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공불락으로 보이는 상대에게 도전할 때면 게임을 하는 기분이 들지. 살얼음판이어도, 상대가 어떤 부분을 앞세워 나를 공략하려고 하는지, 그렇게 하면서 어디를 내보이는지를 살피고 어떤 대응을 할지를 결정하는 과정은 게임과 제법 유사하거든. 나야 애초에 신분이 거짓이니 그런 사람들의 허점을 그대로 답습하는 척을 해야만 해. 거대한 유산을 상속받지만 유년에 받지 못한 사랑을 갈구하는 것 같은 적절한 수준의 환상과 갈증이 필요하지. 여자들뿐만 아니라 인간은 다 그렇지. 허술한 면은 사랑하기 쉽거든. 완벽하게 채워져 있으면 외려 관심을 가지지 않아. 부족하면 채워주고 싶잖아. 그렇게 상대가 나를 잃어버린 반쪽처럼 여기거나, 그에 준하는 무언가로 여기며 좀 더 깊은, 언외의 대화를 나눌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내면 내가 이긴 거야.
슬슬 밥맛 떨어지는데요.
진심은 그런 거야. 고작 하룻밤만에 우연찮게 생겨난 열정을 진심으로 착각하면 불행하겠지. 둘 다 진심이 되려면 좀 더 오래 만나야만 해. 더 깊이 말하고, 부딪치고, 상대에 대한 감정이 사소한 호오에 놀아나지 않을 만큼 단단한지 망치로 때려보는 작업을 거쳐야 해. 모두가 그렇게 진심을 증명하는 건 아니지만 이론적으로는 그렇지.
누구의 이론인데요?
유수의 전문가의 이론을 종합해서-
스티븐이 입을 달싹이다가 말했다.
내가 내린 결론이다.
아하.
재프는 스티븐이 잠시 망설일 정도의 기업 비밀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는 계란을 씹다가 섞여 들어간 껍질을 굳이 혀 위에 얹어서 보여주며 말했다.
그보다, 계란 껍질 두 번째 씹는다고요.
어쩔 수 없어.
뭐가 어쩔 수 없어요, 어제는 안 그랬으면서.
오늘은 우유를 먼저 풀었거든.
그 말은 재프의 흥미를 끈 것 같았다.
우유를 먼저 뿌렸다고요?
색다른 시도를 해 보려고 했거든.
그럼 새로운 시도는 안 하는 게 좋겠네요.
시행착오는 언제나 있는 법이지.
스티븐이 인상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손에 우유가 묻는 바람에 미끄러졌거든.
그 말이 더 말이 되는 거 알아요?
우유를 먼저 붓는 것으로 끝나는 것보다야 말이 되겠지.
아니, 그거 말고요.
재프의 입에서 와그작 소리가 나며 얼굴이 구겨졌다.
그 진심이란 것보다요. 여자를 유혹하는 법이 왜 망치로 때려부수는 걸로 이어지는지 모르겠는데, 그때 한 말이 진심이란 것쯤 모를까봐요.
재프가 잘게 부서진 계란 껍질을 삼키고 말했다.
그 순간순간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니까 말했을 수도 있죠. 그리고 나중엔 그때 진심이 아니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건 진심이었을 수도 있잖아요. 그냥 진심이 변한거지.
스티븐이 접시에 누운 스크램블 에그를 잘게 분해하며 말했다.
너는 그렇겠지.
은회색 눈동자가 포크가 산만하게 움직이는 것을 좇으며 말했다.
당장 스타, 아니 스티븐 씨가 헤어지자고 말한다고 해도-
포크가 접시 가장자리를 땅, 강하게 쳤다.
아니, 안 그래.
그렇게 가정을-
안 그런다니까.
무슨 말을 못하겠네.
말하지 마.
가정이잖아요, 가정.
안 그런다고 몇 번을 말해?
가정도 못해요?
스티븐이 정성스레 골라낸 계란 껍질을 멀찍이 밀면서 말했다.
내 진심은 자존심이 강해.
재프가 스티븐이 밀어낸 계란 껍질을 보고 똑같이 접시를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그는 포크 끝 대신 스티븐의 눈을 바라보았다. 세 번째일 계란 껍질이 포크 끝에 걸렸지만 다시 엉성하게 계란 사이에 묻혔다.
그럼-
그렇게 내버려 둘 거라고 생각해?
뭘요, 무슨 말인 줄 알고 그래요?
네 머리로 생각하는 것쯤 뻔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끈질긴 바보들은 보통 그럴 때 역을 가정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지.
언제는 속 모를 놈이라고 하더니만.
그건 다른 얘기잖아. 논리의 전환이 어디로 이어질지 뻔해. 듣기 싫어.
하지만 만약 제가-
듣기 싫다니까-
헤어지자고 하면 그때는,
쩡, 계란이 얼었다. 놀랍도록 아름다운 제어 능력으로 접시는 전혀 손상이 없고 계란만 언 것을 본 재프가 눈을 끔벅였다.
밥맛 떨어지는 얘기 하지 마.
스티븐이 제 접시를 재프 쪽으로 밀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거 이리 내.
뭐를요.
네 접시.
왜요?
내가 책임지고 먹으려고.
대답할 틈도 없이 두 접시가 맞바뀌었다.
나는 나와 오래 살았지. 진심을 두드려보는 단계는 이미 끝났어.
저랑은 안 했잖아요.
연애 예비 기간이 얼마나 됐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 정도 기간이면 충분해.
금방이라도 하지만, 이라고 말하고 싶은 얼굴로 재프는 눈을 내렸다.
네가 뭐라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돼. 사랑하면 상대에게 더 완벽한 무언가의 환상을 덮어씌운다고 하지. 하지만 난 사랑의 환상 같은 걸 보는 게 아니라 널 보고 있는 거야.
스티븐이 말을 이었다.
방금 내 진심은 자존심이 세다고 했지. 이에는 이, 눈에는 눈. 헤어지기보다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줄 테니 꿈도 꾸지 마. 말로는 더더욱 안 돼.
아하.
재프는 또 시작이군, 하는 눈으로 껍질 없는 스크램블 에그를 천천히 씹었다.
오늘 설교는 끝입니까?
나머지는 밤에.
으윽.
재프가 신음했다.
합법적으로 설교하려고 사귀자고 한 건 아니겠죠.
스티븐은 말없이 재프가 접시를 비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조용해진 식탁에서 커피 냄새가 났다. 계란 냄새도 났고, 옅은 시가 냄새도 났다. 마지막 계란이 목을 넘어가는 것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아마, 지금 이 순간의 모든 걸 위해서겠지.
재프는 포크를 어정쩡하게 들고 멈춘 채 눈을 굴렸다. 지금 저 사람이 정말로 원하는 게 뭘까.
그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말했다.
키스할래요?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커피 맛이 질척한 살덩이와 섞인 독특한 맛이 입안에 퍼졌다. 달콤할 수 없는 게 달콤한 것 같았다. 기분 좋은 달콤함을 정신없이 음미하다 문득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이마를 살랑살랑 간질이는 것을 느끼고 몸이 달아오르고 가볍게 소름이 돋았다. 그건 이제 말이 아닌 것을 나누는 깊은 대화를 할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였다. 하지만 재프는 처음으로 그 신호를 두고 다른 생각을 했다.
왜 다들 사귀기 시작했을 때는 뭐라도 해주고 싶어하는지 모르겠네.
만약 그런 게 사랑이라면 재프는 사랑을 하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에 맞춰주고 싶어 하는 걸 보면 또 사랑이란 게 그런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아니면 이것도 게임인 걸까.
재프는 질리지 않는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한편으로 지금 사랑하고 있다는 말의 진위를 의심하지도 않는다. 언제나 그랬다. 사랑하고 있다는 건 정말 사랑하고 있다는 거다. 그것이 사랑했다는 말로 바뀐다고 해도 그때 사랑하고 있었다는 말은 진심이 아니게 되지 않는다.
그걸로 된 거다.
잘 벼린 칼날도 언젠가 무뎌지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번 진심이 무뎌지는 날이 온다면, 다른 때보다 조금 더 슬플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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