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S/레아시스
2025-01-18 22:44:58
13283文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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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테스] Time, Place, Occasion

데이테스. 본편 기반의 IF세계선. LB7에서 생존한 데이비트와 테스카틀리포카가 처음으로 90++ 주회에 동원된 뒤의 이야기. 2023년 발렌타인 이벤트의 데이테스가 있는 후일담입니다. (여교황 요한나가 실장된 이벤트입니다)
FGO 5주년 기념 PV의 정장 데이비트×2024년 11월 AGF 테스카틀리포카를 보고 싶다는 욕망 하나로 쓴 이야기입니다. 미스 크레인과 마슈, 여자 마스터가 조금 등장합니다.
데이테스 원드로원라이 @Dt_od_ow 참가작입니다. 사용한 주제는 2024년 10월 26일자 제목이었던 'えっちベルト'.
오늘은 최종회차인데...무서울 정도로 지각해서 저도 제 지각 능력이 두렵네요 이제...

칼데아에서 자체적으로 관측 중인 시간 기준으로 2월 중순에 일어난 극소 특이점 발생 사건은 테스카틀리포카 가라사대 ‘별 싸움도 없이 싱겁게’ 마무리되었다. 역시 저 녀석 성격이라면 얼마 전에 소환된 신참자 영령의 정신건강이 심각하게 손상된 건 신경도 안 쓸 것 같았다고, 지구를 파괴할 수밖에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큰일을 벌였으나 제때 죽지 못해서 노움 칼데아의 포로가 된, 엘리트 현장파 연구직에서 급료를 엄청나게 깎이고 목에는 소장과 소장을 제외한 스태프 한 사람의 허락 없이 해제를 시도할 경우 일반적인 마술사라면 치명상을 입는 장치가 된 초커를 찬 노움 칼데아의 잡일담당으로 추락한 데이비트 젬 보이드는 생각했다.
인류 최후의 마스터와 동행한, 혹은 특이점에서 떠돌던 서번트들이 성배를 회수하고 특이점에서 철수하려 했을 때,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특이점의 마력자원을 잔뜩 꿍쳐둔 칼데아의 서번트 중 하나가 좀 더 여기 머무르며 놀고 싶다고 투정을 부리는 돌발상황이 발생했을 때 데이비트는 꽤 흥미로운 기분으로 특이점의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다. 데이비트는 노움 칼데아는 자신이 몸담았던 시기의 칼데아와 달리 간단한 폭력으로 해결 가능한 안건도 되도록 빙 돌아가는 대화로 해결하는 족속들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내심 이들이 이런 것도 대화로 해결할까, 가능하면 옆에서 그 교섭 방식을 참관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관제실 한켠에서 연산작업을 하는 짬짬이 그치들이 처한 상황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보더에 잠시 돌아온 인류 최후의 마스터와 마슈 키리에라이트는 영기 그래프 옆에 앉아서 태블릿 PC를 보며 이런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어우, 또 90++이야.”
“또요? 그래서 이번엔 어느 분이시죠?”
“하늘, 신성, 질서 선, 문캔서.”
“가네샤 씨가? 신작 게임을 제때 드릴 걸 그랬어요
“사실 가네샤가 문제가 아니야. 가네샤는 스카디 님 부르면 뭐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가는 길에 초거대 에너미가 있거든

그런 대화를 하면서 창고에서 꺼내온 마술예장과 태블릿에 적어둔 메모를 번갈아 보던 인류 최후의 마스터는, 레이시프트 도중 발생한 데이터들을 정리하면서 은밀하게 특이점에서 돌아온 이들을 관찰하던 데이비트를 보더니 손바닥을 짝 마주치며 이렇게 말했다.

“초거대 특공!”
……?”
“데이비트 선배! 서번트 좀 빌려주라! 아니, 이게 아니지! 그냥 선배도 특이점에 가자!”

사태의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데이비트는 그대로 인류 최후의 마스터에게 손목을 잡힌 채 관제실로 끌려갔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르돌프 소장과 마침 곁에 있던 엘론에게 단발적인 레이시프트와 교전을 허가하는 확인서류를 받고 그대로 레이시프트 준비를 시작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오퍼레이터 자리를 차지한 마슈는 ‘주회하는 법은 선배가 알려주실 거예요. 테스카틀리포카 신에게는 데이비트 씨가 지시 부탁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대강의 상황은 설명을 들으면서 파악했지만 영 납득이 가지 않았던 데이비트는 굳이 물어보았다.

“브리핑 내용은 제대로 숙지했어. 나와 테스카틀리포카가 ‘1라운드’를 처리하면 되는 거겠지? 그런데 그, 나는 너희들이 되도록 싸움을 피하고 싶어한다고 느꼈다만.”
“제대로 보셨습니다. 저도 선배도 싸우지 않고 해결하는 게 최고라고 생각해요. 뭐, 그래도그게 좋기는 하지만 세상에는 간단한 주먹질로 해결되는 일도 있는 법이니까요?”
“어이 데이비트! 진짜냐! 미션 다 끝났는데 겁도 없이 고용주한테 대고 싸움을 건 서번트가 있다는 게!”

테스카틀리포카 본인이 관제실 문을 열고 난입했으므로, 데이비트의 ‘키리에라이트, 꽤 호전적으로 성장했구나. 테스카틀리포카의 눈에 띄면 곤란한데’ 라는 개인적인 감상은 마슈 본인이 알게 되는 일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무튼 오랜만에 테스카틀리포카를 데리고 레이시프트를 하면서 내심 설레어 하던 데이비트를 기다리던 것은 노움 칼데아의 서번트가 모아둔 마력자원이 전부 바닥날 때까지 석상 속에 숨어서 광석에 부딪혀 웅웅 울리는 목소리로 신음하는 서번트를 끝없이 때리고, 때리고, 때려서 마력자원을 소모시키고 부산물로 떨어져나온 마력자원을 회수하는 반복작업의 연속이었다.
여름용인지 가을용인지 알 수 없는 옷차림을 한 북구 출신의 여신은 오필리아의 회고에 비해 밝고 명랑하게 행동했으나 어딘가 망가진 것 같은,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라는 격언 같은 느낌으로 끝없이 보구를 개방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반복출격 사흘째가 되었을 때 ‘질렸다. 자동반응 모드로 이행할 테니까 지성이 필요한 작업이 필요하면 불러’ 라고 선언하고 의식을 오프했다. 지성체보다 시스템에 가까운 존재방식이 이럴 때는 한없이 부러웠다.
오토 모드가 된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지시를 내리던 데이비트가 뇌가 녹는 것 같은 감각을 잊으려 노력하며 인류 최후의 마스터를 흘깃 보자 인류 최후의 마스터는 왠지 묘렌지 같은 느낌이 드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포기하면 편해.”

데이비트가 지금까지 자신이 해온 일들이 지구를 파괴할 뻔한 자에게 주어지는 페널티치고는 가볍게 느껴졌던 이유를 깨달은 순간이었다.
‘마력자원 회수’ 는 그로부터 2주 정도 이어졌다. 가네샤가 울면서 ‘돌아가면 되잖아!’ 라고 말했을 때 데이비트는 성취감이라 칭하기에는 지나치게 안도감에 가까운 감정에 젖어 멍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인류 최후의 마스터나 북구의 여신이나 환상의 여자 교황이 ‘퇴근이다!!’ 라고 울부짖을 때도 어쩌면 자기 뇌가 몇 번 녹았다가 다시 만들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흐릿한 눈빛으로 전방을 보고 있는 테스카틀리포카를 발견했다.
데이비트는 잠에서 깨어난 것 같은 기분으로 테스카틀리포카의 어깨를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테스카틀리포카, 시련이 끝난 모양이야. 집에 가자.”

천천히 의식과 총명함을 되찾고 자신을 보는 테스카틀리포카의 눈빛이 기묘하게 영롱하게 느껴져서 데이비트는 몇 번 눈을 깜빡였다. 덕분에 데이비트의 첫 ‘이벤트 주회’ 작업은 엔딩만은 나름대로 아름다운 형태로 매듭지어지게 되었다.


*


“그럼 이번 미션은 이렇게 정식으로 종료다. 다들 정말 고생 많았어. 현지조사원들은 다들 좀 쉬고, 0018시에 복장 갖추고 식당에 집합하는 걸로.”
“네에.”
“드레스코드는 있나요?”
“노출이 지나친 복장은 삼갈 것? 이번에는 최고위 성직자가 주빈이잖아.”
“어그렇게까지 신경 써 줄 필요는 없는데. 나도 노움 칼데아에 개성적인 분이 많다는 건 이미 알고 있고.”
“요한나는 ‘진짜’ 칼데아 평균 노출도를 아직 몰라서 그래

아주 넓지는 않은 관제실에 모인 이번 레이시프트 멤버들이 익숙하게 이런 대화를 하는 동안 데이비트는 홀로 조용히 상황설명을 요구할 사람을 찾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 데이비트가 물어보기 전에 설명을 시작하는 성격인 데이비트의 서번트는 완전히 영민함을 되찾은 북구의 여신과 뭔가 마술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데이비트는 드물게 난처해졌다. 그 마음을 읽어낸 것처럼 옆에서 누군가가 팔을 붙잡았다.

“데이비트 씨.”
“키리에라이트.”

마슈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익숙하게 설명했다.

“인리소각 안건 때부터 생긴 전통인데요. 미션이 끝나면 미션에 참여한 분들이나 그 때 실체화 중이던 서번트 분들을 모아서 조촐하게 미션 종료 기념 파티를 하고 있어요. 대단한 건 아니고, 그 때 남는 식량을 사용하고 마력 리소스로 구색만 갖춘 정도지만
“신경 써 줘서 고맙다. 확실히 내가 예전에 입던 정장은 남극에서 얼음덩어리가 돼 있겠지.”
“네그렇겠죠.”

마슈는 조금 곤란한 듯 웃었다. 최근의 마슈는 데이비트 특유의 중간과정을 잘라먹고 결론만 도출하는 화법에 거의 당황하지 않았다. 저게 인생의 경험치라는 것이겠지. 데이비트는 전에 비해 편안한 기분으로 마슈가 단말기에 전송해준 파일을 실행했다. 고양이나 학을 팬시한 느낌으로 디포르메한 캐릭터와 칼데아 마크가 여기저기 그려진 의상 카탈로그였다. 여성복 섹션의 분량이 훨씬 많았지만 남성복 섹션도 나름대로 충실하게 갖춰져 있었다.

“보더 B구획의 12호실에 가서 하베트롯 씨나 미스 크레인 중 자리에 계신 분께 의뢰하시면 돼요. 여기서 원하는 디자인을 골라도 되고 오리지널 디자인을 주문해도 돼요. 특별한 일이 없으면 2시간 안에는 완성해주실 거예요. 많이 급하면 1시간 안에 마감할 수도 있지만, 그럼 다음날 상태가 엉망이 되니까 급한 주문을 하게 된다면 되도록 카탈로그에 있는 디자인 내의 것으로 부탁한다고 하셨어요.”
“보더에 의상을 만드는 영령이 상주 중이라는 얘길 들었을 때는 솔직히 많이 놀랐어.”
“하하,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데이비트가 한창 일하던 시기의 칼데아는 좀 더 사무적이고 건조한 조직이었다. 간혹 제일 큰 홀에 구성원들을 모아서 파티를 할 때도 있었고 그런 행사에 얼굴을 내밀기 위한 의상도 가지고는 있었다. 그래도 칼데아는 사교 파티를 자주 열 정도로 시간이 남아도는 조직이 아니었으므로, 그런 행사를 하는 건 연말연시나 삼분의 일 이상의 스태프가 기념하고 싶어하는 명절 정도가 다였다. 행사용으로 따로 만든 구획이 아니라 매일 드나드는 식당에서 적당히 장만한 음식을 먹는 파티를 하는 조직도, 전투도 아니고 의상을 만드는 것이 특기인 영령을 소환해서 유지하는 데 리소스를 사용하는 조직도 아니었다. 데이비트는 이 사소한 파티의 존재의의를 빠르게 이해했고 받아들였다. 마음을 조금이나마 평화롭게 해주는 파티라도 있어야 모두가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조직. 생존을 위한 평화의 마이너카피.
데이비트는 카탈로그를 대강 넘겨보면서 감사의 말을 했다. 마슈는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이고 그애의 마스터와 함께 관제실을 나갔다. 데이비트는 두 사람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준 뒤 다 빈치에게 인사를 하고 관제실을 나섰다. 그러다가 단말기를 등 뒤에서 다가온 누군가에게 빼앗겼다.

“허, 나름대로 구색은 잘 갖춰 놨네.”

테스카틀리포카였다. 데이비트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아직 내가 읽고 있는 중이잖아.”
“난 원래 이런 거 좋아하잖아. 네가 이해해. 그건 그렇고, 네 성격이면 이런 예복은 바로 마련해뒀을 줄 알았는데.”
“그동안 바빴잖아. 미션이 끝나면 파티를 한다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만? 아, 너는 그때 의식불명이었던가.”

데이비트는 즐거워 보이는 테스카틀리포카를 진심을 담아 째려보았다. 이문대 믹틀란이 완전히 절제되어 사라졌을 때, 테스카틀리포카를 유지하던 토지의 백업을 잃은 데이비트는 이문대에서 무리한 여파와 테스카틀리포카를 온전히 유지하기 위해 마력이 빨려나가는 돌발사태를 함께 겪는 바람에 쓰러져서 사흘 정도 집중치료실에 있었다. 정작 그 원인인 테스카틀리포카는 섀도우 보더의 동력원을 사용하게 된 덕분에 멀쩡했다. 집중치료실 침대 옆에 앉아서 단말기를 보고 있다가 눈을 뜬 데이비트를 보고 ‘오, 일어났냐’고 말하는 테스카틀리포카는 굉장히 얄밉게 웃고 있었고, 데이비트는 의식을 되찾자마자 테스카틀리포카를 한 번만 때리고 싶다는 충동을 삭여야 했다.
데이비트는 단말을 돌려받는 것을 빠르게 포기하고 카탈로그에 집중하는 테스카틀리포카에게 통보했다.

“0018시까지면 빠듯하니까 지금부터 내 의상을 의뢰하러 갈 거다. 너는 파티가 시작할 때까지 자유롭게 행동해도 좋아.”
“그럼 동행하지.”
“올 건가?”
“아름다움을 관장하는 자로서 네 센스를 믿을 수가 없어.”

테스카틀리포카는 태연하게 데이비트를 지나쳐서 B구획으로 향했다. 데이비트는 잠시 그 뒷모습을 가볍게 째려보다가 뒤를 따랐다.


*


오늘의 의상실 근무자는 미스 크레인이었다. 처음으로 의상실을 찾아온 데이비트에게 잘 생각했다, 자기만을 위해 만들어진 잘 어울리는 옷을 입었을 때 빛나는 건 성별 상관없이 같다는 내용의 오래 산 환상종 특유의 한번 시작되면 멈추지 않는 인생에 도움이 되는 충고가 첨부되었다는 뜻이다. 데이비트는 내심 이 자리에 차라리 마슈에게 열을 올리는 다른 근무자가 앉아 있었다면 더 편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 자리에 그 요정이 있었을 경우 신부는 성별 상관없이 누구보다도 반짝거린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데이비트는 아직 모른다.
아무튼 당면한 과제를 되도록 빠르게 처리하고 이번 레이시프트의 피드백을 하고 싶었던 데이비트의 주문사항은 심플했다.

“그러면 뭐, 아무거나 상관없으니 빠르게 나오는 디자인으로 부탁하고 싶어. 중세의 고위 성직자가 주빈이니 적당히 격식 있는 느낌이면 된다.”
“미안하다. 이 녀석은 대체로 요구사항이 확실한 편이다만 이런 개인적인 취향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상황에는 최악의 클라이언트거든.”

의상실을 둘러보던 테스카틀리포카가 데이비트를 등진 채 한 말이다. 다행히 의상실을 담당하는 환상종은 이런 식으로 ‘아무거나’ 라고 말하는 클라이언트의 취향을 알아내는 데도 익숙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음, 그렇다면 예전에 입으시던 정장은 어떤 느낌이었는지 알 수 있을까요?”
“스리피스였어. 검은색 스트라이프에 식스버튼.”
“꽤 클래식한 느낌이네요. 데이비트 씨는 선이 굵고 이목구비가 회화적으로 뚜렷한 느낌이니까 잘 어울렸겠어요. 고풍스러운 맛이 좋죠. 한 번 보고 싶다
“이 녀석 예전 직장이 머리 딱딱한 녀석들밖에 없는 곳이었어서 말이야. 폐쇄적인 마술사들이란 게 다 그렇지.”
‘그런가?’

데이비트는 첫 정장을 주문하던 시기의 기억을 반추해 보았다. 바로 결정하기가 힘들어서 의상실에서 받아온 카탈로그를 보고 있었는데, 곁에 있던 마술사들이 자꾸 참견하다가 가격대가 올라가서 데이비트가 난감해하자 내용물이 무엇이건 외양이 어린 멤버를 곤란하게 만든 책임을 느낀 마술사들이 조금씩 예산을 보태 줬었다. 누군가 어디서 구해왔는지 회중시계를 건네주기도 했다. 꽤 따뜻한 느낌이 들었으므로 기록을 보존해 두었다. 그런 절차를 거쳐 완성된 정장은 나름대로 마음에 드는 디자인이었으므로 그 뒤에도 처음 만든 정장과 비슷한 느낌의 것을 입었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겉옷용 원단들을 팔락팔락 뒤적이면서 말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그런 느낌이 좋냐?”
“글쎄.”
“아무 생각도 없다는 뜻이군.”

사실이다. 테스카틀리포카는 혀를 쯧쯧 차고 크레인에게 말했다.

“저 녀석은 그렇다는데, 나는 저 녀석 몸의 외곽선이 잘 보여도 부끄러울 것 없는 육체 갖고 있으니까 무난한 스리피스로 그걸 묻어버리는 건 좀 아깝다고 생각하거든?”
“음, 그러면 셔츠는 사이즈를 딱 맞게 하고, 상의는 테일코트 같은 느낌으로 디자인하되 마감을 세미정장 같은 느낌으로 하는 건 어떨까요? 격식 있는 느낌을 원한다면 머플러를 추가해도 좋겠죠.”
“괜찮군. 시안을 보여다오. 두 개 정도면 된다.”

빨간 머리의 환상종은 작업용 책상에 앉아 바로 스케치를 시작했다. 테스카틀리포카가 자기 쪽으로 손을 까딱였다. 거절할 수도 없어서 데이비트는 대체로 비슷비슷해 보이는 원단들 앞에 섰다. 그러자 테스카틀리포카가 조금 작은 소리로 물었다.

“디자인은 가닥이 잡혔으니까 색이나 다른 사항을 정해둬야 할 거 같은데, 너 그래서 이번에 눈에 띄고 싶냐, 되도록 조용히 자리만 지키다 오고 싶냐?”
“그걸 고려할 필요가 있어?”
“필요하지. 파티는 정치판이라고.”

데이비트는 조건반사적으로 귀찮아졌다. 발생 이후 13년간 데이비트가 사회적 소통을 할 때 최우선 사항으로 두는 것은 최대한 튀지 않고 지구인들의 눈에 안 띄게 조용히 사는 것이었지만, 데이비트의 시야나 개인적인 목적이나 피지컬의 문제로 그 방침은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데이비트와 오래 교류했거나 같이 일해본 사람들은 다들 데이비트 젬 보이드란 원래 저런 녀석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에 어찌어찌 해결되었지만 간혹 그럴 수 없는 경우도 생기는 법이다.
시계탑은 데이비트가 몸담은 적이 있고 나름대로 인류에게 이바지하고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시대착오적인 혈통주의에 귀족주의를 섞어서 현대 사회에서 바라는 것의 반대 방향으로만 빚어낸 집단이다. 네가 자기 흥미분야 이외에 별 관심 없고 욕심도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시계탑 내부의 정치적 요인도 좀 고려하라는 말은 그때 질리도록 들었다.
테스카틀리포카가 무슨 의미로 말한 건지는 안다. 지금의 자신은 싸움에서 패배한 뒤 항복해서 노움 칼데아에서 노역으로 속죄를 하고 있는 상황이고 당연히 처신에 신경을 써야 한다. 그냥 지금까지의 삶이 학습시켜준 조건반사적인 거부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작은 사회인 데다 거주자들도 대체로 숨기는 것이 없어서 이런 요인을 신경 쓸 필요 없었던 믹틀란 때가 편하고 좋았다.
데이비트는 약간의 아쉬움을 담아 대답했다.

“눈에 띄는 건 어쩔 수 없지. 아무래도 이번에 처음 참석하는 거니까. 그래도 나는 정당하게 싸워서 패배한 거고, 혹시 향후 노움 칼데아의 결정으로 죽게 되더라도 별 유감은 없으니까 지나치게 저자세를 취하고 싶진 않아.”
“그럼 화려한 색 포인트도 나쁘지 않겠구만. 셔츠는 좀 밝은 색으로 하고, 수트 쪽은 무난하게 검은색 민무늬로 어때.”
“이의 없다.”
“좋아. 그러면 내 의상은 어떤 느낌이 좋을지 결정해줘.”
“?”

데이비트는 의표를 찔린 기분으로 테스카틀리포카를 보았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미션 이후의 파티가 처음이 아니니까 지난번에 입었던 옷을 입고 올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기 때문이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뭐가 문제냐는 듯 팔짱을 낀 채로 말했다.

“아니, 너는 결국 나를 데리고 여기까지 왔잖아. 나는 노움 칼데아에 부역하고 있지만 여전히 네 서번트고. 파티에는 참석해야 하고.”
“그렇지.”
“그럼 너랑 내가 같이 파티에 참석하는 상황이 되는데, 그럼 네가 내 마스터라고 힘줘서 주장할 것인가, 거기까지는 안 할 것인가 결정해 둘 필요가 있어. 의상은 그걸 표현하는 제일 간단한 간접화법이지.”
…….”

테스카틀리포카는 말없이 답을 재촉했다. 데이비트는 생각에 잠겼다. 사실 믹틀란 때나 지금이나 딱히 테스카틀리포카를 자신의 아랫사람이나 소유물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마스터와 서번트라는 고유명사를 보면 상하관계를 연상하기 쉽지만, 엄밀히 말하면 현대의 인간과 존재의 격으로는 비교도 되지 않는 영령이 자신과 같은 의견 혹은 그 이외의 요인을 가진 소환자에게 자신의 힘을 고스트라이너라는 포맷으로 빌려주며 협력해주는 것뿐이다. 테스카틀리포카도 그렇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데이비트의 부하가 아니다. 데이비트의 부름에 응답해서 협력자가 되어줬을 뿐이다. 그런 존재답게 고압적이고 제멋대로고 남이 자신을 섬기는 데 익숙했다. 하지만 오래된 존재라서 그런지 규율에 얽매이는 존재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명목상의 상하관계를 존중하려 했고, 종복으로서 기본적인 것은 해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이것저것 사소한 것을 챙겨주곤 했다. 그게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지만.
데이비트는 되물었다.

“마음대로 해도 상관없다면 뭘 입을 거지?”
“다시 만들기도 번거롭고, 지난번에 만든 거 다시 입으려고. 안감만 빨간색인 기본 세미정장이었어. 이번엔 격식 있는 느낌으로 맞춰 달랬으니까 넥타이 정도는 할까 한다.”

데이비트는 조용히 머릿속의 무대에 정장을 제대로 갖춰입고 머플러까지 두른 자신과 노출을 적당히 줄인 세미정장 차림의 테스카틀리포카를 올려 보았다. 합은 나쁘지 않았지만 별로 동행인 같지는 않다. 데이비트는 그 광경을 상상하고 맨 처음으로 도출된 결론을 존중하기로 했다.

“내 의상이랑 합을 맞추는 쪽으로 부탁한다.”
“그러냐. 너랑 비슷한 디자인으로 할까?”
“상관없지만, 너는 옷 많이 껴입는 거 싫어하잖아. 갑갑하다며.”
“그건 맞아. 근데 의외구만.”
“왜.”
“너는 믹틀란에서 내가 코트를 벗고 뭔가 하고 있을 때 바지 위로 엉덩이 위쪽이 보이는 걸 특히 싫어해서 볼 때마다 나한테 뭔가 싫은 소릴 했었거든.”

로우라이즈 위쪽으로 엿보이는 테스카틀리포카의 둔부를 목격한 기억은 있는데 그건 기억에 없다. 중요하지 않은 기록이라 기록에 안 남겼거나, 저런 이야기를 한 것이 민망해서 기억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데이비트는 그것을 숙고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아마도 후자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마음대로 발언을 재개했다.

“아무튼 비슷한 디자인이 별로라면 다른 접근법으로 갈까. 네 경호원 같은 느낌은 어떨까? 새삼스러운 느낌이기는 하지만 효과는 확실할 거고.”
“나쁘지 않지만그, 아무리 생각해도 관계도가 잘못된 느낌일 거 같은데.”

솔직히 자신들이 그런 관계라면 어떻게 생각해도 자기가 경호원이고 테스카틀리포카가 고용주 쪽이어야 맞다. 테스카틀리포카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지 소리내어 웃었다. 거기 맞춘 것처럼 크레인이 둘을 불렀다.

“두 분, 스케치가 완성됐으니까 와서 보실래요?”

시안은 두 안 모두 나쁘지 않았다. 셔츠 색은 오렌지색으로 골랐고 베스트를 추가하기로 했다. 테스카틀리포카가 포인트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냈는데 괜찮은 패턴이 들어간 원단이 없어서 베스트와 머플러에만 스트라이프가 들어간 원단을 쓰기로 했다. 치수를 재고, 계산서를 받아들면서 데이비트는 기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사실 첫 정장 이후로는 옷에 시간을 들이는 게 귀찮아서 대체로 기성품을 입었다. 맞춤옷을 입는 건 이번이 두 번째다. 첫 정장을 만든 날은 가격을 기억해둬야 해서 영수증을 받아든 순간을 기록에 넣어두었다. 데이비트는 그 때 느낀 미묘한 고양감을 생각했다. 처음으로 자기 힘으로 주문제작한 물건을 손에 넣은 순간.
크레인이 자리로 돌아오자 테스카틀리포카는 빠르게 주문사항을 말했다.

“그럼 이번엔 내 쪽이다. 재킷은 필요 없고, 베스트랑 바지랑 넥타이만 있으면 돼. 베스트는 앞뒷면 다른 색으로, 이거랑 이 원단을 써줘. 셔츠는 주름이 덜 지는 재질로.”
“핏은 이번에도 딱 맞는 느낌으로 할까요?”
“그래. 넥타이는 저 녀석 셔츠랑 비슷한 색으로 부탁한다. 선글라스 렌즈 색이랑 너무 비슷하지 않게. 윤기가 나는 재질도 좋겠군.”
“그럼 잠깐 천 좀 같이 보시겠어요? 괜찮은 게 몇 가지 있어요.”

크레인은 잠시 펜을 놓고 서랍을 열었다. 데이비트는 데이비트의 옷을 고르는 동안 자기가 입을 옷을 거기 맞춰서 구상하고 있던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약간 압도된 상태였다. 데이비트는 테스카틀리포카와 크레인의 대화를 들으면서 테스카틀리포카의 의상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짙은 색 셔츠와 바지에 밝은 오렌지색 넥타이. 바지보다 밝은 색 베스트. 테스카틀리포카는 스타일이 좋으니까 머리를 묶은 것도 묶지 않은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지만 뭔가 완성되지 않은 느낌이 든다.
데이비트는 잠시 머릿속에 있는 레퍼런스를 뒤적이다가 넥타이에 사용할 원단 때문에 가볍게 실랑이를 하는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테스카틀리포카. 문제가 있어.”
“응?”
“활동적이고 현장에서 뛰는 사람 같은 이미지기는 한데 경호원 같은 이미지라기엔 약간 부족한 느낌이 드는데. 뭔가 추가했으면 한다. 권총을 꽂아두는 벨트라던가.”
“아니그거정말좋은데요?! 딱 헐리우드 액션이라는 이미지고?!”

디자이너 쪽이 먼저 반응했다. 데이비트는 약간 민망해졌다. 10살 먹은 미국인 소년이 아버지 옆에서 본 블록버스터 영화에 등장하는 특수요원의 이미지를 응용했다는 것을 빠르게 들킨 것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테스카틀리포카는 그걸 지적하는 대신 자기 총을 들어올려 보였다.

“괜찮은 아이디어다만 내 총은 보다시피 거기 안 들어가는 형태인데?”
……. 너는 파티장에 총 들고 들어가나?”
“너 인마, 파티장에서 무방비하게 있다가 습격당해서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 아무튼 그 의견 자체는 수용할 수 있어. 하지만 별 기능성은 없고 그냥 장식이 될 거야. 너는 실질강건한 거 좋아하는 효율주의잖아. 그래도 괜찮냐?”

알고 있다. 별 기능성 없고 불편하기만 한 장식이 될 것이다. 그래도 자기 의견을 몰아붙이고 싶다고 데이비트는 생각했다. 테스카틀리포카가 자기 서번트임을 남들에게 보이기로 마음먹은 참이었다. 기왕 한다면 제대로 욕심을 부리고 싶다. 데이비트의 주문대로, 데이비트에게 맞춘 옷을 입은 테스카틀리포카를 보고 싶다.
데이비트는 대답했다.

“응.”

테스카틀리포카는 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웃으며 대답했다.

“네, 네. 말씀하시면 따라야지요, 고용주님.”

테스카틀리포카는 셔츠에 사용하는 원단을 보관해둔 캐비닛 앞에서 크레인과의 대화를 재개했다. 그 대화 내용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데이비트는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자신은 정말로 사회에 돌아와 버렸다. 140억 광년 반경 안에서 생겨나는 초신성의 모습은 알아도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의 속내는 알 수 없고, 입고 다니는 옷으로도 의견을 표현할 수 있거나 의견을 표현했다고 오해당할 수 있고, 혼자일 때는 자기 처신만 신경 쓰고 책임지면 되었지만 이제는 자신을 따라온 누군가의 안위나 처신을 함께 고려해야 하는 사회.
그러자 연쇄적으로 앞으로는 이전의 몇 배로 번거롭고 귀찮은 일을 많이 겪게 될 것이라는 추론이 데이비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언제나 시간이 부족하고 효율주의인 데이비트에게는 위험신호에 속했지만, 의외로 그것은 나쁘지 않게 느껴졌다. 기꺼이 받아들일 가치가 있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무엇 때문일까. 자신이 지구의 명예 따위를 멋대로 책임지려 한 적은 있지만 실질적으로 남의 목숨을 책임지는 삶을 살아본 적은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테스카틀리포카와 함께하는 생활이 생각보다 즐거웠고, 그것이 이어지는 것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까.

‘죽다 살아나서 그런가. 나도 꽤 센티멘탈해졌군.’

데이비트는 홀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을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테스카틀리포카가 말했다.

“어이, 데이비트. 얘랑 의견조절이 안 돼. 와서 너도 어느 천이 더 나은지 좀 봐라.”
“그래. 간다.”
“아니, 하지만 보세요. 데이비트 씨도 은은하게 패턴 들어간 게 더 예쁘다고 생각하실 거라니까요?!”

데이비트는 그 자리에서 크레인의 편을 들었다. 그래서 테스카틀리포카는 옷이 완성될 때까지 약간 토라져 있었고 데이비트가 보고서를 쓰는 것도 도와주지 않았다. 하지만 파티장에서는 나무랄 데 없는 태도로 데이비트의 곁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데이비트는 결국 그 어색함을 견디지 못했고, 중간에 파티장을 나와 스톰 보더의 복도에서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사과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특유의 성격이 나빠 보이는 미소를 띄운 채 사과를 받아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보상으로는 뭘 해줄 거지?”
“그런 것까지 필요한가?”
“사과를 할 때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도 가져와야지?”

데이비트는 오래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다음에는, 네가 시키는 대로 입을게.”
“호오?”
“진심이다.”

테스카틀리포카가 휘파람을 불었다. 데이비트는 한숨을 쉬고 싶어졌지만 참았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박수를 치며 대답했다.

“좋았어. 각오해라, 형제. 난 네가 그 얼굴에 그 육체를 갖고도 그런 편한 옷만 입고 다니는 게 쭉 마음에 안 들었거든.”
“아니, 뭘 입히려고
“원래 아름다움이라는 건 다소의 불편함은 감수해야 완성되는 거라고.”

타인과 함께하는 사회생활이란 스스로 선택한 것이더라도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다고, 데이비트는 새삼스럽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