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가버스 미스루틸

*지인요청으로씀
*약간 피가치레 착시현상 有

피가로 선생님, 제가 미스라 씨를 화나게 했다면 정말 죄송하다는 말 좀 전해 주시겠어요. 미스라 씨가 기억하는 어머니와 제가 기억하는 어머니가 다르다는 것을 십분 이해합니다. 그러나 제가 기억하는 어머니도 분명히 북풍의 대마녀 치렛타를 구성하는 조각 중 하나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당신을 섣불리 이해하려고, 당신을 감히 연민하려고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센티넬의 생존전략에 가이드가 더 이상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생존만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은 몹시 고되고 지치는 일입니다. 당신들의 힘이 영속적인 것에 비하면 그 생존전략은 너무나 시한적입니다. 당신들이 발 붙이고 살아가는 북부의 가혹함과는 비할 바 못되지만, 우리 형제 역시 아주 미진하게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생존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 삶은 그저 연명일 뿐이라고. 어머니께 그렇게 배웠습니다. 인간은 어쩔 도리 없이 외로움을 타는 생물입니다. 우리 형제는 어머니가 엮어주신 연緣 아래서 센티넬과 가이드로서 생활할 수 있습니다. 생존과 생활은 다릅니다. 당신의 불면이 단순히 가이딩 대체제의 부작용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센티넬은 마음을 타는 능력입니다. 인간이 어쩔 도리 없이 외로움을 타듯이…….








누가 외로워한다고?

오웬이 날카롭게 코웃음쳤다.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내면서도 웃고 있는 입매는 진심이다. 불쾌함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고 그 불쾌함이 주는 유열도 사실이니까, 실로 정직하고 속내를 숨기지 않는 것이 뼛속까지 북부인의 마음가짐다웠다. 그러니까 피가로는 이런 점이 편했다. 적어도 북지부 사람들과 대화할 때 만큼은 머리를 비워도 된다는 점이.

“좀 거칠게 요약하면 그렇다는 거지. 말을 들어보면 아주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던데.”

심지어 반응도 제법 빠르고 정직하기까지 해서 놀리는 맛이 있다. 피가로는 찻잔에 각설탕 세개를 한꺼번에 넣고 휘휘 저어서 오웬 앞으로 내밀었다. 설탕을 타는 피가로의 손짓을 바라보는 눈에도 불쾌함이 역력하게 배어 나온다. 피가로는 그나마 오웬이 이런 반응이라도 해 주니까 재미가 있어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애들 앞에 있는 것 만큼 속 편한 일이, 그에게는 최근 없었기 때문이다.

“비위도 좋네.”

외로우니까. 그래서. 그럴 수도 있다고? 오웬은 아주 징그러워 죽겠다면서도 실실 웃었다. 그리고 각설탕을 세개 또 꺼냈다. 여기서 피가로 가르시아는 생각한다. 역시 네가 봐도 그렇겠지? 그게 상식인의 반응이겠지? 진실을 알게된다면 다 저런 표정을 지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게 옳은 일이었다. 치렛타의 이름도 사랑을 얻자마자 곧바로 죽어서 쫓겨났다. 쫓겨난 게 먼저인지 죽은 게 먼저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현역 시절의 치렛타를 생각하면 피가로는 그 힘의 덧없음을 떠올린다. 그 무엇보다 강력하고 아름답고 두려운 힘이 그렇게 볼품없이 한낯 인간의 마음 따위에 굴복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겨주었다는 점에서, 치렛타의 이야기는 두고두고 적절한 선례로 구전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언급조차 금지되어 아는 이들이 극소수이다. 피가로를 포함한 그 극소수의 사람들조차도 치렛타를 입에 올리기 꺼린다. 그렇게 강력하고 아름답고 두려운 힘이 너무 쉽게 굴종했으니까. 그건 너무 볼품없고 초라했으니까. 그걸 교훈 삼아 어린 이능력자에게 구전하는 건 너무 위험했다. 가장 똑똑하고 욕심 많았던 치렛타도 제가 좋다면서 굴종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쫓겨났어도, 쫓겨났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치렛타는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을 있게 만든 모든 것들을 다 벗어놓고 좋다면서 떠난 것이다. 피가로도 남 앞에서는 ‘쫓겨났다’는 표현을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너무 위험하다) 사실 치렛타가 정말 쫓겨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을 있게 만든 모든 것을 다 벗어놓고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굴종을 택한 치렛타가 끝끝내 지키고 싶었던 것.
그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피가로이기 때문에, 그는 이 사태를 가장 심각하고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입장이다.

미스라는 현역 시절의 치렛타가 남긴 유산 중 하나다. 똑똑하고 긍지 있으며 힘을 좋아하는 치렛타가 가장 자신있게 가져온 것. 치렛타가 있었을 때도 드높임 받았던 유산이었고, 흔적조차 남지 않게 치렛타의 모든 것이 청소당한 지금도 미스라만큼은 여전히 으뜸가는 유산의 자리에서 빛나고 있다. 세계라거나, 사람이라거나, 마음이라거나, 하물며 세계와 사람의 마음이라거나.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이야? 거추장스럽지. 한 가지 확실하게 알아야 하는 건 나 자신이다. 나의 이름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 나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곧 긍지이며, 우리는 그 긍지가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거란다. 지금도 센티넬의 헤리티지처럼 구전되는 이 격언은 치레타가 만든 것이다. 그리고 그 격언대로 빚어서 탄생시킨 괴물같은 유산이 바로 미스라. 그런 미스라더러 ‘더는 외로움을 견딜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에요’라는 말을 한 건, 은퇴한 치렛타가 끝끝내 지키고 싶었던 마지막 유산이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이란 말인가? 현역 시절의 치렛타가 남긴 가장 으뜸가는 유산에 대고 너도 언젠가 인간의 마음을 얻어 굴종하며 안식을 찾고 싶을지도 몰라, 라고 말하는……. 굴종을 택한 치렛타가 남긴 인생의 마지막 유산의 등장이라니. 심지어 그렇게 순진하고 해맑고 속 편하게, 오만하기 짝이 없게 말하다니. 치렛타가 마지막에 목숨을 걸어서 남긴 유산이 겨우 이 정도란 말인가? 치렛타의 두 유산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그러니까 오웬 같이 아주 지극히 상식적인 센티넬이라면. 다들 그렇게 이를 갈면서 역겹다고 말하는 게 당연하다. 유산을 남길 때 치렛타가 하고 있던 얼굴을 아는 피가로는……. 그냥 허허 웃는 수 밖에.

“비위가 좋다는 건 누굴 말하는 거야?”

미스라? 루틸? 아니면 나? 피가로는 허허 웃으면서 쿠키 박스를 열었다. 고양이의 얼굴이 제법 귀여우니까 말린 멸치를 더 줄 것처럼, 다분히 갸륵하고 시혜적인 제스쳐였다. 오웬은 그걸 알면서도 별달리 짜증내지 않고 얌전히 쿠키를 집어먹는다. 그리고 딱 피가로가 원하는 적절한 대답을 해 준다. 누구긴 누구야. 너네 셋 다 말하는거지.

다음에 한 번 더 마주칠 수 있었으면 좋겠네. 그때는 둘 다 나란히 죽여버릴테야.

새빨간 딸기잼이 탐스럽게 올라간 쿠키가 부드럽게 부서졌다. 와아, 오웬. 그러면 나는 빼 주는 거야? 피가로는 약간 들뜬듯이 맞장구쳤다. 네 목숨에 그 정도 가치가 있어? 오웬은 웃지도 않고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정말로 흥미를 잃고 완전히 죽은 표정이어서 피가로는 얌전히 꼬리를 내리기로 했다.

센티넬과 가이드가 앙숙이라는것도 이 땅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가이드라는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으니까. 대체로 모든 예외는 다 이 최북단의 땅에 생겨난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보통의 민간인과 다를 게 하나도 없는 가이드 앞에서 가이딩 하나만으로 납작 엎드려야 한다는 것이 센티넬에게는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가이드 쪽 입장도 마찬가지였는데, 센티넬들이야 말로 가이드 없으면 뭣도 못하는 주제에 기세등등하게 이쪽을 깔본다는 게 애로사항이었다. 이 입장 차이는 몇십 년동안 극히 첨예하게 대립하다가 가이딩을 대체하는 신약이 개발되며 비로소 막을 내렸다. 치렛타는 2막에 오른 사람들 중에서도 가장 독보적인 여자였다.

남들이 다 하기 싫어하는 일, 가장 위험한 일, 그리고 그 노고에 비하면 형편없는 현장. 남들보다 잘나게 태어났다고 해서 숭고한 영웅 정신까지 갖춘 건 아니다. 노동의 강도에 등급을 매기지는 않지만 업계 사람들이면 다 안다. 가장 고약하고 고된 것들은 몽땅 북쪽에서 처리된다는 것을. 이 세상에서 가장 보기 싫고 추하고 어렵고 위험한 것은 모조리 뭉뚱그려 북쪽에 던져놓고, 거기서 그것들이 알아서 꽁꽁 얼어버리기를 바라는 게으름과 비열함을. 북쪽 지부 사람들은 다 알았다. 가이딩 대체 신약 개발 소식을 듣고 어떤 사람들은 기뻐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더 지독한 도태감에 빠졌다. 북지부는 대체로 그런 사람들이 살았다. 그동안은 가이드 부족난으로 업무를 진행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었다. 쏟아지는 업무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타당한 변명도 대체 신약이 개발되면서 무력해졌다. 그러니까 이제는 정말 변명의 여지도 없이 가장 춥고 비인간적인 극한의 일터로 밀려나야했다.

이 사태에 혜성같이 화려하게 데뷔한 치렛타는 그 도태와 절망을 긍지로 바꾸어버린 영웅이다. 민간인보다 빼어난 힘을 갖고 국가를 위해 한몸 바친다는 뜻에서의 영웅이 아니다. 그녀는 가장 능력이 빼어나고 국가를 위해 몸바치면서도 그 노고를 치하받지 못한 북지부 사람들에게 영웅적 존재가 되었다. 모든 노고가 배반당한 이 상황에서 북부의 사람들이 신용할 수 있는 건 결국 자신의 힘 뿐이다. 언제는 우리가 세상으로 인해 살아갈 수 있었던가?

웃기는 소리!

한 가지 확실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나 자신. 절대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의 이름. 나의 이름을 잃지 않도록 하자. 세상이 우리에게 뭐라고 해도. 변치 않는 건 나와, 나의 이름과, 나의 긍지. 내가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나 덕택이다. 나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고, 굴복되지 않으며, 세상과 타협하지 않아. 그건 배반과 도태로부터 그들을 지킬 수 있는 마법의 말이었다. 이렇게 성의없이 요약 해 두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이런 말로 사람들을 세뇌시키는게 가당키나 한가 싶지만) 현역 시절의 치렛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 알았다. 누구라도 그때의 치렛타를 보면 바로 설득당했을 거라고. 북지부에 대마녀가 있대. 그 이름은 치렛타. 오웬처럼 어린 센티넬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 어린 센티넬들이 긍지 따위를 운운하면서 이 혹한의 땅에 발붙이고 살아갈 수 있도록 그럴싸한 말을 남긴 게 치렛타의 유산이다. 이제는 아예 하나의 북풍北風으로 일컬어지는 이 모든 것들이.

오웬은 쿠키박스를 통채로 집어 들고 일어났다.

“가니?”
“뭐, 더 할 말 있어?”
“음……. 딱히 없는 것 같네.”
“그럼 여기 있을 이유가 없잖아.”
“그것도 그렇네.”
“시시해.”

문을 열고 나가는 오웬의 뒷모습은 영락없는 북부인의 자세이다. 어깨가 움츠러들 일은 결코 없으며 허리는 언제나 꼿꼿이 서 있다. 엄동설한의 땅에서는 오히려 이렇게 다니는 게 그들의 생존전략이다. 현재는 북풍이라 불리는 북부인의 걸음거리를 보고 있으면 피가로는 어쩔 수 없이 치렛타를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치렛타가 그렇게 걸었으니까. 그렇게 걷는 치렛타를 동경하는 사람들이 치렛타의 걸음걸이를 따라했고 그걸 보고 자란 애들이 커서 오웬처럼 저런 걸음걸이를 하게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그러면 치렛타의 아이는 어떤 걸음걸이를 하고 있었더라. 피가로는 치렛타가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유산에는 흥미가 있었으나 치렛타의 아이들에게는 크나큰 관심이 없었다. 그도 어쩔 수 없는 북부사람이라서.




혹한의 땅에서 사랑이 금지된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사실 너무 늦게서야 제정된 감이 없잖아 있다……고, 피가로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치만 북풍의 대마녀가 그렇게 될 줄은. 그건 정말 아무도 몰랐으니까. 아름답고 교활하며 강인하고 독립적인 그 치렛타가 사랑이라는 이름 하에 허무하게 사라져버릴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까. ‘후훗, 피가로. 소식 들어서 알겠지만 이쪽은 내 남편 되는 사람이야.’ 평생을 북쪽에서 나고 자란 주제에 남쪽 촌구석 물을 좀 먹었다고 제법 온순하고 명랑한 말투를 쓰는 치렛타는, 정말이지 그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 어려울 것이었다. 결혼 선언보다 더 빠르게 치렛타를 쫓아낸 원로들의 혜안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누구보다 힘 다루는 법을 잘 알았던 치렛타가 왜 저런 선택을 한 건지 피가로는 알 일이 없다. 치렛타에 비하면 그는 아주 범부의 사람이니까. 오즈,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물어봐도 오즈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만큼 관심이 없었다는 거다. 사실 피가로도 그렇게까지 궁금하진 않았다. 그냥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보고 온 감상에 대해 한 마디 감상 정도. 그는 평생을 누군가의 테두리에 걸쳐서 방관하는 게 재미있었다. 치렛타가 준 재미도 딱 거기까지였다.

그래도 치렛타가 사라진 이후의 미스라는 꽤 재미있었다. 피가로를 비롯한 원로 몇몇을 제외하면 미스라같은 보통의 어린애들이 치렛타의 행방을 알 리가 없다. 대체 무엇이 그를 자극했는지는 몰라도, 치렛타가 없어지고 나서의 미스라는 피가로를 더 즐겁게 만들어주었다. 타고난 게으른 성정이 미스라의 성장에 불을 붙였다. 세상이나 사람이나 사람의 마음이나 그런 것들은 미스라에게 불필요한 개념이었다. 그가 기억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 자신의 이름, 그것 뿐이었다. 결국 미스라는 치렛타 없이 제 힘으로 북풍의 헤리티지를 다시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야 치렛타의 마지막 유산이 등장한다니. 이렇게 달갑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 고향이 여기라는 것만 알아요. 그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들은 게 없답니다.

이 지방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해사하게 빙글빙글 웃는 얼굴을 오랜만에 보았을 때, 피가로는 오랜만에 피가 맑아지는 걸 느꼈다. 치렛타와 똑같이 생긴 얼굴이 치렛타가 다시 세운 땅에서, 치렛타가 구축한 북풍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 서 있는 모습이란. 모래사막의 빙판만큼이나 이질적이고 상쾌하다. 달갑지 않게 돌아가는 건 원로회와 북지부의 상황일 뿐. 피가로에게는 모래사막에 빙판처럼 이질적인 이 상황이 더 없이 상쾌하고 흥분될 뿐이었다.

치렛타를 마지막으로 본 건 십 오 년 전이다.

‘내가 놓고 온 애들에 대해서는 별 생각 안 해. 그 때는 그게 제일 좋았고, 그게 제일 중요했고, 제일 소중했거든.’

진실을 말하지 않을지언정 거짓말은 하지 않는 여자다. 가죽 소파에 몸을 파묻은 치렛타의 말은 한없이 느리고 게을렀다.

‘근데 지금은 그것보다 이게 훨씬 더 재미있거든.’
‘이걸 왜 이제야 알았나 싶어?’

원로회의 의사와는 별개였다. 파견 나온 김에 한 번 심심해서 떠 봤는데, 반응이 꽤 의외인 게 좋아서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무슨 소리야? 할 거 다 하고 재미 볼 거 다 보고 나니까 말년에 이런 것도 하는 거지.’

조금만 더 젊었어 봐. 이런 거 재미있다고 했겠어? 어릴 때 실컷 뺑이 치고 나니까 지금이 좋다 싶은거지. 게을러빠져서 그런 대사나 치는 치렛타가 꼭 저보다 나이 많은 행세를 부리는 것 같아서 약간 괘씸하게 느껴졌던 피가로다.

‘꼭 오늘내일 하는 노인처럼 말하는 구나.’
‘네가 유난히 오랫동안 청춘을 유지하는 거야, 피가로.’

그리고 이제 슬슬 나가줄래. 루틸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거든. 고상함은 눈곱만큼도 찾을 수 없이 투박한 축객령을 못 이기고 피가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 같이 짐승의 마음을 가진 여자도 자식 앞에서는 달라지는건가?’
‘정말 멍청하구나. 원래 모든 어미는 제 새끼를 사랑해.’

발화자가 북풍의 마녀만 아니었다면 완벽한 피가로의 패배였을 말이다.

‘남편과 아이는 널 몰라?’
‘몰라도 아무 문제 없던데? 그리고 내 새끼는 그런 척박한 땅에 발도 안 붙였으면 좋겠어.’

자식이 고생하는 거 보기 싫은 건 모든 엄마들의 마음이란다. 너같은 노총각은 절대 모르겠지만. 치렛타가 이죽거렸다. 그때 그 페리도트색 눈자위에서 일렁이던 건 영락없이 북풍 짐승의 숨결이었다. 미스라가 치렛타에게 상속받은 최고의 유산.

그것과 똑같은 페리도트색 눈자위를 가진 루틸의 눈에서는, 불행히도 그리고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피가로 선생님, 제가 미스라 씨를 화나게 했다면 정말 죄송하다는 말 좀 전해 주시겠어요. 미스라 씨가 기억하는 어머니와 제가 기억하는 어머니가 다르다는 것을 십분 이해합니다. 그러나 제가 기억하는 어머니도 분명히 북풍의 대마녀 치렛타를 구성하는 조각 중 하나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당신을 섣불리 이해하려고, 당신을 감히 연민하려고 그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센티넬의 생존전략에 가이드가 더 이상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겠습니다. 그러나 생존만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은 몹시 고되고 지치는 일입니다. 당신들의 힘이 영속적인 것에 비하면 그 생존전략은 너무나 시한적입니다. 당신들이 발 붙이고 살아가는 북부의 가혹함과는 비할 바 못되지만, 우리 형제 역시 아주 미진하게나마 알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생존만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 삶은 그저 연명일 뿐이라고. 어머니께 그렇게 배웠습니다. 인간은 어쩔 도리 없이 외로움을 타는 생물입니다. 우리 형제는 어머니가 엮어주신 연緣 아래서 센티넬과 가이드로서 생활할 수 있습니다. 생존과 생활은 다릅니다. 당신의 불면이 단순히 가이딩 대체제의 부작용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센티넬은 마음을 타는 능력입니다. 인간이 어쩔 도리 없이 외로움을 타듯이……. 당신도 어머니가 엮어주신 연 안에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비록 당신이 묘사하는 어머니와 우리 형제가 묘사하는 어머니가 다를지라도. 인간은 어쩔 도리 없이 외로움을 탑니다. ■■을 찾는 것은 기행이 아님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이런 말을 겁도 없이 글로 남기는 무사태평함이란. 그 오만함이란. 틀림없는 자기긍정과 확신으로 가득 찬 말이란.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너무나 제 어미와 꼭 빼닮아 있어서, 피가로는 소름이 돋았다.

치렛타의 테두리에 발을 걸치고 노는 건 퍽 즐거웠다. 하지만 치렛타의 마지막 유산들에게, 치렛타의 아이에게는 테두리가 없었다……. 평생을 남의 테두리에 걸쳐 놀던 남자에게 마음의 테두리가 없는 사람이라니. 그래서 피가로 가르시아는 현 상황이 다소 곤란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