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S/레아시스
2024-05-26 19:47:18
14702文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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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

데이테스. 본편 기반의 IF 세계선의, LB7에서 생존한 데이비트가 인리표백 해결 이후 노움 칼데아의 테스카틀리포카를 보수로 요구하는 이야기.
데이테스 원드로원라이 @Dt_od_ow 참가작입니다. '결혼', '우리들의 전쟁, 우리들의 멸망, 우리들의 향연オレたちの戦争。オレたちの滅亡。オレたちの饗宴', '운명'을 모두 사용...했는데, 좀 어레인지를 크게 해서 존재감이 옅습니다. FGO에 등장하지 않는 타입문 캐릭터(아오자키 토우코)가 언급됩니다.
데이테스 원드로원라이 2기 최종회 정말 축하드립니다. 주최님도 참가자 여러분도 정말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진짜 심각하게 지각해서 죄송합니다...ㅠ.ㅠ

이것이 끝이다. 숨을 멈추고 1부터 10까지 센다. 땅이 움직이고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를 듣는다.¹ 빛나는 유일존재One Radiance Thing의 활동을 일시정지한 소체를 향해 급강하하는 동안에도 데이비트 젬 보이드가 사용하는 육체의 비상대응체계는 기억영역에 남은 데이터를 필사적으로 반추하며 살아남을 방법을 떠올린다.
데이비트는 이 생물체 특유의 필사적인 몸부림을 번거롭게 느꼈다. 그래도 육체 입장에서는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본래 자기 생각에 올바른 일을 하다 보니 자기 목숨까지 판돈으로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을 뿐이다. 딱히 자신의 죽음을 추구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육체가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인 건 당연하고 정당한 일이다. 하지만 연속적인 기록 10년 분량과 분절되고 재구성된 기록 17일 남짓 분량을 모두 되새겨 봐도 육체의 관제인격이 결정한 소멸은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데이비트는 이미 알고 있다.
처음 이곳에 와서 지형을 측량하고 구체적인 수치를 계측해 봤을 때, 데이비트는 여기서 뛰어내리고 자기 육체가 목표지점에 도달해 짓뭉개지기까지 10초도 걸리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실제로 낙하는 빠르고 신속하게 이루어졌지만, 데이비트의 육체에 갖춰진 인지능력 덕분에 사고는 끝없이 가속되고 인지의 범위는 한없이 확장되어 낙하는 느릿하게 느껴졌다. 데이비트를 지구에 발생시킨 140억 광년 저편의 주민들은 그렇게 공을 들여서 지구에 파견한 단말이 처음으로 교신을 보내왔을 때 특별한 행동방침이나 지령을 내리는 대신 ‘그냥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네가 그 별의 거주자로서 느끼는 모든 것이 우리들에게는 귀중한 정보가 된다’ 는 답변만을 남겼다. 이것도 그들에게는 유의미한 정보가 될까. 데이비트는 이것을 조금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그러면 좀 더 흥미로운 생각을 하기로 한다.
비대하게 확장된 몇 초 속에서 권태롭기까지 한 부유감을 견디면서 데이비트는 여기에 도달했을 때 자신이 들은 말을 떠올렸다. 마이룰이 지나치게 확실하고 제멋대로에 일방적으로 설교하거나 배려해주기를 좋아해서 다루기 성가신 서번트의 마지막 전언은 마지막 인사가 아니었다. 재회를 전제한 인사였다. 예전에 데이비트가 최종플랜을 바꾸고 바꾸다가 자신의 소멸을 전제한 계획에 도달했을 때, 혼자서 뭐가 재밌는지 깔깔 웃던 서번트는 친한 친구에게 비밀 이야기를 하는 어린애 같은 표정으로 사실 자기가 관리하는 낙원은 패배한 전사를 받아들이는 영역이라고 밝혔다. 남들은 잘 모르는 사실인데 너한테라면 알려줘도 괜찮을 것 같다고도 말했다. 별로 중요한 정보도 아니니 이건 네 기억에서 버리건 말건 네 마음대로 하라고도 했다. 데이비트는 고민한 끝에 그 정보를 그 날 분량의 기록에 넣었다. 말이 많은 신은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허투루 말하지는 않는다. 장난스럽게 하는 이야기도 언젠가 복선으로 작용할 수 있다. 기억해 둬야 한다고 생각했다.
데이비트 젬 보이드는 죽음 이후의 자기자신의 안녕을 바란 적이 없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올바른 일을 했다면 사후의 안위 같은 거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천국이나 지옥에 가건 연옥에서 시간을 보내건 사후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대로 소멸하건 별 상관 없다. 하지만 하필 이 시점에 패자의 낙원을 담당하는 신격에게 ‘다시 만나자’ 는 말을 들은 건 신경 쓰인다. 데이비트가 여기서 목숨을 바쳐 일을 성공시킬 경우 데이비트가 갈 곳은 승자의 낙원인데, 거긴 동쪽이다. 테스카틀리포카의 관할인 북쪽이 아니다.
그건 무슨 의미였을까. 테스카틀리포카는 특유의 다원적인 시야로 마스터가 패배하는 미래를 훔쳐보았을까. 테스카틀리포카가 좋아하는 고약한 농담일까. 알고 싶다. 하지만 행성포식자의 행동방침을 확실하게 틀어놓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구를 파괴하겠다고, 반드시 이긴다고 생각해야만 하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이기면 테스카틀리포카를 다시 만날 수 없고 그 의문을 해결할 수도 없다.
음. 그건 좀 싫은데.
이상이 데이비트 젬 보이드라 지칭되었던 영혼과 육체의 결합물이 목적지에 도달하기 0.2초 전에 몰두하던 생각이고.

“진심이냐. 한 번 죽는 거 갖고는 질리지도 아니! 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어쩐지 안 오더니만!!”

노움 칼데아와 그 협력자들과 믹틀란의 선주민들의 총력을 다해 행해진 행성포식자와의 싸움, 그리고 노움 칼데아의 마스터와 임시소환으로 다른 문화권의 사후세계에 불려간 서번트 몇몇만이 겪은 우주에서 왔지만 지구에 정착해서 살게 된 신성과의 싸움으로부터 일주일 뒤, 믹틀란에서 사귄 친구가 선물로 준 축구공이 믹틀란의 해체와 함께 사라져버린 것을 깨닫고 조금 우울해져서 자기자신과 모두를 위해 기분전환을 해야겠다고 결론 내린 노움 칼데아의 마스터가, 믹틀란에서 가져온 마력 리소스로 영기 그래프에 뉴 페이스나 추가하자면서 퍼스트 서번트와 함께 소환 룸에 틀어박혔다가 본 무지개색으로 빛나는 소환 서클의 마력광 속에서 나타난 그랜드 어새신 야야우키 테스카틀리포카가 굉장히 당황한 얼굴로 한 말이다.
그리고,

“보시다시피 살아있다. 기대를 저버려서 미안하군.”

휠체어에 앉은 채 소환을 지켜보던 환자복 차림의, 네모 너스에게 최소 두 달은 밖에 나갈 생각도 하면 안 된다는 판정을 받은 데이비트가 한 말이다.
다행히 데이비트의 서번트였던 적이 있는 영령 흉내를 내는 신령은 상식적으로 반응했다.

“너네들 머리 괜찮냐? 믹틀란에서 나나 이 녀석이랑 무슨 짓을 했었는지 기억은 해?”
“아니 그게. 믹틀란이 사라지기 전에 마력자원 회수하려고 최상층부터 최하층까지 보더 타고 한번 더 돌아봤는데, 글쎄 이 오빠가 오르트 있던 구멍에서 사람꼴 온존하고 살아있길래
“선배 말씀이 맞습니다! 육체손상은 홀로 어느 정도 회복하셨던데 다른 별의 신의 심장이 적출된 부위에 마술적인 손상이 심해서, 그냥 놔두면 더 큰일날 것 같고, 데이비트 씨와의 마지막 대화 내용을 생각해 보니 목숨을 구하신다면 저희한테 협조해주실지도 모르겠다 싶어서 회수해서 귀환했습니다.”
“오 신이시여. 아 젠장, 내가 신이네
“저기 말이다. 너희들 좀 진지하게 얘기하면 안 될까? 그보다 다들 경계심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냐?”

문간에서 반쯤 임전모드에 들어간 채 소환을 지켜보던 카독이 보다 못해 끼어들었다. 노움 칼데아의 서번트 둘과 마스터 하나와 협력자 하나가 그냥저냥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이 난장판 속에서 자연스럽게 소외되는 데 성공한 데이비트는 새로 온 서번트가 노움 칼데아의 마스터를 제대로 ‘마스터’ 라 지칭하는 것을 보고 안도한 듯 웃는 마슈 키리에라이트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그러다가 문득 일주일 전의 자신이 마지막 순간이라 생각했던 0.2초를 생각했다. 냉엄한 신념과 기계적이기까지 한 목적의식과 필요최소한의 효율로 자신을 무장해도 버릴 수 없는 미련.


*


2018년 1월.

그래서 정식으로 뭔가를 해 주는 건 무리고, 인리표백의 진실은 전부 숨겨버리기로 결정한 이상 스태프들 커리어에 뭘 추가할 수도 없게 됐으니까. 결국 신임 소장님이 칼데아는 이래저래 분할해서 챙길 수 있는 것만 챙기고, 스태프들한테는 어떻게든 가능한 범위 내에서 보상해주는 방향으로 얘기가 됐는데. 데이비트 선배는 뭘 원해?”

태블릿 PC와 서류철을 겹쳐서 쥔 칼데아의 마스터가 물었다. 노움 칼데아가 남극대륙에 귀환하고, 이것저것 엄청난 일을 겪고, 여과이문사 사건은 벌어지지 않은 걸로 치고 모두의 일신상의 안전을 위해 모든 진실을 어둠 속에 묻어버리자는 결론을 낸 뒤 뒷수습 때문에 남은 스태프 모두가 죽을 만큼 바빠졌기 때문에, 칼데아에서 실질적으로 맡은 업무가 얼마 없고 모두와 사이가 원만하여 교섭 같은 일에 능한 칼데아의 마스터가 저 업무에 차출되었다는 사실을 데이비트는 알고 있다.
피니스 칼데아에 남은 것 중 버려야 할 기록과 남겨두고 고쳐 써야 할 기록을 구분하는 일을 자진해서 떠맡았던 데이비트는 데스크탑 PC의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물었다.

“뭐든 상관없나?”
가능한 범위 내에서는?”
“너무 걱정 마라, 아가씨. 저건 믹틀란에서 사치 좀 부려 보라고 권해도 귀찮다고 관심도 안 갖던 놈이야. 퇴직금이나 주지 그래. 내가 저 녀석이 지구를 파괴하는 데 성공하는 데 걸어버려서 저 녀석 예금을 다 써버렸거든.”

칼데아의 마스터의 호위 명목으로 따라온 문간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테스카틀리포카의 발언이다. 칼데아의 마스터가 대답했다.

“그건 당연히 줘야지. 마리스빌리 소장이 예전에 계약서에 명시해둔 게 있고, 예산도 그쪽으로 분할해 둬서 그냥저냥 괜찮을 것 같대. 구체적으로는 이 정도
“생명비용 포함된 거 맞냐? 좀 짠 것 같은데.”
“대체 어느 정도를 적정비용으로 생각하는 거야? 난 이런 숫자 처음 봐.”

데이비트는 칼데아의 마스터와 칼데아의 서번트의 대화를 백색소음처럼 들으면서 이 말을 어떻게 하는 게 제일 자연스럽고 위화감이 없을까 쭉 시뮬레이션을 거듭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그럴 방법이 없었다. 결국 데이비트는 당초의 목적을 포기하고 키보드에서 손을 뗀 뒤 최대한 자연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걸 줬으면 한다.”
“그거?”

칼데아의 마스터와 서번트가 동시에 데이비트 쪽을 바라보았다. 데이비트는 최대한 무심한 표정으로 한 손을 들어 뭔가를 가리켰다. 손끝이 향한 방향에는 데이비트가 피니스 칼데아에 올 때 마리스빌리와 함께 작성한 계약서를 보면서 훈수를 두다 말고 멍청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일 년간 온갖 특이점에서 사업을 하거나 사고를 치거나 했던 어새신 클래스의 트러블 메이커.

“하?”
“말 그대로다. 그 녀석의, 노움 칼데아의 서번트 어새신 테스카틀리포카의 영기를 양도받고 싶다. 무리한 요구인가?”
“하아아아아?!”

테스카틀리포카가 기능 트러블을 일으킨 것 같은 표정으로 경악하는 동안 칼데아의 마스터는 왠지 그럴 것 같았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신임 소장님한테 미리 물어봐 두길 잘했네. 가능할 거야. 대신 마력패스는 제대로 본인한테 이어놔야 하는데 괜찮겠어? 저 아저씨 레이시프트처에서 하는 짓 보면 잠깐 사이에 마력 훅훅 쓰고 돌아가던데.”
“그건 생각해둔 방식이 있다. 대놓고 서번트를 빼돌릴 수는 없을 테니 뭔가 마술예장이나 성유물을 양도받는 걸로 서류를 위조하고 싶다. 신임 소장은 법정과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바빠서 정신이 하나도 없겠지만 30분 정도만 상담할 시간을 마련해줬으면 한다.”
“너희들 잠깐. 다 좋은데 내 의견은?”
“와. 사역마가 말대꾸도 하네?”
“야!”
“테스카틀리포카.”

데이비트가 다시 끼어들었다. 싫은 소리나 아쉬운 소리를 하기 굉장히 힘든 느낌을 주는 깊게 고인 물 같고 흔들림이 없는 눈동자가 테스카틀리포카를 응시했다. 칼데아의 마스터는 굉장히 부담스러우니 별로 끼어들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슬슬 뒷걸음질을 쳤다. 데이비트는 말했다.

“내게 오는 게 싫은가?”

테스카틀리포카는 별로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했다. 난처해한다기보다는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이었다.

“아니, 당황스러우니까 그렇지. 내 조력이 또 필요하다고? 너 또 뭔가 내가 조력해야 이룰 수 있는 무시무시한 멸망이나 파괴 같은 거 생각하고 있냐?”
“그건 상황이 안 좋아서 어쩔 수 없이 한 거고, 당분간은 그런 큰일은 안 할 거다.”
“‘당분간은’?”
“데이비트 선배, 자꾸 그런 발언 하면 교섭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거라고 생각해. 테스카틀리포카한테도 신임 소장님한테도.”

교섭은 칼데아의 마스터가 그런 발언을 한 게 무색하리만치 깔끔하게 매듭지어졌다. 개인적인 심적 외상을 불러일으키는 전 A팀의 마스터와 서번트에게 법적 자문을 해주고 교섭을 해낸 고르돌프 무지크는 300분 같은 30분을 견뎌낸 뒤 두통약을 물도 없이 삼켰다. 아직은 노움 칼데아 소속인 어새신 테스카틀리포카는 자기 소유권이 문서화되어 데이비트의 손에 넘어가는 것과 데이비트가 테스카틀리포카의 가짜 신원을 준비하고 얼마 없는 짐을 정리하고 퇴직금을 수령하고 이곳저곳을 경유한 끝에 영국에 들렀다가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표를 사는 것을 약간 질린 얼굴로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이렇게 물었다.

“내가 여기 왔을 때, 네 것을 빼앗긴 기분이라도 들었냐?”
“아니. 믹틀란에서 지낼 때도 네가 내 것이라는 생각은 딱히 안 했다. 나는 인격체를 물건 취급하는 데 서툴러. 네 육체를 사용할 때는 쭉 네게 신세를 진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 녀석이 ‘그거’ 라는 지칭을 해?”
“그때는 그렇게 해야 내가 침착한 상태인 것처럼 보일 것 같았다. 교섭에는 침착함이 필수적이지.”

데이비트는 책상에 앉은 채 남극대륙에서 당장 조달할 방법이 없어서 연금술로 만든 흑요석을 공들여 깎고 있었다. 칼데아를 벗어나고 마력제공원이 끊기면 테스카틀리포카를 지금의 형태로 현현시키는 데 이런저런 애로사항이 생긴다. 그래서 목적지까지 테스카틀리포카를 격납해서(이 표현을 들었을 때 테스카틀리포카는 자제력이 마비된 것처럼 웃었다) 운반할 예장이 필요해졌다. 그리고 데이비트는 이런 일을 할 때 남에게 쉽게 도움을 구하는 인격체가 아니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데이비트의 침대에 누운 채로 말했다.

“나는 너희들에게 이유 없이 조력해주지 않아. 여기 온 건 사고방식이 어떻건 간에 그 마스터 아가씨도 이 천문대에서 일하는 녀석들도 내가 조력하고 끝까지 지켜볼 가치가 있는 전사다운 행동을 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안다.”
“그런 것치고 불친절하게 구는군. 슬슬 설명하는 게 어때?”

데이비트는 깎아낸 세공물을 책상에 올려두고 바닥 부분이 제대로 평형으로 깎였는지, 세공품의 수평이 잘 맞는지 점검했다. 테스카틀리포카가 오래 지낸 땅의 세공사들의 발끝도 따라갈 수 없이 어설프지만 대걍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 광석 덩어리는 바닥에 앉아 있는 고양이과 동물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다.
뒤에서 테스카틀리포카가 말했다.

“그거 아무리 봐도 재규어보다는 고양이 같다.”
“둘 다 고양이과니까 비슷한 거라고 생각해라.”
“내가 들어갈 물건인데.”
“신은 자기가 인간에게 뭘 받을지 선택할 수 없는 법이다.”
“정론으로 공격하지 마.”
“그리고, 너는 내가 무슨 제안을 가져올지 기대하고 있지.”
…….”

테스카틀리포카는 누운 채 어깨를 으쓱했다. 데이비트는 세공도구를 고쳐 쥐면서 말했다.

“조급해하지 마라.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까. 내가 믹틀란에서 한 짓 보지 않았나?”
“실패했지만 말이야.”
“참고로, 나는 내가 실패해서 잘 됐다고 생각한다.”
“이게 한 마디를 안 져.”

데이비트는 세공 작업을 재개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30분 정도 그걸 지켜보다가 지루해졌는지 영체화해서 사라졌다.


*


2018년 3월, 데이비트 젬 보이드는 근 14년만에 미국에 돌아왔다. 데이비트의 토대가 된 소년은 아버지와 함께 영국과 미국을 오갈 때 본 해리 리드 국제공항을 꽤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14년이 지난 뒤 돌아온 공항에 그애가 기억하는 모습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게이트나 탑승구의 형태는 거의 그대로 남아있었기 때문에, 데이비트는 노스탤지어가 주는 감동을 누리며 미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가방에 달려 있는 어설픈 생김새의 흑요석으로 된 고양이 악세사리가 ‘네가 망향 같은 걸 느낀다니’ 라고 말하며 휘파람을 불어서 분위기를 깨기는 했다)
네바다에서 지내던 시기의 기억은 연속적이기는 했지만 열 살짜리 어린애가 자기 집으로 가는 길이나 교통수단을 제대로 기억할 리가 없다. 법적으로 자기 소유인 집의 주소는 알고 있고 볼 수도 있지만 인간이 만든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가는 방법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데이비트는 공항 의자에 앉아 3획으로 이루어진 날개 문양이 새겨진 손으로 지도를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버스 시간표 어플리케이션을 체크해 가면서 버스표를 샀다. 옛 집까지는 1시간 반 정도 버스를 탄 뒤 좀 더 걸어야 했다.

“왜 이렇게 번거롭게 해 놨어. 그냥 런던에 놔두지 그랬냐.”
“부르는 게 값인 물건인데 내가 사용할 예정이 없어서, 잘 지키면서 보관할 방법이 떠오르질 않더군. 그때는 신뢰할 만하고 친한 마술사 지인도 없었다.”
“남한테 가져오라고 하지.”
“돈 아깝다.”

데이비트가 잘라 말하자 흑요석 고양이가 혼자 웃었다. 공항에 있는 식당에서 햄버거를 먹고 버스표에 적힌 시간이 되자 해가 지고 있었다. 데이비트 소유의 주택은 주거지구에서도 꽤 외곽에 있었고 버스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흑요석 고양이와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데이비트는 백팩을 품에 끌어안은 채 잤다. 무릎에 무거운 고양이가 올라와 있어서 곤혹을 치르는 꿈을 꾸었다. 버스에서 내린 뒤 데이비트는 흑요석 고양이를 손끝으로 한 번 때렸다. 흑요석에 갇힌 고양이는 내가 안 그랬다고 항변했다.
데이비트와 흑요석 고양이가 도착한 목적지는 30년 전쯤 유행했던 양식으로 된 이층 주택이었다. 이 집의 집주인이었던 소년의 아버지는 대대로 해오던 연구를 좀 더 제대로 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났지만 내심 자신의 고향은 미국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쭉 네바다의 이 집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와 소년이 사라진 뒤 집의 소유권은 자연스럽게 소년의 신원을 물려받은 데이비트에게 넘어왔다. 소년의 아버지는 일 년에 한 번은 네바다에 가서 집을 청소하고 소년과 함께 휴가를 보내곤 했지만 데이비트는 일 년이 1825분 같은 다급한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일 년에 한 번씩 미국에 있는 청소회사에 연락하곤 했다. 데이비트가 보통 인간이었다면 곤란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지만 데이비트에게는 집에 들어온 낯선 사람들이 이상한 짓을 하지 않는지 지켜볼 시야가 있었으므로 별 일은 없었다. (사실은, 런던에 있는 데이비트가 청소 과정에서 벽에서 잠시 떼어냈던 액자가 거꾸로 걸려 있다고 전화로 지적한 사실 때문에 용역을 파견한 회사도 용역들도 기가 질린 상태였기 때문이지만, 이건 아무래도 좋은 얘기다)
데이비트는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문을 열었다. 반 년 분량의 먼지가 쌓인 집이 사람 하나와 신 하나를 반겼다. 데이비트는 문간에 선 채 침묵하다가 말했다.

“일몰 이후니까 바람의 권능 정도는 쓸 수 있지 않나?”
“너 나를 이런 매체에 수납해 놓고 그런 말이 나오냐?”
“하지만 너는 새 육체에 들어가면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될 텐데, 환기도 안 된 상태라면 곤란하지 않나. 그리고 물건이 지하실에 있다.”
“전이나 지금이나 서번트 막 굴리는 건 여전하네. 집에 있는 문 다 열고 얘기해.”

데이비트는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가린 뒤 보이는 대로 커튼과 창문을 열었다. 3월의 바람을 맞으면서 묵묵히 부엌 옆에 있는 지하실로 내려가는 문을 열었다. 아직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서 데이비트는 스마트폰 액정을 켜서 아래층을 비췄다. 지하실 한켠에 전자제품 같은 커다란 상자가 하나.
목적한 물건을 확인한 데이비트가 말했다.

“됐다.”
“에헤카틀, 에헤카틀, 요왈리 에헤카틀.”

3월의 네바다 교외에 부는 찬바람과 다른 온도의 신의 이름의 증명이라는 개념이 빈집을 구석구석 쓰다듬고 지나간다. 초연과 피와 아열대의 수목 냄새가 나는 밤에 부는 바람이 지나가자 목적했던 물건의 뚜껑이 벗겨졌다. 상자 안에 17세 정도로 보이는 인간 형태의 뭔가가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다. 저것이 약 7년 전의 데이비트와 같은 용모라는 사실을 데이비트는 알고 있다. 인간처럼 보이고 육체의 구성요소도 인체와 다를 것 없지만 영혼은 들어있지 않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이다.
흑요석 고양이가 말했다.

“저런 게 집에 있는데 용역을 써서 청소를 했다고?”
“저게 무엇인지 모르는 이에게는 낡은 자전거나 전자제품처럼 보이게끔 암시를 걸어달라고 부탁했다. 제작자가 나보다 뛰어난 마술사였으니 그런 건 잘 처리해 놨을 거다. 실제로 지금까지 잘 보존되기도 했고.”

데이비트가 지금보다 조금 더 어릴 때, 우연히 만난 마술사에게 본의 아니게 도움을 줘서 빚을 지운 일이 있었다. 마술사는 데이비트에게 뭔가 원하는 게 있느냐, 뭔가 만드는 건 주특기니까 얘기해 보라고 했다. 마술세계에서 좋은 의미로도 나쁜 의미로도 굉장히 유명한, 유전자검사도 통과 가능하고 인간이 죽을 경우 그 인간의 영혼이 인형을 자신의 육체라고 판단해서 그 몸에 들어가 소생할 정도로 완벽한, 자기자신과 100% 똑같은 인형을 만드는 위업을 달성해서 봉인지정을 당한 사람이었다.
그 무렵의 데이비트는 지금보다 어렸고, 자신이 가진 특질이 재구성된 육체에 귀속되는 것인지 육체에 들어 있는 혼에 귀속되는 것인지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데이비트는 마술사에게 자신의 특질을 털어놓고 혹시 자신과 완전히 똑같은 인형도 만들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마술사는 난색과 탐구심을 동시에 느끼는 표정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서는 해보겠다고 말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완전히 똑같이 만들 수는 없었다더군. 내가 교신해서 불러내는 암흑물질은 용무가 끝나면 퇴거하고, 내가 협조해서 체세포를 넘겨줘도 제대로 배양되지 않았어. 이래저래 노력은 해 봤지만 지구에 존재하는 재료밖에 쓸 수 없었지. 그러니 이건 나에 한없이 가까운 지구인의 육체에 불과하고, 나와 신체적인 스펙은 완전히 동일하지만 여분 육체로는 사용하기 어려울 거라고 하더군. 그러니 잘 만든 인형이기는 하지만 실패작인 셈이다.”
“요는 인체로도 문제없이 기능하지만 너는 사용할 수 없는 물건이고, 하지만 굉장히 구하기 힘들고 귀한 물건이라 버리지도 못하고 보관하고 있었단 말이지.”
“그래.”

데이비트는 한쪽 무릎을 꿇고 가방에서 흑요석 고양이를 떼어내서 상자 안으로 휙 던졌다. 신령이 격납된 흑요석 덩어리가 인형의 상체 위에 떨어졌다. 데이비트가 말했다.

“내가 한 의뢰였으니 외견은 나랑 똑같이 디자인돼 있지만 외견은 외견일 뿐이니 바꿔도 별 문제 없다고 들었다. 네 마음대로 고쳐서 써라.”
“오케이. 진짜 막 고칠 거야. 원래대로 해 놓으라고 해도 못 해. 전부 네 육체랑 일치한다면 일단 마술회로부터 좀 늘려야겠네

데이비트는 눈앞에서 인체에서 나면 안 되는 소리를 내며 벌어지는 CG에 돈을 별로 안 들인 공포영화 같은 광경을 쭉 지켜보았다. 꽤 길게 느껴졌지만 실제로는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상자 속에서 마른 몸에 근육을 구석구석 짜넣은 것 같은 체격의 청년이 일어섰다. 왕관 같은 금발에 어둠 속에서도 존재감을 잃지 않는 흐릿한 푸른색 눈동자.
인형은 알몸이었기 때문에 새 육체를 입은 테스카틀리포카는 당연히 알몸이었다. 데이비트는 코트를 벗어서 테스카틀리포카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테스카틀리포카가 말했다.

“육체에 이걸 제조한 공간의 기억이 덕지덕지 남아있더군. 너, 입보다 눈빛이 달변이더라. 이 육체를 사용하면 어쩌면 평범한 지구인류로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구나. 하지만 역시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체념했고.”
“그 정도로 부정적인 생각은 안 했다. 그냥 궁금했을 뿐이야.”
“뭐, 그래. 네가 그렇다니 그런 거겠지.”

데이비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인형이 들어있던 상자를 다시 닫고 그 위에 걸터앉아 다리를 꼬았다. 믹틀란에서 본 것과 다를 것 없는 동작이다.

“오래도 걸렸군. 그럼 얘기해 봐라. 뭘 할 건지.”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있다.”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지 말라는 말 몰라? 뭐 그래도 이런 걸 받아먹고도 입을 닫을 순 없지. 말해 봐.”
“믹틀란에서 퇴거할 때, 왜 ‘다시 보자’ 고 했지?”

테스카틀리포카의 눈이 커졌다. 데이비트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흐릿한 푸른색 홍채를 응시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잠시 이마를 짚고 ‘아’ ‘진짜’ ‘수다 좀 작작 떨어야 하는데’ 따위 말을 반복하다가 말했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냐? 징그러운 기억력이군.”
“그건 다소 자신있는 분야라서. 아무튼 그건 무슨 의미였나?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12천상을 광의적인 의미의 낙원이라 생각하기에는 너는 ‘검은’ 테스카틀리포카라는 정체성을 꽤 중요시하는 개체였고, 그럴 땐 장난 안 치는 성격이지. 이유가 뭐지? 나는 네가 내 패배를 바라지는 않았다고 느꼈다. 혹시 네게는 그 때부터 결말이 보였나?”
“하아.”

테스카틀리포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꼬았던 다리를 풀고, 좀 거북해 보이기는 해도 묘하게 후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맞아. 예지는 아니고 통계의 결과지만.”
“나 같은 케이스가 또 있었다고?”
“아니. 내 경험의 문제야. 보통 혼자인 녀석은 웬만하면 함께인 녀석들에게 질 가능성이 높으니까. 싸움은 규모가 크면 클수록 불확정 요소가 늘어나는 법이고, 상대가 여럿이면 그만큼 시너지가 커지니까. 나는 언제나 할 수 있는 건 해두는 편이야. 그러니 뭐, 곧 내 영역에 올 가능성이 높은 녀석한테 인사 정도는 건네 둬야겠다 싶어서.”
“하.”

데이비트는 실없이 웃었다. 그래도 납득은 갔다. 당장 자신도 자신이 실패할 경우를 전제하고, 자신이 실패하고 그들이 승리하면 남극대륙으로 가라고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아마도 자신이 여기에 있는 이유 또한 그것이다.
데이비트는 집중치료실 천장을 보면서 열심히 생각했던 말을 겨우겨우 입에 담았다.

“일단, 미안하다. 나는 너를 불러낼 때 약속한 것을 달성하는 데 실패했다.”
“괜찮다. 실패했어도 재미는 있었어. 그리고 덕분에 믹틀람파에 특이한 주민이 꽤 늘었거든. 이야, 코아틀 녀석 권속 닮은 인류라니.”
“그리고 늦지만 지금이라도 그 보상을 하고 싶다.”
“어떻게?”

테스카틀리포카는 웃고 있었지만 진지했다. 데이비트는 그에 걸맞는 진심을 담으려 노력하며 대답했다.

“너는 사라졌고, 나는 승자로 죽지도 패자로 죽지도 못했어. 보통이라면 나는 너와의 계약에 실패했다고, 다음부터는 그런 일 벌어지지 않게 하자고 피드백하고 끝이겠지. 하지만 노움 칼데아에 네가 나타난 걸 보니 욕심이 생기더군.”
“흐응. 그래서 어떠냐. 이번에는 나를 만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

광전사와 암살자의 적성 대신 땅의 재정자로서의 자신을 선택해 믹틀란에 왔던 신이 데이비트를 시험하듯 물었다. 데이비트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다. 장담도 할 수 없어. 그래도 내 행동방침은 지금도 여전하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내가 선하다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거다.”

2개월간 집중치료실에서, 그 이후 인리표백의 해결에 협력하는 10개월 가량의 시간 동안 쭉 생각했다. 자신이 불러내지 않은 테스카틀리포카를 처음 봤을 때 통찰해낸 미련. 아무리 생각해도 모든 것이 그것 때문이었다. O.R.T는 데이비트의 육체에서 데이비트가 그에게 내릴 오더가 마술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자신의 잃어버린 심장의 마이너카피 수준이어도 어느 정도의 동력은 공급할 수 있는 다른 별의 신의 심장을 그쪽 입장에서는 되찾아 가는 감각으로 취했다. 그 과정에서 남극대륙에 있는 물건을 파괴해야 한다는 오더는 접수했지만, 마지막 순간 그 실없는 궁금증이라는 미련을 품어 버린 데이비트의 인간체는 데이비트가 부여한 오더와 공존 불가능한 방향성을 갖추었다고 간주하고 뱉어냈다. 딱히 이렇다고 확실하게 증명된 건 아니다. 믹틀란의 O.R.T는 이미 없고 데이터를 제공해줄 개체조차 아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살아남아서 두 달이 넘게 노움 칼데아의 집중치료실에서 요양하는 처지가 된 데이비트가 홀로 고찰하고 나름대로 자기가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낸 결과다.
테스카틀리포카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다시 만나서 함께 모험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미안해할 일 없는 납득할 수 있는 끝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것이 데이비트의 일 년이 내린 결론이다.

“나는 앞으로도 쭉 이렇게 살 거다.”

테스카틀리포카의 손을 잡고,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실어 말한다.

“하루의 23시간 55분을 버리고 내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5분을 주워 가면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할 거다. 필요하다면 또 믹틀란에서 한 짓을 할 수도 있고, 아주 별 것 아니고 조용한 일을 하다 죽을지도 몰라. 전쟁도 향연도 멸망도 약속할 수 없다. 그래도 나는, 언제나 그 때처럼 온 힘을 다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
…….”
”그러니 그 결과, 내가 결국 네 낙원에 갈지 다른 낙원에 갈지 곁에서 지켜봐 줘. 그게 이번에 네게 할 의뢰다.”

무표정하게 데이비트를 바라보던 테스카틀리포카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참으로 난감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구도가 진짜 묘하네. 야, 그런 말은 최소한 반지라도 들고 해라.”
“?”
“아니다. 못 알아들었으면 됐어. 아, 근데 진짜 모양이 좀 별로네. 옷 정도는 만들어 입을 걸 그랬어.”

테스카틀리포카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모양이 영 별로라며 투덜거렸지만 데이비트가 보기에는 딱히 꼴사납지 않았다. 언제나 멋지다고,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세계, 어느 시간을 선택하더라도 제일 가열하고 처절한 싸움 한복판에 있는 육체.
테스카틀리포카는 데이비트의 손을 쥔 채로 말했다.

“결과적으로 제대로 뭘 하겠다고 약속한 것도 없고, 정말 수지타산 안 맞는 거래였다. 네 인생을 위한 충고다. 너 이런 거 두 번 하지 마라.”
“알고 있어.”
“지금의 나는 너에게서 다소 영향을 받았고 너와 함께 행동한 기록을 가졌을 뿐 네게 의리를 지킬 이유는 없는 존재야. 하지만 네가 나를 이런 수단을 동원해 가면서까지 네 인생에 또 끌어들이고 싶다면, 좋다. 나는 요청받은 건 거절하지 않아.”

신자에게 조용한 삶도 편안한 죽음도 허락하지 않는, 허나 누구나 눈길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형태로 웃음짓는 전쟁신이 다시 말한다. 신자는 귀를 기울인다. 인간의 언어의 형태를 한, 운명이라는 이름의 수레바퀴가 다시 돌아가는 소리.

“지켜봐 주지. 그러니 충분히 보여 봐라, 셈의 남자. 네가 약속했던 멸망을 넘어설 무언가를.”
“아아. 물론이다.”

이리하여 운명은 또다시 달려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세계는 대체로 이런 식으로 유지되는 법이다.





<마침>

¹ Adele <Skyfall> 의 첫 소절
“This is the end, Hold your breath and count to ten. Feel the earth move and then, Hear my heart burst ag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