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S/레아시스
2023-12-25 19:11:23
9606文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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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娛樂의 역설

데이테스. 데이비트가 테스카틀리포카를 소환한 날, 믹틀란 최하층에서 보낸 밤 이야기.
LB7 1주년 기념으로 썼습니다. 개인적인 뇌내설정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CP색이 옅습니다.

믹틀란 최저층, 빛나는 유일존재One Radiance Thing의 시체 위에 그린 소환진 위에서 이루어진 3시간 가량의 대화 끝에 나와 데이비트 젬 보이드가 ORT의 재기동에 디노스를 자원으로 사용하고, 인류종의 도시에 가까운 것을 재현해서 믹틀란 원생종 유인원의 발전을 앞당겨 우리의 협력자로 사용하자는 계획의 구체화를 막 마쳤을 때의 일이다.
조력자가 될 영혼을 부를 때 신장이나 맹장처럼 꼭 필요하지 않은 기관을 사용하는 것보다는 생존에 필수적인 기관 일부를 사용하고 영혼의 질을 올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는 내 첨언에 인선은 너에게 일임할 테니 마음대로 하라고 답한 데이비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갑작스럽게 말해서 미안하지만 오늘 분 기억용량을 다 썼다. 오늘은 일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지.”
“뭐?”

나는 내가 새 육체를 입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음성정보를 잘못 해독한 줄 알았다. 데이비트는 태연한 얼굴로 아까 한 말을 반복했다.

“갑자기 중단해서 미안하다. 이건 내 기억용량 문제라서 어쩔 수 없어.”
“그건 기억하고 있어. 우선도가 낮은 정보는 전부 버릴 테니까 반드시 필요하지 않지만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될 정보는 내가 기억하라고 명령했잖냐.”
“그래. 그리고 오늘은 기억할 게 많다. 그래서 이제 꼭 기억해둬야 하는 얘기는 하면 안 돼.”
“아니, 그래도 그렇지

긴 속눈썹으로 감싸인 느리게 깜빡이는 눈이 나를 꿰뚫어서 없앨 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바라본다. 교섭을 시도해도 받아줄 생각이 없는 인간이 자주 보이는 패턴이다. 나는 혀를 찬 뒤 조금 전까지 열중하던 고찰의 우선순위를 낮춰 기억영역에 처박았다. 도시를 구현해내는 역할을 맡을 존재를 구성할 때 신에게 도시의 정령을 습합習合하는 것과 도시의 정령에게 신을 이식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나을 것 같느냐고 물어보려던 참이었는데 다 글렀다.
데이비트가 자세를 바꾸려고 일어섰을 때 빈틈을 찌르듯 대답했다.

“받아들이지. 하지만 흥을 깬 책임은 져라. 나는 이야기하는 거 좋아하고 이야기하다가 도중에 방해받는 거 싫어해.”
“참고하마.”

가볍고 빠른 대답. 잘 참고할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생각해 보니 애초에 여기서부터는 저 녀석이 버릴 정보니까 참고할 리가 없다. 나는 다리를 바꿔 꼬고 되물었다.

“그럼 이제부터 뭘 할 거냐? 네 육체의 사이클은 범인류사의 24시간 주기 기준이라고 했지? 자정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어. 난 지루한 거 싫다.”
“물론 그것도 예상 범위 내다. 지금부터는 내가 일방적으로 지금까지 파악해둔 정보를 네게 들려주마.”
“일방적으로?”
“일방적으로.”

이 내가 굳이 눈을 마주치고 말했는데도 무심한 얼굴로 동어반복으로 대답한다. 내가 눈치를 줬다는 사실을 눈치채고도 무시하는 태도였다. 실로 현대의 인간형 지성체다웠다.
내가 침묵하자 데이비트가 다시 물었다.

“지금까지는 이쪽의 계획에 필요한 최소한의 배경만 설명했다. 너도 궁금한 게 많겠지?”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그랬다. 자정까지는 5시간 남짓이 남은 상태였고 데이비트는 숨 가쁘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언제나 성실하고 이번에는 청자 역을 맡았으므로 성의 있게 들었다.
지저세계 믹틀란의 역사 이야기 도중 ‘이건 내 추론이지만’이라는 말을 다섯 번째 들었을 때, 나도 ‘마야’와 동일기종이니 그쪽의 데이터베이스를 털어서 실제로 관측된 정보와 대조해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마야’와 접속을 시도했다가 중간에 나보다 많은 권한을 가진 뭔가에게 방해당해서 실패했다. 데이비트가 미간을 찌푸리고 사실 자기가 카마소츠와 정보교환을 마치고 이 장소에 도착했을 때쯤 디노스의 도시에서 존재규모가 너랑 비슷한 무언가가 발생했다, 아마 그게 개입한 영향일 거라고 말해줬을 때는 관대한 나도 짜증을 참지 못하고 제발 그런 건 좀 미리 말하라고 짜증을 냈다.
대략적인 믹틀란의 역사를 추론해낸 데이비트가 자기가 가진 정보로는 추론 불가능한 공백을 채우기 위해 이 세계의 아키타입을 찾아갔는데 그 아키타입이 여러 가지 의미로 인상적인 모습이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호기심을 느낀 내가 궁금하니까 한 번 묘사해 보라고 했더니 데이비트가 ‘직접 보는 게 낫다’ 면서 감각정보가 포함된 정보를 공유해 주었다. 눈 감고도 이 세계의 모든 생명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데이비트의 인식능력으로 수집한 폭력적인 양의 정보를 받아들인 내 육체는 당연히 생명활동을 유지하기 위해 거부반응을 보였고, 나는 ORT의 사체 위에 구토했다. 데이비트가 미묘하게 연민을 느끼는 얼굴로 내 등을 두들겨 주었다. 먹은 게 없어서 위액밖에 안 나왔다. 뭐 그래도 용각류의 형태를 한 아키타입은 정말 인상적인 모습이었으므로 용서하기로 했다.
칸 왕국 이야기를 할 때는 ‘마침 장소가 좋다’며 자리에서 일어선 데이비트를 따라다니면서 설명을 들었다. 데이비트는 군더더기 없는 필요최소한의 동작으로 움직이며 한 번 파괴되었다가 보수하면서 일부분의 재질이 달라진 건물의 흔적에서 태양에 준하는 열원조차 없는 세계에서 눈부신 문명을 이룩해낸 자신들이라면 이길 수 있을 것이라 믿던 왕국의 백성들의 절망과 절망에서 파생된 오기에 대해 이야기했다. 유적에 돋을새김으로 새겨진 왕국민들의 마지막 싸움을 묘사한, 자신들이 사라진 뒤 홀로 남겨질 왕 혹은 언젠가 발생할 또 다른 지성체에게 자신들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는 의도로 만들어진 장대한 벽화의 마무리를 하던 예술가가 왕에게 그 몸을 바치러 가기 전에 일 분 일 초라도 더 살아있고 싶다는 욕망 때문에 망설인 흔적을 읽어냈다. 그 모든 일을 겪은 뒤 아키타입 이외의 누구에게도 명예로운 존재임을 인정받을 일 없이 홀로 남겨져 위층을 떠돌고 있는 마지막 용자의 이야기는 학술연구자에 가까운 이 특유의 경직된 언어로 이루어졌으나 한 겹 벗겨내면 인간의 생존방식을 자세히 관찰해온 존재 특유의 통찰이 서려 있었다.
믹틀란 이야기를 끝냈을 때 자정까지는 1시간 27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데이비트는 이건 천천히 설명할 생각이었지만 대략적인 브리핑이라면 할 수 있겠다며 다른 별의 신과 명목상의 세계의 왕 게임의 플레이어들과 지금쯤 허수공간 속에 몸을 사리고 있을 불확정 요소 이야기를 했다. 방해된다며 잘려 나갔다가 되살려진 참혹한 흉터를 폭풍으로 가린 채 지구에 나타난 여섯 개의 세계를 반경 140억광년 안의 것이라면 뭐든 훔쳐볼 수 있는 눈으로 들여다본 이야기를 데이비트는 ‘훔쳐본 건 조금 미안하지만, 이쪽도 사활이 걸린 문제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얼굴로 태연하게 늘어놓았다. 거기까지 이야기하자 딱 18분이 남았다.
나는 세 대째의 담배를 바닥에 던지고 신발 바닥으로 문질러서 껐다. 데이비트는 벌컥벌컥 소리 내면서 물을 마신 뒤 수통 뚜껑을 닫았다. 데이비트가 나에게 시선을 돌렸을 때 나는 데이비트의 이야기를 듣고 내린 결론을 이야기했다.

“잘 들었다. 감상 말해줘도 되겠냐?”
“내 향후의 행동방침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면 백업 시간 이후에 말해라.”
“아니, 넌 행동방침을 확실히 정해두고 행동하는 타입이니까 큰 영향은 없을 거라고 생각해.”
“그럼 말해도 된다.”

가차 없었다. 나는 무심하게 느껴지게끔 신경 쓴 말투로 대답했다.

“잘 즐기고 있구나, 너.”

데이비트는 10초 정도 침묵한 뒤 되물었다.

“그렇게 보이나?”
“태도만 봐도 알아.”

갓 소환된 내게 앞으로의 계획 이야기를 할 때는 거래 상대에게 이런 것을 만들 생각이라며 청사진을 프레젠테이션하듯 오래 생각하며 정리한 말을 버릴 것 없이 깔끔하게 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이야기할 때는 입 밖에 낸 말을 정정하기도 하고 덜 완성된 문장을 입 밖으로 내뱉기도 했다.
데이비트는 내내 무표정했고 대화의 방식은 불친절했다. 지금껏 사회적 소통에 크게 집착하지 않고 살아온 티가 났다. 하지만 그래 봤자 지구산 인류종의 사이클에 맞춰 살아온 인간형 지성체다. 나 정도 되는 존재라면 몸짓만 봐도 그 화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 데이비트가 지금껏 자기가 탐구해온 대상에 대해 남에게 이야기하는 작업을 명백하게 즐기고 있었다는 사실. 아마 높은 확률로 그 탐구 작업 자체도 즐겨왔을 것이라는 사실도.

“종교인이란 근본적으로는 특정한 무언가에 골몰하면서 탐구하고 그걸 실생활에 적용하는 직종이야. 나는 직책상 골몰하는 인간을 많이 봐 왔지. 너는 신앙심 같은 거 없는 녀석이지만 그런 측면에서는 내 신관들과 제법 비슷한 존재일지도 모르겠군. 좋아. 이 세계의 주민들이 너 요새 뭐 하냐고 물어보면 내 신관으로 취직했다고 말해라.”
“지금 말해도 기억할 수 없어.”
“아, 그랬지. 이따가 한 번 더 말해주마.”

나는 데이비트의 손목에서 빛나는 디지털 시계를 보며 남은 시간을 가늠했다. 15분 37초. 남은 시간에 맞춰서, 미래의 데이비트가 다시 떠올리고 짓씹고 오랫동안 고찰할 시간 없이 버릴 말을 한다.

“너는 내게, 네가 지구에서 사는 생명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지구의 멸망을 이용하려 한다고 말했다. 알고도 막지 못한 존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그랬지.”
“나는 직책상 자기 행동원리를 그런 식으로 정의하는 인간을 많이 봤어. 보통은 그걸 자기 이외의 인간은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의무감이라는 이름을 붙여 행동의 동력원으로 만들지. 그건 확실히 좋은 동기부여다. 나는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며 자기 자신을 치켜세울 수도 있고, 나 말고는 할 수 없고 내가 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돼서 좀 더 필사적으로 행동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행동하면 언젠가 지쳐. 육신을 가진 지성체는 지치면 변질되고 망가진다. 자연스럽게 본래의 목적에서 멀어지지.”
“내가 의무로 행동하는 존재인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존재인지 생각하고 있었나?”
“그래.”
“어떻게 생각했지?”
“후자다.”

‘왠지 여기서는 가능할 것 같아서 너를 소환했다’고 뻔뻔하게 밝히던 얼굴을 생각한다. 지저의 닫힌 세계의 역사와 잘려 나간 세계를 배당받은 괴짜들에 대해 말하던 서늘한 열을 띤 목소리를 생각한다. 이 녀석은 순전한 욕망으로 나를 불러냈다는 것. 자기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열을 올리는 존재라는 것을 생각한다.
나는 기본적으로 필사적으로 싸우는 전사를 좋아한다. 전사에게 힘을 빌려주는 것도 좋아한다. 하지만 타인의 염원에 부응하며 그에 상응하는 시련을 부여하는 존재인 이상 상대의 수요를 파악하고 어떤 스탠스를 취할지 정해두어야 한다. 자신이 고통스럽다고 여기는 일을 하는 존재를 연민하고 비웃으며 즐겨야 할지, 자신이 즐겁다고 여기는 일을 하는 존재를 시험하고 놀리면서 즐겨야 할지 생각했다. 데이비트 젬 보이드는 후자다. 그러면 됐다. 이번 전쟁은 웃으면서 해도 된다. 나름대로 즐거운 1년이 될 것이다.
묵묵해 보이지만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는 단정한 얼굴에 대고 순순히 신탁을 내려주었다.

“너는 해낼 거다. 운이 어지간히 없지만 않다면.”
“왜 조건부지?”

얼굴을 찌푸렸다. 신이 해주는 말의 여운에 잠길 시간을 조금 줄 생각이었는데 그걸 자연스럽게 망치는 재주가 눈부셨다. 이 녀석은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게 아니라 분위기 파악을 선택적으로 하는 성질이라는 통찰의 신뢰도를 조금 올리고 대답했다.

“행운과 불운을 관장하는 자로서의 밸런스 조정이다. 내 권능이 있다면 다소의 확률은 조작할 수 있지만 거긴 반드시 그만큼의 대가가 필요해. 운은 이 세계가 너희들에게 갖춰줄 수 있는 마지막 공정함이니까. 그러니까 노력해라.”
“말하지 않아도 그럴 생각이다. 지금까지도 해왔고.”
“재미없긴.”

자정이 되기 3분 전, 데이비트는 칸 왕국 유적의 벽에 등을 기대고 편한 자세로 앉았다. 내가 여기 왔을 때 데이비트는 먼저 내게 자신의 신체적 문제에 대해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하루 분량의 정보를 백업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도 했다. 나는 곁에 앉은 채 데이비트를 빤히 바라보았다. 데이비트는 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지금부터 하는 말은 네 머릿속에만 남기고 내 말을 반복하지 마라. 아키타입은 나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네 언동은 제대로 인식하고 기억하니까.”
“무슨.”
“말하지 않아서 미안한데, 나는 백업 도중에는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을 인식할 수 없다. 시간은 평균적으로 2분 정도 걸린다.”
빨리도 말한다.”

이 녀석, 몸이 아파서 의사한테 갔을 때 유의미한 정보라고는 아무것도 안 주고 중언부언하다가 집에 가려고 진료실 문고리를 잡은 뒤에야 진짜 문제를 말하는 타입이다.
나는 새 장난감을 쥐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근방에 위험한 기척은 없지만 어쨌든 경계가 필요하다. 데이비트는 계속 말을 이었다.

“너무 염려할 필요는 없다. 내가 공격행동이라고 학습한 사건이 벌어지면 자동으로 요격하게 돼 있으니까. 자랑은 아니지만 비상상황에 대응할 데이터베이스는 나름대로 잘 갖춰놨다고 생각한다.”
“이런 얘기는 처음부터 해. 나는 일단은 네가 부른 서번트고, 서번트 이전에 신성이다. 너를 못 지키면 네 요망에 부응할 수 없고 그건 내 프라이드를 굉장히 크게 상처입히는 일이야.”
“시계탑이나 칼데아 근무자들이나 A팀 녀석들에게도 얘기한 적 없다. 이걸 듣는 건 네가 처음이다.”
“뭐?”
“답례다. 그런 듣기 좋은 말을 해준 녀석은 네가 처음이니까. 그리고.”

데이비트는 숨을 고른 뒤 천천히 대답했다. 최대한 또박또박하게 말하려 노력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내가 너를 신뢰하겠다는 의사 표명이다.”
…….”
“너만 알고 있는 약점이야. 너는 나보다 교활하지. 부디 잘 사용해라.”

침묵하다가, 자정까지 50초가 안 되게 남았을 때 말했다.

“사치의 본질은 귀하거나 쓸모 있는 것을 마구 소모하고 내버리는 행위지. 너는 네가 생각하기에 ‘듣기 좋은 말’을 버리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을 번복할 생각은 없고.”
“기분 좋은 말이었지만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이제 알았다. 너는 너를 제약하는 기억용량의 제한을 네가 예상할 수 없는 미래를 자아내는 행위로 개찬했다.”
…….”
“그게 네 나름의 사치고 즐거움이군.”

데이비트가 별안간 웃었다. 정돈된 느낌의 무표정을 보면서 지구에 덜 적응한 외우주 지성체다운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올린 얼굴은 제법 귀염성이 있었다. 발생 후 13년을 맞이한 생물이 연배에 어울리는 웃음을 띤 채로 말한다. 자기가 생각하기에 선한 일을 이루는 즐거움을 위해 살아가는 생물.

“들켰군.”

자정이 되었다. 나는 반응하지 않게 된 데이비트의 곁에 선 채 내가 담배를 비벼끈 흔적을 발끝으로 더듬었다. 살아있는 죽음이 살아있는 망해亡骸를 쓰다듬는다. 모순적이지만 여기서는 모순 없는 문장이다. 여기는 믹틀란이니까. 망자의 낙원의 패러디 같은, 책임을 아는 존재가 자기들의 소산인 지성체를 마지막까지 책임지기 위해 만들어낸 테라리움이니까.
망자의 낙원에서 제일 욕심 많은 남자의 곁에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믹틀란은 지저세계지만 상층은 인류가 지상에서 살던 시절과 똑같이 꾸며져 있다고 데이비트에게 들었다. 태양이 가까이 오면 낮이 되고 태양이 멀어지면 밤이 된다고. 밤에는 하늘에 별이 보인다고.
데이비트가 말하기로 칸 왕국의 백성들은 태양이 없는 세계에서 지열에 기대어 살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칸 왕국의 유적에 별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내 생각에 그들은 별이 없어도 괜찮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분명 미래가 계속될 것이라는 빛나는 희망이 별이 있을 자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을 테니까.

“이번의 나는 꽤 감상적인 인격이군. 마스터의 영향인가.”

위협적인 뭔가가 다가오는 기척은 느끼지 못했으므로, 나는 체내를 질량이 없는 뭔가가 천천히 차오르는 감각에 용량을 좀 더 할애하기로 했다. 어쨌든 나를 신뢰하는 동료와 함께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은 가슴 설레고 즐거운 일이다. 그게 세계의 창세이건 별의 끝이건 마찬가지다.
오랜만에 느끼는 감각이었다. 동시에 생각했다. 데이비트가 백업을 마치기까지 1분 하고도 몇십 초가 남았다. 깨어난 데이비트는 모른다. 본인이 모르는 포상 정도면 괜찮은 보답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의 방식으로. 뒤탈이 남지 않는.
한쪽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맞추고, 눈을 감은 청년의 모양 좋은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가져갔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