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1일 오락관에 나온 페이트 그랜드 오더 아르토리아 캐스터x모르간 개인지를 웹공개합니다. LB6 이후 노움 칼데아의 아르토리아 캐스터(아발론)가 노움 칼데아의 모르간과 마주치는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인 뇌내설정이 많습니다. 서버페스 2에 등장하는 요소(수영복 캐스터의 보구 이름)가 나옵니다. 아서 코난 도일의 〈The Final Problem〉을 소폭 오마주했습니다.
별의 억지력이란 건 별 혹은 인간의 죽고 싶지 않다는 의지의 구현이다. 위기를 답파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렇기에 아라야 억지력의 실행담당요원 격인 영령의 좌 또한 가능한 한 최대한의 효율주의를 기본방침 삼아 움직인다. 당면한 위기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데이터베이스에 있는 수많은 영령 중 제일 적절한 인선을 골라 파견한다. 이것이 영령의 좌가 시간과 공간 양방향으로 미친 곳인 이유이다.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그 소환은 인류 입장에서는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겠지만 너 개인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뜻이야.”
범인류사의 영령의 좌에 내 정보를 등록하기로 결정하고 드러내야 할 정보와 숨겨야 할 정보를 추려낼 때 갑자기 나타난 꽃의 마술사(진짜인 쪽)가 한 말이다. 나는 조금 당황한 상태로 되물었다.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당신이 찾아오신 거죠? 혹시 제가 좌에 가는 걸 별의 내해에서 달갑게 여기지 않나요?”
“설마. 이건 약관고지 같은 거야. 잘 써먹을 수 있는 인력 중 하나가 영령의 좌에 가기를 요청한다면 그 정도 설명은 해줘야지. 별의 내해가 단말로 써먹을 수 있는 인격체 중에 제일 유능하고 걔들에게 협조적인 게 나인 것도 사실이지만, 이번에는 아무래도 상대가 너니까 내가 자원했어.”
마술사는 범인류사의 인간형 지성체 기준으로 장난스럽고 매력적인 느낌을 주는 표정을 지으며 ─ 요정안, 그리고 별의 내해의 일원으로서 알게 된 지식이다 ─ 한쪽 눈을 감았다 떠 보였다. 나는 여전히 당황했지만 그래도 꽤 침착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별의 단말로서 수많은 정보와 접촉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냉정침착함에게 소소하게 감사하면서.
“그런데 그렇게 말씀하셔도 저는 당신의 아르토리아가 아니에요. 혹시 제가 제가 발생한 세계의 그녀에 해당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리움을 느낀 것인지?”
“아니 딱히. 아르토리아는 좀 돌아돌아가긴 해도 답을 찾는 존재인걸. 그러니까 괜찮아. 그리고 그 이문異聞에서는 네게 크게 신세를 졌으니까 말이야. 젊은 낙원의 요정Avalon le Fae.”
나는 조금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이건 지난번의 제가 느꼈던 감상인데요, 호칭의 사용에 그렇게까지 구애될 필요가 있나요? 이름은 그냥 식별명칭이고 당신은 왕이 된 그녀와 제가 다른 존재임을 알고 있을 텐데요.”
범인류사에 성검과 깊은 연관점을 지닌 아르토리아 팬드래건이라는 여자가 존재했고, 나는 그녀의 영향을 받아 파생된 개체다. 원래 그녀의 이름이었다. 그래도 나의 전신이 된 그녀가 아르토리아라는 이름을 나름대로 오래 사용해온 건 사실이다. 별의 내해의 일원이 되면 호오가 옅어진다지만 옅어질 뿐이지 인격체로서 갖춘 구성품은 그대로 계승된다. 개인적인 경향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건 내가 나이 먹고도 주책 부리는 늙은 마술사에게 눈치 주고 싶어서 투덜거린 거다. 아르토리아라는 이름은 네가 키운 그 애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라는 얘기다.
꽃의 마술사는 정말로 곤란한 듯 입을 가리고 웃다가 대답했다.
“인류에게는 에일리언 같은 존재라고 공언하면서 지내온 내 입으로 하기 웃기는 얘기기는 한데…개인적으로는 그 단순한 식별명칭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인간다운 행동이라고 생각하거든?”
“변명치고 궁색하군요.”
“둘러댈 생각도 안 들 만큼 깔끔하군. 하지만 그건 사실이야. 변명이지. 이건 나 개인이 아르토리아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방식이면서, 나라는 존재가 아르토리아에게 개인적으로 구애되고 있다는 걸 나와 나를 아는 존재들 모두에게 오래도록 증명하는 수단이기도 해.”
이 행동은 조금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는 성검의 개념이고 저치는 오래된 몽마이므로 존재방식에는 차이가 있지만 개념적인 존재라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개념적으로 유지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근간인 기억은 쉽게 흐려지지 않는다. 당장 나도 날아갈 듯한 기분으로 글로스터 거리를 걷던 틴타겔 촌뜨기 계집애의 기억을 어제 일처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었다.
“그건 기억이 흐려지는 게 두렵기 때문입니까?”
마술사는 정말로 곤란한 듯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 즐겁기 때문이야.”
그리고 정말 늙은 존재답게 이런 말을 덧붙였다.
“너도 그쪽에서 지내다 보면 이해하게 될 거야.”
아무튼, 그런 물어본 적도 없는 설명을 들어둔 덕분에 나는 노움 칼데아에 도착했을 때 낯익은 인간 마스터나 유능한 인공존재나 요정기사 소녀나, 그녀들의 동료들이 요정국 브리튼의 그 무엇도 알지 못하며 애초에 그 땅에 발을 들여놓은 적조차 없는 것 같다는 점을 깨달았을 때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외치는 자Caster’ 쪽의 나의 경향성이 무의식중에 조금 의기소침해지기는 했지만 들키지는 않았다)
그녀들과 나 사이의 1년 가량의 시간차는 ─ 광기에 가까운 집념 하에 수집된 노움 칼데아의 라이브러리에게 소소한 감사를 ─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정말 멸절 직전까지 몰린 범인류사 최후의 희망이라는 노움 칼데아는 엉망진창인 것을 여왕이 혼자 어떻게든 수습해서 꾸리던 요정국 브리튼만큼이나 엉망진창으로 굴러가는 상태였다. 갑작스럽게 툭 튀어나온 나를 보고도 다들 ‘오, 잘은 모르지만 얘도 너무 일찍 와버린 서번트인가 봐’ 정도 반응만 하고는 뭘 하고자 하는 존재인지, 뭘 할 수 있는지부터 캐낸 건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아니, 대체 특이점은 왜 그렇게 많이 발생하는가. 칼데아의 서번트란 존재들은 왜 요정들만큼이나(가끔 요정들보다도 더) 이상한 사람들밖에 없는가. 범인류사의 존재나 이문대에 저항하다가 범인류사 쪽과 연이 닿아 아라야 관할의 영령의 좌에 새겨진 이들까지는 이해하는데 이문대의 중추로서 범인류사와 적대하던 이들까지 데려다 인력으로 써먹어도 과연 괜찮은 것인가. 시스템은 뭐고 체이테피라미드히메지성은 뭔가. 내가 할 일은 뭐가 그렇게 많은가. 아무리 생각해도 꽃의 마술사는 이걸 먼저 말해줬어야 했다. 요정국 브리튼에서 인간 마스터가 전투를 할 때 내가 잘 모르는 서번트들을 소환하던 것을 상상하면서 막연히 나도 그런 식으로 싸우겠구나 상상하기야 했지만 이런 식으로 정말이지 끝도 없이 임시소환되어 세계를 구하는 싸움보다는 노동에 가까운 일에 온 힘을 다하는 미래는 상상한 적 없단 말이다. …말이야 이렇게 했지만 그래도 나쁘지는 않았다. 어처구니없는 일밖에 일어나지 않는 노움 칼데아의 여행은 노움 칼데아 사람들이 요정국 브리튼에 도달하기 전에 정보가 노출되어 버려서 이미 정해진 미래가 바뀌는 타임 패러독스를 막아야 한다는 제약이 걸린 상태로도 즐거웠다. 아마 지금은 미래가 된 과거에 요정국에서 여정을 함께했던 마슈 씨도 하베트롯 씨도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부끄럽고 눈치 없는 발언이니까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생전의 나는 먼 과거의 브리튼에서 구세주 토네리코의 여행에 동행했다는 마슈 씨가 여왕이나 현자를 보면서 따뜻함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는 것을 조금 부러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움 칼데아가 아르토리아 캐스터라는 여자애와 만나기까지의 2017년 12월에 멈춘 지구에서의 1년은 그런 식으로 흘러갔다. 나는 온갖 다양한 레이시프트처를 달렸고 마력과 가호와 대숙정방어와 그 외의 많은 것을 자아냈다. 그러다 내가 이러자고 영령의 좌에 갔나 괴롭다는 생각이 들 때면 붕괴할 요정국 브리튼이 남긴 찌꺼기들과의 재회까지 남은 기한을 손꼽아 세고는 했다. 어쨌든 인간이건 요정이건 낙원의 요정이건 인리의 유지장치건 자기가 한 일의 결과물을 보고 싶고 궁금하게 여기는 건 똑같기 때문이다.
*
오전 내내 노움 칼데아 지하의 이름이 긴 도서관에 있다가 점심때쯤 식당에 갔더니 나쵸와 닭고기와 야채를 넣고 매운맛 소스를 뿌린 부리또를 먹고 있던 마스터가 말을 걸어왔다.
“캐스터 안녕. 좋은 아침.”
“마스터… 그, 지금은 점심땐데…”
“아, 맞다.”
마스터는 범인류사산 마스코트 캐릭터 같은 표정으로 웃으며 주먹을 쥔 손으로 자기 머리를 짚었다가 뗐다. 그래도 까맣게 물든 눈 밑은 숨길 수 없었다. 이번에 발생한 특이점에서 보물상자가 나온다는데, 거기서 없는 재료가 엄청 나온다는 이유로 쭈욱 특이점을 뺑뺑이 돌고 있다고 했다. 작년에는 진짜 나를 끝도 없이 불러댔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최근 서번트가 많이 충원되면서 요즘은 내가 나갈 일이…아주 없어지진 않았지만 조금 줄어들었다. 덕분에 이런 걸 보고 측은하게 여길 여유도 생겼다. 오베론은 저 자식 아주 물욕에 정신이 나갔다고 하던데 나는 그런 표현을 사용할 정도로 심하게 성격을 망친 요정은 아니라서 그냥 조용히 회복마술을 걸어줬다. 마스터는 고르돌프 씨에게 베이컨을 받아먹은 캐스팔루그 같은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대답했다.
“고마워.”
“재료도 좋지만 몸부터 챙겨야지. 마스터가 쓰러져서 임시소환 해제되면 재료 챙겨서 돌아올 수도 없는데.”
“에이, 쓰러지면 마슈가 받아주니까 괜찮아.”
농담이 아닌 눈빛이다. 솔직히 오베론이 왜 마스터가 물욕에 미쳤다며 매도하는지 이해가 갈 것 같아서 더 생각하는 건 그만두고 마스터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서 햄버그랑 새우튀김을 추가한 카레덮밥을 먹기 시작했다. 먼저 식사를 마치고 빨대로 하리토스를 빨고 있던 마스터가 말했다.
“아 참, 모르간이랑 지금 돌고 있는 장소랑 상성이 잘 안 맞아서 모르간한텐 쉬라고 했거든. 그랬더니 당분간 시뮬레이터에 있겠대서 그러라고 했어.”
사래들릴 뻔했다. 별의 내해의 단말로서의 모든 평상심을 그러모아서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그 요정 참 어디 틀어박히는 걸 좋아하네요. 오사카베히메 씨랑 좋은 승부가 될지도.”
“히메가 들으면 울걸.”
“마스터만 조용히 입을 다물면 해결될 것 같은데?”
“사실만 가지고 마스터를 공격하는 건 칼데아에서 금지돼 있어. ─근데 말이야. 캐스터는 모르간이 거북한가?”
마스터가 물었다. 나는 대답이 궁해졌다.
이문대 브리튼의 붕괴로부터 며칠, 여왕 모르간은 아주 뻔뻔하게 노움 칼데아의 소환실에 나타났다. 그때 나는 4술사 서번트들이 주로 모이는 휴게실에서 ‘신성이 없는 존재도 마력으로 신성을 부여한 무기를 사용하면 영령 아킬레우스를 상처입힐 수 있을까’ 라는 잡담거리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완전히 달라졌어도 그치와 나는 일단은 동일규격으로 만들어진 개체다. 나는 그 마력파장을 느끼자마자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서 이야기하던 것도 잊고 바로 소환 룸까지 달려갔다. 아무튼 거기서 마주친 여왕이 내 얼굴을 보자마자 한 말은 이렇다.
‘낙원의 요정Avalon le Fae. ─그러냐. 너는 자기만의 운명을 찾아냈구나.’
그리고 자연스럽게 아마 나와 비슷하게 충격받은 표정인 마스터와 마슈를 거느리고 기록용 단말을 들고 달려온 노움 칼데아의 스태프를 따라 나가 버렸다. 인류의 배신자로서 이문대 브리튼의 왕이던 자가 범인류사의 고스트라이너로 전락해 자기 나라를 무너뜨리는 데 크게 기여한 후속요정과 다시 만난 반응이 딱 그걸로 끝이었다. 너무 자연스러운 동작이라서 끈질기게 따라붙던가 뭔가 지적할 기운도 안 났다. 자연스럽게 마주치려니 했는데, 그쪽과 이쪽은 싸우는 방식이 다르다 보니 만날 일이 잦지가 않아서 이야기를 나눌 일도 별로 없었다. 그 상태로 1개월 정도가 그대로 지나간 상태였다.
나는 마슈 씨가 방패를 챙겨 돌아가서 소환 서클의 빛이 꺼져 평소의 기계적인 느낌으로 돌아온 소환실 벽을 보고 서서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휴게실로 돌아간 기억까지 회상한 뒤에야 대답했다.
“딱히 그렇진 않아요. 애초에 요정국에서 살 때도 딱히 싫어하진 않았는걸. 복잡한 느낌이야 들지만.”
“그거 몇 번 들어도 신기하네. 낙원의 요정은 원래 그래?”
“글쎄요. 저도 저랑 모르간 이외의 낙원의 요정을 본 적은 없어서. 간단하게 발생하는 존재는 아니거든요. 뭐 그래도 별의 내해의 단말로서 활동하는 개체들은 기본적으로 욕망이 없는 형태로 만들어지고, 가치관을 이루는 개인적인 호불호도 옅은 애들이 많아요. 그 영향도 있기는 할 거야.”
정확히 말하자면 별의 내해에서 얻은 평행세계 쪽의 데이터베이스는 가지고 있지만 그쪽도 투입되는 안건에 따라 경향성이 다르기 때문에 일반화할 수는 없다. 이것까지 설명했다가는 기껏 주문한 내 카레덮밥이 다 식을 것 같아서 그만뒀다. 그랬더니 마스터가 혼자 속 편한 얼굴로 말했다.
“다행이다. 그럼 말해도 되겠구나.”
“엣.”
불길한 느낌.
“모르간이 당분간 시뮬레이터에서 뭘 좀 할 건데 자기가 용무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다른 사람은 접근하지 못하게 해달라고 했거든.”
“…정말로 불길한 느낌밖에 안 드는데? 그 요정, 서번트가 되었어도 이문대의 왕이야. 위험한 짓을 할지도.”
“아니, 이문대의 왕이니까 그런 거지. 흔한 일이야.”
마스터는 내 눈앞에서 손가락을 휘휘 흔들더니 작은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캐스터는 처음 소환에 응했을 무렵의 스카디 님 본 적 없지? 진짜 진지하게 우울증 걸릴 것 같았어. 지금도 비슷하지만 그때보단 많이 나아지셨고.”
스카사하=스카디라면 안다. 현자 그림이나 북구 쪽 사람들을 만나러 갈 때 가끔 마주쳤다. 체구는 작지만 온화하고 상냥하고 어머니(범인류사 기준) 같은 정신성을 가진 좋은 분이다. 가끔 운이 좋으면 룬 마술로 맛을 낸 얼음과자를 받을 수 있다. (딱히 맛있는 얼음과자를 주니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다.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자식처럼 생각하는 인간들을 일정 연령이 되면 거인한테 먹이로 준 적이 있는 신이기도 하다. 솔직히 이건 우리 쪽 여왕보다 더 무섭다고 생각했다)
나는 노움 칼데아의 라이브러리에서 북구 이문대의 데이터를 열람했고, 저 서번트는 가끔 혼자가 되거나 외양이 어린 서번트들을 보면 굉장히 우울한 생각에 골몰하기 때문에 이런저런 의미로 눈여겨 보고 있었다. 요정안이 없는 마스터에게도 그건 확실히 보였던 모양이다.
“이문대 왕 출신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가 온 세계에 애착이 있으니까 거의 다 소환 초기에 자기 정신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뭔가 해. 그래야 우리랑 같이 일할 수 있으니까. …내가 이런 말 하기는 많이 미안하지만 말이야.”
“그러니까, 아마도 모르간도 그런 케이스일 거고 뭔가 위험한 짓 하고 있는 건 아닐 테니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는 얘기?”
“응.”
마스터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나 노움 칼데아의 서번트들이나 이 마스터의 이런 점을 신뢰하기야 하지만 솔직히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 들여다봐야 할까, 하지만 그 모르간이 축객령을 내렸는데, 라고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아무튼 들어 봐. 그래서 알겠다고 그랬는데, 모르간이 캐스터는 들여보내 줘도 된다고 했거든.”
“하?”
내가 생각하기에도 멍청한 목소리였다. 다행히 마스터는 그걸 빌미로 나를 놀려먹는 노크나레아나 오베론 같은 짓을 하는 대신 하던 말만을 매듭지었다.
“나는 별 걱정 안 하지만 신 소장님이 엄청 무서워하시더라고. 캐스터도 걱정하겠다 싶었고, 모르간 본인도 허락했으니까 혹시 신경 쓰이면 보고 와. 그 동안 레이시프트는 빼줄게. 어차피 이번엔 코얀스카야랑 이부키 님이랑 같이 돌 예정이니까 캐스터는 쉬어도 돼.”
마스터의 본의는 아니었겠지만, 나는 그런 식으로 또 모르간에게 선수침을 당하고야 말았다. 솔직히 많이 분했다.
*
노움 칼데아에 설치된 시뮬레이터는 기본적으로는 모의전투나 새로운 기술, 혹은 아티펙트의 안전하고 인명피해 없는 시운전이라는 목적 하에 굴러간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실제로 그런 용도로만 사용하고들 있다면 시뮬레이터가 항상 그렇게 붐빌 리가 없다. 자기 기억에 있는 공간을 칼데아의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해 재현해서 자기가 찾아내지 못한 단서를 찾아내기도 하고 마력을 많이 쓴 뒤 본인과 상성이 좋은 공간을 꾸며서 리프레시 용도로 사용하기도 하고 자기 취향인 공간을 꾸민 다음 피크닉을 즐기기도 한다. (이건 내가 처음 소환됐을 때 마스터 본인한테 들은 용도다. 범인류사 진짜 이대로 괜찮을까)
모르간은 범인류사에서도 이문대에서도 정통파 마술사고, 칼데아에 오자마자 시뮬레이터를 취미생활이나 빈둥거리기에 써먹을 만큼 대충대충 편하게 살고 싶어하는 요정도 아니다. 그러니 그 여자가 시뮬레이터를 사용하고 있다면 본연의 용도에 가까울 확률이 높다. 출입문 옆의 ‘309’ 라고 적혀 있는 액정 앞에서 몇 번 심호흡을 한 뒤 시뮬레이터에 입장하자마자 하얀 성벽과 요정국 브리튼 특유의 언제나 변함없는 황혼녘의 하늘이 펼쳐졌다. 성문은 열려 있다. 문 위에는 붉은색으로 덧칠된 ‘죄 없는 자만이 지나가거라’.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물론 아르토리아 캐스터라는 소녀는 모두가 익히 알다시피 여왕의 눈길이 닿기도 어려운 요정국 브리튼의 오지 중의 오지 틴타겔 시골뜨기 출신이었므로, 풍문으로밖에 못 들어본 죄도罪都 카멜롯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을 땐 이유가 어떻건 간에 나름대로 들떠 있었던 건 맞다. 하지만 그것뿐이다. 이 도시에는 별로 좋은 기억이 없다.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는 자기가 이룰 거라고 믿었던 일을 남에게 빼앗겼다. 세 번째로 방문했을 때는 아예 죽어 버렸다. 그뿐인가. 첫 번째로 방문했을 땐 또 어떻고.
“나의 아내는 말을 액면 그대로의 의미로 받아들이는 몹쓸 버릇이 있군. 교정해둘 필요가 있겠어.”
“왁!”
별의 내해의 정령답지 않은 소리를 내기는 했지만 눈앞의 이것도 별의 정령 출신이니 괜찮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요정국에서 저걸 처음 봤을 때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잡스러운 상급 요정들의 목소리 틈에서 내 요정안이 포착해 버린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산 속에 있는 오래된 요정들의 시신이 화한 고목으로 둘러싸인 고요한 호수를 뒤덮은 얼음장 위에 투명도가 높은 광석을 세공해 만든 구슬을 떨어뜨려 부딪히게 만들 때 같은 느낌이 드는 소리였다.
‘온전히 자기 의사로 여기에 온 것이 아니군. 그래도 자포자기하고 떠밀려온 것은 아니야. 그건 칭찬해 주마.’
“이번에는 네 의사로 왔군. 칭찬받을 만한 일은 아니지만 용기를 낸 것이 가상하니 칭찬해 주마.”
빛바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플라티나 블론드, 이 요정 특유의 푸른색 마력광을 뿜는 마창, 통치자보다는 범인류사의 ‘종교’의 사제를 연상시키는 느낌의 겹쳐 입은 옷, 가시처럼 생긴 왕관 밑으로 드리운 세상 모든 것이 싫고 더러워서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얼굴을 가린 베일, 뜨거운 분노나 저주의 흔적이 엿보이지만 이제는 차갑게 식어 깊은 물 바닥에 침전되어 버린 ‘이런 것들한테 희망을 걸어보려 한 내가 멍청했지, 이것들 다 싫고 지긋지긋해. 나는 더 큰 위험에 대비해야만 하는데’ 라는 속내까지 기억과 하나도 다르지 않은 모습의 노움 칼데아의 신참자.
마음속으로 반사적으로 뒷걸음질하지 않은 자신을 칭찬해준 뒤 물었다.
“왜 여기 있는 거야? 설마 내가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기라도 했어?”
“그럴 리가. 네 마력이 접근하는 게 느껴지길래 단말을 하나 소환해서 이리로 보낸 거다. 내게 싸움을 걸러 이 성에 왔을 때 보지 않았나?”
“으.”
나는 다시 몸서리쳤다. 서번트는 꿈을 꾸지 않지만 꿈에서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영상이 연쇄적으로 떠올랐다. 온 힘을 다해 쓰러뜨린 여왕이 각지에 출몰해 무심하게 아군을 섬멸하는 광경이란.
요정국 브리튼의 여왕이나 겨울전쟁의 승리자나 브리튼의 정당한 토지의 여주인 같은 이런저런 거창한 직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모르간이라는 이름으로만 불리는 여자가 베일 밑에서 웃는 소리가 났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카멜롯 왕성에 쳐들어가서 보란 듯이 이기면 저 베일을 확 벗겨버리고 싶다는 생각 정도는 했었다. 그래도 투덜대면서 말하는 건 너무 어린 개체처럼 느껴지니까 되도록 침착하게 말하기로 한다.
“나를 마중하러 나온 거라면 앞장서.”
“그건 네가 정당한 이유로 찾아왔을 때지. 나의 아내에게 한 말은 어디까지나 네가 오고 싶어 하면 오게 두라는 의미지 너를 데려오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정 너를 초대할 생각이었다면 바게스트를 시켜서 정식 서한을 보냈겠지.”
“그 나이 먹고 말장난 하는 거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아.”
“그때라면 몰라도 지금의 너를 친절하게 대해 줄 이유도 없지 않나. 어쨌든 네 덕분에 칼데아나 그 벌레는 성공해 버렸으니.”
자꾸 아픈 데를 찌른다. 말이 궁해지자 모르간이 다시 말했다.
“아무튼 나를 만나고 싶다면 네 힘으로 여기까지 도달해 봐라. 옥좌를 사용해 봤다면 이 도시의 구조에 대한 정보도 획득했겠지.”
옥좌의 방에 갔을 때, 아무리 마브와 계약을 해뒀어도 모르간은 심술쟁이니까 자기 이외의 요정은 사용할 수 없게 온갖 프로텍트를 다 걸어뒀을 줄 알았다. 실제로 사용해 보면 마술예장의 구조도 알려주고 사용해야 할 영창도 안내해주는 사용자에게 이상할 정도로 친절한 인터페이스였으므로 모르간 나름의 공정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서 묘하게 부아가 치밀었던 기억이 난다.
재확인차 물었다.
“방해할 생각은 아니겠지.”
“도시 전체의 구조를 재확인하고 점검하는 중이라 이래저래 길이 바뀔 수도 있을 거다. 그래도 막지는 않으마. 너 정도면 별 불편은 없겠지.”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와서 조금 당황했다. …사실 거짓말이다. 많이 당황했다.
“뭐, 뭐야. 이제 와서 칭찬해 줘도 별로 기쁘진 않은걸.”
“뭔가 파괴하고 부수는 재주는 너나 범인류사의 너나 다를 게 없더군. 솔직히 감탄했다.”
“하?!”
“그럼 노력해 봐라. 나는 옥좌의 방에 있겠다.”
모르간의 단말은 ‘어린 것 얼러대는 것도 생각보다 재밌군’ 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모습을 감추었다. 나는 홀로 분개했다. 공정함은 무슨, 역시 악랄하고 잔혹하고 심술궂은 요정 맞다.
요정국답지 않게 잘 정리되어 있고 깔끔하게 관리된(요정국에서 태어난 요정들은 범인류사의 시설을 따라하며 즐기는 건 좋아하지만 그걸 깔끔하게 관리해야 하는 이유는 모르기 때문에 사후관리에는 소홀하다) 카멜롯의 거리를 걷는다. 가끔 계단이나 다리가 움직이고 골목이나 건물이 움직이며 길이 바뀌었다. 내심 혀를 내둘렀다. 옥좌에 나를 연결했을 때 이 도시 전체가 거대한 마술예장이라는 건 파악했지만 뭘 어떻게 해야 저런 식으로 큰 외양은 유지하되 도시 전체의 구조를 내키는 대로 가변가능한 구조를 만들 수 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역시 천재는 짜증난다.
가끔 눈앞에서 길이 막히거나 바뀔 때는 그냥 부수고 지나가면 안 될까,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걸 멀린 마술로 돌파한다면 모르간이 또 너는 정말이지 파괴밖에 할 줄 모르는구나, 마술사 맞냐는 소리를 하며 구시렁댈 것 같아서 그냥 신체강화 마술을 사용했다. 마슈 씨한테 저게 구세주 시절에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다 들었는데 내 앞에서는 지는 파괴 안 하고 다닌 척을 하는 점이 참으로 마술사다웠다. …혼자 그런 생각이야 했지만 크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요정이 두 명밖에 없는 카멜롯은 진정한 의미로 고요했다. 누구도 기분 나쁘다던가 두렵다던가 내 것을 빼앗길까 겁이 난다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요정국에서도 노움 칼데아에서도 더더욱 맛보기 힘든 고요함. 먼 곳이나 가까운 곳에서 도시의 구조가 바뀌면서 나는 둔탁한 소리 혹은 보도에 닿는 자신의 구둣굽 소리만이 시뮬레이터로 재현된 요정국의 황혼의 하늘을 가득 메우는 감각. 실존했던 요정국에서는 거의 느껴본 적 없는 편안함.
진짜 카멜롯에 갔을 땐 시기하고 질투하고 두려워하는 목소리 혹은 끝없는 전투행동에 시달리느라 몰랐지만, 역시 잘 만든 도시다. 구세주 토네리코의 최고걸작이라 부를 만하다. 요정국에서 태어난 요정이라면 모두가 불길함과 두려움을 느끼는 커다란 구멍이 성의 뒤도 아니고 정면에 있는 것을 그냥 역시 여왕도 저런 건 어쩔 수 없구나, 별 수 없지, 라고 생각하면서 여상하게 넘길 수 있을 만큼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전의 몇 곱절의 시간을 들여 옥좌의 방으로 다가간다. 십자로를 돌아서 송곳니의 씨족도 편히 드나들 수 있는 문을 지나면…
“왔나.”
“왔어.”
모르간은 의외로 테라스 앞에 선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와 손 주변에 어지럽게 고대 문자로 된 술식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열심히 눈여겨 보니 죄도 카멜롯에 있는 영맥의 위치를 기준점 삼아 짜둔 술식을 어느 영맥에 연결해도 사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고치는 것 같았다. 나는 기묘한 탈력감을 느끼며 감상을 말했다.
“…나는 당신이, 추억이나 망향에 열중하는 답지 않게 감상적인 짓을 하고 있는 줄 알고 놀랐는데.”
“어린애 같은 이야기를 하는구나. 그런 건 이곳에 소환된 시점에 청산을 끝마쳤다. 새로운 싸움에 임할 때면 자기가 가진 무기를 재점검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정론으로만 대답하는 거 칼데아에선 금지돼 있어.”
“재미있는 농담은 아니구나.”
진척상황이 궁금해서 옥좌에 손을 대고 가볍게 의식을 연결했는데 저쪽에서 점잖게 내치는 것 같은 감각과 함께 연결이 끊어졌다. 미간을 약간 찌푸리자 모르간이 말했다.
“조정 중인 예장이나 술식에 손대면 사고가 날 수 있다고 배우지 못했나?”
“그 정도는 알거든? 나도 한 번 사용해 봤고, 지금의 나라면 괜찮으니까 만져본 것뿐이야.”
이건 내가 부주의했던 게 맞다. 화제를 바꾸기 위해 먼저 말했다.
“이 성이 그 땅에서 당신이 만들어낸 무기들 중 제일 강하고 복잡하고 쓸모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재조정하고 있다는 건 알겠지만…기분 나쁘다던가. 그런 생각 안 해? 당신도 여기서 죽었는데. 그리고.”
지금 시뮬레이터로 재현된 이곳 말고, 아르토리아 캐스터라는 소녀가 요정국 브리튼의 왕성에 처음 갈 때부터 품고 있던 의문이다.
“통치를 쭉 이어가고 싶었다면 위험 요소가 될 만한 녀석들은 대체 왜 살려둔 거야? 당신 오로라 때문에 거울의 씨족이 멸망한 것도 스프리건이나 페페론 백작이 인간인 것도 사실은 알고 있었잖아. 당신의 나라에서 제일 심각한 위험 요소인데. 어차피 요정국은 씨족 하나가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도 모두 다음날이면 잊고 다른 흥밋거리를 찾는 곳이니 당신이 죽여버려도 딱히 큰일은 나지 않았을 텐데.”
“꽤 위정자다운 시각으로 생각하게 되었군. 그래, 한 번 옥좌에 앉아보니 그때 이렇게 했다면 더 나았을 것 같더냐?”
“그런 말이 아니잖아…”
모르간은 나라는 개체를 미워하지 않지만 아주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를 계속 냉소적으로 비꼬며 놀리기는 하지만 크게 기분이 나쁜 기색은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가 느껴진다. 노움 칼데아에 온 모르간은 여전히 배배꼬인 괴팍한 요정 늙은이는 맞지만 요정국에서 만났을 때처럼 모든 인격체를 마주친 순간부터 실망하지는 않게 되었기(물론 옛날과 마찬가지로 희망을 걸게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때문에 그때에 비해 마주하기는 많이 편해졌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다른 느낌이다. 모르간은 긴장한 상태다. 모르간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느꼈던 둔탁한 위기감과 비슷하지만 다른 느낌이 들었다.
모르간은 그것을 솔직하게 내보이는 대신 내 물음에 대답했다.
“하지만 아직도 멀었다. 그런 물음의 대답은 이문과 범인류사를 막론하고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로 정해져 있지 않나.”
“아니, 어디가 예뻐서? 스프리건은 수완이 좋았지만 오로라는 겉만 예쁘지 순 멍청이였잖아? 바반 시 걔는 이해라도 가지.”
“그거 바반 시에겐 말하지 마라. 또 널 죽이려고 덤비다가 네게 다시 패배하고 크게 좌절할 거다.”
“당신이 그런 자세 일변도니까 바반 시가 혼자 안절부절 못하고 안 좋은 생각만 하다가 폭주하는 거야. 본인한테 좀 더 널 사랑하고 걱정하고 있다고 얘길 해주란 말이야.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좀 알아듣게 설명을 해 봐.”
나는 테라스 옆의 벽에 기대고 섰다. 모르간은 마창을 휘둘러 작업하던 술식을 분할하면서 대답했다.
“요정국 바깥에서는 첫 숨을 쉴 일도 없는 생명과, 요정국 밖에서 흘러와서 요정국의 소산물에 매료되고 만 생명과, 요정국에 아무 관심도 없지만 자기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죽기 위해 찾아온 생명이다. 내 나라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거나 내 나라에 와야만 할 이유가 있는 생물들이지. 배제할 이유가 있나?”
아주 당연한 일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괜히 칼데아식 소환으로 버서커 판정을 받은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만 들었다. 괜히 어깃장을 놓았다가 모르간이 손가락 하나 휘둘러서 날려보낸 저주를 맞고 재수가 좋으면 팔, 재수가 없으면 머리가 폭발해서 마음에 드는 옷을 망치고 싶지는 않으니 순화해서 대답했다.
“…이런 게 왕의 가치관이라면, 역시 왕 같은 거 안 하는 게 낫겠네. 역시 평범하고 소소한 일로 기뻐하고 슬퍼하는 평범한 생활이 훨씬 행복해.”
“네가 그런 진리를 입에 담다니.”
모르간은 이때 진심이었다. 그래서 더 은근하게 짜증이 났다.
모르간이 옥좌에 앉았다 일어섰다 하면서 옥좌와 카멜롯 성을 뜯어 고치는 동안 나와 모르간은 노움 칼데아가 서번트를 얼마나 험하게 부려먹는지 당신은 아직 모른다던가(모르간은 오히려 나를 제외한 버서커는 다 해고하라는데 저건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인다며 투덜거렸다), 바반 시는 차라리 범인류사에 와서 잘됐다던가(우리 둘 다 동의한 사실이다), 마스터를 공동통치자로 간주해서 당신의 배우자 취급하는 건 솔직히 범인류사의 인간 입장에선 비웃음으로 작용하진 않을 것 같다던가(모르간 본인도 인정했지만 딱히 주워담을 방법도 없고 주워담을 생각도 없는 것 같았다), 시집 가는 데 필요도 없는 요정에게는 독으로 작용하는 최신기술을 사용하는 병기를 자기네들 살아남자고 아무것도 모르는 범인류사의 요정한테 쥐어주는 건 대체 무슨 경우 없는 짓이냐던가(부정할 수 없었다), 페페론 백작이 디자인한 옷은 솔직히 너무 경망스러운 느낌이라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용무가 있어 요정국에 온 손님이니 내버려 두었다던가(다행이다), 이문대 밖에서 뭔가 터무니없는 크기의 시야를 가진 누군가가 자꾸 이쪽을 훔쳐보았는데 혹시 너 알고 있는 거 없느냐(모르겠다) 같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동안 모르간은 단 한 순간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저렇게 근면하니 요정국 브리튼 같은 곳을 어찌어찌 나라꼴로 만들어서 굴렸구나. 라는 생각과 저렇게 쓸데없이 근면하게 노력하는 바람에 애먼 요정 여자애가 평생 숙원도 추구하지 못하고 끝없이 자기자신을 잘라내서 다른 요정들에게 다 나눠주는 고통을 겪게 되어버린 거란 생각이 같이 들 즈음에 모르간이 말했다.
“대강 준비는 끝났군.”
시뮬레이터 내부의 기상현상은 이용자가 추가적인 주문을 하지 않을 경우 칼데아 기준의 24시간 사이클에 맞춰 해가 뜨고 지게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요정국 브리튼은 낮 시간에는 내내 황혼이기 때문에 시간의 경과를 알고 싶으면 칼데아에서 준 단말을 확인해야 한다. 액정을 흘깃 보자 내가 시뮬레이터에 들어온 뒤 세 시간 정도가 지나 있었다. 내가 시간을 확인하고 액정을 암전시킨 순간, 그걸 신호로 삼기라도 한 것처럼 공기 중의 마력농도가 급격하게 올라갔다. 모르간은 테라스 밖을 바라보면서 내게 말했다.
“지금의 네가 에뮬레이트한 인격으로 지내는 것 쪽을 마음에 들어하고 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다.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라.”
“어째서?!”
“그게 더 적절한 선택이다.”
테라스 밖에서 소용돌이치는 상식을 넘어선 마력량. 낯익은 불길함. 모르간을 본다. 긴장에 두려움이 섞이고 있었다. 논리 대신 통계에 몸을 맡기기로 하고 눈을 감는다. 영기를 개찬하고 인격의 구성을 교체한다. 에테르로 재구성한 마르미아드워즈를 쥔다. 다시금 눈을 뜨자 그곳에는,
“…당신, 역시 노움 칼데아를 어떻게든 멸망시킬 생각이었나요?”
“무례하기는.”
솔직히 물리적으로 목숨을 탄환으로 사용했는데도 완전히 쓰러뜨리지 못하고 칼데아의 손으로 숨을 끊을 수 있을 만큼의 손상을 입히는 게 전부였던 14000년 동안 썩은 육체가 다시 눈앞에 서 있으면 이렇게 반응할 만도 하다고 본다.
내 입장에서는 일 년 하고도 한 달 만에 다시 보는 축제신祭神 케르눈노스의 시신을 올려다보며 모르간이 말한다.
“마력량을 잘 봐라. 네가 봤던 그 분과는 비교도 안 될 거다.”
“아, 정말이네…”
옥좌의 방으로 달리던 아르토리아 캐스터의 기억을 반추한다. 1만 4천 년간 죽어간 요정들의 저주를 끌어안고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겠다는 책임감 하나로 일어선 신의 시신을 떠올린다. 서 있는 것만으로도 조용히 죄과의 대가를 묻는 듯 두려운 신이었다. 그 공간에 있을 때는 숨을 내쉬기만 해도 몸이 떨릴 정도의 위압감을 느꼈다. 이번에도 무거운 압력이 느껴지는 것은 같지만 이것은 그때와는 종류가 다르다. 여기서 느껴지는 것은 공포와 외경보다도 죄책감. 미안하다는 마음. 나의 죄가 아닌데도 울며 사과해야 할 것 같은 기분.
모르간은 나를 보지도 않고 말했다.
“간혹 물리세계에서 쓰러뜨린 뒤에도 정신 속에 남아서 후유증을 남기는 부류의 고약한 존재가 있지. 너도 알 거다.”
“악성정보 말이군요. 하지만 당신은 범인류사 시점에서야 배신자지만 케르눈노스 신이 죄를 물을 존재는 아닐 텐데요?”
“개념의 문제다. 나는 거의 다 소멸해서 영혼의 일부분만 남은 바반 시를 소생시킬 때 그 애를 나의 딸, 그러니까 후속 요정이라고 선언해서 이 세계의 억지력을 속였다. 바반 시는 요정국에서 내가 살아있으니 나의 후속요정인 그 아이도 살아있다는 논리 하에 숨쉬고 있었어. 그러다가 내가 죽은 뒤 그 아이도 죽었고, 그 아이는 죽은 뒤 신의 신핵이 되어 잠시나마 신과 연결됐어. 바반 시가 여기에 소환되면서 그 영향이 개념적으로 내게 흘러들어오게 되었는데…내가 이 분께 죄책감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되더군.”
마스터도 없는 자리에서 엄청난 이야기가 툭툭 튀어나왔다. 보통 저런 일이 생기면 당황하는 표정 정도는 지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지금의 나는 냉정침착한 성검의 수호자 아르토리아 아발론이기 때문에 입 밖에 내지는 않는다. 사실 말할 필요도 없다. 내 앞에 있는 여자는 이런 사안을 마스터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뭔가 고지할 필요도 없는 혼자서 정리할 수 있는 가벼운 안건 취급할 수 있는 신의 영역의 천재 마술사다.
“그 정보가 내 죄책감과 시너지가 좋아서 내 안에서 악성정보 비슷한 걸로 자리잡았다. 그러니 이런 불안요인을 가만히 둘 수는 없겠다고 판단했지. 애초에 이 성은 이런 일을 대비해서 준비해 둔 수단이다.”
“저 분께는 가혹한 얘기군요.”
모르간은 쿡쿡 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타인을 비웃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 저이가 비웃는 건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모르간을 대신해 시뮬레이터가 재현한 신을 바라보았다. 모르간의 후속요정에서 비롯되었으나 존재의 목적이 완전히 달라졌고, 별의 내해에서 새롭게 구성되기까지 해서 계통수부터 완전히 달라진 존재인 내가 모르간의 죄책감에 영향을 받을 정도의 슬픔이 모든 감각기관을 짓눌렀다.
“왕이 된 시점에, 나는 이 분께 그들의 죄를 사해달라고 용서를 구할 수 없게 되었다. 1만 4천 년 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 땅에서 내 나라를 가지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심으로 요정국을 만들었고, 지금도 그 소원은 변하지 않았어. …그러니 적어도 죄를 씻어내어 없는 것으로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였군. 본래 옥좌에 준비되어 있던 대재해술식의 영창의 의미를 뒤늦게 깨닫고 마음 속으로만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간은 이 시점부터 나를 정말로 의식에서 배제하고 대재해술식의 시작 시퀀스에 들어갔다. 옥좌가 모르간의 마력광으로 발광한다.
“영맥 폐색형 병장兵裝, 장전.”
도시 전체가 호응한다. 구멍을 향해 조준된 포문이 빠르게 움직이며 이쪽으로 팔을 뻗어오는 신을 겨눈다. 무심결에 마르미아드워즈를 꽉 붙잡았다. 마력의 흐름이 포문에 집중된다. 모르간이 입고 있던 옷이 지면에 접촉한 부분부터 에테르 입자로 분리되어 기화하며 대재해술식의 일부로 변질된다. 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단순히 자기 나라의 왕으로서 갖췄던 정장에 미련이 있는 게 아니었다. 저것 또한 ‘마술예장’ 이었다.
“라운드 랜스, 1문과 12문부터 순차발묘─ 가라!”
신의 중심부, 신핵이 격납되어 있을 자리에 마력광으로 감싸인 롱고미니아드가 0.2초씩 시간차를 두고 착탄한다. 첫 번째로 발사된 창이 남긴 상흔을 두 번째 창이 조금 더 후벼 파 들어간다. 계속해서 방해하는 신의 팔을 피해서 그 다음에는 세 번째가. 네 번째가. …왜 다른 사람도 저런 식으로 사용할 수 있게끔 기록을 남겨두지 못했는지 알겠다. 이건 대재해의식을 진행하는 존재가 온전히 자기 감각으로 조정해야 하는 거라 타인에게 인계받은 데이터만 가지고는 완전한 형태로 재현할 수 없다. 발사각도와 투척물에 두를 개념들을 제어하고 그에 걸맞게 섬세하게 마력을 배분한, 신을 지키던 썩은 살덩어리를 모두 불태워 신핵만이 남는 한순간을 만들기 위한, 모든 기술과 마력과 무기를 쏟아부은 지고의 11격.
10격째가 착탄해 신핵이 반쯤 드러났을 때쯤엔 모르간이 개인무장에 저장해둔 마력까지 쏟아부었는지 마창의 형체가 이지러지며 좀 더 장식이 적고 덜 복잡한 형태로 바뀌었다. 육체를 제어할 리소스까지 롱고미니아드의 제어에 사용했기 때문에 마창에 기댄 채 몸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휘청거리지 않고 11격째를 발사한다. 나뭇가지처럼 어지럽게 시야를 방해하는 신의 팔들을 뚫고 명중. 신핵이 완전히 드러났다.
그리고,
“아르토리아!”
모르간이 나를 불렀다.
“────.”
지금의 모르간에게 이쪽을 돌아보고 말할 만큼의 여유 같은 게 남아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눈을 마주치지도 얼굴을 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내 눈은 모르간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간파했다. 동시에 떠올린다. 요정국의 저 여자는, 마지막까지, 혼자였다.
생각하기 전에 달려나간다. 동시에 옥좌에 의식을 연결한다. 이번에는 거부당하지 않았다. 신핵을 꿰뚫을 12발째의 롱고미니아드가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다. 마력이 부족한가? 아니다. 제어할 힘이 없는가?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다른 사람이나 요정은 몰라도 나는 알고 있다. 모르간은 요정국을 만들었을 때 ‘죄 없는 자Heavenly’의 조건을 무효화해 버렸다. 모르간은 욕망을 택함으로서 죄를 청산해 그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므로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없다. ─모르간은 신의 목숨을 거둠으로서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모르간의 곁에 섰다. 늙은 요정은 부축하는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외칠 수밖에 없었다.
“회선과 제어권을, 모르간에서 아르토리아 아발론으로!”
“승인한다!”
마력이 이쪽으로 모여든다. 각오할 틈도 주지 않고 떠밀려오는 마력의 폭풍. 새로운 존재로 거듭났음에도 뇌가 터져나갈 것 같은 충격이 똑같이 내 육체를 잠식했다. 모르간은 자기 발로 서기도 힘든 주제에 잘도 외쳤다.
“지금의 너는 확실하게 별의 단말이다! 롱고미니아드의 사용권한은 네게도 허락됐고, 지금이라면 제 성능을 발휘할 수 있다!”
모르간은 그제야 나를 돌아보았다. 다시금 떠올린다. 주눅들고 소심한 그 여자애는 저 여자를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이길 기회도 없었고 증명할 기회도 없었다. 하지만 그 애는 저 여자와 자신이 다른 사람임을 증명해야 했다. 좌절한 구세주의 사명만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위해 살아있었음을 증명해야 했다.
“그 누구도 너를, 나를 비웃지 않을 거다. 그러니─”
정말이지 요정의 세대교체 메커니즘은 최악이다. 이렇게 방향성이 달라져도, 그 때 그 시점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다 들켜버리니까.
“용맥소각병장, 장전! 라운드 랜스, 병렬 발묘!”
11개의 빈 포문에 성검을 채워 넣는다. 그 당시의 내게는 가진 것이 없어서 나를 쏟아붓고 그 자리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아도 괜찮다. 다행이다. 사실 그 때, 그 애는 굉장히 보고 싶어 했었다. 자기가 보란 듯이 성공했을 때의 이 여자의 얼굴을. 그 애에게 자신의 숙원을 맡길 수밖에 없는, 그 애를 믿고 의지하며 그 애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이 여자를.
“기도의 창, 구세의 검. 지금 여기에서 죄를 씻어내는 빛이 되어라─”
베일도 왕관도 잃은 늙은 왕의 죄책감과 똑바로 눈을 마주치고, 그가 먼 옛날부터 바라왔던 것의 이름을 입에 담는다. 찬탄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고, 하지만 오래도록 그 땅을 지켜온 그녀가 받아야만 했던 그 무언가.
“『숙원을 잇는 희망의 검Hopewill Camelot』─!!!!”
*
모르간은 시말서를 쓰게 되었다. 나는 사태 해결을 도운 게 정상참작이 돼서 시말서까지는 안 갔지만 마스터한테 좀 혼이 났다. 마스터가 모르간을 붙들고 그런 중대한 일은 제발 우리도 대비할 수 있게 허락을 받고 하라며 혼을 내는지 애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투로 말을 토해내는 걸 측은지심과 즐거움을 동시에 느끼면서 구경한 뒤, 나는 지금은 모르간이 점령하다시피 한 캐스터들이 자주 모이는 휴게실의 문간에 선 채 물었다.
“나 없으면 해결이 안 될 일이었잖아. 혹시 내가 안 갔으면 어쩌려고 했어?”
“네 성격에 그런 말을 듣고도 안 올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르토리아라는 이름 쓰는 애들이 다 그렇지.”
“으.”
“그런 소리 많이 들으면서 살았다.”
한 마디를 져주질 않는다. 나는 조용히 모르간을 째려봤다. 모르간은 훗 하고 웃더니 다시 키보드를 두들겼다. 오래된 요정 주제에 단말 다루는 법은 빨리도 배운다. 나는 꽤 고전했는데.
내가 아무 의자나 끌어당겨서 앉자 모르간이 노트북 액정을 보면서 말했다.
“아무튼, 그 대재해술식은 이제 네 것이다. 훌륭하게 완성해 주었다. 네 마음대로 사용해라.”
이 여자는 남을 전혀 칭찬하는 것 같지 않은 말투로 칭찬해서 칭찬받은 당사자를 당황하게 하는 걸 즐기고 있는 것 아닐까 항상 생각한다. 평상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대답했다.
“고맙긴 한데, 그 선심 쓰는 것 같은 말투는 뭐야? 애초에 내가 사용한 뒤 영령의 좌에 새겨진 시점부터 그건 내 보구로 카운트되는걸.”
“더 잘 다루지 못한 것 같아서 신경 쓰고 있었던 녀석이 말은 잘 하는군.”
괜히 부끄러워졌다. 종이로 된 서류철 책등을 건드리며 괜히 딴청을 부렸다. 하지만 모르간이 조용해지자 신경이 자꾸 그쪽에 쏠렸다. 결국 모르간에게 다시 캐물었다.
“저기 말이지. 당신 자기 나라를 만든다는 그거, 계속 추구할 생각이야?”
“그것 이외의 이유로 움직여 본 적이 없어서.”
“이 버서커.”
“타인이 선택할 수 없는 사실을 이용해서 타인을 매도하는 버릇은 고치는 게 좋겠구나.”
“으!”
진짜 싫어서 얼굴을 있는 대로 찌푸리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모르간은 내 반응을 봤는지 못 봤는지 헷갈리는 태도로 의자에 몸을 기대고 다리를 바꿔 꼬았다. 노트북 액정 말고 허공을 보면서 다시 말한다.
“다음에는 더 공고한 나라를 만들 거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들이 암약하거나 벌레가 한 입 깨문 정도로 무너지지 않는 내실이 탄탄한 나라로.”
“저기 말이야. 이제 와서 이런 얘기 하는 것도 웃기지만 사실 난 당신 개인을 싫어한 적은 한 번도 없어. 하지만 지금의 나는 인리를 유지하는 장치니까, 쭉 그 꿈을 추구한다면 당신을 계속 막을 수밖에 없다고. 그런 거 말해도 좋을 거 하나도 없는데…”
“흥.”
모르간이 웃었다. 굉장히 즐거워 보였다. 그런 걸 보는 건 처음이라서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모르간은 내 속내를 읽은 것처럼(아니, 생각해 보니 정말로 읽고 있을 것이다) 웃으며 말했다.
“바라던 바다.”
나 같은 필요해서 만들어진 존재들에게는 실제로 벌어지는 일에 불과하지만, 우연히 태어난 존재들은 어떤 일을 겪을 때 너무나 기쁘거나 가슴이 벅차오른 나머지 그 순간에 도달하기까지의 자신의 모든 것을 예정된 운명처럼 느끼기도 한다고 한다.
“너에게는 빚이 있지. 그래서 이번에는 대가를 치렀다. 내가 비장의 패로 사용할 수 있는 예장의 구조를 전부 보여주었고 대재해술식은 네게 양도했다.”
“…….”
“하지만 두 번째는 없다. 다음에는 내가 이긴다. 그러니 다음에는 더 좋은 무기를 떠올리는 게 좋을 거다.”
운명이란 건 가혹하다. 거절할 수 없고, 내 자유의지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는 것처럼 취급하고, 무슨 짓을 해도 벗어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예언의 아이 아르토리아 캐스터는 예언도 운명도 다 싫지만 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체념하고 있다가 결국 운명대로 행동하는 것이더라도 그것이 자신을 증명할 기회라면 괜찮다고 자신을 채찍질해 결국 자신을 불태워 자기가 마음에 들어하던 사람들을 도울 수 있었다. 내가 바라던 것을 이루기야 했지만 운명이란 개념은 내 안에서 그리 좋은 인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렇게 짜릿한 거구나.
운명을 스스로 정의하는 감각이라는 건 이렇게 벅차오르는 거구나, 생각했다.
“누가 할 말을.”
웃어 보인다. 최대한 건방진 표정으로. 저 늙은 요정이 건방지고 기분 나빠서 박살내 주고 싶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을 만큼 건방진 얼굴로.
“어디 해 봐. 쉽지 않을걸.”
“담력 하나는 봐줄 만해졌군.”
“이문대를 만들어낼 정도로 담력이 큰 요정의 후속 요정이라서.”
이문대 브리튼에서 생겨난 첫 번째 문제Problem는 나와 모르간이 같은 곳에서 죽음을 맞이함으로서 매듭지어졌다. 하지만 모르간도 나도 거기에서 끝나지는 않았다. 범인류사는 나도 모르간도 자신들에게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우리들에게 제2의 삶을 부여해 주었다. 범인류사는 어떤 방식으로 분기될지 알 수 없는 수없이 다종다양한 혼란으로 가득한 미지의 세계다. 나와 모르간의 삶은 아마도 이번 파견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영령의 좌에 새겨진 존재는 그 시점에 개념이 되므로 그들이 획득한 경향성은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 모르간이 여기 있는 이상 두 번째 문제는 언제든 이 세계를, 지구를 침식하리라.
동화책에 나오는 악녀 같은 방식으로 웃는 모르간이 말한다.
“이제 네게 자비를 베풀 이유는 없다. 봐주지 않을 테니, 네게 나의 꿈을 거꾸러뜨릴 힘이 있다면 내게도 그만한 힘이 있음을 명심하도록 해라. 그때야말로 헛꿈을 꾸던 비참한 마을 소녀로 돌아가게 해 주지.”
“한 번 한 짓을 두 번은 못 할 줄 아네, 이 요정.”
아르토리아 아발론은 생각한다. 언제 어디에서 벌어질지 모르지만 그다지 멀지 않은 세계에서 벌어질 다음 싸움을. 아주 사소할 수도 있고 또다시 지구가 멸망 안건으로 판단할 만큼 거대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쪽이건 괜찮다. 어느 쪽이건 하는 보람이 있고도… 몹시 즐거운 작업이 될 것이다.
“이쪽이 할 말이야. 당신의 꿈을 거꾸러뜨리기 위해서라면 나는 또다시 기쁘게 죽어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