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S/레아시스
2024-07-07 20:57:07
26656文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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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편집자의 생존법

* 2024년 7월 7일, 데이테스 합작 5분간의 이터니티/五分間のエターニティ 투고작
* LB7 이후, 데이비트가 테스카틀리포카와 함께 노움 칼데아에 보호되고 생존한 세계선입니다. 제가 예전에 쓴 다른 소설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전작을 읽지 않아도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문제없습니다. 2페이지에는 후기가 들어있습니다.
* 카독, 오리지널 모브 캐릭터가 몇 명 등장합니다. (데이비트나 테스카틀리포카와 연애 측면으로 엮이지 않습니다)
* 조앤 k 롤링 〈해리 포터〉 시리즈의 스포일러가 조금 있습니다.

+ 2024년 7월 9일: 후기를 조금 추가했습니다.

데이비트 젬 보이드가 태어나기 1년 전, 데이비트가 자신과의 연속성을 가졌다고 느끼는 아홉 살 먹은 영국에 거주하는 미국인 소년이 읽은 그 분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인이 이 학문은 대충 어떤 형태인지 파악하는 것을 돕기 위해 집필된 영화에 대해 설명하는 교양서적의 첫 줄에는 뻔하게도 ‘영화란 편집의 예술이다’라는 격언이 적혀 있었다. 그 나이대 애한테 흔한 지적 허영 때문에 독서를 시작했어도 근본적으로 영민했던 소년은 그 문장과 저자가 전달하고자 한 바를 머릿속에 잘 새겨넣었다. 영화란 카메라와 마이크와 그 외의 다양한 장비를 통해 수집한 시각정보와 청각정보를 선구자들이 발견하거나 창안해낸 다양한 기술을 동원해 재구성한 편집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세계의 형태를 재현해내는 방식의 예술이다. 당시의 소년은 영화를 그렇게 정의했다.
발생 후 지구 시간으로 1년이 경과한 뒤에야 자신의 기억용량에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타인의 지적으로 자각하게 된, 자신을 정의하는 식별명칭에 막 ‘Day-bit’ 라는 복합어를 추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의 데이비트 젬 보이드는 문득 아홉 살의 미국인 소년이 읽었던 교양서적의 첫 구절을 떠올렸다. 현대의 영상연출가들은 모두 상영시간의 한계(지구에서 인류종으로 정의되는 인간형 지성체에게는 대체로 3~4시간 이상 자리에 앉은 채 최고의 집중력을 유지할 능력이 없다), 스폰서의 의향, 배우나 각본가 같은 협업자의 의견 등 최종적으로 극장에 걸리고 광매체에 담기거나 OTT에 팔리는 식으로 유통될 영상의 방향성을 바꾸거나 길이를 줄여야만 하는 수많은 이유에 시달리고 눈물을 머금고 자기가 몇 주 혹은 몇 년 동안 찍어놓은 영상에 칼을 댄다.
데이비트가 생각하기에 현실의 영화 제작에서 보다 중요한 요소는 이 ‘타의적인 이유로 분량을 줄여야만 하는’ 부분 쪽이었다. 최종편집이 끝난 뒤 남은 영상의 분량을 적절한 양으로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영화를 제작할 때부터 본래 생각한 이야기의 분량을 줄이거나 어레인지를 한다. 애초에 그런 방식에 걸맞는 배우나 협업자를 섭외하기도 한다. 처음과 나중이 치환된다. 영화를 타인이 최고의 컨디션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분량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만들기 위해 한계선을 설정하고 영화를 자르고 재편집해 한계선 안에 욱여넣는다. 자신이 만든 영화라는 형태의 정보를 세계에 남기기 위해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분절하고 재결합해서 재구성한다. 현대의 영화 제작이란 그런 행위이다.
문득 영화산업의 본질이 그런 것이라면 자신 또한 1년 경력의 영화감독을 자칭해도 될지도 모른다고 ‘Day-bit’는 생각했다. 관객은 자신 하나뿐이어도 어엿하게 최종편집까지 마친, 수많은 한계선에 맞춰 효율적인 방식으로 가공되어 뇌수 속에 보관된 5분 분량의 단편영화 삼백예순다섯 하고도 몇십 편.


*


2018년 7월, 런던 젬루푸스 저邸.

“아무리 생각해도 뭘 하면서 먹고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넌 그런 얘길 대체 왜 아침 먹으면서 하냐?”

카독 젬루푸스는 한때 데이비트의 서번트였던 손재주 좋은 남자가 구운(전 직장 동료와 저 남자를 한동안 이 집의 세입자로 삼기로 결정했을 때, 식사 당번은 매일 돌아가면서 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토스트에 오렌지 맛 마멀레이드를 바르는 작업을 하고 있었지만 식탁에 앉자마자 저런 발언이 나오고 보니 딴죽을 걸 수밖에 없었다. 발화자인 데이비트 젬 보이드는 그가 문신으로 새긴 것처럼 유지하는 진지한 표정으로 칠면조 햄이 많이 들어간 샌드위치를 한 입 물고 씹기 시작했다. 집주인과 전 고용주가 식사를 시작하게 두고 커피메이커를 보고 있던, 요즘은 테스카틀리포카라 불리는 빈도가 조금 줄어든 손재주 좋은 남자가 끼어들어 말했다.

“성장했구나, 집주인. 지적하는 태도가 꽤 자연스러워졌어. 그 상태로 2년 정도만 더 있으면 그 녀석 대하는 태도도 후지마루 녀석만큼 편해지지 않을까 싶다. 응원하마.”
“그쪽한테 칭찬받아도 전혀 기쁘지 않거든? 그보다 여기서 얼마나 더 지낼 생각인데?!”

카독과 테스카틀리포카가 실갱이를 하는 동안에도 데이비트는 말없이 샌드위치를 씹었다. 데이비트는 입안에 음식이 있을 때 말하지 않는다. 카독은 가벼운 짜증을 느끼면서도 납득했다. 시계탑에서도 손에 꼽히게 비밀스럽고 피가 비싼 근무자가 많은 전승과에서 교육을 받았다면 그 정도 예절교육은 자연스럽게 따라갈 테니까. 본래 데이비트는 자신의 개인사에 대해 거의 말하지 않았지만, 중남미 이문대에서 노움 칼데아에 투항하고 스톰 보더의 식객으로서 공동생활을 하게 된 뒤에는 뭔가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 종종 말하게 되었다. ‘시계탑 전승과에서 보관하던 유물이 일으킨 액시던트 때문에 전승과의 식객 겸 학생이 되었다’ 정도였지만, 이전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데이비트는 씹던 음식을 전부 삼킨 뒤에야 답변을 내놓았다.

“내 방침은 지금도 변함없이 ‘질서의 유지’다. 그건 카독, 너도 알고 있겠지.”
“네 칼데아 퇴사 면담 기록은 나도 다 들었어. 후지마루랑 다른 스태프 녀석들이 나도 들으라고 하더라.”
“알고 있었으니 사과할 것 없다.”
“사과하는 거 아니야.”

2018년 초, 마리스빌리 아니무스피어의 야망은 많은 희생과 수많은 요행과 굉장히 많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순간들을 거쳐 저지되었다. 모든 진실은 재편집되고 왜곡되어 제삼자들에게 보여도 괜찮은 형태로 조정되었다. 카독 젬루푸스와 데이비트 젬 보이드는 범인류사에 전쟁을 선포한 집단의 일원에서 코핀 속에서 생환하는 데 성공한 A팀의 유이한 생존자들이 되었다. 고르돌프 무지크는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칼데아의 처리 방침을 나름대로 확실히 세웠고, 잔존한 스태프들에게 떠나고 싶다면 정식 절차대로 사직서를 제출하라고 통보한 뒤 모두의 단말기에 서식 한 다발을 전송했다. 데이비트는 그 사실을 통보하는 자리에서 바로 사직서를 작성해 고르돌프에게 제출하며 ‘면담 일정은 언제쯤 잡을 수 있나?’ 라고 말해서 카독을 포함한 스태프 대부분이 경악하게 만들었다.
고르돌프의 정신건강이 엉망이 되기는 했지만 데이비트의 사직서는 받아들여졌다. 데이비트는 이런저런 비밀유지의무를 이행하고 가끔 칼데아의 사후처리에 협조해주는 조건으로 마리스빌리와 함께 작성한 계약서대로 퇴직금을 받고 퇴사하기로 결정되었다. 사후처리에 동반되는 사무작업을 돕던 도중에 스태프 퇴직금 지급용으로 기금이 따로 마련되어 있어서 다행이라며 고르돌프가 한숨을 쉬는 걸 주워들은 카독은, 고르돌프에게는 미안하지만 자신도 칼데아를 퇴사하기로 결정했다.
카독은 물려받은 마술의 특성과 개인적인 상황 때문에 쭉 어느 정도 부정적인 가치관을 유지하며 살아왔지만, ‘그녀’와의 만남과 몇 개월간 최악의 상황 속에서 필사적으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경험을 한 결과 다시 복마전 같은 시계탑으로 돌아갈 자신이 생겼다. 아마 이번에도 짜증나는 일과 좌절할 만한 일로 가득하겠지만 그녀가 지켜준 목숨이니 그 목숨값을 갚기 위해서라도 앞으로는 좀 더 힘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자 어느 정도의 성취감과 함께 깊은 상실감이 몰려왔다. 카독이 사직서를 고르돌프에게 제출하고 돌아오는 길에 데이비트가 나타나 ‘당분간 런던에 머물러야겠는데 머무를 곳이 없다, 그러니 너희 가문에서 런던에 소유한 집에 한동안 신세를 지고 싶다. 집세는 내지. 아, 테스카틀리포카도 함께다’ 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알록달록한 색으로 칠한 해골이 프린팅되어 있는 검은색 머그잔에 정성들여 내린 커피를 붓고 얼음을 집어넣던 테스카틀리포카가 말했다.

“뭐야. 이번 아르바이트 마음에 안 들었냐? 그 카페 주인은 너 계속 고용하고 싶어하는 눈치던데?”
“일은 나쁘지 않았어. 이것 또한 공공의 이익과 질서의 유지에 보탬이 되는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일을 내가 계속 하고 싶은지는 잘 모르겠더군.”

봄, 데이비트와 테스카틀리포카를 대동하고 런던의 집에 돌아온 카독은 한동안 방문자를 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피니스 칼데아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하는 마술사는 카독의 인맥 이상으로 많았다. 카독에게는 ‘그녀’ 와의 추억이라는 입을 열고 싶지 않은 이유가 있었고 데이비트에게는 자기 대신 써먹을 말재간이 좋고 지구 백지화의 진실을 숨길 가짜 진실을 작성할 때 관여했을 정도로 거짓말에 능한 대리인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비 오는 밤에 시계탑의 학장이 조용히 찾아왔을 때는 그 자리에 얼어붙듯 멈춰선 카독과 학장의 마술적 능력을 알아보고 휘파람을 부는 대리인을 물러서게 하고 데이비트 본인이 나섰다. 데이비트와 학장에게 응접실을 내주고 부엌으로 간 카독은 둘에게 차를 내주고 온 대리인이 몸소 만들어준 핫초콜릿을 마시며 긴장을 삭여야 했다. 그로부터 1시간쯤 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난 뒤 다기 세트를 들고 부엌으로 돌아온 데이비트는 ‘전승과에 복귀할 생각이 있냐고 묻더군. 거절했다’ 고 대답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예상대로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지만 카독은 기절할 것 같았다.
어쨌든 그 후 데이비트는 정말로 시계탑에 돌아갈 생각이 없는지, 시계탑에 복귀해 이것저것 하기 시작하고 본가와 연락하며 골치 아픈 상태가 된 카독과는 달리 건설 현장 인부부터 번역, 사무직, 카페 서빙까지 온갖 아르바이트처를 전전하고 있었다. 시계탑의 호사가들은 슬슬 데이비트가 학장을 돌려보낸 이야기를 전승과에서 제명당한 데이비트의 상태를 보러 갔던 학장이 데이비트가 구제 불가능한 개체라는 것을 알고 포기했을 거라는 소문으로 확장시켜 살을 붙여나가고 있었다. 데이비트는 어제 저녁식사 자리에서 두 달 정도 했던 카페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고 말했다. 아마 그것 때문에 한 말일 것이라고 카독은 짐작했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건 사실이었다.
데이비트는 발언을 재개했다.

“예전에는 방향성이 확실했어. 나는 전승과에 처음 재적할 때 어린 나이였고 전승과에서 하는 일은 내가 지향하는 것과 같아서 그쪽의 일을 돕는 것만으로도 별 문제가 없었다. 전승과를 나와서 칼데아에 가기로 결정한 것 또한 마리스빌리 아니무스피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질서의 유지에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건 다들 알고 있어. 뭘 말하고 싶은 건데?”
“카독, 칼데아에서 일하면서 너만 가치관의 변화를 겪은 건 아니다.”

퇴사 준비를 하면서 데이비트는 고르돌프를 포함한 칼데아 직원들과 많이 부대껴야 했고 그 동안 시간을 때우기 위해 많은 잡담을 해야 했다. 그 상대들 중에는 존경하는 ‘선배’가 사직서를 제출했지만 왠지모르게 들떠 있는 마슈 키리에라이트도 있었다.

‘선배는 돌아가면 일단 고등학교에 복학하실 거래요. 졸업하면 대학교에 가서 요리랑 경영을 배울 거고, 그리고 나중에 저랑 같이 빵집을 열고 싶은데, 혹 제가 괜찮다면 협업해줄 수 있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깜짝 놀랐어요.’
‘그랬나. 그녀와 네 기술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다. 혹 가게에 출자가 필요하다면 연락해라.’
‘감사합니다. 아, 그러면 데이비트 씨는 무엇을 하실 건가요? 퇴직하면 일단 런던에 간다고 하셨죠? 그러면 역시 신임 소장님이나 카독 씨처럼 시계탑으로 돌아가시나요?’
……. 그건 잘 모르겠군.’

마슈 키리에라이트는 인류사가 멸망하니 뭐니 하는 사안에 소모한 2년 동안 인간으로서의 경험치를 꽤 많이 쌓은 상태였으므로 드물게 곤란한 표정을 짓는 데이비트를 보고 많은 것을 묻는 대신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데이비트 씨는 언제나 시간이 없다고 하셨죠? 저도 인생경험이 많지는 않지만, 직업을 바꿔 보면 어떨까요? 이것저것 해 보면 방향이 정해질지도 몰라요.’
‘정말 많이 변했구나. 닥터 로망이 알면 기뻐할 거다.’
‘저도 이것저것 많이 해 보려고 해요. 닥터가 바란 것처럼요.’

그 대화가 이루어지고 사흘 뒤 데이비트는 카독과 테스카틀리포카와 같은 비행기로 남극대륙을 떠나 아르헨티나로 갔다. 북구에 가까운 땅 출신인 카독이 더위로 고생을 하고, 테스카틀리포카는 그리운 땅과 가까운 토지를 만끽하고, 두 사람과 비행기를 몇 번 갈아타고 런던으로 향하는 여정 동안 들른 가게나 길에서 만난 행인들에게 데이비트는 이 직업은 남에게 추천하기에 어떠냐고 넌지시 묻고는 했다. 그리고 데이비트는 런던에 돌아온 뒤 일주일만에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전부 다 마술과 관련 없는 일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마술세계 안에서 살았지만, 앞으로도 쭉 마술사나 마술사용자의 방식으로 살아갈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이것저것 시도해 보고 있지만 이게 내 천직이다, 하고 느낌이 오는 게 없어서.”
되게 마술사 집안에서 자란 반항적인 애들이 꿈꾸다 정말로 실행했다가는 고확률로 겪게 되는 미래도 같은 얘길 하네.”

카독은 마멀레이드를 너무 많이 바른 토스트를 씹었다. 그제야 식탁에 앉은 테스카틀리포카는 자기가 커피를 내리는 동안 조금 식은 오믈렛을 포크로만(설거지거리가 늘어나는 게 싫다고 했다) 재주 좋게 가르면서 말했다.

“원래 나이 먹고 나서 직종 바꾸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내 시대건 너희들의 시대건 말이다.”
“그쪽이 웬일로 멀쩡한 얘길 하네. 그래서 데이비트, 어떻게 할 거야. 마술세계랑은 완전히 연 끊을 생각이야?”
“그것까진 아니다. 마술이랑 관련 없는 일을 해보면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여전히 잘 모르겠더군. 여기 쭉 머무를 수도 없으니, 앞으로 반년 안에 결정할 수 없으면 다시 예전에 하던 일을 해야 할 텐데 영 내키지 않아.”

직업 선택에 어려움을 겪는 젊은 인간이 많이 겪을 만한 공감이 가는 이야기지만 학장한테 스카웃 제의까지 받는 전승과의 엘리트님께서 하시는 말씀이라 묘하게 짜증이 났다. 카독이 뭔가 빈정거리는 말을 하기 전에 토마토와 콜리플라워가 많이 들어간 오믈렛을 빠르게 씹어삼킨 테스카틀리포카가 끼어들었다.

“데이비트, 그건 그렇고 오늘 검진 가는 날이다. 스케줄 제대로 빼 뒀지?”
“그래. 공방에서 어제 연락도 받았다.”
“그렇게 돼서 나랑 이 녀석은 외출이다. 집 잘 보고 있어라, 집주인.”
“자기 집처럼 말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는데?”
“아니, 내 기준으로는 맞아. 신을 모셔놨으면 그게 신전이지 뭐.”
“우리 캐스터는 성녀 수준으로 성격이 좋았구나.”

카독은 한숨을 내쉬고 어제 데이비트가 카페에서 받아온 토마토 주스를 마셨다. 데이비트는 조용히 공감을 느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런던 교외, 모처의 공방.

“스읍.”

테스카틀리포카는 목적지의 문 앞에서 숨을 한 번 들이쉰 다음 문을 열어젖히고 말했다.

“좋은 점심이다, 이베트!”

집 안에서 의료기기로 추정되는 기계에 뭔가 수치를 입력하고 있던 체구가 작고 긴 머리의 여자 마술사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미스터 테테오칸! 미스터 보이드도 잘 지내셨나요! 오늘도 광대뼈가 예쁘네요!”
“오랜만입니다, 닥터 베자리우스. 몇 번 말씀드렸지만 그 방면의 품평은 필요 없습니다.”
“저도 꽤 분위기 안 읽는 걸로 이름난 사람인데 그쪽은 더하신 것 같아요! 바이탈 측정부터 할 테니까 여기 앉으세요.”

이베트 베자리우스는 런던 교외에 공방을 마련한 지 10년쯤 된 시계탑 창조과 출신의, 제대로 된 의사 자격을 가진 인형공학자다. 인체모조가 17세기 이후 쇠퇴한 건 시계탑에서 공부한 사람이라면 다들 아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에 인체공학을 전공하는 마술사라면 효율 이상의 집착을 가졌을 수밖에 없다. ‘인체 이상으로 아름다운 것은 없다’ 가 지론인 이 마술사의 공방은 마술사답지 않게 의료기기가 이것저것 놓여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대학의 오타쿠 동아리가 점령한 동아리방 같은 느낌을 준다. 데이비트가 자신을 다시 스카웃하러 온 학장에게 ‘복귀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건 그렇고, 동거인이 인체의 일부를 마술적인 이유로 소모해 버려서 생활이 곤란한 상황이라 인체공학자를 좀 소개받고 싶습니다. 현대 마술사 기준으로 간혹 애프터케어가 필요한 정도로 우수한 정도면 됩니다. 토우코 아오자키나 로드 발뤼엘레타의 작품 정도로 지나치게 대단한 것은 필요 없습니다’ 라고 말했을 때 학장은 굉장히 할 말이 많은 표정을 지었지만 데이비트의 주문에 딱 맞는 인선이라며 이베트를 소개해 주었다. 이베트 본인에게도 너무 잘 맞았던 게 문제였지만.
데이비트는 칼데아를 퇴직할 때 테스카틀리포카의 반출 허가를 함께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신분증명을 위조할 때 시온 엘트남 소카리스의 협조를 얻는 데 성공했기 때문에, 테스카틀리포카는 공적으로는 야야우키 테테오칸이라는 이름의 중남미 출신의 아틀라스원에 재적하던 연금술사로, ‘토쉬카틀제Tōxcatl祭의 제물로서 테스카틀리포카 신과 동일존재로 취급되었던 현인신 테스카틀리포카를 마술적으로 재현해 테스카틀리포카 신의 권능을 재현하는 걸 목적삼았다가, 반쪽의 성공과 반쪽의 실패를 거둬서 이런저런 리소스를 퍼부으면 신의 권능을 약간이나마 재현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실제 신의 권능의 몇 백 분의 일도 되지 않으며, 그 이후 시온과 함께 행동하다가 칼데아에 합류하게 되었다’ 는 커리어를 가진 것으로 꾸며져 있다. 테스카틀리포카의 마술사로서의 역량은 데이비트 따위가 따라갈 수 없는 급으로 뛰어나며 존재방식의 특성상 아틀라스원의 연금술사의 전유물이라는 분할사고도 문제없이 해냈으므로 데이비트가 걱정했던 테스카틀리포카의 정체가 밝혀져 물리적으로 육체를 탈취당할 위기에 처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베트는 학장이 소개해 준 인선답게 동료가 일 때문에 내장을 여러 개 잃었고 이걸 비밀에 부쳐줬으면 한다는 설명에 선선히 입을 다물기로 서약했고, 데이비트가 ‘내장의 대체품이 몇 개 필요하다. 개념적으로 잃은 것이라 완전히 새것으로 대체되어서는 안 되고 불완전한 형태의 대체품이어야 한다. 유지보수는 가능하면 몇 년에 한 번 정도 간격이었으면 한다’ 라며 소개한 ‘미스터 테테오칸’을 보고 엄청나게 기뻐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아마 현존하는 인류로 분류되는 생물 중 비상식적인 일에 제일 익숙한 존재였지만, 그녀는 인체를 이루는 모든 파츠를 미학적으로도 사랑했고 그걸 남에게도 이야기하고 싶어 했으므로 테스카틀리포카쯤 되는 존재도 그녀의 텐션을 쉽게는 따라가지 못했다. 이베트는 시계탑에 드문 정치꾼과 장인 중 장인 측면에 크게 기울어져 있는 마술사였으므로 여기에는 테스카틀리포카 혼자만 찾아와도 되었지만, 이베트의 텐션에 기가 질린 테스카틀리포카는 꾸준히 데이비트를 대동했다. 내가 동행하겠다고 먼저 말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데이비트는 생각했다.
이베트가 시키는 대로 겉옷을 벗고 손가락 끝이나 여기저기 측정용 장비를 부착하는 테스카틀리포카를 보며 데이비트는 조용히 자기 몫의 티백 홍차를 탔다. 이베트는 끝없이 조잘거렸다.

“폐활량 한계는 어떤가요? 사실 오시기 전에 지난번에 뽑은 데이터를 다시 체크해 봤는데, 섬세한 부분이라서 보조파츠 재질을 더 비싼 걸로 바꾸는 것도 고려하는 게 좋을 것 같더라고요. 예산은 아낄 필요 없다고 하셨지만 이 업계에서 집안 망하는 건 순식간이잖아요. 사실 제 광석과 친구가 보유한 비취 광산이 있는데, 제 이름을 대면 거기서 가격을 괜찮게 맞춰 주거든요
“얼마 전에 크게 싸움질을 한 번 했는데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어. 그리고 지금 쓴 것보다 더 비싼 걸 써도 되니까 비취는 참아줘. 그건 나랑 상성이 안 좋더라.”
“에, 비취가 더 예쁜데. 아무튼 알겠습니다. 바이탈사인도 별 문제 없으니까 오늘 정착수술 하고 가실게요. 보이드 씨, 그쪽에 서류 뒀으니까 보호자 동의 사인 부탁드릴게요.”

데이비트가 자주 앉는 소파 앞의 테이블에 서류철이 볼펜과 함께 놓여 있었다. 지금까지 세 번 정도 본 적이 있는 서류였고 앞으로도 몇 번이 더 남아 있다. 데이비트는 지금까지 퇴직금의 십 분의 일 정도를 이베트의 계좌에 쏟아부어 VIP 취급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데이비트도 테스카틀리포카 본인도 그 사실을 유감스럽게 생각한 적은 없다.

“닥터, 사인 끝났습니다.”
“네, 고마워요~. 수술은 저번이랑 비슷하게 걸리는데 보고 계실 건가요? 마취 필요 없는 수술이라 꼭 계실 필요는 없어요.”
“데이비트, 나가 있어. 근처에 영화관 있던데 영화라도 한 편 보고 와.”

테스카틀리포카가 굉장히 함축적인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데이비트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저 마술사는 수술 도중에도 인체의 내외를 불문하고 이거 보라고, 너무 예쁘지 않냐고 데이비트나 테스카틀리포카 같은 치들이 듣기에는 트래시 토크에 가까운 찬탄을 퍼붓기 때문이다. 그걸 듣는 게 테스카틀리포카 혼자라면 몰라도 관전하던 데이비트가 끼어들면 테스카틀리포카가 대처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간다. 당해도 혼자 당하는 게 낫다고 결론 내린 것 같았다.
데이비트는 눈빛으로 웅변을 하는 테스카틀리포카를 보며, 할 수 있는 것이 많아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존재 특유의 주도권을 빼앗기는 것을 싫어하는 욕구란 참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이 생각 자체가 자기 얼굴에 침 뱉는 행위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고 대답했다.

“알았다.”


*


이베트 베자리우스의 공방은 교외의 주거지구 외곽에 있었고, 이 주거지구와 번화가 사이에는 작은 크기의 쇼핑몰을 동반한 멀티플렉스가 있었다. 주말이라면 여유롭게 영화를 선택하는 대신 그 때 자리가 남는 영화를 반강제적으로 골라야 했겠지만, 오늘은 평일이었으므로 데이비트는 비교적 여유로운 기분으로 멀티플렉스의 발권용 기계 앞에 서서 지금의 개봉작을 체크했다. 〈쥬라기 공원〉의 후속작이나 마블 코믹스의 실사영화를 눈으로 훑으면서 데이비트는 자연스럽게 14년 전에 시계탑 전승과 부지 내에서 사라진 미국인 소년의 추억을 생각했다.
소년의 아버지는 어린애도 좋아할 만한 취미생활을 하라고 타박을 받지 않는 위치의 양육자였으므로, 소년은 영리하니 괜찮다는 핑계를 대고 소년을 데리고 영화관에 가고는 했었다. 그걸 아직 짐작할 수 없는 연배였던 소년은 아버지가 좋으면 그 애도 좋으니 자연스럽게 영화를 나름대로 좋아하게 되었다. ‘Day-bit’는 어땠느냐 하면, 저 부모와 자식에게 영화에 대한 애착은 어느 정도 물려받았지만 그들만큼 영화를 즐길 수는 없었다. 데이비트의 넓은 시야는 고확률로 영화의 내용 이상으로 더 중요하고 기록에 남겨야만 하는 무언가를 관측했다. 데이비트가 텍스트로 정리된 시놉시스 대신 영화를 이루는 영상이나 음악을 그 날 분량의 기록에 넣고 싶을 정도로 인상깊은 작품은 손에 꼽힐 정도로 적었다. 그래서 데이비트 시점에서 보면 영화 관람은 비교적 손해를 보는 취미생활이었다. 그래도 나쁜 취미생활은 아니라고 데이비트는 생각했다. 데이비트는 그 기억을 없앨 것을 전제하고 그 순간을 최대한 즐기는 일에 익숙했다. 영화를 볼 때도 이 작품을 남들과 같은 형태로 즐기지 못한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그것이 데이비트가 영화를 즐기지 않을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데이비트는 칼데아의 영화 상영회에도 곧잘 참여하곤 했다. 물론 이 사실을 남들이 알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이건 남들은 잘 모르는 얘기다. 테스카틀리포카 정도나 알고 있다.
데이비트는 발권기 앞에서 자신의 하루 기억분량 정도 고민한 끝에 〈쥬라기 공원〉의 후속작을 골랐다. 발권 버튼을 누르자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데이비트는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오래 걸려서 미안하 음?”

등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영화는 그냥 평범했다. 믹틀란에서 생활하던 시기가 생각나서 고른 것이었는데 그렇게 보니 더더욱 기분이 묘했다. 개봉한 지 얼마 안 된 작품이었지만 어린애들 보기에는 꽤 무서운 연출이 많았다. 그게 입소문을 탔는지 주말이 아닌 것을 감안해도 관객 수는 적었다. CG로 재현된 공룡들은 꽤 무서운 크리처처럼 묘사되어 있었는데, 실질적인 스펙은 그치들보다 무해하고 얌전한 성격이 대부분인 믹틀란의 디노스들이 더 강하고 뛰어다나는 사실을 생각하면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상영시간 내내 그런 잡스러운 생각을 하거나, 이베트의 대화상대를 해주면서 고전하는 테스카틀리포카를 보거나 하면서 두 시간 가량을 보냈다.
데이비트는 스탭롤을 눈여겨 보는 정도의 영화광은 아니었지만 이 영화의 배우들이 초기작과 똑같이 유지되었는지는 궁금했으므로 스탭롤을 조금 지켜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는데, 출구 쪽에서 큰 소리가 났다.

“C열에 분명히 누가 있었다니까요!”

옷을 편하게 입은 젊은 남자였다. 거북목이나 손의 모양을 보니 사무직 종사자고 휴가를 내고 오전에 용무를 본 뒤 남은 시간을 때우려고 영화관에 온 것 같았다. 화를 내고 있지만 육체의 상태를 잘 보니 겁에 질린 것 같았다. 그 상태로 출구를 지키던 영화관 직원을 붙들고 소리를 높이고 있다.

“C열에 분명히 사람이 있었는데, 불 켜니까 바로 없어졌다고요! 내가 여기서 그걸 몇 번째 봤는지 알아요?!”
“손님,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희 쪽에서는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요.”

영화관 직원이 난감한 표정으로 상대를 달래면서도 다른 관객들을 도움을 청하듯 바라보았지만 몇 안 되는 관객들은 못 본 척 두 사람을 지나쳐 나가는 상태였다. 직원에게 계속 화를 내던 관객은 공포와 짜증을 견디지 못했는지 혼자 짜증을 내며 도망치듯 나가 버렸다. 그 순간, 데이비트는 확실하게 감지했다. 사람은 입으로는 거짓말을 해도 신체반응으로는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영화관 직원은 곤란한 손님 때문에 난감해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어느 정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데이비트는 다른 관객들이 모두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고 직원에게 다가가 물었다.

“실례합니다.”
“네, 손님. 뭔가 문제 있으셨나요?”
“혹시, 당신도 조금 전 나간 사람이 말한 자리에 누군가 있다가 사라지는 걸 봤습니까?”
…….”

상대가 반사적으로 눈길을 피했다. 데이비트는 그것만으로도 꽤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존재였으므로, 다음 상영이 시작되기 전에 대화를 끝내야 한다는 일념 하에 빠르게 되물었다.

“알겠습니다. 질문을 바꾸죠. 한 번 이상, 여러 번 봤습니까?”
다 알면서 왜 물어 봐요?”
“자세히 설명해주십시오.”

데이비트보다도 조금 어린 것으로 보이는 영화관 직원은 북받치는 설움을 참지 못했는지 두서 없는 말투로 빠르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자기가 근무하기 시작하고 반 년쯤 뒤부터 갑자기 ‘그게’ 출몰하게 되었다, 이 상영관에만 나오는 것도 아니다, 그것 때문에 그만둔 사람도 있는데 매니저한테 이야기해도 매니저도 본사에서도 아무것도 해 주지 않는다.

“매니저님한테 몇 번이나 말했는데, 네가 피곤한 상태인데 자꾸 무서워하니까 없는 걸 보는 거라고, 그냥 무시하라고 하시는데저는 진짜로 봤단 말이에요.”
“어떻게 보신 거죠?”
“매표소에서 기계 마감하는데, 등 뒤에 누가 있는 거 같아서 돌아보니까, 그게 이렇게 서서 절 보다가 사라졌다고요.”

어깨를 늘어뜨린 채 시무룩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영화관 직원을 보면서, 데이비트는 조용히 염화念話를 연결했다.

‘테스카틀리포카.’
‘뭐야, 갑자기.’
‘일이다. 네가 필요해.’

마침 이 방면의 스페셜리스트가 도보로 15분 거리에서, 한쪽 허파를 대신할 물건의 정착수술의 마지막 시퀀스를 밟는 중이었다.


*


“유령 맞아. 흔적이 잔뜩 남아있네.”

소독약 냄새를 풍기며 멀티플렉스의 매표소가 있는 로비에 나타난 테스카틀리포카가 멀티플렉스 건물을 한 번 돌아본 뒤 한 말이다. 테스카틀리포카가 수술을 마치고 멀티플렉스까지 나타나는 40분 남짓한 시간 동안 멀티플렉스의 근무자들에게 혹시 유령을 본 적 없느냐고 탐문하고 다녔던 데이비트는 물었다.

“왜 내게는 보이지 않았지?”
“너는 원래 그 방면의 감지능력은 낮잖아. 그리고 너는 딱히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그런 부류의 존재들은 연약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떠도는 소문이나 공포에 기대서 겨우 존재를 유지하거든. 네가 공유해준 정보들을 들어 보면 그 녀석은 그 정도로 사념이 강하지도 않아. 아마 이 영화관 어딘가에 뭔가 그 유령이 생전에 남긴 유품 같은 게 남아있어서 그걸 토대로 이 영화관에 출몰하는 걸 거다.”
“그런가. 혹시, 부정적인 느낌은 들지 않았나?”
“악한 존재냐는 얘기지? 그런 녀석들은 내가 나타나면 바로 힘의 크기를 인지하고 도망치던가 반응할 거다. 하지만 그런 건 딱히 느껴지지 않는군. 그래도 놔둬서 좋을 건 없다고 본다. 이런 하잘것없는 공포여도 많이 축적되면 강해지고, 그런 존재들이 힘을 얻으면 대체로 부정적인 방향으로 진화하거든?”

테스카틀리포카는 꽤 즐거운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테스카틀리포카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을 보자 멀티플렉스의 직원 복장을 단정하게 입은 중년 여자가 데이비트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목에 건 사원증에 매니저라는 직함과 함께 이름이 적혀 있다.
데이비트가 선수를 쳐 말했다.

“호출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군요. 매니저님이시죠? 반갑습니다.”
“환영합니다, 고객님. 상영 도중에 그런 일을 겪으셔서 당황하신 것은 이해합니다만, 저희 직원들까지 당황하게 하시면 곤란합니다.”

매니저는 사무적인 태도로 일관했지만 그냥 보기에도 금방이라도 한숨을 쉬고 싶은 표정이었다. 데이비트는 그녀의 태도를 이해했다. 자신이 그녀의 입장이었다면 자신 또한 저런 태도였을 것이다. 평소 같으면 데이비트 대신 나서서 혀에 기름을 바른 것처럼 떠벌거릴 테스카틀리포카는 무슨 생각인지 조용했다. 이것도 저치가 좋아하는 ‘시련’ 일까.
데이비트는 대답했다.

“매니저님. 저는 상영관에 유령이 나오니까 항의를 하자던가, 뭐 그런 의도로 직원분들을 선동하고 다닌 게 아닙니다. 애초에 저는 그 유령으로 추정되는 뭔가를 보지도 못했습니다.”
“나쁜 의도가 없으신 건 압니다. 하지만 고객님이 하시는 일이 저희 직원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고, 근무에 방해가 되니까 그러는 거예요. 그리고, 애초에 그게 사실이더라도 저희는 그런 걸 처리할 방법도 없는데 교회에 가서 기도라도 받아야 하나요?”

자주 한 말을 반복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오래 시달렸을 것이다. 지친 얼굴로 여러 번 반복한 말을 또 하는 마술적인 능력도 신비를 보는 감지능력도 부족한, 자신처럼 타인의 신체반응을 보고 그가 진심인지 간파할 수도 없고 도움을 청할 만한 신비에 대응하는 스페셜리스트를 데리고 있지도 못한 보통 사람.
데이비트는 자연스러운 측은지심을 담아 말했다.

“어떻게 보자면, 맞습니다.”
“맙소사. 정말로 목사님을 모셔 오라고요?”
“아니오. 정말로 유령이 나왔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매니저님. 관객들도 직원분들도, 뭔가 영화관 측에서 이 상황에 대응하고 있다고 눈에 보이는 형태로 보여주길 바라는 겁니다.”
정말로 그러면 괜찮아질까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지켜보는 테스카틀리포카의 시선을 느끼면서, 최대한으로 친절하게, 마술도 신비도 모르는 보통 사람의 시점에서 납득이 가고 자기 자신도 납득할 수 있는 말을 한다.

“괜찮게 만들어야지요. 그게 더 많이 알고, 알기 때문에 상황을 수습할 책임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할 일이니까요.”

그리고 직원들의 증언을 듣고 테스카틀리포카가 찾아오는 동안 막연한 형태로 생각한 대책을 조심스럽게 입에 담았다.

“그런 의미에서 제안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잠시 사무실에서 얘기할 수 있을까요.”


*


작년에 있었던, 3일간 밤부터 새벽 시간에 걸쳐 〈해리 포터〉 시리즈의 실사영화를 1편부터 7편까지 모두 상영하는 올나이트 상영회에 참석했던 〈해리 포터〉 시리즈의 열렬한 팬인 관객이, 상영회 마지막 날 영화관에 오던 도중에 사고를 당해 죽고 말았다. 하던 일을 마치지 못한 그 관객의 유령은 영화관에 눌러앉아 버렸고, 지금 영화관에 출몰하는 것은 그 관객의 유령이다.
데이비트가 이 이야기를 마치자 데이비트와 테스카틀리포카 일행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매니저는 풉 소리를 내며 웃었다가 약간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그런 걸 믿겠어요?”
“직원들이 그 유령으로 추정되는 존재를 보기 시작한 시기가 비슷하던데, 그 즈음에 저 상영회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핑계로 사용하기도 좋고, 직원들을 안심시키려면 가능한 한 웃기고 별 것 아닌 계기인 편이 좋겠죠.”
그건 확실히 그렇군요.”

매니저가 조금 전에 비하면 납득이 간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곁에서 멋대로 물을 마시던 테스카틀리포카가 끼어들어 말했다.

“아가씨는 이 사건에 쭉 합리적인 태도를 견지해 왔지. 그러니까 이걸 진지하게 밝혀서는 안 돼. 일단 저 상영회를 올해 한 번 더 하기로 했다고 공지해. 그리고 나와 이 녀석이 이런 제안을 했고, 말도 안 되지만 그래도 한 번 시도는 해 보자는 투로 직원들에게 흘려.”
“조언 감사합니다, 고객님. 어그런데아가씨?”
“아가씨가 아가씨지, 그럼.”

테스카틀리포카는 이 근방에서 살아 숨쉬는 지성체들 중 제일 나이를 많이 먹었고 모든 자신이 여성이라 느끼는 존재를 젊은 아가씨 취급할 수 있다. 물론 그걸 설명할 만큼 친절한 존재는 아니다. 데이비트는 이 상황에 대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가 없는 것 같은 매니저와 뻔뻔한 테스카틀리포카 사이에 빠르게 끼어들어 말했다.

“낮 시간에 하는 상영회라면 상영일정이 크게 꼬이겠지만, 딱 사흘간 하는 심야 상영회라면 어느 정도 편성 폭이 넓겠지요. 도움이 필요하다면 말해 주십시오. 어디까지나 저희들의 의견이고 매니저님이 그걸 들어 주는 입장이라는 스탠스를 견지하려면 상영회를 준비하는 동안 저나 이 녀석이 현장을 돌아다니는 편이 좋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 상영회에 드는 일손이 부족하니 아르바이트로 고용하는 걸로 하죠.”
“예. 일정이 정해지면 연락해 주십시오.”
“뭐야 너. 아르바이트 그만두자마자 새 아르바이트야?”
“진지한 얘기할 땐 조용히 좀 있어, 야야우키.”

상영회 일정은 3주 뒤로 잡혔다. 일정이 확실하게 잡히면서 영화관에 단기 아르바이트 계약서를 쓰러 왔을 때, 데이비트와 테스카틀리포카는 영화관의 유령의 앵커 역할을 한 물건을 찾아냈다. 모두가 죽음을 관장하는 아스테카 출신인 테스카틀리포카의 망자에 대한 감각은 잘 갈린 흑요석처럼 예리했으므로 테스카틀리포카가 좁혀준 좌표 내에서 데이비트의 감각을 동원하면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멀티플렉스는 매표소와 로비, 좌석 수가 적은 상영관으로 사용하는 맨 아래 한 층과 상영관으로만 사용하는 두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2층과 3층을 잇는 에스컬레이터 옆에 있는 장식 구조물의 잘 보이지 않는 틈새에 네 잎 클로버 그림이 프린팅된 아크릴 키링이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바로 치우면 안 된다. 그 상영회를 해야 집단 내의 공포가 사라지는 거니까, 상영회 시작하고 나서 너랑 내가 같이 해치우자고.”
“알고 있다.”
“네가 그 유령을 가엾게 느끼는 것 같으니까 얘기하는 거야.”

굉장히 애매한 시간대였기 때문에 그날 데이비트와 테스카틀리포카는 멀티플렉스 아래층의 식당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데이비트는 매콤한 양념이 된 동양식 비빔국수를, 테스카틀리포카는 튀긴 연어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었다.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문 테스카틀리포카는 이 나라 요리는 왜 죄다 이 모양이냐며 투덜거리다가 다시 발언을 재개했다.

“그 유령의 정체에 흥미가 있냐?”
“어떤 유령인지 정도는.”
“오랫동안 가지고 있던 물건이면 내가 어느 정도 기억을 뽑아낼 수 있지만 그게 아니라서 나도 더는 무리야. 이 영화관 아래층에 있는 대형 문구점에서 여자 동행자가 사 준 물건이라는 것 정도밖에 몰라.”
“‘밖에 모른다’ 고 말한 것치고 잘 알고 있군.”
“과시하는 거야.”

데이비트는 묵묵하게 국수를 씹어 삼켰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돌아간 뒤 이딴 맛없는 걸 오늘의 한 끼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혼자서 야채나 리코타 치즈를 썰고 훈제연어를 꺼내오더니 드레싱을 부어서 샐러드를 만들었다. 데이비트와 집에 있던 카독에게도 먹겠냐고 물어봤는데 데이비트는 이미 배가 불렀기 때문에 한 입만 받아먹고 말았다.


*


상영회까지 일주일 가량이 남았을 즈음부터 매니저에게 연락이 왔다. 데이비트는 테스카틀리포카를 대동하고 몇 번 멀티플렉스에 들러 행사에 필요한 이런저런 장식물을 꾸미고 동선을 체크했다. 매니저가 소문을 잘 퍼뜨려 두었는지 데이비트가 멀티플렉스에 처음 간 날 마주친 직원들이 지나가면서 데이비트에게 아는 체를 하거나 감사 인사를 하기도 했다. 그런 한편으로 저런 본격적인 상영회까지 하는 건 너무 심한 거 아닌가, 솔직히 미신 같다며 반신반의하며 수군대는 직원들도 있었다. 데이비트는 그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성실하게 작업에 몰두했다. 종이를 자르거나 당첨 물품을 포장하고 직원들이 입을 망토나 마법사 모자를 마련하는 작업은 꽤 즐거웠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작업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영화관의 유령을 몇 번 찾아본 모양이었는데 계속 허탕을 쳤다. 데이비트는 솔직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테스카틀리포카처럼 격이 지나치게 높은 존재 앞에 앵커가 없으면 존재를 유지할 수조차 없는 유령이 나타날 리가 없었다.
상영회 당일은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꽤 많았다. 팬을 대상으로 하는 상영회는 허명이 아니라서 7월의 더운 날씨였음에도 관객들은 망토를 두르거나 형형색색의 목도리를 두르고 팬시하게 디포르메된 인간 캐릭터나 부엉이 인형을 든 채로 나타났다. 후기 작품은 왜곡이 심하니까 초기 작품만 볼 거라던가, 작년에 올라온 연극은 봤냐던가, 최근에 〈킬 유어 달링〉을 다시 봤는데 해리 포터 보러 오니까 기분이 묘하다던가, 같은 대화를 나누는 관객들을 통과시키면서 마법사 모자를 쓴 테스카틀리포카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너 어릴 때 나온 소설이었지? 읽어 봤냐?”
“5편까지는 읽었다. 어려서 잘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너는 읽었나?”
“믹틀람파의 라이브러리에는 갖춰뒀지만 이 육체에도 그 데이터를 넣어두진 않았어. 마법을 사용하는 영웅인 주인공 소년이 차별주의자인 악역과 싸우고, 이 시리즈가 굉장히 히트했다는 것밖에 몰라.”
“그 정도 알면 된 것 같군.”

조금 긴장한 얼굴로 입장하는 관객들을 지켜보던 매니저가 데이비트와 테스카틀리포카에게 고개를 끄덕인 뒤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 다 진지한 표정이었지만 마법사 망토와 모자 차림이라서 모양새가 굉장히 묘했다. 밤샘 상영회는 아무래도 관객들의 체력 문제가 크다 보니 객석이 잘 차지 않아서 별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상영관이 생각보다 많이 찬 모양이었다. 초기작이 인기가 많기 때문이라고 데이비트는 테스카틀리포카에게 귀띔했다.
상영회 첫날은 상영관에 들어가지 않고 상영관 밖을 지키는 직원들과 교대로 순찰을 돌았다. 데이비트와 함께 순찰을 돌던 직원 중, 첫날 데이비트에게 유령을 봤다고 하소연하던 직원이 있었다. 직원은 데이비트에게 솔직히 매니저님까지 설득해줄 줄은 몰랐다, 고맙다, 근데 그 유령이 해리 포터 보러 왔다가 죽었다는 거 정말이냐고 물어봤다. 데이비트는 조금 고민하다가 파트너 쪽이 영적으로 민감해서 그렇지 나는 잘 모른다고 둘러댔다. 이 직원은 상영회가 끝나 모두가 자유의 몸이 될 때까지 테스카틀리포카와 눈을 마주치는 것을 슬슬 피했다.
상영회 이틀째, 겁이 많은 직원들이 테스카틀리포카를 보면 슬슬 몸을 뺐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데이비트와 짝을 지을 수 있게 된 테스카틀리포카는 2층과 3층 사이로 향했다. 데이비트는 장식 구조물 틈에 미리 준비해온 집게를 집어넣어 손재주 있게 아크릴 키링을 꺼냈다. 보호비닐도 떼어내지 않은 새것이었다.
테스카틀리포카가 손을 내밀었다. 데이비트는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집게로 키링을 건네주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키링을 받아들고 주변을 몇 번 돌아보았다.

“왜?”
“아니, 이거 사준 사람 연배를 보니 슬슬 나타날 때가 됐어.”
“사준 사람?”
“너도 보면 알, 오우.”

테스카틀리포카가 데이비트의 등 뒤에 눈길을 고정했다. 데이비트는 그 때에야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데이비트가 뒤를 돌아보자 테스카틀리포카가 빠르게 데이비트의 손에 키링을 쥐어 주었다. 키링이 손바닥에 닿자 드디어 그것이 눈에 들어왔다. 몸의 윤곽이 흐릿하고 표정도 읽을 수 없으나, 키는 어느 정도 컸지만 완전히 어른이 되지는 못한 것 같은 청년과 소년 사이에 낀 어린 사람을 연상시키는 형상의 무언가였다.
작년부터 모두를 공포에 몰아넣었던 영화관의 유령은 테스카틀리포카를 두려워하는 듯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었으나 확실히 이렇게 말했다.

“저기.”

그리고 데이비트의 손을 가리켰다.

“그거, 저희 엄마가, 사줬는데.”
…….”
“제 거, 예요.”

테스카틀리포카가 데이비트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데이비트는 잠시 홀린 듯 유령을 보다가 물건을 내밀었다. 물건을 받아 든 유령의 표정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만족한 것은 분명했다. 퇴거하는 영령처럼 빛무리가 되어 흩어졌으니까.
테스카틀리포카는 말했다.

“네게 저 녀석을 봤다고 증언한 사람들이 다 젊더라. 많이 연상인 사람은 무서웠어도, 자기보다 조금 연상인 녀석들에게는 잃어버린 물건을 찾는 데 도움을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럼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은 건
“그런 이유였겠지. 참 나, 나는 저 정도로 어린애한텐 너희들 기준으로 평범하게 자비로운데. 그래도 소중한 걸 되찾겠다고 내 앞에도 나타나다니 용기 있는 녀석이야. 자라면 괜찮은 전사가 됐을 텐데.”

테스카틀리포카는 혀를 찼다. 그러다가 고양이 같은 얼굴로 하품을 했다.


*


상영회 마지막 날, 데이비트는 이틀 연속으로 밤을 새워서 인간인 체를 하는 영령인 주제에 눈에 띄게 피곤해 보이는 테스카틀리포카를 보고 매니저에게 오늘은 상영관 안을 모니터링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상영회 동안은 유령을 목격했다는 보고가 들어오지 않아 어느 정도 안도하고 있던 매니저는 바로 OK를 내리고 안에 들여보내 주었다. 이제 초자연현상이 벌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데이비트와 테스카틀리포카는 서서 모니터링을 하는 대신 약간 사보타주를 하는 셈치고 외곽 자리에 앉았다. 머릿수가 많이 줄어든 관객들은 상영관 가운데 자리를 거의 다 채우고 있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한동안은 의식을 유지했으나 1시를 조금 넘긴 순간부터 고개를 끄덕이며 졸기 시작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믹틀란 시기에 자신이 지금 사용하는 육체의 연령이 30대 후반 정도라고 밝혔는데 이 정도로 잘 재현할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데이비트는 생각했다.
데이비트는 졸고 있는 테스카틀리포카를 곁에 앉힌 채 영화의 내용에 집중했다. 오늘 상영되는 것은 마지막 편인 7편을 두 편으로 나눈 2부작이었다. 데이비트는 이 영화의 원작을 5편까지밖에 읽지 못했고 그나마도 기억력이 믿음직스럽지 않은 평범한 인간 어린애의 정신상태로 보았기 때문에 자세히는 기억하지 못했다. 그래도 영웅담이란 거의 비슷한 포맷을 취하기 마련이고, 벌어지지 않은 사건의 틈과 틈도 어느 정도는 알 수 있기 마련이다. 부모의 죽음 뒤, 어릴 때부터 타의적으로 유명인으로 지냈던 마법사 소년은 매해 목숨을 위협받으며 많은 시련을 겪는다. 하지만 소년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결국 악은 부활하고, 집처럼 생각했던 학교 밖으로 쫓겨나 악을 물리칠 방책을 찾아 모험을 한 끝에 종국에는 자신의 죽음만이 상황을 해결할 방책임을 알게 된 영웅이 된 소년의 이야기를 기반지식이 온전치 않아서 듬성듬성한 부분을 자신의 추론능력을 총동원해 끼워맞춰 가며 보던 도중, 데이비트는 문득 테스카틀리포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조는 대신 목을 이상한 각도로 꺾은 채 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데이비트는 테스카틀리포카가 깨지 않도록 테스카틀리포카의 머리를 잡고 천천히 움직여서 테스카틀리포카가 자기 어깨에 기대게 만들었다. 어깨에 한 사람 분량의 무게가 실렸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조금 전에 비해 편한 얼굴로 숨을 색색 내쉬었다. 그것을 본 데이비트는 문득 데이비트는 반년 전의 일을 떠올렸다. 지구 백지화 사건의 최종국면, 테스카틀리포카가 이번에야말로 눈앞에서 퇴거하겠구나 결론내리고, 가용 가능한 자원을 모두 소모해서라도, 테스카틀리포카와 마스터와 서번트라는 접점조차 없어지더라도 테스카틀리포카와 계속 함께 있고 싶다고 충동적으로 결정했을 때를 생각한다. 손등을 장식한 령주를 모두 소모하고 테스카틀리포카가 깨어나기만을 기원할 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순간임을 깨닫는다. 어둠 속에서 졸고 있는 테스카틀리포카와 함께 영화관에 앉아, 골몰하는 사람들 특유의 고양감에 휩싸여 있는 관객들과 함께 내용을 잘 모르는 시리즈물의 마지막 편을 보는 미래. 예상치 못한 고양감이 데이비트의 전신을 침식했다.
데이비트가 평생토록 남길 정보를 선별해내고 분절하고 재결합하여 기록할 때, 데이비트를 제일 곤란하게 만든 것이 이런 부류의 정보값이 없어 압축해내어 보존하기 어려운 순간들이었다. 이 모든 시간을 이루는 요소를 자신의 기억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 이런 순간이 다가올 때 데이비트는 최대한 즐기기 위해 노력했고, 실제로 그 순간을 즐겨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간혹 그것이 어려워지는 순간도 있다. 상영관의 어스름, 대체품으로 채워넣은 테스카틀리포카의 육신의 무게, 데이비트가 테스카틀리포카의 어깨가 오르내리는 감각에 집중해 버렸기 때문에 조금 멀게 들리는 배우의 대사를 배경음악 삼아 잠든 테스카틀리포카의 창백한 얼굴을 곁에서 지켜보는 모든 순간들을 기억에 포함시키고 싶다는 욕망에 시달려야 하는 순간이 있다.
데이비트 젬 보이드는 깨닫는다. 자신이 테스카틀리포카와 함께 지내는 동안, 이런 요약하거나 일부분만을 잘라내면 정보값이 없어지지만 소중히 여기고 싶은 순간들은 끝없이 생겨날 것이라고. 테스카틀리포카와 함께 살아남는 것을 목적삼은 순간부터 자신에게는 각오가 필요해졌다고. 즐기는 동안에도 그 순간들을 조금 더 아까워하고, 조금 더 아쉬워하면서도 계속해서 버릴 각오. 5분짜리 단편영화를 계속해서 연출하기 위해, 테스카틀리포카와 함께 걸어가기 위해 더 소중히 여기고 싶은 테스카틀리포카와 함께 한 순간들을 버리고 갈 각오.
그것은 당연하고 익숙한 일이었지만 역시 아깝고, 까닭없이 조금 화가 나고, 그러자 조금 토라진 상태로 비뚤어진 짓을 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 기분을 잠재우기 위해 데이비트는 자고 있는 테스카틀리포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잠을 얕게 자는 테스카틀리포카는 얼굴을 약간 찌푸리다가 눈을 떴다. 눈이 마주친다. 스크린의 빛으로 왜곡되어 창백하고 현실감이 낮은 색을 띤, 반년 전의 데이비트가 부디 다시 보게 해 달라고 죽을힘을 다해 빌었던 흐릿하고 푸른 눈동자.
데이비트는 지금은 더 욕심을 부리고 싶다고, 네가 자는 걸 조금 더 즐기고 싶다는 말을 대신해서,

“더 자.”

라고 속삭였다.


*


관객들이 돌아가고, 밤샘 상영회의 뒷수습을 마치고 매니저와 직원들에게 인사를 받은 데이비트와 테스카틀리포카는 오전 5시가 되기 조금 전에야 멀티플렉스가 있는 건물을 벗어났다. 런던의 7월은 해가 빠르게 뜨기 때문에 바깥은 이미 밝았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영화관 의자에 구겨 넣었던 몸을 펴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데이비트는 하품을 참으며 말했다.

“잘 자더군.”
“어, 간만에 푹 잤어. 자세는 불편했는데.”

테스카틀리포카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비트는 카독의 집으로 향하는 버스가 몇 시부터 오는지 체크했다. 카독의 집은 대중교통과 연이 없어서 버스를 타도 지하철을 타도 조금 불편한 데가 있었지만, 데이비트는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기 때문에 버스를 타기로 했다. 사실 새벽 2시 즈음부터는 자고 싶었지만 잘 수가 없었다. 말해두고 싶은 것이 있었다.
데이비트는 버스 정류장의 의자에 테스카틀리포카를 앉히고 곁에 선 채 말했다.

“로드 브리시잔의 복귀 제안을 거절한 것 말이다.”
“아, 그거.”
“카독에게는 이유를 밝히지 않았지만, 사실 그건 전적으로 내 입이 싸기 때문이다.”
“뭐어?”

테스카틀리포카가 오랜만에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데이비트는 천성적으로 수다쟁이인 평소의 테스카틀리포카처럼 말을 쏟아냈다.

“내 방침을 현실로 옮기려면 전승과에 있는 편이 낫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거기 머무르다 보면 구성원들 대부분은 내가 칼데아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 궁금해할 거고, 기대가 빗나가서 실망한 상대를 보고도 쭉 진실을 숨길 자신이 없었어. 그러면 칼데아와의 비밀유지의무 위반이 되고, 나도 내게 실망할 것 같았다.”
“참 내뭐 그래도 잘 생각했다. 너 보이는 것에 비해서 떠벌리기 좋아하는 성격이잖아. 괜히 날 불러낸 게 아니라니까.”
“그러니까, 그런 걸 직업으로 삼을 생각이다.”
“어?”
“탐정사무소를 하려고 한다.”

데이비트는 유령이 되어서도 어머니가 사준 물건을 찾아내려 애쓰던, 물건을 돌려받고 사라지던 영화관의 유령을 생각했다. 이래저래 많은 일은 있었어도 종국에는 고맙다며 자신들을 배웅하던 영화관의 직원들을 생각했다. 아마도 전승과에 있던 즈음처럼 실질적으로 지구의 멸망을 막기 위해 암약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진실을 밝혀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진실을 숨기면서 세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건 꽤 좋은 기분이었다. 노움 칼데아가 자신을 찾아오기도 전에 잃어버린 경영고문이 해 오던 일. 과시하고 떠벌리고 그것으로 감사받고 싶어 하는 것이 미덕이 되는 일.
테스카틀리포카는 못 말리겠다는 듯 웃었다.

“그래, 너답게 엉뚱하다. 돈은 별로 안 되겠지만. 드디어 아르바이트 생활 청산하는 거냐?”
“그래. 카독에게도 얘기해 둬야겠지.”
“기뻐하겠구만.”
“그리고, 탐정에게는 비망록 작가나 조수가 필요하지.”
“?”
“너도 함께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잠시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데이비트를 올려다보았다. 데이비트는 자신에게 말했다. 이 녀석에게는 괜찮다. 이 녀석에게는 이 정도 욕심은 부려도 된다. 그것을 믹틀란에서 테스카틀리포카가 증명해 주었다.
데이비트는 당연한 것을 재촉하듯 물었다.

“그렇게 됐다. 답변은?”

테스카틀리포카는 어린애가 떼쓰는 걸 보는 어른 같은 표정으로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이제부터 소장님이라고 부르면 되냐?”
“어감이 별로야. 그냥 이름으로 불러라.”
“나 참.”
“그래. 사무소는 미국에서 낼 생각이다.”
“말이 왜 이렇게 많아, 진짜.”

데이비트는 집에 돌아가는 버스에서 목을 꺾고 잤고 테스카틀리포카도 다시 잠들어 버렸기 때문에 둘은 버스 종점에서 버스 기사의 채근을 듣고 깨어났다. 데이비트는 그 때 테스카틀리포카의 옷에 자기 침 자국이 난 것을 발견했다. 나는 이 순간을 편집해버릴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데이비트는 혼자서 생각했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