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선에도 아주 드물게 비가 오는 날이 있다. 1년에 평균 하루도 되지 않는 그런 날에는, 하늘이 갈라진 것처럼 물줄기가 대지를 때려댔다. 그러면 모래들이 갑자기 저들도 흙이었다고 피력하듯이 일제히 질척하게 배를 까뒤집어 젖은 땅 냄새를 풍기며 바이크의 바퀴와 행인의 발을 구분없이 붙잡아댔다. 맡아보지 못한 새로운 냄새와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방울로 인해 짐승들과 가축들은 기뻐하기도 하지만 인간은 그런 원시적인 요소를 온전히 즐길 수만은 없는 노릇인 게, 도시에 비해 열악한 인프라와 그 희소성으로 인해 배수 시설이라곤 자연적인 대지의 경사의 추세와 선인장 뿌리의 저수를 기대해야 하는 수준이었으므로 비가 오는 날이면 블레이즈 우드 마을의 주민 모두가 상층부로 올라와 시간을 보내곤 했다.
칼리돈의 자손은, 그전까지는 다른 곳을 쓰고 있었으나 불지옥 라이딩 이후 로프꾼의 도움을 받아 재건한 치즈토피아에 머무르는 것으로 암묵적인 합의를 보았고 비가 내리자마자 하나 둘 자리를 잡고 앉은 채였다.
개중에 가장 안쪽 자리에 앉은 파이퍼는 바깥에 세워둔 그녀의 애차 크라운을 보며 엊그제 세차를 했는데 다시 세차를 해야 한다고 궁시렁거렸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기쁜 빛이 돌고 있었다. 그건 파이퍼가 애차를 위해서 하는 일 그 자체를 즐기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빅대디에게 새로 세차를 할 이유가 생긴 것이 제법 만족스럽다는 투로 세차가 귀찮은 일이라는 것을 벌써 몇 번째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파이퍼의 맞은편에 앉은 빅대디는 신문을 보며 그녀의 얘기에 동의를 표했다. 그는 그 이야기를 성의 있게 들어주고 있었지만, 그것은 한쪽 귀 뿐이었다. 다른 한쪽 귀로는 치즈토피아에 흐르는 피아노의 선율을 듣고 있었다. 트럭이나 바이크의 배기음을 비롯한 떠들썩한 일상의 소음이 빗방울에 묻혔을 때나 집중해서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는 어쨌든 세 가지 일을 한번에 하고 있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집중하고 있는 것은 선율을 느끼는 것이었으므로 벌써 몇 번째 반복된 파이퍼의 얘기에 또다시 동의를 표하며 한쪽 귀를 기분 좋게 쫑긋거리고 있었다. 버니스는 모두의 자리에 춤을 추듯 와서 니트로 퓨엘 잔을 채워주고 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녀가 사랑하는 불과 엔진은 침묵하지만, 그것조차도 하나의 이벤트로 여기고 있는데다 낮부터 모두가 니트로 퓨엘을 즐기는 일은 드물었기 때문에 선율의 위에 이따금 쉐킷과 믹서가 흥얼거리는 소리를 화음으로 얹어주고 있었다.
치즈토피아 한가운데에 자리한 그랜드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고 있는 것은 카이사르였다. 벌써 들여온 지 두어 달은 지난 그것은 칠 사람이 없어 방치되고 있어 조율이 시급한 상태였지만, 그런 것은 어쨌든 손에서 멜로디가 흐르는 게 중요한 카이사르에게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비에 맞으며 치즈토피아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만 해도 누군가에게 비가 오는 날은 연애 소설을 읽기 좋은 날이라는 귀띔을 받았기 때문에 설레는 마음, 반짝이는 눈으로 품에 있던 책을 꺼내들었으나 피아노를 본 순간 문득 달려가 앉아버렸던 것이다. 공용 공간에 전시한, 마을에서 가장 크고 좋은 피아노를 아무 방해 없이 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다는 듯이.
그렇게 벌써 몇 시간째 카이사르가 자아내는 선율이 치즈토피아를 간지럽히고 있을 때 루시는 마을의 조망이 가장 넓게 보이는 창가에 앉아 귀를 열어두고 있었다. 피아노 선율의 전진을 따라가며 조금 부족하지만 들어줄 만 하다는 루시 나름의 찬사를 보내며, 그래도 블레이즈 우드 마을과 칼리돈의 자손을 책임지는 실무자라는 자부심으로 테이블에 트레이 대신 공책을 펴두고 있었는데, 거기엔 숫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이번 호우로 인한 피해액을 산정하는 중이었는데, 그녀는 이 마을의 누구도 이런 데에 신경쓰지 않기 때문에 그녀가 해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게 그녀를 기분 상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반대로 도전 의식을 고취시켰다. 피해를 성공적으로 복구해내는 게 그녀의 역량을 증명하는 일로 느껴져, 발밑의 멧돼지들이 노는 것도 잠시 내버려둔 채 마을에 발생하는 피해의 어느 하나 놓치지 않기 위해 수시로 창문 바깥과 노트를 눈을 부릅 뜨고 쳐다보며 펜을 굴리고 있었다.
외벽에 한 번 걸러져 잔잔하게 들리는 빗소리와 피아노 선율, 쉐킷과 믹서의 규칙적인 화음이 어우러져 도시의 카페와 비슷한 분위기를 띤 치즈토피아에서 유일하게 내적 평온을 지키지 못하고 있는 것은 라이터였다. 그의 입에서 심란할 때 물고 있기를 즐기는 막대 사탕이 위아래로 흔들리고 있었는데, 입이 닿는 부분은 이미 잇자국이 수도 없이 나 있었다. 뚫린 창을 통해 들어오는 비에 젖은 팔 밑과 테이블에는 이미 몇 개의 잔뜩 씹어 구부러진 막대가 흩어져 있었으며 또 하나가 추가될 것이었다. 그런 더러운 주변에는 일절 신경쓰지 않은 채 그는 지평선 저 끝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어쨌든 라이터는 이따금 공책이나 카이사르에게 시선을 돌리기도 하는 루시와 다르게 한시도 눈을 떼지 않고 바깥만을 내다보고 있었으므로, 그것을 가장 먼저 발견할 수 있었다. 지평선 저편의 까만 점을. 그것을 본 그의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은 한순간에 무슨 말을 하는 게 좋을지,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그런 기대감과 고민으로 뒤섞인 표정으로 변했다.
표정이 변하는 소리가 나기라도 한 듯, 마침 고개를 든 루시도 그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오늘 처음으로 라이터를 흘끗 곁눈질했다.
“오네요.”
루시가 누군가 들으라는 듯 운을 띄웠다. 그래서 그것은 모두에게 들렸다.
“오, 오늘의 천군만마가 오는구먼.”
가장 먼저 파이퍼가 말을 받았다. 창문을 등지고 있다가 돌아앉아 다리를 꼬았다.
“어머, 생각보다 빠른데⭐️ 지난번에 듬뿍 넣은 연료가 힘을 발휘했나 보네?”
모두에게 따라주고 남은 재료로 벌써 다섯 번째 니트로 퓨엘을 흔들던 버니스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하이힐 소리를 내며 리드미컬하게 걸어와 라이터의 어깨에 몸을 기대더니 라이터의 잔에 그것을 전부 부었다. 화끈한 빨간색의 투명한 액체 속에서 탄산이 톡톡 터졌다.
“드디어 오는구나!”
카이사르가 뒤늦게 루시의 뒤에 서서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녀의 시선이 잠시 루시의 노트를 향했는데, 몇 줄 훑어보지도 않고 곧 머리가 아픈 듯 찡그리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빅대디까지 천천히 걸어왔을 때쯤 지평선 저편의 까만 점은 점차 커져 이제는 제법 뭐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꼴을 갖추고 있었다.
그건 트럭이었다. 하늘을 온통 뒤덮어 어둑하게 만드는 구름과 눈을 어지럽히는 굵은 빗방울 탓에 어떤 색인지도 구분할 수 없었지만, 정면에서 보이는 헤드라이트의 빛과 도로변의 크기를 비교해 눈에 익은 모양으로 추측하기도 했고, 오늘 이 시간에 여기로 올 만한 게 그 트럭뿐인 것도 있었다.
고작 트럭이라는 것뿐이었지만, 라이터는 트럭을 몰고 오는 게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으므로 보이지 않는 창문 안쪽의 풍경을 그릴 수 있었다. 넓은 운전석 중 한 자리에는 유치한 가면을 쓴 히어로의 1/7 스케일 피규어가 안전 벨트를 두르고 있을 테고, 그 앞에는 운전석에서 손이 닿는 거리에서 덜컹거림에 맞춰 춤을 추는 두 자루의 권총과 엉망인 음정으로 히어로의 주제가를 흥얼거리고 있을, 그 사람을 눈에 보지 않아도 그려낼 수 있었다.
“여! 나 왔어!”
치즈토피아의 허술한 문이 활짝 열렸다. 트럭이 주차되는 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이 그 인사에 화답하려고 하던 그때, 라이터가 처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가게를 성큼성큼 가로질렀다. 그것을 본 순간 빅대디는 보던 신문을 접었고 루시가 쥐고 있던 펜과 표정을 찌그러뜨리며 외면했고, 카이사르는 눈을 반짝였으며 파이퍼는 쉐킷과 믹서를 절묘하게 흔들어 휘파람을 불려고 하는 버니스의 손을 막고 ‘젊은이들이란....’하고 중얼거렸다.
어쨌든 그런 뒷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지, 라이터는 마지막쯤에는 거의 달리고 있었고,
“...선배.”
“우, 우왓! 라이터?”
빌리에게 돌진해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 충격으로 몇 발 밀려난 빌리의 노란 시각 모듈이 동그랗게 변했다.
빗속을 뚫고 트럭을 몰고 온 운전수는 당황해 이제 어떻게 하냐는 것 같이 황망하게 고개를 돌리다 마음대로 하라는 것처럼 거칠게 손짓하는 루시를 보고서야 조심스럽게 라이터의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빌리의 등을 안은 라이터의 손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난 게 정확히 3주 전이었다. 며칠에 한번 꼴로 만나던 라이터에게는 그 시간이 너무나 길었기 때문에 체면을 차릴 여유 같은 게 없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을 때, 도시에서 물건을 싣고 오는 계약일이 오늘인데 공교롭게도 지금 도시에 나가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루시가 빌리에게 도움을 청하겠다고 교활한 토끼굴에 연락했을 때, 그리고 빌리가 정말로 도우러 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몸이 달아 있었던 것이다.
“선배, 선배... 기다리고 있었어...”
빌리가 온전히 알고 있을지 모르나, 라이터의 목소리는 연인을 향한 애절함으로 가득 차 있어 아주 야릇하고 노골적이었으며, 짧은 자켓 밑, 슬슬 물기가 떨어져나간 등 이곳저곳을 어루만지는 손길도 그를 따르듯 아주, 묘해지고 있었다.
그들이 이런 연애 행각을 벌이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부분은 원래 하던 일로 돌아갔지만, 루시만은 달랐다. 그녀는 이대로 두면 저 이상한 커플이 치즈토피아 현관에서 일을 치를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침부터 창가에서 떨어질 생각을 하질 않는 라이터를 보고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차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듯 경악과 체념이 섞인 얼굴을 한 루시가 한 손으로는 창 밖 어딘가를 연신 힘있게 가리켰고 다른 손으로는 목을 긋는 시늉을 해보였다. ‘지금 바로 그 남자를 데리고 나가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라는 루시의 신호를 곧이곧대로 알아듣지는 못했으나, 그의 대장이 험악한 분위기로 말할 때와 비슷하다는 것을 느낀 빌리는 그게 무슨 뜻인지를 되묻는 대신 재빨리 말을 꺼냈다. 루시와 니콜의 사이가 좋아지면서 루시의 의도가 고스란히 니콜에게 전달되는 일이 잦았기 때문에 (경험으로) 생긴 눈치였다.
“그, 라이터. 니콜 대장이 그러는데, 사무소 소파가 젖으면 알아서 하랬거든.”
그 말을 들은 라이터가 멈췄다. 그래서? 라고 되묻지는 않았지만 무슨 얘기를 하는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 같아 빌리가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조금 확신이 없이 작은 목소리였다.
“내 생각엔 그게... 아마 오늘은 돌아오지 말라는 거 같은데...“
기분 탓인지, 시렌도 아닌데 귀가 쫑긋거리는 게 눈에 보이는 것만 같다고 생각하면서, 빌리가 라이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혹시... 잘 곳 있어?”
드디어 라이터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표정은, 마치 비를 맞고 핀 선인장의 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그 뒤에서, 이번엔 루시가 일어나 발을 차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발로 차서 내보내기 전에 당장 나가세요.’라는 마음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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