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테스. 본편 기반의 IF세계선. 데이비트가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연애감정 없이 청혼을 하는 이야기.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 https://privatter.me/page/66531336c6b02 의 후속작입니다. 데이비트가 2부 완결 이후에도 살아있고, 노움 칼데아의 어쌔신 테스카틀리포카를 보수로 받아 동거하게 되었다는 설정입니다. 전작을 읽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모브 캐릭터가 조금 등장합니다.
2011년 가을, 데이비트 젬 보이드는 시계탑에서 수중에 돈이 없는 학생에게 사실상 공짜로 빌려주는 플랫을 벗어나 처음으로 자기 방을 얻었다. 데이비트는 그즈음에 이미 전승과에서 충분히 한 사람 몫을 하는 마술사로 인정받은 상태였지만, 그래도 법적으로 미성년자였기 때문에 자기 방을 얻는 데 예금을 마구 소모할 만큼 담이 크지는 못했다. 그래서 데이비트가 처음 구한 방 또한 치안은 어느 정도 보장되는 곳이었으나 ─ 데이비트는 자신의 일신의 안전을 충분히 지킬 무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데이비트가 소유한 물건들의 안전을 지키려면 어느 정도 영국의 치안기구를 의지해야 했다 ─ 방세가 아주 비싼 곳은 아니었다. 각 층마다 2개의 방이 있는 3층짜리 건물에는 데이비트와 마찬가지로 수중에 돈이 별로 없거나 돈을 아껴야 하는 이유가 있는 일반인이나 마술사 몇이 살고 있었다. 데이비트의 옆방에 살던 A도 그런 돈을 아끼면서 살아야 하는 마술사 중 하나였다. 필요최소한의 데이터만 엄선되어 들어가는 데이비트의 기억에는 없는 얼굴이었지만 데이비트가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A와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치가 ‘어, 너 시계탑 다니지’ 라고 말했기 때문에 안면을 트게 되었다.
‘나는 A라고 해. 강령과 졸업생이고. 전에 여기저기 강의 많이 듣고 다녔었지? 지금은 어느 과 다녀?’
‘전승과입니다.’
‘와. 이렇게 젊은데? 천재는 나이 안 가리네.’
A는 꽤 수요층이 확실한 마술을 사용하는 프리랜서 마술사였지만 마도의 길을 걷기 시작한 지 5대도 안 된 가문 출신이고 집에 돈이 많은 것도 아니라서 이래저래 잡음 많은 삶을 살고 있었다. 집세를 낼 즈음이 되면 간혹 정자를 팔기도 했다(본인이 말한 건 아니고 데이비트 정도의 인식능력이 있으면 멋대로 알게 된다). 그래도 마술사답지 않게 사람이 좋았다. 보호자 없이 이웃집에 사는 마술사라는 이유로 데이비트에게도 나름대로 신경을 많이 써 주었다. 데이비트는 A가 성장기에 가깝게 지낼 만한 마술사가 별로 없는 환경에서 성장했고, 시계탑에 온 뒤에는 가문의 역사가 짧다는 이유로 겉돌거나 비웃음을 당했기 때문에 자기처럼 어리고 인맥이나 핏줄로 남을 차별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는 마술사에게 정을 붙이고 싶었을 거라고 추측했다. 진짜 이유는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우리 딸이 너보다 좀 어리거든.’
‘그렇습니까.’
데이비트는 A가 사다 준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A의 방을 자기 시야로 훔쳐보았다. 침대 옆의 사이드 테이블에 어린 여자애랑 그 애를 닮은 여성이 찍힌 사진이 놓여 있었다.
A는 계속 말했다.
‘나보다 마술회로가 많아. 속성도 두 가지나 되고. 내가 잘 벌어 둬야 걔가 시계탑에 올 때 좀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을 테니까.’
마술사에게 자식은 가문의 비원을 맡길 후계자다. 소중히 여기기는 하지만 깊게 정을 붙이지는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덕분에 정신적인 문제를 겪는 사람도 넘쳐나지만 마술사회에서는 그게 보통이다. A는 비교적 마술사답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났고 감성도 데이비트의 전신이 된 소년의 아버지 같은 일반인에 가까웠다. 아마 그게 그를 마술사 사이에서 괴리되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데이비트는 추측했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A는 데이비트가 말하지 않아도 혼자서 잘도 떠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한 적도 있었다.
‘혹시 네 또래 중에 좋은 상대 있으면 우리 애한테 소개해 주렴. 좋은 마술사 말고 좋은 사람.’
‘제게는 권하시지 않는군요.’
‘사위로는 좀 그렇지. 너는 공부 열심히 하잖니. 며칠씩 집에 안 들어올 때도 있고. 그러니 그 나이에 전승과에 있을 거고.’
데이비트는 자신이 그렇게까지 열심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연구나 전승과에서 맡는 일들이 데이비트의 경향성과 잘 맞기 때문에 몰입하게 되었을 뿐이다. 거기에 전승과에서 처리하는 일은 그 특성상 조금만 규모가 커져도 며칠에서 한 달 정도는 우습게 날아간다. 그래서 데이비트는 잠시 전승과는 중요하고 위험한 일을 자주 처리할 뿐 그렇게 대단한 곳은 아니라고 밝히려다가 그만두었다. 애매한 능력치 가지고는 살아남기 힘든 곳이었다. 관심을 갖지 않는 게 제일 좋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대답했다.
‘현명한 판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자식은 안 가질 생각이라서.’
‘이런. 부모님이랑 사이 안 좋니? 미안해서 어쩌지.’
A는 데이비트를 마술세계에 흔한 부모와 사이가 나쁘기 때문에 반항의 일환으로 젊은 나이에 집을 나와서 시계탑 근처에서 자취하는 애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데이비트는 사실 내 육체는 140억 광년 바깥의 외우주의 거주자들에 의해 재구성된 것이고 나 또한 지구인 두 사람을 토대로 만들어진 외우주에서 파견된 지구를 관측하는 단말이지만, 지구인들의 정체성을 물려받은 채 태어났으니 지구에 이로운 일을 하는 지구생물로서 살기로 결정했고, 이 몸으로 아이를 만들었다간 뭐가 태어날지 알 수가 없으니까 가족계획은 일찌감치 포기했다고 말할 만큼 눈치가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 데이비트는 대답을 하는 대신 조용히 샌드위치를 씹어 삼키고 오렌지주스를 마셨다. A는 묘한 표정으로 데이비트를 보다가 이렇게 말했다.
‘뭐 그건 네 자유지. 시계탑에 그걸로 마음고생하는 애들 많이 봤으니까. 그래도 자식은 몰라도 가족은 다시 생각해 봐. 가족 있으면 좋아.’
‘잘 모르겠군요. 제가 좀 어려서.’
‘그래. 좋을 때다. 너도 나이 먹으면 알게 될 거야.’
데이비트는 그로부터 한 달 뒤 출장으로 이듬해 봄까지 자리를 비우게 되었다. 어찌저찌 사후처리를 끝내고 방에 돌아오자 A의 방은 비어 있었다.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개인적인 일 때문에 방을 빼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했다. 관리인은 A의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를 이것저것 했지만 데이비트는 그 정보에서 ‘A가 고향으로 돌아갔고, 그래서 더이상 옆방에 살지 않는다’ 부분만을 기록에 남겼다. A는 마술세계에서 드물게 인간적이고 친절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데이비트에게 일방적으로 마음을 써줬을 뿐 그리 깊은 친분관계는 아니었고 그리 중요한 관계도 아니었다. 그리고…당시의 데이비트는 본의는 아니었으나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독립해 독신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소년과 소년의 아버지는 그의 전신일 뿐이다. 가족은 물론 꽤 중요한 사회적 관계의 대상이지만 필수적이지는 않다. 데이비트는 소년과 소년의 아버지의 기억에서 다소의 노스탤지어를 느끼기는 했지만 세상에는 그것보다 중요하고 흥미로운 것이 많이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남들에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데이비트는 자신이 A처럼 의지할 가족이 없어도 자기 생활을 잘 영위하고 있다는 점을 조용히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아마 그 즈음의 자신은 어렸기 때문에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A에 대한 기록의 양을 의식하고 줄였을 것이라고 미래의 데이비트는 추측하게 된다.
데이비트는 그로부터 3년 후 전승과를 스스로 그만두고, 처음 얻은 방을 비운 뒤 인리계속보장기관 피니스 칼데아로 떠나게 된다. A는 데이비트의 기억영역에서 몇 분 이상을 배분받지 못한 ‘그리 중요하지 않은 인물’ 범주에 속했다. 그래도 그와 나눈 이야기들은 데이비트의 기억영역에 그대로 보존되었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정보도 잊지 않고 기억해두면 어디에든 쓸모가 생겨난다. 데이비트가 13년간 온몸으로 얻어낸 교훈들 중 하나였다.
*
2018년 1월 말, 남극대륙 舊 인리계속보장기관 피니스 칼데아의 로비 한켠의 소파에 앉아 인이어 이어폰을 끼고 담소를 나누고 있던 마슈 키리에라이트가 말했다.
“데이비트 씨, 격벽 개방까지 2분 남았대요. 슬슬 나갈 준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데이비트 젬 보이드는 그 음성정보를 인식하는 몇 초 동안 피니스 칼데아 혹은 노움 칼데아에서 보낸 몇 년간을 빠르게 반추했다. 마리스빌리 아니무스피어의 면담요청에 응했을 때만 해도 여기에 이렇게 오랫동안 머무를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거대한 위기를 예감하고 다급하게 결정한 칼데아행이었다. 이름은 거창해도 해야 하는 일 자체는 지금까지 전승과에 재적하면서 해온 일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주 재미있는 일도 있고 별로 하기 싫은 일도 있고 굉장히 곤란한 일도 있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기도 몇 번이나 찾아왔다. 그 과정에서 실제로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역시 여기에 오길 잘했다고, 여기에서 한 일에는 의미가 있었다고 데이비트는 생각했다. 그것을 처음 여기에 왔을 때의 데이비트도 칼데아 건물 안에서만 실험동물처럼 숨쉬다가 수명한계를 다하고 조용히 죽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지금 여기에 당당하게 살아남아 담소를 나누고 있는 마슈 키리에라이트 또한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데이비트는 마슈가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린 뒤에 대답했다. 지금까지 겪어온 바에 의하면 자신이 하는 말은 타인에게 잘 이해되거나 가슴에 잘 와닿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래도 지금의 그녀라면 자신이 진심임을 알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 지금까지 고마웠다. 너와 네 동료들의 앞날에 행운이 있기를.”
“신세 많이 졌다, 실더 아가씨. 보자, 그럼 나도 뭔가…”
자연스럽게 끼어드는 이야기를 오래 하면 조금 텐션이 올라 혼자서 들뜨기 시작하는, 지금은 딱히 말을 길게 주고받지 않았는데도 들떠 있는 아직도 관위Grand라는 거창하고 무거운 이름을 꼭 쥐고 있는 고스트라이너.
지금까지 본인에게 말한 적은 없지만 데이비트는 저치의 천성적으로 타자와의 대화를 좋아하는 성향도 이야기하는 목소리도 말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텐션이 올라 빠르게 말을 쏟아내는 버릇도 꽤 좋아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마슈와 모두의 무사안일한 미래를 위해 무자비하게 행동하기로 결정했다.
“아니, 테스카틀리포카 넌 말하지 마라. 하고 싶어도 하지 마.”
“왜? 내가 말하면 제대로 된 가호가 딸려가는데?”
“네 가호는 일반적인 의미의 가호라고 보기엔 애매하다고 생각해.”
“와 진짜. 이런 것도 신관 취급해 준 내가 미친놈이다…”
“두 분 다 진정하세요. 저도 나름대로 신경을 써주셨다는 건 잘 알고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테스카틀리포카 신.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이제 이 어린것도 내 가호를 거부하네. 내가 이런 꼴이나 보려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닌데. 그래도 오늘은 기분이 좋으니까 용서하마. 넌 꼭 필요하지 않은 싸움도 좀 적극적으로 해라. 네 마스터에게도 제대로 얘기해 둬. 전사라면 당연히 틀라위스틀람파 행이 최고다만, 믹틀람파도 언제나 너희들을 환영한다.”
“네, 선배에게도 제대로 전하겠습니다.”
데이비트는 백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손에는 전날 밤까지도 추가적으로 세공을 했던 크게 디포르메된 고양이과 동물의 형상과 석기시대의 유물 사이에서 곡예비행을 하는 것처럼 생긴 흑요석 덩어리를 쥐고 있었다. 세공 작업을 시작할 때는 자신의 인식능력을 과신하고 기계적인 반복작업은 자신의 특기니까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시계탑에서 마술 기초를 배울 때, 마술회로가 적거나 마력량이 낮은 마술사에게도 보석마술이 좋은 대안이 될 수 있으니 그걸 배워보지 않겠냐고 제안받은 적이 있다. 그 때는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못 들은 걸로 쳤지만, 좀 더 귀담아 들을 걸 그랬다고 데이비트는 막연히 생각했다.
테스카틀리포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움직임에 부응하듯 손안에 있던 광석이 붕 떠올랐다. 일정한 온도로 유지되는 피니스 칼데아의 로비에 낯 모르는 바람이 분다. 숨죽이고 사냥감을 찾는 동물과 호흡하는 식물을 공정하게 보듬는 밤에 부는 바람.
흑요석 덩어리는 데이비트의 눈높이 정도에서 멈춰 섰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신랄하게 말했다.
“못생겼네.”
“미안하게 됐군.”
“뭐 그래도 노력한 건 느껴지니까 합격점을 주지. 중요한 건 마음이야. 아니, 정말로.”
테스카틀리포카가 세공사의 궤멸적인 실력에도 불구하고 날카롭게 빛나는 흑요석에 손끝을 대고 데이비트도 마슈도 알고는 있지만 구사할 수는 없는 언어로 영창을 몇 마디 했다. 영창을 마칠 때마다 흑요석이 상대의 의지에 부응하듯 작게 진동했다. 마슈가 궁금해하는 눈치였으므로 데이비트는 작은 소리로 ‘이사 갈 집을 정리하는 작업 같은 거다’ 라고 귀띔했다.
테스카틀리포카가 말했다.
“좋아. 데이비트, 이쪽 준비는 끝났다. 시작해.”
“고한다.”
공기 중의 마력농도가 자연스럽게 올라간다. 테스카틀리포카의 진짜 권능을 목도해 본 적이 없는 칼데아의 인물들은 테스카틀리포카가 입은 육신에 속아서 간혹 그를 그냥 마술적인 역량이나 지식이 자신들에 비해 훨씬 뛰어나고 시점이 다차원적인 평범한 인간 같다고 착각하고는 한다. 그들에게는 조금 미안한 얘기지만 그럴 때마다 데이비트는 미묘한 우월감을 느꼈다. 자신만이 그의 본질을 좀 더 자세하고 확실한 형태로 파악하고 있다. 개인의 힘만으로는 쉽게 땅에 붙들어둘 수 없는, 땅의 힘을 빌리던가 백지로 환원된 지구에 남은 리소스를 있는 대로 끌어모아야만 눈앞에 붙들어둘 수 있는 규격 외의 무언가.
“그대의 몸은 내 곁에, 나의 운명은 그대의 손 안에.”
누구도 인도해 주지 않았다. 자신이 호기심을 품고, 자신이 동경하고, 자신이 그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었다. 이문異聞의 땅에서, 여기에서라면 왠지 모르게 불러낼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를 지명해 불러냈다. 그 부름에 그가 응답했다. 고작 그것뿐이다. 당위에 충실한 평범한 사건. 어디에나 있는 기브 앤 테이크.
“그대가 이 뜻, 이 이치에 따르겠다면 대답하라. 그리하면─”
지구의 인간들은 누군가와의 만남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아름답게 여기고 싶을 때 그 사건을 운명이라고 칭함으로서 그 만남을 장식하고는 한다. 지구를 고향으로 여기는 생물로 살기로 결정한 자신에게도 그럴 자격이 있다고 데이비트는 믿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방적인 자신의 마음에서 기인한 것이므로 약간 불안하고, 변덕스러운 성품인 상대가 이제 와서 마음을 바꿀지도 모른다는 나쁜 예감이 든다.
그러므로 데이비트 젬 보이드는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애원하는 사람처럼 상대를 바라보며, 몇 번이고 외워둔 문장을 필사적으로 입에 담는다.
“이 운명을, 다시금 그대의 손에 맡기겠다!”
마력으로 재현된 산의 심장부의 수목 냄새가 나는 공기 속에서, 왕관을 쓴 암살자가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화답한다.
“─그랜드 어쌔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받아들이겠다. 데이비트 젬 보이드, 그대는 나의 주인이며, 나는 그대의 도구로다.”
스톰 보더와 칼데아의 동력원으로 유지되던 고스트라이너의 육체가 옅은 색 마력광과 함께 마력으로 환원되어 허공으로 흩어진다. 하지만 그 존재가 사라지지 않았음을 이 자리, 이 장소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허공에 떠 있던 흑요석 세공품이 몇 번이나 진동하며 발광하다가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추고 낙하했다.
잠시 이 상황에 압도되어 있던 데이비트는 한 발 늦은 사람처럼 분주한 몸짓으로 광석 덩어리를 받아냈다. 오른쪽 손등에서 마술적인 뭔가를 이식했을 때 특유의 이물감에 가까운 통증이 느껴졌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그는 이미 알고 있다.
마슈 키리에라이트가 안도한 듯 웃음기 섞인 소리로 말한다.
“간밤에 생각을 좀 해 봤는데.”
“어.”
“너랑 내가 혼인신고를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랜드 어쌔신 야야우키 테스카틀리포카는 몇억 년 단위의 지구 생활로 어지간한 일로는 놀라지 않는 담대함을 자신이 가진 덕목 중 제일 쓸모 있는 것 중 하나라고 생각해 왔다. 문제는 그가 그 덕목의 한계에 항상 도전하는 고용주 밑에서 일한다는 데 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말없이 다리를 바꿔 꼬았다. 패스트푸드점의 의자는 빠른 회전율을 위해 딱딱하고 오래 앉기 불편하게 설계되어 있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기 좋은 곳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데이비트 젬 보이드는 그걸 해냈다. 스프라이트 한 잔과 커피, 빅맥 하나와 반쯤 먹은 치킨 샌드위치, 콘샐러드, 2인분의 감자튀김이 함께하는 프로포즈.
테스카틀리포카는 치킨 샌드위치를 다시 집어들면서 말했다.
“세상에는 결정할 때와 장소를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라는 게 있다. 알지?”
“안다. 그래도 되도록 빨리 말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았어. 확실히 일반적인 연인관계라면 이건 실례가 되는 행위지만 우리는 그런 사이가 아니잖아.”
“네 이상한 효율주의는 널 만난 순간부터 포기하기로 했는데 내 상식이 자꾸 짜증을 낸다고. 그래도 뭐 틀린 말은 아니니까 이만 하자.”
테스카틀리포카는 묘하게 지친 얼굴로 식사를 재개했다. 데이비트는 감자튀김을 먹으면서 자신이 그 제안을 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얼마 전에 마술적인 물품이 필요해서 치안이 나쁜 지역에 갔을 때 테스카틀리포카가 혼자 담배를 피우던 장소에 좀 전에 살해당한 따끈따끈한 시체가 낙하했기 때문에 테스카틀리포카가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의심받게 된 사건. 테스카틀리포카의 고용주인 데이비트도 거기에 말려든 것. 사건 자체는 데이비트의 눈이 있으면 빠르게 해결되는 성질이었으나 바로 그것을 밝혔다가는 데이비트가 유력한 범인 후보가 되기 때문에 해결에 시간이 걸렸던 일.
이 사태에 그냥 말려들었을 뿐인 테스카틀리포카는 멕시코 국적을 가진 외국인이고 데이비트는 테스카틀리포카의 신원보증인이지만 함께 살고 있는 고용주와 피고용자 사이일 뿐이기 때문에 뒷수습에 쓸데없이 시일이 더 소요된 것. 그러다 보니 차라리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영주권이 있으면 훨씬 편해질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의 테스카틀리포카가 미국 영주권을 획득하려면 자신과 법적으로 혼인신고를 하는 게 제일 간편하다는 것.
테스카틀리포카는 미간을 찌푸리고 대답했다.
“그럴 거면 왜 내 신원을 위조할 때 멕시코 국적을 고른 건데?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마음에 들었어. 굉장히. 근데 이제 와서 이 나라 영주권이라니.”
“그땐 정말로 여기서 옛날 집만 정리하고 영국이나 다른 곳으로 떠날 생각이었어. 그렇다면 네 입장에선 네 고향의 여권을 받는 편이 기분이 좋을 것 같아서.”
데이비트는 네바다에서 프리랜서 마술사로서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데이비트 혼자일 때는 마술에 대한 지식은 몰라도 마술사용자로서의 역량에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에 주변에 마술사가 많은 런던에 머무르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얘기가 다르다. 누구라도 빼어난 마술사용자로 인정할 인재인 테스카틀리포카가 붙어 있다. 캘리포니아 모처의 위치크래프트를 대물림하는 마술사 저택에서 얼마 전 서거한 당주의 유산인 살아 있는 마술예장을 둘러싸고 벌어진 연쇄밀실살인사건에 말려든 미국이 고향인 칼데아 스태프의 헬프콜 때문에 어영부영 결성된 데이비트와 테스카틀리포카의 콤비는 반년도 되지 않아 북미 마술계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덕분에 적당히 상태를 보고 현상유지 상태로 돌아가거나 파는 물건이 될 예정이던 네바다의 보이드 하우스는 리모델링을 거쳐 조용히 둘의 집으로 탈바꿈했다. 그렇게 어영부영 1년 가량이 지나가고 현재에 이르렀다.
현재 데이비트는 공식적으로는 칼데아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가 계약기간이 끝나서 프리랜서로 활동하게 되었지만 칼데아의 자회사와 공동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는 설정이고, 테스카틀리포카는 칼데아의 자회사를 이용해 그쪽에서 파견되어 온 인력 자격으로 미국에 체류 중이다. 그래서 지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체류와 관련된 문제를 좀 더 깔끔하게 정리하고 수습할 필요가 있기는 했다. 설마 그걸 법적인 혼인신고로 해결하자고 할 줄은 몰랐지만.
“그러니까 결혼하자. 찾아보니 그거 말고도 편해지는 게 꽤 많더군.”
“너 정말 그런 말투로 하면 안 되는 말만 하는구나….”
“나와 결혼하는 게 싫은가?”
“아니 그게 아니라. 혼인신고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이 경우에는 영주권 획득이 목적이니까 너랑 내가 제대로 된 부부라는 증명도 이래저래 번거롭게 해야 하고, 뭣보다 평생 네가 한 번 혼인했다는 기록이 생겨서 나중에 마음이 움직여서 다른 인간이랑 결혼하고 싶어져서 이혼을 하더라도 그쪽에서 서류를 조회하면 나랑 결혼한 적이 있다고 나오니까 솔직하게 밝혀야 하거든?”
의외로 멀쩡한 반박이 돌아왔다. 데이비트는 상대가 자신과 그의 결혼 자체에는 이견이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대답했다.
“난 몸이나 기억용량이 이러니 결혼은 원래 예정에 없었고 아이는 안 가질 예정이다. 그러니 아마 그쪽 문제는 없을 거야.”
“미치겠네.”
“네 본래 적성은 버서커니까 별 차이는 없는 것 같군.”
테스카틀리포카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데이비트는 무심한 얼굴로 콘샐러드를 한 스푼 빼앗아 먹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머리를 감싸쥔 채 깊게 한숨을 내쉰 뒤 대답했다.
“걔넨 널 만들 때 대체 뭘 했길래 이런 360도 돈 로맨티스트가 태어난 건지….”
“…그런 평은 처음 들어 봐.”
“지구인이 그런 추악한 짓을 하면 내가 우주인들 앞에서 창피해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가 없으니 차라리 죽으라면서 지구를 파괴하려 드는 놈이 로맨티스트가 아니면 뭐야. 아니, 애초에 이것도 내 머리카락이나 손톱 한두 개 쓰면 싹 해결되는 건데 혼인신고를 하자고? 넌 그냥 로맨티스트가 맞아.”
테스카틀리포카가 이죽거리며 웃었다. 데이비트는 눈길을 피하려다 그만두고 대답했다.
“내가 네게 나와 같이 가자고 부탁했으니까, 이런 건 가능한 한 내 힘으로 해결하고 싶어. 내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아니고 좀 더 편하고 싶어서 하려는 일이니까.”
“그게 네가 생각하는 ‘책임’이냐? 나쁘진 않군. ─패밀리 네임은 어떻게 할 거냐? 네 그건 코드네임 같은 거지?”
“응.”
본래 그에게 처음 붙여진 식별명칭은 ‘Sem Void’ 였지만, 그건 너무 사람 이름 같지 않으니까 사석에서는 이전 아버지를 따라 시계탑에 출입하던 소년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형태였다. 그로부터 1년쯤 후 그의 하루 분량의 기억용량이 밝혀지면서 식별명칭의 맨 앞에 ‘Day-bit’ 가 붙었다. 그러자 꽤 일반적인 인간의 이름 같은 형태가 갖춰졌다.
데이비트는 자신이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데 기여했지만 이제는 생명활동을 멈춘 소년의 이름으로 자신을 지칭하는 데 조금 불만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그 식별명칭을 자신의 퍼스널 네임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사용할 이름을 스스로 지었다는 것은 데이비트에게 소소한 자랑이었다.
“설마 이걸 남과 공유하게 될 줄은 몰랐군. 네 이름과 잘 어울리진 않지만…어쩔 수 없지.”
“너, 자연스럽게 내가 보이드가 되는 전제로 말하고 있는데.”
“싫은가?”
“아니 별로. 야야우키 T 보이드라… 미학과 통일성 같은 거 신경 안 쓴 것 같은 어감이야. 웃겨서 마음에 들어. 원래 명명이란 제일 개인의 자아가 강하게 드러나는 행위거든.”
테스카틀리포카는 혼자 빙긋빙긋 웃었다. 데이비트는 약간 조바심을 느꼈다. 그걸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테스카틀리포카가 말했다.
“너답다.”
“무슨 뜻이지?”
“네가 어이없게 재미있는 녀석이라는 뜻이지. 아무튼 청혼은 받아 주마. 자세한 건 이따 얘기하고, 일단은 먹던 거 마저 먹어라.”
데이비트가 비언어적 소통수단으로 더 이야기하고 싶다고 어필을 하건 말건 테스카틀리포카는 그 뒤로 쭉 식사에만 집중했다. 이후 노움 칼데아의 생존자들 사이에서 ‘내가 살면서 들어본 것 중에 제일 끔찍한 프로포즈’ 로 회자될 프로포즈는 그렇게 끝났다.
*
2019년 10월경, 야야우키 테테오칸 ─ 데이비트 젬 보이드 못지 않게 사람 같지 않은 이름이라고 서류를 위조하던 고르돌프 무지크가 부정적인 의미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 은 야야우키 T 보이드가 되었다. 법원 서기 앞에서 “Yes, I Do”와 결혼 서약을 영혼 없이 복창하지 않는 데 꽤 기력을 많이 소모한 데이비트는 상당히 진이 빠진 상태로 법원을 걸어나왔다. 그러다 문득 혼인허가신청서를 작성할 때 물어보려다 그만두었던 것이 떠올랐다. 테스카틀리포카가 작성한 혼인 허가 신청서를 봤을 때, 데이비트는 검정Yayauqui과 공허Void 사이에 낯익은 복합어가 적혀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자리에 적혀 있는 문자는 ‘T’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T’는 결국 뭐였어? Tezcatlipoca? Tepeyollotl? Titlacauan?”
“전부 평범한 인간이 사용하기엔 너무 무거운 이름이야. 나쁜 쪽으로 유명하기도 하고…그러니까 뭐, 흔적은 남기되 의미는 마음대로 생각하라는 의미로 ‘T’다.”
“Tom Hanks…”
“취향하고는.”
테스카틀리포카가 악당처럼 웃었다. 혼인신고를 하고 3개월 뒤에 이민국에 서류를 내기로 했다. 서류로 해결되는 범위를 넘어 국적 취득을 위한 위장혼인이 아니라 제대로 된 부부라고 증명해 보여야 한다. 의심받지 않도록 말을 맞추고 구체적인 증빙을 마련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이미 중남미에 파견근무를 갔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었지만 아는 사람도 공감대를 공유하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 상대와 친목을 쌓게 된 이야기에 살을 붙이기 시작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타고난 거짓말쟁이이니 꽤 좋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다.
당연하다는 듯 조수석에 앉은 테스카틀리포카가 안전벨트를 메면서 물었다.
“식은 안 올릴 거냐?”
“응. 그런 자리에 와줄 만큼 친한 지인들은 다 흩어져 있어서 부르기도 번거롭고. 대신 웨딩사진은 찍을까 한다. 스튜디오 서치는 네게 맡기마.”
“솜씨가 좋은 마을 사진관 사람? 아니면 소셜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포트폴리오로 활용하는 사람?”
“전자. 얼굴이 팔리면 번거로우니까.”
“오케이. 그럼 너한테도 과제를 주마. 영광스럽게 여겨.”
“뭔데.”
“반지.”
데이비트는 시동을 걸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뭐 그렇게 당연한 걸 캐묻냐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뭘 그렇게 놀라. 그럼 내가 혼인관계씩이나 맺어주면서 아무것도 안 받아먹을 줄 알았어?”
“아니, 생각도 못 해서…. 알았다. 원하는 보석이 있다면 알려줘. 물론 네가 공물로 받아온 건 당연히 최고급품이었겠지만 난 지금은 퇴직금을 까먹고 사는 자영업자니까 예산은 어느 정도 배려해줬으면 한다.”
“네 퇴직금 액수 기억하고 있거든?”
테스카틀리포카의 말을 틀어막듯 차에 시동이 걸렸다. 테스카틀리포카도 별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데이비트는 차를 출발시켰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창문에 팔을 올리고 턱을 괴고 입을 열었다.
“농담이야. 네 생각에 적절하다 싶은 걸로 해. 다이아몬드가 일반적이고 무난하지만 요즘은 개인적인 취향을 크게 반영하는 녀석들이 많으니까. 보석은 비취만 제외하면 뭐든 상관없어.”
“빠르군.”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옷 고르는 거랑 다를 게 없는걸. 생각나는 것이 없으면 너랑 내 눈동자 색으로 해. 로맨티시즘에 경도된 젊은 인간 남자가 할 법한 짓이지?”
“디자인이 괜찮은 공방을 찾아보지.”
“그래. 디자인이 영 별로면 반납할 테니까 열심히 골라 봐라.”
신호가 넘어갔다. 데이비트는 운전대에 손을 얹은 채 빨간색 신호등을 응시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고양이처럼 하품을 하고 말했다.
“네가 미래에 남과 함께 있을 거라고 상상한 적 없지?”
“…응.”
데이비트 젬 보이드는 혈육은 만들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을 때부터 평생 독신으로 살겠다고 결의했고 그게 흔들릴 일은 아마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데이비트는 자신이 인류사회에 쉽게 녹아들지 못하는 것을 유감스럽게 여겼으나 그만큼 자신의 단독개체로서의 완성도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타인과 서로 이해하고 섞일 수 없다고 인정하고 유감스럽게 여긴 만큼 평생을 혼자 살기로 선택한 자신에게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타인과 함께하는 미래는 상상한 적이 없다. 뭔가 선한 일을 행하다가 어딘가에서 홀로 죽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으나…자신의 죽음을 전제한 계획을 완성한 뒤 충동적으로 저지른 소환이 그 청사진을 흙발로 짓밟았다.
“당연한 일이야. 죽음을 앞에 둔 인간은 비합리적이거든. 두려움으로 미치건 종족번식의 본능에 몸을 맡기건 어떤 식으로든 충동적으로 행동하게 되지. 네 경우에는 그게 영령소환이었고 말이야.”
“놀리는 건가?”
“설마. 네가 아직도 적응을 못 하는 것 같으니까 그러는 거야.”
“뭐가.”
“타인과 함께하는 생활을 즐기는 것.”
눈이 마주쳤다. 데이비트는 자신이 자각하지 못한 채 테스카틀리포카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는 것을 한 발 늦게 깨달았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이해력이 나쁜 학생이 뒤늦게 정답을 맞추는 것을 지켜보는 교사처럼 웃었다.
“너는 내게 믹틀란에서 한 실패를 보상하고 싶으니 함께 있어 달라고 주문했고, 난 그걸 수락했다. 너는 나와 함께하는 생활을 하기로 선택했어. 그러니 자기 손으로 뭔가 해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딱히 부족하고 어색한 행동은 아니야. 그 기준을 정한 게 설령 예전의 너이더라도 말이야. 인격체는 사회적이고, 자신이 지구에 하나뿐인 유일개체라고 생각하면 당연히 스트레스를 받을 거야.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합리화를 해야 해.”
데이비트는 운전대를 쥔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동정받고 싶지는 않다. 설령 그게 자신에게 큰 도움을 주었고, 자신의 욕심 때문에 실패한 벌충을 해야 하는 상대이더라도. 테스카틀리포카는 고확률로 그것을 알아챘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테스카틀리포카는 천연덕스럽게 발화를 이어나간다. 그런 인격체다.
“나는 그게 병적이라고 할 생각은 없다. 이 세계에 온전한 정답은 없어. 모든 인격체는 각자가 생각하는 정답을 선택하며 살아가. 그건 너에게도 다를 바 없는 일이고. 그냥, 네 방침이 바뀌었음을 인정하라는 거지. 그리고.”
“그리고?”
“너도 슬슬 깨달을 때가 됐어. 남의 이름에 ‘공허’ 같은 칙칙한 단어를 갖다 붙이는 거, 쉽게 할 수 있는 일 아니다. 넌 책임을 지고 싶은 게 아니야. 굳이 책임질 필요 없는 걸 굳이 네 손으로 하면서 그걸 즐기고 싶은 거지.”
데이비트 젬 보이드는 생각한다. 사실 여전히 잘 모르겠다. 테스카틀리포카를 끌어들인 것부터 미국에 데려온 것까지 모든 것이 충동적이었다. 지구생물로서 같은 지구의 생물들을 배려하고 향후의 재앙을 방지하기 위해 혼자 사는 게 좋겠다는 결심은 어이없을 만큼 충동적으로 깨졌다. 데이비트는 테스카틀리포카와 교대로 식사를 만들고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전화 응대나 이런저런 정보수집을 맡기며 마술적인 자문을 받고 간혹 같은 침대를 쓴다.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결말을 맞이할 때까지 테스카틀리포카가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이게 무엇인지는 여전히 확실히 언어화할 수 없다. 당위라기에는 불필요하게 한 것이 너무 많다. 사랑이라기에는 애매하다. 친애라기에는 한 것이 지나치게 많다. 모르겠지만….
‘그래도 자식은 몰라도 가족은 다시 생각해 봐. 가족 있으면 좋아.’
이름의 주인이 웃기는 어감이라고 평한 야야우키 T 보이드라는 재구성된 명사의 어감은 제법 나쁘지 않게 느껴진다고, 아니 오히려 마음에 든다고 데이비트 젬 보이드는 생각했다. 본래의 이름에 비해 부드럽고 처음부터 한 가지가 아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는, 손 안에 움켜쥔 운명의 맛.
*
테스카틀리포카는 2020년 초에 무사히 미국 국적을 취득한다.
데이비트는 이후 한 달 정도 근방의 귀금속 상점이나 개인적으로 악세사리를 제작하는 공방을 순회하고, 근무자들은 무기를 고르는 것 같은 표정으로 귀금속과 눈을 마주치는 젊은 남자 손님을 어떻게 취급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식물의 줄기처럼 가늘게 짜낸 플라티나로 아메지스트와 아쿠아마린을 열매처럼 감싼 디자인의 결혼반지를 테스카틀리포카는 나쁘지 않게 평했다.
그로부터 일 년 뒤, 테스카틀리포카는 마술사의 공방에서 실험용으로 혹사당하던 사역마가 독자적인 의식을 습득해 인간에 대한 적의와 마술사를 잡아먹어 생긴 무진장한 마력으로 마술사의 공방이 있던 도시를 멸망시킬 뻔했을 때 자기 몫의 결혼반지를 대량의 마력이 담겨있다는 이유로 촉매로 사용해 폭파해 사건을 해결한다. 그리고 데이비트에게 죽을 만큼 혼나고 ‘새 것이 필요하니까 디자인은 네가 골라라’ 라는 임무를 받고 입을 삐죽하게 내민 채 반지 카탈로그를 뒤적이게 된다.
데이비트는 테스카틀리포카를 혼내는 내내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내심으로는 그 상황을 꽤 즐기고 있었다. 아마 테스카틀리포카도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말하지 않았을 거라고 데이비트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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