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https://www.wired.com/story/pedro-pascal-interview-last-of-us-mandalorian/
인터뷰어: Hemal Jhaveri (@hemjhaveri)
*대체 단어를 못 찾아서 people pleaser를 그냥 뒀습니다. "남 눈치보고 비위 잘 맞춰주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복잡하게 얽힌 Sci-Fi의 신인, 페드로 파스칼의 가면을 벗기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스타가 말하는 게임, 폭력성, 그리고 people pleaser가 터프한 남성(안녕, 만도!)를 연기할때.
사실, 페드로 파스칼은 조금
과하게 친절하다. 너무 잦은 포옹. 간식을 향한 너무 많은 공손한 거부. 이 인터뷰를 위한 사진 촬영 세트 위에서, 그의 안에 분명히 존재하는 긴장감. 그는 유명인의 초연함 속으로 피하면서도, 다른 이와 연결되는 것을 갈망한다. 그는 자신의 사진을 찍는 것을 즐기는 듯 하면서도, 사진사가 근접 촬영을 위해 가까이 가면 부끄러워 한다. 그는 본질적으로 타인을 향해 열려있지만, 스스로의 많은 부분을 억누른다. 따지고 보면, 그는 자신이 연기하는 "만달로리안"의 익명의 현상금 사냥꾼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가면을 벗어 타인이 자신의 얼굴을 봐줬으면 하지만, 그는 그 여파를 감당하고 싶지 않아한다.
불쌍하게도. 파스칼은 "만달로리안"의 시즌3으로 돌아올 뿐만 아니라, 아마 여태까지 가장 큰 규모의 게임-TV 실사화인 HBO의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주연이기도 하다. 이제 모두가 알아볼 그의 얼굴에서 누군가는, 흠, 충격을 느낄지도 모른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잡지 표지, TV 스타덤, 이 모든것이
— 가족이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의 칠레 독제를 피해 덴마크를 지나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한 뒤, 늦은 밤 HBO에서 방영하는 80년대 영화에 스스로를 감싼 어린아이로써 말이다. 파스칼이 언제나 연기자가 되고 싶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왕좌의 게임"에서 두 눈이 파여지기 전엔 몇년동안 작은 TV 쇼 조연이나 뉴욕에서 무대 일을 해왔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헐리우드의 “어쩔 수 없이 아버지가 되는 사람”의 기본이 될 줄은 몰랐다. 그러니까,
유명해진다는 것 말이다.
이제 파스칼이 주로 주변 사람들을 편하게 만드는 것을 걱정하는 것은 아마 그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른다. 촬영이 길어져 1대1로 마주할 시간까지 잡아먹히기 시작하면, 그는 남아서도 대화할 수 있다고 나를 안심시켜준다. 그리고 그는 실제로 그런다, 그의 스케줄이 허용하는 시간을 훨씬 넘어서까지 말이다. 나는 그가 드디어 멋진 녀석들의 자리에 같이 앉게 된 것에 흥분되고
—에단 호크! 니콜라스 빌어먹을 케이지!
—아무 실수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이해한다. 거의 모든 유명인들처럼, 그의 일부는 조금 불안정하고 언제나 인정을 바란다; 그냥 가볍게 던진 그의 연기에 관한 칭찬도 그를 안심시킨다. 그는 우리가 그의 가족과 정치에 관해 얘기할때 가장 몰두했다. 그의 목소리, 바디 랭귀지, 교묘한 때마다 올라가는 눈썹을 통해 다 티가 나기 때문이다. 그는 너무 많이 마음을 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그만큼 마음을 쓴다는 것을 불편해한다.
이것은, 내가 추론하기에, 그의 능력의 원천이다
—그의 중심을 이루는 공감 능력이, 터프한 남성의 외관과 눈에 띄게 경쟁하는 것 말이다. 요즘 흔한 영웅상과는 다르게, 그러니까 매끄럽게 다져진 완벽함을 띈 몸을 가진 자들과는 다르게, 파스칼은 세월이 그대로 얼굴에 스며들어있다. 그는 화려함이 부족한 곳은 투박함으로 대체한다: 그의 딱 벌어진 풍모와 희끗한 수염은 그에게 잿빛의 보호적인 분위기를 준다. "더 라스트 오브 어스"에서 그는 좀비가 무성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시대의 폐허 속에서 개인적이자 세계적인 상실을 겪는 아버지, 조엘 밀러를 연기한다. 그의 연기는 위협과 비탄 사이를 오가며 깊은 감정이 스며들어있다
— 갈등하는 주인공의 마음 속에서 인간성을 찾는 타고난 능력 말이다. 그것이 파스칼이다. 우리의 갈등하는 영웅. 그가 공감하고자 나누는 포옹까지 모두.
WIRED: 당신은 의도적으로 거칠게 굴며 갈등을 겪는 외지인— "만달로리안",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조엘—배역을 고르는 것 같다. (그 선택이) 너무 단정하고 일관된 것은 아닌지?
페드로 파스칼: 나는 누군가가 내 경험을 선택과 연관짓는 것이 재밌다. 물론 거절할 수 있긴 하지만, 당신은 존 파브로, 캐슬린 케네디, 데이브 필로니, 혹은 HBO를 거절할 수는 없을 것이다. 멈춰서 그 캐릭터가 어떤 지에 대해 선택해 봤다는 느낌은 없다. 그것은 그저 문이 열렸으니 지나갔을 뿐인 상황이었다.
그럼 "더 라스트 오브 어스"가 유달리 더 탐난 점은 없었는지?
정말 정직하게 얘기하자면, "체르노빌"을 했던 크레이그 메이진과 일하고 싶었다. 그리고 HBO는 내가 어릴 때부터 보고 자란 컨텐츠다. 나는 그들의 초기 프로그램을 겪어봤다. 그들의 초기 프로그램들은 매우, 매우 성숙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밤 11시 이후에 했던 초기 프로그램을 말하는 것인가.
바로 맞췄다. 엄청난 얘기지만, 난 그것들을 전부 봤다.
당신의 부모님은 신경을 쓰지 않았나?
당연하게도 미국 이민자의 경험은 다양하지만, 보통은 다른 길을 열 정도로 엄격하다. 내 부모님은 그들이 본 프로그램이 마음에 들면, 거의 항상 나를 방에 돌려보내지 않았다. 물론 나는 좋은 성적을 유지해야 했고 그렇지 못했다면 아무 잡것들도 보지 못하게 했다.
나도 그랬다—좋은 성적을 유지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가능했다.
그들은 TV가 우리들의 선택에 영향을 끼칠정도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HBO와 같은 네트워크에 중요한 일부가 되고 싶다는 큰 꿈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더 라스트 오브 어스"의 준비는 어떻게 했나? 게임은 플레이 해봤나?
나는 그 게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의 지시는
게임을 플레이 하지 말라였다. 나는 그들을 무시했다. 게임을 플레이하려고 시도했지만 정말, 정말 못했다. (하지만 내 조카의 실력은 끝내줬다.) 게임에 있는 원작 요소와 직접적으로 관계 있는 것들을 연주하는 것은 내게 중요했다
—신체적으로도, 시각적으로도, 목소리로도.
배역에 개인적인 것을 포함시킨 적은 있나?
그게 바로 재밌는 점이다
— 당신이 얼만큼 내적인 어둠을 안전한 방향으로 표출하고, 당신의 악몽 속에 있는 것들을 불러오는 것 말이다.
예를 들어?
조엘이 수용하는 폭력성과, 그것을 잘 한다는 점. 나는 자라면서 어릴때 치고박는 싸움은 해본 적이 없고, 성인이 되어서는 더더욱 한 적이 없다. 폭력은 나를 엄청난 두려움에 빠지게 한다. 폭력에 대한 두려움은 세상 모든 것에 대한 것일까? 아니면 자기 자신의 폭력성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아니면 (폭력을) 좋아할 수도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라던지?
맞는 말이다. 나는 스릴을 찾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내 한계를 시험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조금 적대하는 편이다. 나는 아픔이 싫다.
신체적인 아픔을 말하는 것인가?
모든 종류의 아픔이다. 나는 정신적인, 감정적인, 신체적인 아픔이 싫다. 어떤 사람들은, "오, 내가 이걸 부술 수 있는 확률이 매우 높다는 걸 아니까 한번 해봐야겠다,"라고 군다. 엿. 먹어라. 나는 나 자신을
—나는 터프 가이가 아니다.
정말로?
나는 그런 식으로 살지 않는다. 나는 윤활유다. 나는 사람들이 편안함을 느꼈으면 좋겠다. 나는 다른 이의 평온함을 침범하며 사는 방법을 모른다. 나는 people pleaser다.
나는 종종 당신이 계정을 만들 수 있는 모든 곳에서 만드는 것 같은 sns에서 종종 그런 점을 본다. 예를 들어, sci-fi 팬덤이 더 접근하기 쉽고 포괄적인 느낌이 든다던가 말이다. 당신은 2021년에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한 여동생을 매우 지지한다. 당신은 정치적인 공간 속에서 어떤 사람으로써 항해하는가?
완전히 즉흥적이고 결과적으로 실수를 하는, 예를 들어... [매우 긴 공백, 두 번의 깊은 한숨들] 내 마음은, 그러니까, 소외된 약자를 향해있다. 그것은 내 선택이 아니다. 그게, 어떤 이가 감히 지지를 받아 마땅한 자들을, 보호를 받아 마땅하고 당신보다 더 필요한 이들을 지지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내 말을 알겠나?
그렇다, 하지만 어떤 배우들은 "내 주가가 오르고 있으니, 나는 이것에 관여되고 싶지 않다"고 하기도 한다.
만약 당신이 잠시 멈추어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당신이 옳은 일을 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정말 최소한의 최저인 정도다. 정말, 엄청난 최소의 최저.
인스타그램 포스트 정도로는 충분치 않다는 말인가?
당연히 충분치 않다. 내 개인적인 희망은 진실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것이다. 나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내 자신이 충분히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게, 극-진-보 성향이지만, 모순점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적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러니까, 그 창피함의 무게를 지고 있다고 할까?
자본주의적 창피함의 무게? 당신이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이 나쁘다는 것인가?
대충?
당신은 커리어적으로 늦게 성공했다. 당신은 계속 일했다—
나는 지속적으로 일했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흔한 방식으로 힘들었지만, 언제나 내게 도움을 주는 누군가가 있었다
—집세를 낸다거나 식료품을 산다던가 말이다.
하지만 당신은 이제 데미 무어처럼 수많은 돈에 굴러다니지 않는가.
[웃음] "은밀한 유혹"의 데미 무어?
그렇다.
나는 그럴만한 몸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직 그녀만이 그 것을 소화해낼 수 있다. 그렇다, 나는 돈을 번다. 벌어서 침대에 뿌리고 내가 그 위를 뒹군다.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진지하게 말해보자면, 당신은 최근의 성공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는 30대 후반에 될 때서야 "왕좌의 게임"에 캐스팅 됐다. 그러므로, 내가 도움을 받은 많은 순간들, 그리고 매우 힘든 시간들을 버티게 도와준 많은 사람들
—그들 중 일부는 절대로 내게 밥을 사주게 두지 않을것이다. 나는 그들이 나를 보살펴준 만큼 나도 그들을 보살펴주고 싶다.
누가 당신을 도와줬는가?
그 질문은 우리가 오스카 (아이작)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뜻인가?
인터넷은 이 우정을 사랑한다.
나는 2005년에 우리가 같이 참여했던 연극에서 그와 만났다. 세금이 떼이기 전 가격으로, 우리가 주마다 500달러정도로 받는 오프 브로드웨이(맨해튼에 있는 작은 극장) 쇼였다.
둘이 함께한 기억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이 있는지?
너무 많다. 그는 장난기가 많다. 예를 들어, 그가 그때 무대에 올랐을 때 장난기의 레벨이라던지 말이다. 그는 유령을 연기했고, 살아있는 설정의 캐릭터들이 그를 볼 수 없음을 뜻했다. 내가 내 장면을 연기해야할 때 그는 그곳에 존재했지만, 캐릭터들이 볼 수 없기에 그는 모든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그가 원하는 만큼 나를 웃기려 하거나 대사를 까먹게 하려들며 내게 엿먹일 수 있었다. 이 기억은 꺼림칙한 동시에 즐겁다.
당신은 스스로를 희망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언제나 희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너무 특권을 누리며 살고 있다. 내 말을 알겠는가? 그러니까, 나는 너무 운이 좋다. 재미있는 이야기다. 누나와 내가 미국에서 살 수 있었던 것은 내 부모님이 군사적 독제를 피해 이민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 부모님이 피난한지 고작 10년쯤 뒤에, 나는 "조찬 클럽"이 비디오 대여점에 없어서 울고 있었단 얘기다.
그러나 덩달아 극복해야 하는 일들도 있지 않았나?
되돌아보자면, 그것들조차 많이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내 부모님이 사면된 망명자가 되어 칠레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을 때, 미국에서 자란 경험 때문에 존재하지 않았던 양쪽의 많은 가족들도 (내 삶에) 함께 하게 되었다. 중년이 되어서야 내가 개인으로써 어느 한 곳에 깃발을 꽂을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감정적으로 힘들어진 것 같다. 모든 곳이 내 집이자 그 어느 곳도 내 집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동시에 내게 장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 문화에서는 자주 단점으로 여겨지지만, 인격적으로, 관점적으로, 시야적으로 장점일 수 있다.
당신이 좀 더 젊었을 때 국가적인 인식 속에 들어왔다면, 예를 들어, 전통적인 마블 배역에 들고 싶지 않았을까—망토와, CGI같은 것들 이라던지?
하지만 난 그걸 원한다. 나는 영화에 참여하고 싶다.
그렇지만 세계는 지금 정치적으로 제법 긴장된 상태에 있다. 그것이 영웅이 된다는 것의 의미를 바꾸는가?
사람들을 오해할 수 있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고 그것을 잊기 위해서라면, 결과적으로, 당신의 이웃은 당신에게 입고 있던 셔츠를 벗어 줄 수 있다. 낯선 사람과 교차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더 많이 인간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분단되었는지 온갖 것을 찾아보며 두려움에 빠질 수도 있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해서 나는 내가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영웅적으로 친절하다는 것을 기억한다.
어떤 의미로는, 당신은 새로운 종류의 영웅의 얼굴이다.
세상에. "~의 얼굴"이라는 표현이 나오면 좀 웃기다, 왜냐면 만도는 얼굴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이 내가 자라오며 봐왔던 것들의 일부로써 상상하기 힘들다. 내 안에는 분리가 된 부분이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이 세상에 어디에 둬야할지 모르겠다. 그냥, 머리가 하얘진다.
그렇다면 "더 라스트 오브 어스"에서 당신의 캐릭터에 관해 얘기해보자. 조엘은 좀 무서울 수 있다.
내 생각에 조엘이 무서운 이유는 사랑하는 이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우리가 어떤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 모른다는 점인 것 같다. 그것이 의식적이던, 무의식적이던, 살아있는 것과 인간으로써 존재하는 것은 우리가 느끼는 사랑에 직접적이게 연관되어있다. 존재하는 것은 특정한 관계에 당신이 느끼는 사랑과 연결되어 있다
—당신의 아이나, 당신의 배우자거나
—그리고 그것을 잃는다? 어떤 이들은 그런 상실이나, 그런 상실을 겪을 수 있는 위협이나, 다시 한번 상실을 겪는 위협에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 없다. 그렇지 않는가?
그것이 당신을 인간으로써 존재하게 하는가.
그것은 동시에 당신을 인간적이게, 또는 비인간적이게 만든다. 그것은 게임이 제시하는 아름다운 의문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아이를 가지지 않음으로써 회피한다. (연애적)관계를 가지지 않는 것도 포함해서.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은가?
잘 모르겠다.
당신은 조카들과 가깝지 않은가.
뭐, 그렇다. 그들이 "더 라스트 오브 어스"를 잘 플레이하기 때문이다. 아니다, 장난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계속 주저하는 아버지와 같은 배역에 캐스팅 되는 것이 웃기거나, 적어도 조금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나는... 나는 상상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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