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리터 생수병의 입구를 입에 갖다댄 채로 민기가 눈동자를 굴렸다. 잠시 숨 돌릴 틈도 없이 빡빡한 스케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주방으로 직행한 참이었다.
할 말? 무슨 말. 한편으로 머리를 굴리며 민기는 기어코 생수병을 전부 비워내고는, 작은 탄성과 함께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그리고 식탁 한 편에 앉은 윤호를 향해 물었다.
“…머리 잘랐어?”
예쁘네, 하고 칭찬도 같이 덧붙였건만 꽁해진 표정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게 아닌가?
직접적으로 얘기하지 않으면 상대방의 속내를 좀처럼 알아채지 못하는 민기를 바라보던 휴대폰을 만지더니 던지듯 식탁 반대편으로 밀어냈다. 그 위로는 메신저 채팅창이 띄워져 있었는데, 그 마지막은 윤호가 아침에 잘 갔다오라는 인사로 끝나 있었다.
그건 언제나와 똑같은, 별다른 특이점도 없어 보였다. 여전히 요점을 잡지 못한 채로 민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왜?”
“이걸 보고도 모르겠어?”
“응.”
그 대답은 어떤 지체도 없이 나왔다. 짧은 한숨 끝에 윤호가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단번에 반을 비워냈다. 그러는 사이에도 민기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윤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동할 때 어디로 가는지, 뭘 하는지. 너무 바빠서 그럴 틈도 없으면 최소한 몇 시에 들어오는지, 그 정도는 알려주기로 했잖아.”
“…아.”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고 있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 목소리에 민기가 방금 전까지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기억을 뒤늦게 떠올렸다.
잠시 자신의 입장을 항변하려던 민기는 이내 입을 다물었다. 어떤 상황이었던 간에 어쨌거나 약속을 어긴 건 자신이니, 일단 굽히고 들어가는 것이 우선이라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미안. 깜빡했어.”
민기는 순순히 사과하며 테이블을 돌아 윤호의 앞에 섰다. 미안해, 하고 재차 사과했지만 이내 차갑게 자신의 손을 뿌리치는 상대의 행동에 민기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그게 다야?”
“…….”
“진짜 나한테 미안한 건 맞아? 너 그거 진심 아니잖아. 왜 자꾸 그렇게 대강 넘어가려고 해?”
자신의 태도를 매도하는 상대의 반응에 민기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야, 정윤호. 적당히 해라.”
민기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단번에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졌다. 진한 스모키 메이크업으로 강조된 눈매가 자신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음에도 윤호의 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고, 앙다문 입매에서는 먼저 굽힐 마음이 없다는 것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뻐근한 목을 좌우로 늘리며 민기는 생각했다. 물론 약속을 어긴 건 제 잘못이 맞지만 마냥 비난만 받기에는 억울한 것이, 온종일 눈코뜰새 없이 바빴으므로 애초에 그 약속을 깜빡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행적에 대해 미주알 고주알 보고할 틈따위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근본적인 원인은 과도하게 빡빡하게 짜여진 스케줄 탓이었다. 하지만 그건 전부 ‘비용 절감 차원’ 이라고 회사에서 먼저 양해를 구했기에 민기는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화장실을 갈 틈도 없어서 하루종일 수분도 제대로 섭취하지 못한 채로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고 돌아왔더니, 애인이라는 자식이 수고했다고 다독여주진 못할 망정 만나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잔소리야? 겨우 연락하는 걸 까먹었다는 이유로?
순간 부아가 치민 민기가 생각나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내가 무슨 이상한 짓 하다 왔어? 그냥 일하다 온 거잖아. 너랑 똑같이.”
“요점은 그게 아니잖아. 내가 너 일하는 거 가지고 뭐라고 했어?”
윤호가 휴대폰 화면을 손가락 끝으로 두들기자 현재 시간이 그 위로 나타났다.
“시간 보여? 새벽 한 시가 넘었어. 너, 오늘 아침에 뭐라 그랬어. 늦어도 10시 전에는 끝날 것 같다며. 그런데 자정이 지나도록 오지도 않고, 아무리 전화해도 연결도 안 되고, 그럼 기다리는 내 마음은 어떨 것 같은데.”
차분하게 시작되었던 목소리의 끝은 약하게 흔들렸다. 끈질기게 마주하던 시선을 외면하며 결국 손바닥에 제 얼굴을 묻는 윤호를 바라보던 민기가 날이 섰던 말투를 누그러뜨렸다.
“…그래, 그 연락 안 한 건 내가 잘못했다고.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했잖아. 그럼 거기서 끝내면 안 돼? 이게 이렇게 길어질 일이야?”
“이게 뭐가 길어. 난 그냥 네가 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를 못 하는 것 같으니까…”
“내가 뭘 이해를 못 하는데. 아, 진짜…!”
최근 며칠간 차곡차곡 누적되던 스트레스가 기어코 역치를 넘어섰다. 몇 번이나 반복되었던 레퍼토리에 완전히 지쳐버린 민기가 짜증스러운 손길로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내내 스프레이로 고정시켰던 머리카락들이 서로 마찰하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때 휴대폰 진동 소리가 울렸다. 짜증스러운 손길로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 민기가 그 화면 위에 떠오른 이름에 흠칫했다.
윤호는 여전히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괴롭히며 윤호와 휴대폰 화면을 번갈아보며 망설이던 민기가 걸음을 뗐다.
“네, 혀엉.”
그 소리를 끝으로 방문은 닫혔다. 제딴에는 소리를 죽이려고 한 행동이었던 듯했지만, 주변 소음이 전혀 없는 집안은 지나치게 조용했고 공간을 분리하고 있는 방문은 민기의 목소리를 온전하게 차단하지 못했다.
지금요? 아, 지금은 좀 그런데… 아뇨, 그런 건 아닌데요. 많이 급한 일이에요? 아, 벌써 와 계시는구나… 아, 네. 그럼 잠깐 나갈게요. …아하하, 아니에요. 네에.
짜증을 마구 발산하던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말투에 윤호가 헛웃음을 지었다.
이윽고 다시 닫혔던 문이 열렸다. 넓은 보폭으로 단번에 윤호의 앞까지 도달한 민기가 뭐라 말을 하려다가, 이내 우물쭈물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윤호가 아무 말 없이 일어나 거실 소파 한켠에 굴러다니던 자신의 후드 집업을 건넸다.
“갔다 와. 급해 보이던데.”
“…들렸어?”
“응.”
그렇구나… 순간 머쓱해진 민기가 옷에 팔을 꿰며 웅얼거렸다.
“… 오래 안 걸릴 거야.”
“응.”
그리고 나가려는 민기의 손목을 윤호가 붙잡았다. 그 의중을 바로 파악하지 못했던 민기가 자신을 향한 무언의 눈빛을 읽어내고는, 여전히 뚱한 얼굴로 말했다.
“사랑해.”
“나도.”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서려는 윤호를 이번에는 민기가 붙잡았다. 그게 다야? 라고 말하는 듯한, 가파르게 올라간 한쪽 눈썹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윤호가 고쳐 말했다.
“나도 사랑해.”
“어. 갔다 올게.”
담긴 의미와는 달리 둘 다 굳은 표정에 침울한 목소리였다.
그 원인이 뭐였건, 정도가 얼마나 심했건, 그 끝맺음은 반드시 ‘사랑해’ 라고 말할 것.
최근들어 부쩍 다투는 일이 많아진 둘이 머리를 맞대고 짜낸 해결책이었다. 그건 한동안 꽤 효과가 있었다.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더라도, 상대방이 그런 말을 하면 저절로 마음이 누그러지는 데다, 저절로 그런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래, 내가 뭘 어쩌겠나. 아직도 난 얘가 좋고 곁에 두지 않고선 못 살겠는데… 뭐 그런.
“…하.”
길게 한숨을 쉬면서도 윤호는 손가락을 바삐 움직였다. 딱딱하게 굳은 그의 얼굴에서는 무자비하게 전장을 학살하는 자신의 캐릭터를 보고서도 어떤 감흥도 느껴지지 않는 듯했다.
이제 그 방법도 약빨이 다 떨어졌나. 그럼 이젠 어떻게 해야 하나. 송민기는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을 만큼 자유분방한 영혼이라서, 그를 구속하려고 할 수록 반대로 손바닥에서 빠져나가는지라 무작정 옆에 잡아 둘 수도 없는데.
잠시 정신이 흐트러진 사이에 에임이 빗나갔다. 그와 동시에 헤드폰 반대편에서 온갖 상스러운 말을 쏟아졌다. 초딩, 아무리 관대하게 봐준다고 해도 고삐리도 안 될 것 같은 앳된 목소리였다.
요즘 애들은 왜 이렇게 입이 험한 거지. 부정적인 말들을 한 귀로 흘리며 윤호는 곁눈질로 현재시간을 확인했다. 금방 온다던 민기는 30분이 넘는 시간동안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형. 그놈의 형. 그렇게 형님들이 좋으면 아예 나가 살지, 왜 동갑인 나랑 산대? 아, 짜증나….
팀 승리를 최우선으로 하던 평소의 스타일과는 정반대로 윤호는 완전히 본능에 의지한 채로 플레이를 이어가고 있었다. 가파르게 올라가는 킬수만큼 헤드폰에서는 현란한 욕설들이 쏟아졌다.
난생 처음 듣는 생소한 표현에 윤호가 쯧, 하고 혀를 찼다. 대체 이런 욕들은 어디서 배우기라도 하나. 스트레스를 풀려고 시작한 게임인데 도리어 더 스트레스를 받는 기분이었다. 아, 모르겠다. 이젠 될대로 되라 싶어 게임을 던지려는데, 갑자기 시야가 회전하더니 입술에 말캉한 것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눈 앞에 나타난 민기가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만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시끄러운 게임 소리에 뭉개져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방금 뭐라고, 하고 윤호가 중얼거리자 민기가 피식 웃으며 윤호의 헤드폰을 벗겼다.
“미안해. 윤호야.”
통통한 혀 끝으로 발음된 그 말은 잔뜩 뭉개져서 정확히 글자로 옮기자면 ‘미아내, 유노야’ 에 가까웠다.
“내가 잘못해떠… 앞으론 안 그럴게.”
그리고 민기가 윤호를 와락 껴안았다. 바닥으로 떨어진 헤드폰에서 나는 소리따위는 이제 윤호의 귀에 도달하지 못했다.
여전히 영문을 모른 채로 윤호가 민기를 마주안았다.
“…갑자기 뭐야?”
“그냥… 뛰면서 자아 성찰 좀 했거든.”
그건 최근 새롭게 찾아낸 민기가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이었다. 원래는 침대 안에서 꼼짝않고 내내 자는 것이었지만, 끊임없이 자기관리가 필요한 직업을 가지고 나서부터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빈틈없이 맞닿은 가슴에서 쿵쿵거리는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그 진동을 고스란히 느끼며 윤호가 민기의 목덜미에 뺨을 부빗거렸다. 도무지 해소되지 않을 것 같았던 꽁한 마음이 단번에 사르르 녹아내렸다.
아, 짜증나. 나 왜 이렇게 쉬워졌지…. 그런 생각을 하며 윤호는 더 강하게 그를 끌어안았고, 그런 행동에 민기가 몸을 꼼지락댔다.
“야, 이제 그만…”
“으응,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나 지금 땀나서 냄새 나는데…”
아무리 땀으로 범벅되었다고 한들 다른 새끼 냄새를 묻혀오는 것보다는 낫지. 그렇게 표현하면 너무 집착하는 것 같나…. 복잡한 심경을 완벽하게 숨긴 채로 윤호가 살짝 달아오른 얼굴을 마주했다.
“나 너랑 이런 걸로 싸우기 싫어.”
“나도 그래.”
“시간 아깝잖아. 가뜩이나 요즘 자주 못 보는데….”
반짝반짝 빛나는 송민기의 20대를 독점해도 모자를 판에, 그 귀중한 시간의 대부분을 회사에서 썩어야 한다니. 그치만 일을 하지 않으면 우리 민기 예쁜 옷도 못 사주는데….
딜레마에 갖힌 채로 윤호가 민기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으며 끙, 하는 소리를 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로 민기가 윤호의 얼굴을 잡아 올리며 시선을 맞췄다.
“다음에 내가 또 잘못하면 꼭 오늘처럼 화내야 돼.”
“화난 거 아니라니까….”
송민기를 상대로 정윤호가 진심으로 화낼 일은 없지만, 아리송한 말에 윤호가 되물었다.
“근데 왜 그래야 되는데?”
“방금 달리면서 하나 깨달은 게 있거든.”
“뭘?”
“나 원래 잘 까먹잖아. 그러니까 그냥 그것만 생각하기로 했어. 정윤호가 화를 내면 무조건 내가 잘못한 거다, 라고.”
“…응? 그게 대체 무슨…”
뭐라 말하려는 윤호의 입을 민기가 자신의 것을 덮는 것으로 저지했다. 짧은 키스 끝에 민기가 선언하듯 말했다.
“이게 맞아. 그러니까 오늘 일은 여기서 그만. 오케?”
윤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같이 씻을래?”
절대 거절할 리 없는 달콤한 제안에 윤호가 함박웃음을 띈 채로 민기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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