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_morrie
2025-03-09 14:45:03
4870文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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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빌리

이건... 마른 하늘의 염병

“라이터.”

어떤 가능성을 생각해보기로 했다. 이를테면 이 앞에 있는 게 잘 조작된 환각이 아닌가 하는 것에 대한 가능성을 말이다.

외환선은 기온이 높은 황야로, 열기로 인한 신기루가 드물게 발생한다. 한낮의 버려진 공터에, 인간이나 식물, 심지어 에테르 공동에게조차 버려진 땅을 지날 때면 분명 거기에 없어야 하는 기이한 자연 현상이 현실 위를 일렁인다. 물 웅덩이, 높은 나무, 혹은 자그마한 에테르 공동이 보일 때도 있는데, 그런 것들은 눈 한 번 깜박하고 나면 어디론가 사라져 있다. 그런데, 사라지기 전까지는 실재하는 것처럼 움직여 눈을 속여댄다.

“라이터?”

물론 여기는 황야가 아니므로 신기루가 발생할 확률은 낮다. 신기루가 아니라면 유력한 것은 바로 꿈이다. 지금 자신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가능성이 대두되었다. 생각보다 꿈을 꾸는 날이 많다. 꿈이라는 건 무의식에 묻어둔 기억을 뇌가 이리저리 원하는 대로 만져보는 것이기 때문에 현실의 물리 법칙이나 인과를 무시한 현상을 체험하게된다는 얘기도 있고, 겪어보지 못한 미래의 사건을 보여주는 데자뷰 같은 현상도 이름이 붙을 정도로 만연하게 퍼져 있다. 그리고 꿈을 꾸는 사람의 의식 수준도 아주 다양해서 꿈인줄은 전혀 모르는 것부터 현실과 동일한 정도로 오감을 생생하게 느끼는, 이른바 자각몽까지 다양한 편이다.

이런저런 근거를 확증편향을 무시하고 수집한 결과 라이터는 자신이 자각몽을 꾸고 있는 게 틀림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 이건 분명히 꿈이다!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날 리가 없지 않은가. 결론을 내리고 나니 이제 다른 문제가 생겨났다.

자, 그렇다면 어떻게 이 꿈에서 깨어나면 좋은 것일까?

“라이터!”

문득 고개를 쳐들었다. 어깨를 붙잡은 금속 관절의 손에 정신이 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꿈에서 깨어날 때처럼 그 아득했던 정신에 찬물이 확 끼얹어지는 느낌이 들진 않았다. 아직도 꿈결처럼 느껴졌다. 무슨 일이 있는지를 물어보며 자신의 상태를 살피는 노란색 시각 모듈이 부산하게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것을 눈으로 좇다가, 드디어 아주 모질고 단호한 결심을 세웠다.

“선배, 지금 당장 날 한 대만 때려줘.”

노란 빛이 덜컥 멈추더니 상태가 심각하다는 사실을 인지했는지 걱정스러워하는 모양으로 바뀌었다. 라이터에게는 그게 꼭 꿈에서 깨어나면 안된다는 것처럼 보였고 속으로 사과하고 변명했다. 나쁜 일을 시키는 건 알고 있지만 이게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다, 라고.

“대체 무슨 일이야? 지금?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긴 한데...“

그 말을 듣고 역시 그것만이 해답이라고 굳게 믿기 시작한 라이터가 다시 말했다. 마치 혈혈단신으로 적 무리에 뛰어들기 전처럼 비장한 태도였다.

”아무것도 묻지 말고 강하게 때려줘. 반드시 기절할 정도여야 해.“

”내, 내 주먹은 아프다고?“

”괜찮아, 정말. 선배한테는 어떤 책임도 묻지 않을 거야. 얼른.“

하고 라이터는 눈을 감았다. 그럼에도 고민을 하고 있는지 귀에 들릴 정도로 큰 모터 소리가 나다가, ”그게 부탁이라면, 알았어.“하는 말이 귀에 들려오더니, 곧이어 아주 끔찍한 고통이 그를 덮쳤다.

당도한 일격은, 과연 경고한 대로 어마어마한 위력이었다. 마치 이 세상에서 쫓겨나 어디 다른 세계로 날아가는 것 같은 고통 속에서, 라이터는 안도했다. 그에게는 못할 짓을 했지만 이 꿈에서 나가면 괜찮을 것이다. 모든 일이 없던 일이 될 테니까.

멀어져가는 세상의 소리 속에서 문득, ”...혹시 이거, 결투 신청이었던 건 아니겠지...?“ 라는 말을 들은 것도 같았다.





”...헉!“

라이터가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낯익은 진갈색 나무 천장을 보며 숨을 가라앉혔다. 드디어 꿈에서 깨어난 게 분명했다. 정말 아름답지만 슬픈 꿈을 꾸었다. 그 꿈은 정말로...

라이터가 방금 꾼 꿈에 대해 생각하려고 했을 때 불쑥 왼편에서 한 쌍의 노란 빛이 끼어들었다.

”오, 일어났네, 라이터!“

이제는 정면이 아니라 위에서 굽어보고 있는 그는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라이터의 얼빠진 말에 대답한 건 전혀 엉뚱한 목소리였다.

”대체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거에요?!“

새된 소리가 좁은 방 안을 천둥처럼 울렸다. 덕분에 막 일어나 취약한 상태였던 고막이 고통을 호소했지만, 그것이 입으로 나오기도 전에 멧돼지와 같은 쿵쾅거리는 발걸음이 라이터를 향해 폭풍처럼 몰아닥쳐왔다.

”관리인 아가씨?“

”당신, 빌리에게 기절할 정도로 힘껏 때려달라고 했다면서요?“

루시는 그녀가 키우는 멧돼지 삼형제가 심부름을 하던 중에 한눈을 팔다가 물건을 잃어버렸을 때보다 더욱 어처구니 없는 일을 맞닥뜨린 것처럼 거칠게 씨근거리고 있었다.

”관리인 아가씨의 성격은 꿈에서도 여전하군.“

”꿈? 얼간이 같은 소리 좀 그만 해요! 여긴 현실이에요. 그리고,“

루시가 가시 돋친 방망이를 라이터의 코앞까지 뻗어, 마치 그게 그녀의 거대한 검지라도 되는 것처럼 삿대질하듯 흔들어댔다.

”당신이 빌리에게 고백한 다음에 바로 폭력을 휘두르라고 종용해 기절한지 벌써 이틀이 지났다고요! 알아요? 당신이 일하기로 되어 있던 일정에 빌리가 대타를 뛰어야 했어요!“

라이터는 루시를 이해했다. 칼리돈의 자손 내에서 라이터의 공식적인 지위는 무패의 챔피언이므로 비싼 값으로 고용된 처지였는데, 그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진 보스가 있어 곧잘 잡역에 동원되곤 했다. 물론 챔피언이라고 싸움만 잘 하는 게 아니라, 체력은 물론이고 타고난 운동 센스가 좋아 몸으로 하는 대부분의 노동에는 일가견이 있어 어떤 노동에도 잘 적응해 훌륭한 결과를 내는 편이었다. 그러니 고용주인 루시의 입장에서는 라이터가 일을 못하게 되면 비즈니스에 차질이 생긴다. 화를 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도 산업재해보험-물론 전투원에게 그런 좋은 것을 들어두지는 않았겠지만- 청구 사유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동성의 기계인 선배에게 고백을 하고 본인을 때려달라고 졸라서 이틀씩이나 기절해 있었다면...

동성의 기계인 선배에게 고백을 하고...

고백을 하고...

고백?

라이터는 무언가 차가운 물에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되어 눈앞에서 흔들리는 가시 돋친 방망이를 멍하니 보았다. 갑자기 그 가시가 날카로워 보였다. 왠지 잠에서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났다고 자각했음에도 그가 놓인 현실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때문에 라이터는 빠르게 달려나가려는 현실 인식의 꼬리를 붙잡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내가 선배에게 고백을 했다고?”

그것은 누군가에게 답을 요구하는 질문이라기보다는 스스로를 향해 던지는, 이른바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또 여긴 어디인가?’같은 독백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것이 소리가 되어 나왔기 때문에 답이 돌아왔다.

“그래, 라이터. 내가 나도 널 좋아한다고 대답했잖아. 혹시 잊어버리거나 마음이 바뀐 건 아니지? 그 사이에 내가 싫어졌다거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선배. 내가 선배를 싫어하게 될 리 없잖아. ...그런데 부탁이 있는데 말이야.”

“응?”

라이터는 심호흡을 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말했다.

“한 번만 더 날 때려줄 수 있을까?”

꿈에서 덜 깬 것이라는 아집에 사로잡혀 몹시 단정적인 투였다. 빌리가 곤란한 듯 더듬거렸다.

“그러니까 라이터...”

”정말 아무 말 할 필요 없어. 선배한테 책임을 지라고도 하지 않을 거야. 정말로...“

“그, 정말로 어려운 일은 아니야! 아니지만...!”

빌리는 주먹을 쥐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건 결코 라이터의 소원이 이상해서 혹은 그의 의지를 의심하고 있어서가 아니라, 루시를 보고 있어서였다. 빌리는 라이터와 단 하나뿐인 애인 사이가 되었으므로 가능하면 부탁을 들어줘야 한다는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학습한 통념을 있는 그대로 수행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무시무시한 얼굴을 보고 있자니 라이터의 부탁을 곧이곧대로 들어주었다간 큰일이 날 것 같다는 기계적인 예감과 싸우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빌리는 라이터의 소원을 들어주기 전에 한번 더 물었다. 그것이 시간을 버는 행동인지 아니면 정말로 기계적인 예감을 거스르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하는 행동인지는 빌리 본인도 알 수가 없었다.

“우리, 애인인 거지?”

“그래, 선배. 이제 나랑 선배는 애인 사이야. 그러니까...”

무심코 빌리의 말을 복창한 그때 라이터가 눈을 한 번 깜박였다. 그런데 갑자기 눈을 깜박이기 전과 눈을 깜박인 다음이 아주 다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치 세상이 온통 따스한 빛으로 가득 차고, 어쩐지 닫힌 방 안에 훈훈한 미풍이 불어오고 또 나무 천장의 물결 무늬가 아름다운 하트 무늬를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이상 현상을 일으킨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라이터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선배와 내가...” 그리고 한층 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애인이라고?”

그 중얼거림은 작았다. 평소의 시끌벅적한 외환선이었다면 라이터 자신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데시벨이었지만, 이번 것은 모두의 귀에 아주 잘 들렸는데, 그것은 빌리가 라이터의 얘기에 열렬히 고개를 끄덕일 준비를 하고 있어서였기도 했지만, 다른 한 사람인 루시가 팔짱을 끼고 라이터가 어디까지 멍청해질 수 있는지를 눈에 담아두기 위해 그녀의 인내심을 최대로 발휘하고 있어서였기도 했다.

온몸으로 완벽하게 yes를 표현하고 있는 빌리를 마주본 라이터의 얼굴이, 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쁜 일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을 때, 루시는 자신의 임계점을 넘어서는 바보 같은 두 사람의 행각에 단 1초도 더 어울려주기 싫다는 듯 고함을 질렀다.

“라이터, 당장 일어나요! 애인끼리 지지고 볶을 시간은 일이 끝나고 나서 하란 말이에요! 고작 한 대 맞고 기절한 것으로 엄살을 피울 생각을 하지 말고, 일어나서 일을 하란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