미식가처럼 웃으면서.
‘그래. 해소할 방식은 스스로 고민해라. 믹틀람파의 체재기한은 네 영혼이 이쯤이면 됐다고 납득할 때까지다. 질리고도 남을 만큼 시간이 남아돌 거라고 장담하마.’
미안한 얘기지만, 휴식의 낙원에 손님을 맞이하는 인사가 아니라 무슨 선전포고 같았다.
믹틀람파는 은퇴한 군인 모임과 요양원과 휴양 리조트를 5:2:3 비율로 섞어놓은 것 같은 느낌의, 옛 사람과 현대인, 범인류사와 이문대의 존재, 범인류사의 인간과 디노스와 오셀로틀 등이 적당히 섞여 지내는 깊이 생각하면 지는 것 같은 공간이었다. 그 이야기를 하자 너는 ‘믹틀람파의 본질을 간파했군, 축하한다’고 했던가. 관리자가 그래도 되나?
어쨌든 믹틀람파는 네가 꿈의 드림스파라고 장담한 대로, 세계구로 악명 높은 전쟁신이 준비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평온한 곳이었다. 자잘한 필요는 염원하기만 해도 대부분 준비되는 것보다도, 사회적 소통을 원하면 집 밖에 나가서 놀면 되지만 딱히 소통을 원하지 않으면 얼마든지 홀로 지낼 수 있는 세계라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재능 있는 인간들을 데려다 놓고 평생 지구가 처한 위협을 경계하게 하는 직장과 인류사의 존속을 보장하려는 척 페이크를 치고 전 우주에 민폐를 끼치려 들던 직장을 거쳐온 몸이라서 그 느긋한 공기에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평생 싸움질만 하다 죽은 전사들이 평온을 참지 못하고 심심해져서 다음 세계로 가서 전쟁을 벌이게 하는 게 목적인가 몇 번 생각했을 정도다. 너는 비약이라며 투덜거렸지만, 찾아보면 그런 생각 하는 전사도 꽤 많이 있었을 거다. 아마도.
생활 초창기에는 다른 시대 출신의 거주자들이나 이문대 믹틀란 출신의 거주자들과 어울려 호기심을 채우는 데 집중했었는데, 그게 어느 정도 일단락되자 뭘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어져서 ‘은퇴’한 사람다운 짓을 해보기로 했다. 한 번쯤 가보고 싶었는데 평생토록 시간이 없어서 갈 틈이 없었던 관광지를 몇 곳 돌아보았다. 루브르, 요크의 휘트비, 산토리니의 해안, 나이아가라, 우유니 사막. 그리고, 내가 어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당연하다는 듯이 뒤따르는 네 단말.
기분이 묘했다. 나는 하는 일의 특성상 거의 평생 혼자 돌아다녀 왔다. 믹틀란에서 너를 만났고 동행하고는 했지만, 그때도 항상 바빴으니 너와 단둘이서 해결할 일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네가 믹틀란에 살 때 나와 자주 못 다닌 걸 아쉽게 생각했고, 그 무의식이 반영된 거야.’
‘무의식.’
‘전에 여기서 원하는 게 생기면 바로 염원하면 된다고 말했었지? 말해도 되고 바라기만 해도 되지만, 전사의 요망은 대체로 바로바로 반영하고 있다. 영 이해가 안 가는 일이 벌어져도 그건 네가 의식하지 못하는 영역에서 발생한 요망이니까 너무 놀라지 말고.’
‘…놀랄 일도 있는 건가?’
‘세상엔 자기 진짜 욕망이 어떤 형태인지 모르는 녀석이 생각보다 많아.’
이쪽의 네 몸에는 결격사유가 없었다. 너는 언제나 너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아름다울 수 있었다. 머리카락이나 피부가 상하지도 않았고 음식을 먹어도 되고 달릴 수도 있었다.
그 반대 방향도 가능하다는 것을 추론했을 때, 그리고 너는 그 욕망도 딱히 꺼리지 않고 이뤄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다. 당시의 나는 네게 내 가공되지 않은 욕망을 들킬 것이 두려워서, 라고 생각했지만. 아니었다. 내 욕망은 완전히 다른 곳에 있었다.
평생 세계를, 지구를, 우주의 질서를 위협하는 위험요소들과 싸우며 은퇴생활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걱정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나는 빠르게 은퇴 이후의 생활에 적응해 버렸다. 잊을 만하면 벌어지는 전사들의 싸움판을 구경하기도 했고 이문대 믹틀란 출신들이 모여 믹틀란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기는 일에 손을 보태기도 했다. 라이브러리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노움 칼데아와 접촉하는 바람에 영령의 좌에 기록되어 버린 ‘이문대 믹틀란의 태양신 쿠쿨칸’ 이 12천상에 출몰할 때 구경을 가기도 했다. 그리고 너는, 그때의 내 요망에 따라 모습을 감추기도 했고 그림자처럼 따라붙기도 했지만 대체로 내 곁에 있었다. 수다스럽게 떠들고, 묻지 않은 말을 하기도 하고, 근방에서 싸움이 벌어지면 좋아하면서.
네가 곁에 있는 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다. 아주 즐거웠다. 너는 내게 정말 잘해줬다. 영화를 함께 볼 때 문득 떠오른 착상을 주어 없이 말해도 자연스레 문맥을 유추해서 받아쳐 주고, 저녁으로 무엇을 먹고 싶은지 애매할 때 한 시간이 넘게 머리를 맞대고 함께 메뉴를 고민해주고, 술을 마신 채로 입을 맞췄다가 낄낄거리면서 러그를 깔아둔 거실 바닥에서 일을 치르고, 노움 칼데아가 소소하게 행사를 할 때 편법으로 은근슬쩍 고개를 내밀게 해 주기도 했으니까. 나무랄 데라고는 없었다. 고작 일 년이 조금 넘는 기한 동안 싸움을 벌인 대가치고는 지나치게 커서 미안해질 정도였다.
그거다. 그게 문제였다.
카마소츠가 네 낙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꽤 최근 일이었다. 방식은 뜬금없었다. 혼자 생각을 좀 하고 싶어서 산책을 나갔다가 우연히 마주쳤다. 그렇게 커다란 녀석을 ‘마주쳤다’고 표현하는 것도 좀 그렇다만.
‘크립터. 믹틀란에서 제일 머리가 이상한 녀석이 왜 내 앞에 있는 거지? 담대한 카마소츠도 꽤 당황했다.’
‘당연하지. 나는 테스카틀리포카의 마스터고 너처럼 칼데아의 마스터에게 패배했으니까.’
‘글렀군, 글렀어. 역시 테스카틀리포카의 제안 따위 받아들이는 게 아니었다. 보면 싫은 생각이 나는 녀석들이나 불길한 녀석들이랑만 마주치게 되니.’
‘제안?’
카마소츠는 나를 꺼리는 것치고 즐거워 보이는 말투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카마소츠가 노움 칼데아와 싸우고 죽었을 때, 네가 그를 잡아채 여기에 데려왔다고. 이제야 조용히 잠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낚아채이듯 낙원에 끌려오고 보니 영 기분이 좋지 않아서 너를 네 조각으로 찢어 줬지만 하필 여기가 네가 지배하는 개념적인 공간이라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고. 그러다가 네게 ‘제안’을 받았다고.
‘내게도 흥미가 있지만 내 안의 백성들에게 몹시 흥미가 있다고. 하하, 어이 없는 이야기다, 얄궂은 이야기다!’
‘그들은 네 일부가 된 것이 아니었나?’
‘아아, 나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테스카틀리포카가 말하더군. 전사들은 개별적인 육체와 경향성을 잃었을 뿐이고 그 영혼들은 완전히 시들지 않았고 영기를 유지하고 있다고. 전사들의 신을 자처하는 몸으로서 그 10억의 전사들을 외면할 수 없다고 말이다.’
카마소츠가 안식을 택하는 것은 아무 문제없는 선택이고 너는 그것을 존중하지만, 칸의 전사들의 영혼에 자의는 남아 있지 않더라도 그들이 다음 세계로 갈 기회는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카마소츠의 영기는 네가 지닌 힘으로도 쉽게 분리해낼 수 없는 복합체지만, 믹틀람파 생활을 끝낸 영혼이 다음 세계로 갈 때라면 카마소츠라는 틀에 갇혀 있던 그들을 해방시켜 주는 것도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네게 그렇게 제안받았다고 카마소츠는 말했다.
‘어처구니없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거절할 수도 없었지. 안타깝고 희극적이지만, 나는 테스카틀리포카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내 영혼이 납득하여 이곳을 떠나는 날, 전사들과 시민들의 영혼도 다음 세계로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 즈음에 디노스들이나 마술적인 지식이 있는 주민들이 자기들끼리 합쳐지거나 습합된 영기를 분리해내는 시험을 하거나 라이브러리의 자료를 열람하고 있었던 이유를 알게 된 순간이었다. 착해빠진 녀석들이야.
믹틀란에서 처음 만난 카마소츠는 미친 사람처럼 보였지만 자기 나름대로 나를 반겨주었다. 믹틀람파에서 만난 카마소츠는…여전히 미친 사람 같았고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믹틀란 시기보다는 안정되어 있었다. 새삼스럽게 네 휴식의 낙원의 힘을 실감했다.
‘테스카틀리포카가 제안한 것치고 불확실한 거래로군.’
‘이곳은 아주, 아주아주아주아주 불쾌하고 지루한 공간이야. 허나, 그래도 괜찮다. 들어오게 된 계기는 불쾌하지만 그 제안은 나쁘지 않다.’
카마소츠는 상쾌하게 느껴질 정도로 깔끔하게 잘라 말했다.
‘백성들을 해방시켜 줄 수 있다는 말이 한낱 가능성에 불과했더라도, 그들의 선택이, 그들의 삶이 무의미하지 않았다고 증명할 수 있다면…카마소츠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할 수 있다. 지루하고 완만한 일만 이어지는 명계 생활도 얼마든지 버텨주고말고.’
그가 어디에서 태어나 어떻게 살아가는 어떤 존재이건, 그는 용사였고 걸물이었고 왕이었다. 너는 자기 일을 충실하게 잘 하는 녀석을 좋아하지. 믹틀란에서 네가 카마소츠 이야기만 하면 즐거워했던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유감스럽게도 카마소츠는 눈치가 없어도 되는 존재였으므로, 홀로 감동하고 홀로 납득하던 나를 다시 본래 화제로 되돌렸다.
‘그런데 네가 왜 여기에 있지? 나는 다른 녀석들과 괜히 마주치지 않게 조심해서 돌아다닌다만.’
‘…그랬다고?’
‘그랬다. 여기에 올 때 누군가 대화상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라도 한 건가? 여기서는 흔히 벌어지는 일이라던데.’
나는 망설이다가 뭐에 홀린 것처럼 털어놓았다. 믹틀란에서 너를 소환했을 때로부터 너를 눈앞에서 잃고 나 또한 죽어 믹틀람파에 도달하기까지의 이야기를 최대한 간결하게 늘어놓았다. 믹틀람파에서의 생활은 평화롭고 너는 바라는 모든 것을 주지만, 역시 믹틀란에서 해내지 못한 그 일이 신경쓰인다고. 하지만 그 결말을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어떤 형태로 그 허무감을 채워야 내가 납득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머리가 이상한 녀석이라고는 생각했다만, 생각보다 더 묘한 문제를 가져왔군. 그만 당황시켜라.’
‘머리가 이상하다는 말은 그만 하면 안 되나?’
‘틀렸나?’
반박할 수 없어서 짜증 났다. 카마소츠는 나를 곁에 두고 혼자서 먼산바라기도 하고, 나를 째려보기도 하고, 멀리서 지나가는 전사 한 무리를 훔쳐보기도 하면서 고민하다가, 갑자기 내게 버럭 쏘아붙였다.
‘타인을 이해할 수는 없었다만 싸우는 능력만은 천하제일이라 왕이 된 내게 너무 심한 짓을 했다는 생각 안 드나? 카마소츠는 상당히 깊게 좌절하고 있다.’
‘누가 고민하라고 했나?’
‘됐다, 됐다. 가라. 산책이 재미없어졌다.’
카마소츠는 질린 듯 나를 쫓듯 손을 흔들어 댔다. 어이가 좀 없어지기는 했지만 이야기한 것만으로도 꽤 속이 후련해졌다. 나는 카마소츠를 등지고 내 거처로 돌아가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그 때, 등 뒤에서 한 마디가 들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면 처음으로 돌아가라. 애초에 너는 그 놈으로 무엇을 하고 싶었지?’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카마소츠는 이미 간 데 없이 사라진 뒤였다. 문득, 내가 진짜 카마소츠를 만난 것인지, 내가 무의식중에 바란 요망 때문에 네가 내 마음을 안심시킬 만한 환상을 마련해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사실 어느 쪽이어도 상관없다. 네가 한 일이라면, 조금 부끄럽지만 고맙다. 그가 진짜 카마소츠였다면, 감사 인사를 전해다오.
나는 상당히 오랫동안 내가 욕망이 약한 존재라고 믿어왔다. 그것이 크나큰 착각이었음을 삶의 마지막 나날을 보내면서 겨우 이해하게 되었다. 네가 알게 해 주었다.
너를 만나기 전에는 가지고 싶었고 만난 뒤에는 쓰고 싶었다. 너를 손에 넣고, 마지막 한 조각까지 탐욕스럽게 너를 소비하고, 네가 사라진 뒤의 허무를 보고 밀려올 상실감을 만끽하고 싶었다. 내가 생각해낼 수 있는 모든 방식으로 이 귀중한 것을 다 써버리고 싶다는, 그리고 그 소비행위로서 내게 내려와준 너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다는, 그런 평범하고 가혹한 욕망이다.
너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정말 재간 좋은 상인이었다. 내가 너를 전부 사용해버리기 전에 먼저 자신을 내던져 세계에서 사라지다니. 훌륭하다. 욕망을 인도하는 법을 제일 잘 아는 이다운 행동이었다. 덕분에 나는 죽은 지금도 이런 상태다. 너를 최고의 방법으로 써버리고 싶었는데 그것을 이뤄내지 못해서, 길 잃은 욕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지금까지도 애태우고 있다.
오래도록 고민했다. 카마소츠의 충고를 듣고 또다시 고민했다. 그리고 드디어 결론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것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모테쿠소마 쇼코요친은 신의 손에서 벗어나 인간의 힘으로 세계를 이끌기를 원했다. 그래서 너를 버렸고, 그는 불행해졌다. 너는 그 사실을 슬퍼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불행을 잊지도 않았다.
이스칼리는 범인류사에 복수할 도구여야 할 오셀로틀을 지나치게 사랑해버렸다. 디노스의 세기가 끝나고, 역할을 다한 자신이 사라진 뒤 오셀로틀이 믹틀란을 지배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네 기대를 저버렸다. 그에게 남아 있던 마지막 분노를, 싸움의 가능성을 부정했다.
나는 앞서 네가 이스칼리에게 마지막으로 자비를 베풀었을 때 네 기분이 어땠을지 알고 싶었다고 밝혔다. 네 기분이 상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할 자신이 없어 그만두었다고도 말했다. 미안하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그건 내가 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질투가 났기 때문이다. 그는 너를 버렸으나 나는 너를 버린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테스카틀리포카. 나의 서번트. 나의 도구. 나의 싸움의 보상. 내가 가져본 것 중 제일 사치스러운 것.
나는 이제부터 너를 버릴 것이다. 네가 주는 만족도 네 배웅도 마다하고 네 손을 놓고, 너를 원하며 애태우는 이 마음을 그대로 품은 채 이 낙원을 떠나 다음 세계로 가겠다.
내 영혼이 아직 그 무엇도 납득하지 못했더라도, 그래서 내 영혼이 온전한 형태로 다음 세계로 가지 못하더라도, 그래서 생전의 내가 겪던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그래서 다음 세계의 내가 불행해지더라도, 상관없다. 지금의 내가 그것을 원한다. 이유는 그걸로 충분하다.
실은 지금도 너를 원한다. 믹틀람파의 라이브러리에서 친한 디노스들과 최근 몰두하는 연구주제 이야기를 하고, 마음에 드는 고전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고 거처에 돌아가 저녁을 만들고 있는 네게 인사하고 싶다. 너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면서 네 추임새를 들으면서 오늘 라이브러리에서 읽은 책 이야기를 하고 싶다. OTT로 최근에 범인류사에서 만들어진 영화를 보고 싶다. 그러다가 너를 끌어안고 침대에 눕고 싶다. 새벽까지 이야기를 해도 좋고 몸을 맞대도 좋다. 이상하지. 이렇게나 너를 원하는데 너를 버리려 하다니.
하지만 역시 그럴 수는 없다. 너는 손님이 요구하기 전에 그가 원하는 것을 쥐어 주는 눈치 빠른 바텐더 같은 존재니까. 가만히 있다가는 나의 무의식이 네가 주는 모든 것에 취해 욕망의 형태를 바꾸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친절한 네가 나의 무의식의 요청을 수락해 내 욕망을 이루어 주어서, 내가 이것을 바랐다는 사실조차 아무래도 좋아질지도 모르니까. 이렇게나 너를 원했는데, 너를 쓰고 싶었는데 그 마음을 잊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이것이 나다. 나는 어디에서 태어나고 자랐노라 밝힐 때 부끄럽고 싶지 않다는 욕심으로 지구를 파괴하려 하는, 그 사업을 위해 불러낸 존재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던, 그리고 그렇게 원하면서도 손을 놓아 미래의 네 입으로 옛날에 제법 재미있는 전사가 있었노라 회자되고 싶다는 욕심을 가진 존재.
믹틀람파의 주거지구를 떠나 외곽의 황야를 지나 한참을 걸었다. 7시 방향 즈음에 새벽의 흐린 태양이 보였다. 모닥불과 잠시 몸을 쉴 통나무도 있었다.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 본 것이다. 그렇다면 맞게 온 것이겠지.
저 통나무 위에 앉아서 이 글을 썼다. 보다시피 노트도 펜도 내 방에서 가지고 나온 믹틀람파 지급품이다. 몰래 떠나겠다면서 네 뱃속에 글을 쓰고 있는 꼴이 된 게 아이러니하지만, 너라면 이 정도 이율배반은 용서할 거라 믿는다. 너야말로 이 낙원에서 제일 모순적인 존재니까. 미래의 자신의 거취를 운에 맡기라고 귀띔하고 내가 이 낙원에 오래 있을 것이라 장담하면서도, 내가 미래에 너를 전부 써버릴 낭비가가 될 것이라는 신탁을 함께 쥐어주는 존재니까. 어쩌면 이 모든 일을 나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예상했으면서도 쭉 내 곁에 있어준 존재니까.
이 글을 마친 뒤 저 태양 너머로 갈 것이다. 피니스 칼데아의 레이시프트용 코핀을 열고 나갔을 때처럼, 무엇도 예상할 수 없는 혼란을 내포한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실은 지금도 기대하고 있다. 지금의 내가 너를 바라지 않으니 너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한쪽 다리가 더 무겁다는 특징 때문에 듣기만 해도 티가 나는 네 발소리가 들려오기를 바라고 있다. 이건 꽤 인간다운 생각 같다. 마음에 든다. 그러니 이쯤에서 마무리하자.
두 번 다시 여기에 오지 않는 것이야말로 네가 이 낙원을 만든 목적임을 알고 있다. 이 글을 읽은 네가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하지만, 몰라도 상관없다. 지는 건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니까. 다음 삶에서도 싸움을 하게 된다면 이기고 싶으니까.
건강해라. 이 우주에서 영원히 싸움이 그치지 않기를 바라겠다.
기원을 담아,
데이비트 젬 보이드
추신
혹시 네 다음 의뢰인의 싸움에 내 힘이 필요하다면 나를 불러다오. 온 힘을 다해 이용당해 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