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어두웠던 극장에는 서서히 불이 들어온다. 박수를 치는 사람은 없었다. 묵묵히 스크린에서 시선을 돌리지 않는 관객만 있을 뿐. 현악기를 기조로 한 웅장한 음악이 흐르며 작은 글씨가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소년에게는 그것이 의미 없는 문자의 나열로만 느껴졌다. 이 영화를 완성하는 데에 참여했을 수많은 사람들. 문자가 그들의 이름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이름 너머에 있을 그들의 모습이 소년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살아가는 삶을, 느끼는 감정을, 소년은 알 수 없었다. 스크린이 꺼지고 모두가 영화관을 떠날 때까지, 소년은 자리에 앉아 그저 허공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근방의 조사를 마치고 메히코시티로 돌아온 데이비트가 마주한 것은 여전히 바쁘게 움직이는 오셀로틀과 도시, 그리고 비디오 플레이어를 손에 든 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위대하신 전능신이었다. 신전의 한구석에서 테스카틀리포카를 발견한 데이비트는 말을 걸었다간 귀찮은 일에 휘말릴 것이라는 걸 느끼며 못 본 척 자리를 뜨려고 했다. 선글라스 너머로 자신을 발견한 그가 잘됐다는 듯이 불러 세우지만 않았어도, 데이비트는 오늘 얻은 정보
(압축하면 3분 남짓할 양이다)를 정리할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무시하면 나중에 더 성가셔질 미래를 예상하며 데이비트는 귀하디귀한 시간을 소모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엔 뭐지. 새로운 무기라도 마련한 건가?”
“무기라니, 터무니없는 소리! 이건 그 토끼 녀석한테 서비스로 받아온 거다. 이걸 이용하면 영화라는 것을 볼 수 있다고 하더군. 인간은 역시 건방지다니까. 공상을 현실처럼 구현해 낸 걸 기록할 생각을 하고 말이야.”
“그렇군. 그런데 보아하니 사용법은 모르는 모양인걸.”
“
……그래.”
신이란 원래 이렇게 자신의 부족함을 순순히 인정하는 존재인 것인가. 물론 그 사실을 데이비트가 알 방도는 없다. 어찌 되었든 테스카틀리포카는 데이비트가 소환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서번트였으며, 영령 소환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살아있는 채로 신을 만나는 것은 현대에서 불가능하니까. 데이비트가 아는 신이라곤 이 현대 문물에 찌들 대로 찌든 신뿐이므로 다른 신들이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는 추측의 영역에 머물렀다. 물론 이 이문대에 존재하는 신이라면 한 명 더 있긴 하지만, 데이비트가 그녀와 직접 이야기를 나눌 기회는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이 지저세계 비추는 태양. 만일 그녀가 데이비트와 대면할 일이 온다면, 그것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가 아니라 믹틀란에 위협이 될 외부인을 배제하기 위한 것일 터이다. 그녀의 이름을 입에 올렸을 때 테스카틀리포카가 보이던 반응을 떠올리며 데이비트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주워들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비디오 플레이어는 포기한 것인지 이번엔 브라운관 TV를 잡고 애쓰고 있었다. ‘그때’ 이후로 영화를 본 적은 손에 꼽지만, 이번 한 번쯤이라면. 그런 생각으로 데이비트는 비디오 테이프를 플레이어에 밀어 넣었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TV에서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은 수상한 소리가 났지만, 다행히도 영화는 정상적으로 재생되었다. 전능하시다는 신은 그 과정을 물끄러미 보다가 만족스럽다는 듯이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비트는 오랜만에 한숨을 쉬고 말았다. 누가 봐도 저예산으로 만들어졌을 것이 분명한 B급 영화에 처음부터 모른 척하지 않은 자신을 원망했다. 이런 걸 서비스로 주다니, 그 무기 상인의 취향을 의심해 보아야 마땅했다. 괴물이 불을 뿜는 연출은 그래픽이라는 게 적나라하게 보여 몰입도를 떨어뜨렸고,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기어이 함선이 거대로봇 형태로 변신하는 장면은 원치 않게도 데이비트의 기억에 오래도록 남게 되었다. 어떤 의미로는 정말 대단한 영화가 아닐 수 없었다. 영화가 재생되는 내내 심각한 얼굴로 TV를 보던 테스카틀리포카는 화면에
The end 라는 글자가 떠오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생각만큼 재미는 없군. 애당초 저런 시시한 괴물 놈과 맞서려 하는 인간이 왜 고작 저것뿐인 거지? 이 영화를 만든 놈이 눈앞에 있다면 머리에 바람구멍을 내줬을 거다.”
“안타깝지만 괴수 영화란 원래 그런 법이다. 다음에 영화를 볼 기회가 있다면 할리우드산 영화를 추천하지. 화려한 액션이 네 취향에 맞을 거다. 기왕이면 그런 영화는 이런 작은 브라운관보다 영화관 스크린으로 봐야 제맛일 테지만.”
굳이 테스카틀리포카의 사격 실력은 지적하지 않으며 데이비트는 그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테스카틀리포카는 데이비트의 얘기 속에서 영화관이라는 말이 신경 쓰인 듯했다. 서번트가 소환되면서 얻게 되는 지식 속에 영화관이 무엇인지는 있을 것이다. 이문대 특성상 앞으로 남은 시간 동안 실제 영화관을 가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게 한 가지 아쉬운 점이겠지만.
“멍청하게 앞을 쳐다보기만을 위한 공간이라니, 사치스럽기 짝이 없군. 하지만 그런 점이 마음에 들어. 본디 오락이란 싸움만큼이나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하는 법이지.”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신께서는 그새 질려버린 것인지 그 뒤로 브라운관이 재차 켜지는 일은 없었다. 비디오테이프는 메히코시티의 성채가 그 역할을 다하는 날까지 플레이어 안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저승은 영화관 같은 곳일 거라는 말을 누가 했던가. 몇 번이고 압축되어 가지런히 정리된 청년의 기억 속에 그런 말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법 그럴싸한 환상이라고 청년은 생각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벽면을 가득 채운 스크린. 고개를 돌리면 천장 구석에 쳐진 거미줄과 천이 다 해진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런 아무도 없는 텅 빈 극장의 한가운데에, 청년은 앉아 있었다.
스크린에는 한 소년의 이야기가 영화처럼 흘러갔다. 청년은 그 소년을 아주 잘 알고 있다. 좋아하던 영화마저 더 이상 즐길 수 없게 된, 비교적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어느 소년의 이야기였다. 별 감흥 없이 스크린을 보며 손을 뻗자 산 기억 없는 팝콘이 오른손에 닿았다. 색깔을 보아 맛은 아마도 캐러멜. 청년은 팝콘으로부터 조금 더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그리고 청년은, 아무도 없었을 옆자리에 누군가 있는 것을 깨닫는다.
금연 구역으로 지정된 영화관에서, 남자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본연의 모습이라는 것처럼. 연기가 피어오르는 거울, 검은 태양. 모든 빛을 반사하기는커녕 흡수해 버릴 듯한 검은 옷차림의 남자는 낡은 영화관과는 어울리지 않는 멋스러움을 내며 의자에 앉아 있었다. 스크린에서 나오는 빛으로 색을 바꾸며 물드는 얼굴을, 청년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을 보듯이 보았다. 그랬기 때문에, 청년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가 옆에 앉은 남자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걸 인식하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그래서, 싸움을 끝낸 소감은 어떠신가?”
무게감 있지만 묘하게 친근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청년은 영화 속의 소년만큼이나 옆의 이 남자 또한 잘 알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이름을 말하려고 한 순간 무엇인가에 가로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치 지금 자신의 입에서 나와야 할 말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듯. 다짜고짜 질문을 던진 남자는 답을 재촉하지 않고 정면만을 보고 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는 남자를 보며 청년은 생각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완수해야 했던 임무와 그를 위한 싸움. 청년은 고독하고도 길었던 싸움을 끝내고 이곳에 왔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후회는 없다. 마지막 순간까지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썼고, 그 끝에 통쾌한 승부까지 할 수 있었다. 결과는 패배였지만 다음에 만난다면 지지 않을 것이다. 그 다짐은 입밖으로 내지 않은 채 마음에만 묻어두며 다시 스크린을 보았다. 영화는 점차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대등한 입장에서 싸우는 두 마스터의 모습을 보며 이번엔 청년이 질문을 던졌다.
“그럼 너는 어떻지?”
이 영화를, 너는 어떻게 평가하지? 재미라곤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지만 있는 힘껏 달려온 한 남자의 일생을, 너는 어떻게 보았는가. 줄곧 스크린만 보고 있던 남자는 청년의 질문에 처음으로 청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청년에게는 그 모습이 아주 느린 슬로우 모션처럼 느껴졌다.
“최고의 걸작이다.”
이보다 더 호쾌할 수는 없는 웃음을 지으며 남자는 찬사를 보냈다. 한치의 고민도 없이 돌아온 대답에 청년은 무심코 따라서 웃어버리고 말았다.
어느새 상영은 종료되어 눈앞에는 흰 스크린만 남아있었다. 남자가 앉아 있던 옆자리도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희미한 온기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점점 어두워지는 영화관에서 청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저 멀리 어디선가 모닥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잡담
믹틀란을 클리어한 지 아직 일주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을 때 쓴 첫 번째 연성입니다. 저는 이제 민망해서 다시 읽기 힘들지만, 그래도 처음 쓴 거라 제일 날것의 캐해가 들어가 있지 않나 싶네요. 프라이베터로 옮기면서 조사만 살짝 손 보고 나머지는 되도록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저도 그때의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어서요. 당시에 저는 대체 무슨 정신으로 이런 걸 쓴 걸까요?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벌써 3년이 지난 것도 구라 같고, 제가 아직 이러고 있는 것도 구라 같네요. 설마 내년에도? 그래라,,, 참고로, 죽으면 영화관에 간다고 하는 얘기는 후지모토 타츠키 작가의 <파이어펀치>라는 만화에서 나옵니다. 추천하기 뭐한 만화이긴 한데 재미는 있습니다. 아마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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