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S/레아시스
2024-10-13 20: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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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의 作法: 필요악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데이테스. 믹틀람파의 할로윈 날, 데이비트의 원본인 소년이 데이비트 앞에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믹틀람파에 대한 개인적인 설정, 소년과 테스카틀리포카의 신체접촉 묘사가 약간 있습니다. (NTR물 아닙니다...) 데이비트와 테스카틀리포카가 기존에 데이테스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일 다 한 설정입니다.
믹틀람파의 모든 전사들에게는 그 전사를 응대하기 위한 테스카틀리포카의 단말이 한 명씩 배정된다 & 믹틀람파는 전사가 뭔가를 믹틀람파에서 염원하면 바로 제공되는 시스템이고, 이것은 자각하고 있는 욕망과 무의식중에 바라는 욕망 모두에 평등하게 적용된다는 설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데이테스 원드로원라이 @Dt_od_ow 참가작입니다. 사용한 주제는 '할로윈', 'ごろにゃん' 입니다.

10월 31일 오전 8시 40분경, 믹틀람파 주민 데이비트 젬 보이드는 아침부터 뒤늦게 자기 집을 청소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데이비트는 객관적인 시각으로 봐도 자기 공간을 비교적 깔끔하게 유지하는 독신자였지만, 문득 자기 방이 자주 대화하는 사람을 맞이할 수 있을 만큼의 청결함을 유지하고 있기는 해도 처음 만나는 사람을 맞이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원래부터 깨끗한 방이었고, 애초에 믹틀람파라는 곳이 물리세계 특유의 마모나 오염을 걱정할 필요도 없는 곳이라서 데이비트가 할 일은 그냥 방을 한 번 더 쓸고 닦고 창틀이나 소파의 쿠션과 쿠션 사이를 공들여 닦아내고, 탁자나 서적이나 기억매체를 가지런하게 정리해서 책꽂이나 캐비닛에 집어넣는 게 다였다. 이미 테스카틀리포카나 믹틀람파 생활이 긴 오래된 전사들에게 믹틀람파에는 언제나 어린 사람이 몇 없었다는 귀띔을 들었지만 세상사란 원래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는 거다. 데이비트 자신의 발생처럼.
데이비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영화 블루레이를 넣어둔 캐비닛 문을 닫았을 때, 딩동 하는 소리가 났다.

“!”

감전된 것처럼 움찔한 데이비트는 빠르게 전날 몇십 번이나 시뮬레이션한 프로세스를 떠올렸다. 괜찮다. 두려워할 것 없다. 드디어 한 달 전부터 준비한 것을 실행에 옮길 때가 왔다. 데이비트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사교적으로 보이지는 않더라도 적당히 덜 무섭게 느껴지는 표정을 짓고, 범인류사 현대 출신의 전사에게 조언을 구해서 종류별로 구비해 둔 단맛 과자를 챙기고, 테스카틀리포카를 들볶아 훔쳐본 현재 믹틀람파에 체류 중인 나이가 어린 전사나 나이는 그치가 살던 문화권 기준으로 성인이지만 정신적으로 어려서 과자를 내놓으라는 농담을 하며 들이닥칠 만한 전사의 얼굴과 이름을 떠올린다. 누굴까. 누가 맨 처음으로 찾아왔을까.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었다. 데이비트의 허리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서 어린 남자애 목소리가 났다.

“장난 아니면 간식Trick or treat!”
“간식으로 하지. 꽤 일찍 왔군. 부모님이랑 같이 차라도 마시고 가겠 어?”

어린애는 혼자였다. 보호자 하나 대동하지 않은 어린애는 약간 긴장한 얼굴로 데이비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밀짚과 황금 사이에 걸친 색의 약간 뻣뻣한 재질의 머리카락. 눈동자는 보라색. 테스카틀리포카가 투덜거리면서 갖다준 목록에 없는 얼굴이다.
사실 그건 아무래도 좋고, 데이비트에게는 그것 이외의 아주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

“저기.”

매일 아침 거울 속에서 보는 얼굴에서 세월의 경과를 13년 분 덜어낸 얼굴이 말했다.

“분위기 파악하려고 노력해 보긴 했는데, 여기가 어디고 음, 형은 누군지 알려 줬으면 좋겠어요.”

2003년, 런던 시계탑의 전승과가 점유한 구역의 장식재가 된 소년이 돌아왔다. 2018년 10월경의 믹틀람파에.


*


그런 연유로 할로윈 아침부터 데이비트의 방에 불려온 테스카틀리포카(의 데이비트 응대용 단말)의 답변.

“난 아무것도 안 했다.”
“말이 돼? 저 애는 싸우다 죽은 것도 아니고 패배한 것도 아니야. 이 영역의 지배자는 너고 다른 신이 수작질을 하게 내버려두지도 않을 텐데.”

데이비트가 문간에서 음량을 최대한 줄이고 테스카틀리포카를 추궁하는 동안 소년은 약간 난감한 표정으로 데이비트가 서둘러 준비한 아침식사 ─ 토스트와 베이컨, 스크램블 에그, 토마토와 레터스에 오리엔탈 풍 드레싱을 끼얹은 샐러드 ─ 를 먹고 있었다. 전승과에 신세지던 첫 해의 데이비트가 굶었을 때 단 것만 먹으면 속이 부대낀다고 온몸으로 뼈저리게 학습했기 때문이다.
테스카틀리포카는 한 손으로 자기 입을 막고 대답했다.

“네가 여기 들어올 때도 설명했지만 나는 여기서 기본적으로 방임주의야. 너희들을 여기 맞아들여서 휴식을 주고, 너희들이 이제 충분히 쉬었다고 생각하면 내보내 주는 게 다야. 그동안 너희들이 갖고 있던 개인적인 문제나 과제들에 답을 얻는 건 전부 너희들의 의지지 내 의지가 아니야.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저 소년을 만들어낸 건 내가 아니야. 평소와 마찬가지로 네가 바란 거지.”
“내가?”
“어쩐지 네가 리소스를 평소보다 좀 많이 쓴다 싶었어. 너, 저 녀석 때문에 내가 이 단말에 배분하는 리소스까지 끌어다 썼거든. 덕분에 난 피곤해 죽겠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입을 막은 채 길게 하품을 했다. 데이비트는 아연해졌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미간을 찌푸리고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야, 그건 네가 자책할 일이 아니야. 나는 이 영역에서 전사의 자유의지에 리소스를 최우선 순위로 할당하니까. 그래도 너는 이 영역의 지배자가 아니라서 저 소년도 아마 하루 이상은 유지되지 않을 거다.”
“그러면.”
“기왕 불러온 거 둘이 좋은 하루 보내란 얘기지. 그리고 나도 슬슬 의식을 유지하기 힘드니까 간다. 저녁때면 나아질 것 같으니까 필요하면 그때 불러.”

그렇게 말하더니 연기 몇 줄기만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데이비트는 뭐라 윽박지르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난감한 기분이 되어 애먼 문만 째려보았다. 식사를 하면서도 데이비트와 테스카틀리포카를 계속 보고 있던 소년이 물었다.

“뭐 하는 사람이야?”
“테스카틀리포카다. 멕시코에서 옛날에 섬기던 신이야.”
“신? 아니 그보다 멕시코 신인데 저렇게 그, 커트 코베인처럼 생겼어?”
“요즘 유행에 민감한 신이야.”

데이비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소년의 맞은편에 앉았다. 별 것 하지도 않았는데 묘하게 기운이 빠졌다. 그것이 저 소년 때문이라는 사실을 데이비트는 조금 전 본의 아니게 알았다.
데이비트는 물었다.

“어디까지 기억하는지 설명해 다오.”
“아빠 사무실에 놀러 갔는데, 아빠가 설명해준 ‘천사의 유물’에서 빛이 확 났어. 그 뒤로는 아무것도.”
“그런가.”

하필 언급을 피해서 적당히 넘기기도 힘든 지점에서 끊겨 있었다. 데이비트는 뒷머리를 몇 번 벅벅 소리나게 긁은 다음 대답했다.

“알았다. 길어지겠지만 가능한 한 전부 이야기하지.”
“좀축약할 수는 없어?”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죽었고 지구는 파괴되지 않았어.”
“미안, 그냥 차근차근 설명해줘.”

데이비트는 또래에 비해 약간 조숙하고 철딱서니가 없는 아버지 때문에 어른용 공상과학 영화를 몇 편 봐서 묘한 지식이 몇 가지 있는 정도인 소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으로 축약해 지금까지의 인생사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린애가 알아듣기 어려운 개념을 풀어서 이야기하려 애쓸 때마다 노움 칼데아에 있는 후지마루의 이야기 기술이 부러워졌다. 이야기에는 1시간이 조금 덜 되게 걸렸고 소년은 두 번, 데이비트는 세 번 정도 마실 것을 리필했다. 다행히 그 동안 찾아온 손님은 없었다.

“이상이다. 뭔가 더 물어볼 건? 혹시 괴로워졌다면 정말 미안하다.”
“아니, 너무 이상한 얘기밖에 없어서 충격받을 시간도 없었어. 그러니까 140억 광년 바깥에 사는 외계인들이 나랑 아빠를 지구에 올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나랑 아빠는 우리가 거기에 있었다는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졌고, 나와 인격과 기억을 공유하는 외계인인 네가 내 육체를 가진 채로 지구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던 도중 무슨 빌리라는 사람의 음모를 저지하기 위해 칼데아라는 집단에 들어갔고, 고심 끝에 지구를 파괴하기로 했다? 진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게.”
“그건그렇군.”

솔직히 부정할 수가 없었다. 할 말이 궁해진 데이비트는 소년이 남긴 식은 토스트를 집어들고 씹기 시작했다. 소년이 말했다.

“하지만 네 야망은 후지마루라는 사람에게 저지됐고 너는 죽었다고 했지? 그럼 여기는 사후세계? 아 맞다. 아까 그 락스타 같은 아저씨가 멕시코의 신이라고 했었나? 그 아저씨가 지배하는 사후세계?”
“이해한 대로가 맞다. 아버지가 SF나 판타지를 좋아해서 다행이었군.”
“근데 왜 멕시코 신이야? 나랑 아빠는 교회 다녔었는데.”
“나는 무교였어서.”
“헤. 하긴 외계인이 교회 다니는 건 상상 잘 안 간다.”

소년은 혼자서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비트는 조심스레 물었다.

“슬프지 않나? 너나 아버지가 죽었다는데.”
“슬프지. 나도 아빠도 엄마처럼 됐다니. 근데 너무 많은 얘기를 들었더니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실감이 별로 안 나. 네가 적당히 거짓말을 한 거고 나는 그냥 아빠랑 잠깐 떨어져 있는 것 같아.”
“나도 그랬어.”

분명 소년의 기억도 인격도 똑같이 가지고 있었는데도 어째서인지 그게 남 일처럼 느껴졌다. 자신이 염기배열은 같아도 이전의 소년과 다른 존재임을 인지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즈음의 기억 중 괴로운 감정은 거의 없다. 데이비트는 그래서 당시의 자신이 그리 괴로워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데이비트는 내심 그 즈음의 자신이 전승과의 식객 생활에 적응하는 데만도 굉장히 바빴기 때문에 그 당시 느꼈던 감정들을 기록에 남겨둘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 또한 하고 있었다. 어쩌면 과거의 자신이 더 많이 자책하고 더 많이 외로워하고 더 많이 괴로워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도. 하지만 그걸 지금 말할 필요는 없다.
소년이 다시 묻는다.

“그, 고대 멕시코의 신이.”
“외우기 어려운 이름이지. 테스카틀이건 포카건 마음대로 불러. 참고로 의미는 연기Poca를 뿜는 거울Tezcatl이다.”
“그럼 포카. 포카가 나는 오늘 하루 이상은 유지되지 않는다던데, 그거 진짜야?”
“그 녀석이 하는 말은 바깥에서는 선택적으로 믿어야 하지만 여기서는 대체로 진짜다.”
“네가 날 불렀다는 얘기 다 들었어. 왜 부른 거야?”
나도 잘 모르겠군.”

소년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데이비트도 동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짚이는 게 없다. 물론 데이비트는 평생 동안 저 소년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다. 아무리 데이비트의 본의가 아니었더라도 데이비트는 소년의 아버지를 사라지게 만들었고 소년의 인생을 훔쳐냈다. 질서의 유지라는 핑계로 소년의 삶을 이용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그래도 자기 나름대로 소년과 아버지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자신이 이제 와서 저 소년을 만나려 할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없었다. 오늘 아침의 자신은 그저 믹틀람파의 어린 주민들에게 과자를 나눠주면서 어색하지 않은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는데.
별안간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데이비트의 고개가 소년의 동선대로 움직였다. 소년이 말했다.

“나가자.”
“혹시 해야 할 일이 떠올랐나?”
“아니. 그래도 기껏 돌아왔는데 뭐라도 해야지. 사후세계는 처음 와 봐. 궁금하니까 안내해줘.”

잘 보니 눈이 빛나고 있었다. 하긴, 원래 어린애란 이런 생물이다. 아무리 불행한 일을 겪었더라도 눈앞에 자신이 맛보지 못한 미지가 있다면 달려들기 마련인.
데이비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필드워크용의 실용성을 중시한 디자인의 배낭 말고 길에서 몇 번이나 여닫기 편한 디자인의 배낭을 어디 두었는지 떠올린다.

“5분만 기다려라. 오늘은 할로윈이라서.”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사후세계도 할로윈을 챙겨?”
“멕시코에서는 할로윈부터 11월 2일까지를 죽은 자의 날Día de los Muertos이라고 해. 중요한 명절이지.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멕시코가 아닌 곳 출신도 많아서 같이 챙긴다.”
“헤.”
“그러니까 넌 이거 가지고 가.”

디노스 노점에서 눈에 띄어서 들고 왔지만 쓸 데가 없어서 탁자 위에 방치해 두었던 해골 모양 바구니를 넘겼다. 소년은 곳곳에 원색 포인트 장식이 들어간 화려하게 장식된 플라스틱 재질의 해골 바구니의 디테일을 군데군데 자세히 관찰하다가 말했다.

“아빠는 이런 거 안 해 줬었는데.”
“그랬지. 아버지 직장은 원래 바쁜 곳이다.”
“뭐 하는 곳이었어?”
“지구를 문명 밖에서 온 미지의 위협에서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지.”

소년은 정말 이상한 것을 본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아니, 넌 그런 데서 일했는데 지구를
“쉿.”

데이비트는 소년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변명할 구석이 없었다.


*


현재 믹틀람파에서 데이비트가 살고 있는 구획에는 인간형 지성체가 많고, 당연히 범인류사 출신이 많기 때문에 어린애들 보기에 재밌는 건 별로 없었다. 비교적 소수파에 속하는 호박 장식과(사흘 전, 데이비트는 이 소수파 현대인 전사들에게 조언을 구해 호박 속을 파내고 이목구비 모양을 깎았다) 화려한 장식이 된 해골이나 해골 모양 과자, 마리골드 꽃 장식, 시대감이 제각각인 옷차림을 한 주민들(나이가 많은 주민들은 소년에게 오늘을 위해 쟁여둔 과자를 안겨준 뒤 데이비트를 보면서 자식을 가지고 싶은 건 젊은 녀석이라면 당연한 욕망이라고 마음대로 오해하고 마음대로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정도밖에 볼 게 없었다.
이문대 믹틀란에서의 생활은 어린애한테 축약해서 설명하기가 굉장히 어려웠기 때문에 그냥 테스카틀리포카가 기록한 데이터베이스를 보여주면 편할 것 같았다. 그래서 데이비트는 처음 먹어보는 칼라베라 과자가 좀 먹기 불편해서 곤란에 빠져 있는 소년을 데리고 라이브러리에 갔다. 그러다가 라이브러리에 자기 방을 하나 마련해버릴 것 같은 기세로 다른 세계의 지식에 탐닉하고 있는 믹틀란 출신의 디노스와 마주쳤다.
소년은 초신성이 발생하는 순간 같은 소리로 외쳤다.

“공룡이 있다고는 말 안 했잖아!”
“아, 그건 이해합니다. 크립터는 말할 때 우선순위를 좀 이상하게 잡는 경향이 있지요.”

‘별을 보는 디노스’ 테페우는 평소처럼 남을 악의 없이 궁지에 몰아넣었다. 데이비트는 ‘그리 중요한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라는 대답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저쪽이 하는 말이 다 맞다. 당장 제일 최근에 본 오셀로틀 어린애들은 어지간히 용감한 애가 아닌 이상은 디노스를 꺼리거나 무서워했기 때문에, 애들은 공룡을 좋아한단 걸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았다.
소년은 일등성보다 반짝이는 눈으로 물었다.

“말도 해?! 저기, 종이 어떻게 돼? 벨로시랩터? 데이노니쿠스?”
“진정해. 그건 후세에 붙은 이름이잖아. 당사자가 어떻게 알겠어.”
“그렇게 물으셔도 답하기가 어렵군요. 디노스는 공룡을 토대로 만들어진 종족이라서 범인류사의 공룡과는 많은 점이 다르거든요. 내키는 대로 생각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말하더니 데이비트를 보며 애교 있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데이비트는 이 디노스의 자기본위적인 사교성을 언제나 곤란하게 여겼는데 적어도 소년은 그게 엄청나게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데이비트는 소년의 과자 바구니를 떠맡은 채로 좋아서 날뛰는 소년과 마이페이스인 디노스가 듣고 있으면 묘하게 기운이 빠지는 대화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았다.
데이비트가 방문목적을 설명하자 테페우는 소년을 등에 얹은 채로 익숙한 손짓으로 믹틀란의 생활상이 담긴 시청각 자료를 골라냈다. 믹틀람파 생활 1년을 넘긴 덕분에 범인류사 기준의 아동보호에도 익숙해서 폭력성이 높거나 잔혹한 자료는 자연스럽게 배제하고 있었다. 공룡이 인류의 위치를 점한 세계라는 키워드만 듣고도 본 적 없는 세계관에 대한 기대치가 MAX가 되어 버린 소년에게 자연스럽게 VR 헤드셋을(테스카틀리포카는 당대의 유행만큼이나 기술의 발전에도 민감하다) 씌워준 테페우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크립터. 그래서 이 아이는 어떤 존재인가요? 당신과 생체파동 패턴이 같네요. 당신이 만든 범인류사의 신의 단말 같은 건가요?”
“비슷하지만 달라. 테스카틀리포카 말로는 내 염원 때문에 발생했다는 것 같은데 자세한 건 모르겠다. 무의식 단계의 욕구 같은데 그것까지는 고찰할 수단이 없군.”
“확실히 염원이 내가 자각한 것과 자각하지 못한 것을 불문하고 모두 구체화된다는 건 꽤 곤란한 시스템 같더군요. 이것저것 이해할 수 없거나 곤란한 일이 많이 일어나죠. 저도 그런 적이 있거든요. 범인류사의 신이, 아키타입 같은 고밀도 정보체를 일부분만이라도 구현하는 건 제가 기록한 데이터와 자기 힘이 있어도 어려운 일이니 그 녀석의 다른 지인과 상담하라며 저희 쪽의 신을 초빙해 주었습니다만.”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데이비트는 쉴 새 없이 감탄사를 내뱉는 소년에게 눈길을 고정한 채 말했다.

“아마 발생의 메커니즘은 네가 추론한 대로가 맞을 거다. 여기 오는 동안 쭉 이야기해 봤고, 저 애가 내가 발생할 즈음의 정신성과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는 걸 확인했어. 아마도 다른 개체가 만든 기록 데이터를 가진 호문쿨루스가 자신에게 입력된 다른 개체의 데이터를 에뮬레이트해서, 다른 개체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같은 방식이겠지.”
“발생크립터는 일반적인 범인류사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탄생했나요?”
“그래. 저 녀석은 내 원본 같은 거다.”
“그건 좀 인간답지 않은 표현이군요.”
“인간이라고 자칭하기 애매한 존재라서.”
“하지만 당신, 인간이라고 불리면 기분이 좋아 보였는데요.”
“그랬나?”
“뭐, 통계치고 모수가 너무 적으니까 제 감각은 너무 믿지 마십시오. 저는 지금도 당신들의 표정 혹은 생체활동 패턴의 변화보다 디노스의 생체파동 쪽이 더 익숙하니.”

테페우는 웃는 낯으로 두 팔을 올리고 으쓱하는 동작을 했다. 데이비트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헛웃음을 흘리고 싶다는 충동과 이 디노스를 한 대 가볍게 때리고 싶다는 충동을 함께 느꼈다.
공룡이라는 대 어린이용 최종병기의 영향 덕분에 이문대의 자료 열람이 끝난 뒤에도 소년의 하이텐션이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질 않았으므로 데이비트는 다음 목적지를 수정해 디노스가 많은 구획에 가기로 했다. 여전히 인간형 지성체에게 어느 정도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익룡형 디노스가 범인류사의 어린애 하나를 상대로 곤혹을 치르거나 믹틀람파에 오면서 사진이 취미가 된 디노스가 같이 사진을 찍자고 나서는 걸 남 일처럼 지켜보면서 데이비트는 옛날 자연사박물관에 갔을 때 자신/저 소년의 아버지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온몸으로 이해했다.


*


“크립, 터.”

디노스가 많은 주거지구를 떠난 뒤 식사 때문에 들른 쇼핑몰에서 익숙한 얼굴, 아니 가면과 마주쳤다. 꽤 지친 상태로 치즈를 얹어서 오븐에 구운 미트소스 파스타를 먹고 있던 데이비트는 빠르게 대답했다.

“콰우테목? 오랜만이군. 가족들은 아직 쇼핑을 하고 있나?”
“응. 나는, 기다리고 있으라고, 해서.”

재규어 가면을 쓴 인간형 지성체는 약간 시무룩해 보이는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정체를 숨길 필요가 없으니 가면을 쓸 필요도 없어졌지만 대부분 멋지다는 이유로 마음에 들어해서 아직도 많이들 쓰고 다녔다.
테스카틀리포카가 믹틀람파에 오셀로틀을 고객으로 받아들임으로서 테스카틀리포카의 데이터베이스에 오셀로틀의 언어가 추가되었으므로,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오셀로틀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주문하거나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언어를 배우면 오셀로틀과 꽤 편하게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오셀로틀은 지식욕과 탐구욕만으로 데이비트가 믹틀란에 퍼뜨린 영어를 독학해낸 별종이라 약간 어설프지만 확실한 발음으로 영어를 사용했다. 본래 데이비트는 이름조차 몰랐지만 믹틀람파에서 지인이 되면서 알게 되었다.
곁에서 부리또를 먹던 소년이 말했다.

“어, 오셀로틀이다.”
“이름은 콰우테목이라고 한다. 제대로 인사해.”
“크립터와, 닮았, 구나.”
“안녕하세요, 미스터 콰우테목. 저는 ■■이라고 합니다. 데이비트의 형입니다.”

소년은 나무랄 데 없는 태도로 콰우테목에게 인삿말을 했다. 디노스들이 테페우와 데이비트의 대담 내용을 자기들의 화제로 흡수해 떠들어대는 걸 듣더니 ‘원본이라면 먼저 태어났다는 의미 아니야?’ 라며 지금부터 자신을 데이비트의 형이라고 자칭하겠다고 데이비트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부정할 수도 없었으므로 그냥 그러라고 했다.
콰우테목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이 애, 믹틀란에서, 만난 적, 없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어서 잠시 믹틀람파에 왔다. 괜찮으면 과자라도 나눠줘.”
“그럴까.”

콰우테목은 나름대로 익숙한 동작으로 휴대용 가방에서 유령 모양 사탕 꾸러미를 꺼냈다. 디노스들은 칼라베라를 익숙하게 주고받았으나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이것저것 배운 오셀로틀 입장에서는 칼라베라는 그렇게 간단하고 가볍게 취급하기에는 좀 애매하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소년은 익숙한 동작으로 꾸러미를 받아들고 환하게 웃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데이비트는 자기가 저 정도로 환하게 웃어본 지 얼마나 지났는지 셈하면서 콰우테목에게 포장한 초콜릿 몇 개를 건네 주었다. 자식에게 전해주라는 뜻이었다.

“범인류사의, 어린아이도, 우리와 비슷하구나.”
“너희는 범인류사의 인간의 조상이니까. 별다를 것도 없다.”
“신에게 들었고, 몇 번, 보기도 했지만, 정말로 보면, 신기해서.”

하긴 믹틀람파까지 온 어린애들은 여러 가지로 어린애답지 않은 경우가 많다. 여전히 유치해 보여도 죽을 각오로 싸운 애들은 어떤 식으로든 평화 속에서 자란 어린애와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싸우다 죽은 것도 아니고 패배해서 죽은 것도 아닌 소년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덕목이다.
콰우테목의 주머니 쪽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가족이 부르는 모양이었다.

“먼저, 갈게. 해피, 할로윈.”
“그래. ■■, 인사해야지.”
“응. 안녕히 가세요.”

소년은 오셀로틀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소년은 반쯤 먹은 부리또를 방치한 채 하품을 했다. 데이비트가 파스타를 먹는 동안 소년은 노점을 하는 디노스에게 받은 ‘믹틀란의 태양신 쿠쿨칸’ 모형(별 생각 없이 다른 신의 상징물을 유통하는 걸 허가해줘서 괜히 그쪽 좋을 짓만 해 버렸다며 그 디노스를 담당하는 테스카틀리포카의 단말이 투덜거렸다)의 알록달록하게 빛나는 겉옷의 디테일 묘사를 관찰했다. 데이비트가 잠시 식기를 내려놓자 소년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말이 좀 어설프네.”
“아직 진화하는 도중이었으니까. 저 녀석은 그 중에서도 뛰어난 종자야.”
“콰우테목 씨가 우리 세계에서 태어났으면 내 조상이 되는 거였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유인원은 여러 종이 다양하게 있었으니까.”
“재미없긴.”
“타당한 평가로군. 원래 재미있게 이야기한다는 평은 별로 들어본 적 없어.”

소년이 바람이 새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데이비트는 조용히 탄산수를 빨아 마셨다. 간혹 지나가는 인영들을 지켜보던 소년이 말했다.

“그건 그렇고 아이스크림 먹어도 돼? 초콜릿 맛으로.”
“되지. 여기 아이스크림은 옥수수 맛도 맛있다.”
“근데 나 밥 남겼는데.”
“매워서 남긴 건데, 뭐.”

치킨 부리또에 들어있는 소스가 꽤 맵다는 걸 잊고 평소에 자기가 먹던 메뉴를 그대로 주문해 버린 탓이다. 뼈아픈 실수라고 데이비트는 생각했다. 소년은 데이비트가 손을 들고 얼굴이나 몸의 조형은 완전히 다른 형태지만 어딘가 테스카틀리포카 같은 느낌이 드는 서버를 부르는 것을 턱을 괴고 지켜보았다. 그러더니 말했다.

“해달라면 다 해주는 건 자녀교육에 안 좋대.”
“아이를 키워본 적은 없어서.”
“너, 아까부터 나한테 뭔가 안 된다는 말을 하질 않았잖아. 그래서 그러는 거야.”

소년은 약간 시큰둥한 표정으로 데이비트를 바라보았다. 데이비트는 자세를 고치려다 그만두고 대답했다.

“내가 발생했을 때, 이런저런 검증을 해 본 뒤 네가 살아 돌아올 일은 없다고 들었고 나도 그게 진실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걸로 끝내기는 뒷맛이 나빴으니까혹시 기적이 일어나서 네가 돌아온다면, 네가 바라는 건 뭐든 해 주자는 생각 정도는 했었어.”
“헤에.”
“혹시 해서 묻는데 뭔가 더 하고 싶은 건 있나?”
“딱히. 근데 이거 내가 화내야 되는 건가?”
화를 내고 싶다면 얼마든지 내도 좋아.”
“정말?”
“그럴 만한 일을 했으니까.”

소년은 침묵하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대답했다.

“난 나이 먹으면 멍청해지는구나. 화를 낼 상황이어야 화를 내지.”
미안하다.”
“됐어.”

소년은 자기가 주문하지 않은 옥수수 아이스크림을 눈을 반짝이며 먹어치웠다. 소년이 본래 주문했던 초콜릿 아이스크림은 자연스럽게 외면당했다. 결국 초콜릿 아이스크림은 데이비트가 다 먹었다.


*


“여, 왔냐.”

데이비트는 약간 이른 저녁을 먹고 소년과 함께 범인류사에서 최근 개봉했다는 영화를 보고, 007 영화 같은 연출이 가미된 할로윈 기념 퍼레이드까지 구경한 뒤 소년과 함께 귀가했다. 그리고 자택 문간에서 담배를 피우던 테스카틀리포카가 손을 흔들었다.
데이비트는 대답했다.

“와 있으라는 의미는 아니었는데.”
“아닌데? 네가 오라고 염원하길래 왔을 뿐이야.”
“?”
“내가 불렀어.”

간식거리가 든 바구니와 선물받은 물건이 가득 들어있는 보조가방을 양손에 들고 있던 소년이 말했다. 데이비트도 테스카틀리포카도 소년에게 눈길을 고정했다. 소년은 당황한 기색 없이 말했다.

“자세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나는 데이비트에게서 파생된 존재라는 것 같길래. 혹시 했는데 정말 되네.”
듣고 있었나?”
“묘하게 잘 들리더라고. 이 몸 신기하네. 멀리 있는 사람 목소리도 들리고.”

데이비트는 소년이 자신에게서 파생되었다면 자신의 인식능력 또한 소년에게 갔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한 발 늦게 추론했다.
소년은 테스카틀리포카를 올려다보았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담배를 문 채로 팔짱을 끼었다. 데이비트는 기묘한 조바심을 느꼈다. 소년은 데이비트를 보며 말했다.

“포카랑 얘기하고 싶어.”
“하지만, 날짜가 바뀔 때까지 1시간도 안 남았는데.”
“응, 그래서.”

소년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안 돼?”

데이비트는 테스카틀리포카 쪽을 보았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 데이비트는 잠시 언제나 빠르게 결단하는 그치답지 않게 망설였다. 주먹을 꼭 쥐기도 하고 가볍게 아랫입술을 깨물기도 했다. 그러다가 말했다.

네가 그 녀석을 원한다면.”

데이비트는 테스카틀리포카를 지나쳐 자택 문을 열었다. 의식하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이야기가 끝나면 들어와라.”

문이 닫혔다. 소년과 테스카틀리포카만이 남았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내면을 엿볼 수 없는 유리구슬 같은 눈길로 소년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뭐, 그럼 자리를 옮길까?”
“응.”

테스카틀리포카가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믹틀람파 한켠의 주거지구가 지워지고 평원이 그 자리를 메운다. 멀리서 새와 동물이 우는 소리가 들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안개가 가시성을 저해하는, 영원히 타오르는 모닥불만이 그 장소의 속성을 암시하는 언제까지고 새벽녘인 세계.
영역의 지배자는 어느 틈에 모닥불 앞에 놓인 통나무에 앉아 있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아직도 이런저런 짐에 두 손을 빼앗긴 상태인 소년에게 말했다.

“일단 앉아라. 하루종일 돌아다녀서 힘들었지?”
“응.”

소년은 짐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맞은편의 통나무 위에 앉았다. 테스카틀리포카는 혼자 웃으며 말했다.

“역시 근본은 데이비트랑 같구만. 입발린 소리 하나를 안 하네.”
“아저씨에게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으니까.”
“데이비트 앞에서 어린애처럼 구느라 고생이 많았겠구나.”
“형인데 동생한테 잘해줘야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
“아빠한텐 말 안 했지만 동생이 갖고 싶었거든.”
“하.”

젊은 나이에 요절한 뮤지션과 비슷한 인상의 퇴폐적인 느낌이 드는 남자는 위험한 분위기를 온몸에 둘렀으면서도 어딘가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기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이 사후세계의 컨셉을 들었을 때는 납득한 기억을 떠올린다. 테테오칸의 북쪽 믹틀람파. 패배자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공간.
테스카틀리포카가 말했다.

“그럼, 문제편이 있으면 해결편이 필요하지. 그 소년은 데이비트가 발생한 순간 지구에서 사라졌고, ‘죽은 자의 날’ 이라는 개념에서 발생하는 힘을 빌리더라도 그 소년에게는 내 낙원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 그럼 너는 실재했던 그 소년과 아무 관련도 없는 존재라고 보는 게 타당하지. ─너는 데이비트의 단말이지?”
“응.”
“발생한 목적은?”
“데이비트가 평생 품고 있던 자신의 ‘원본’에 대한 죄책감을 해결하는 것.”

처음에 이 공간에 불려왔을 때는 알 수 없었지만, 데이비트와 하루종일 함께 행동하면서 알았다. 데이비트의 주변의 식자들의 견해로도 데이비트 본인의 견해로도 지구에서 사라진 소년이 돌아올 가능성은 확실히 0%였기 때문에, 데이비트 본인도 평생 막연한 방식으로만 생각해 왔던 욕망이었으므로 확실히 어떤 방식이어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애초에 정말로 속죄를 하고 싶은 거라면 내가 걜 싫어하면 간단할 텐데, 난 데이비트가 딱히 밉지 않아.”
“인간은 보통 진심으로 자기자신을 정죄하기 어려워하는 법이거든. 그리고 데이비트는 너와, 아니, 정확히는 그 소년과 자기자신을 완전히 분리하지 못했어. 인격이란 그렇게 간단하게 분리되는 게 아니야. 인격체가 자기애를 갖는 건 살아남기 위해 당연한 행위다. 그러니 네가 데이비트를 미워하지 않는 건 당연한 거야.”
“하지만 그래도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했지.”
“그래. 그러니까, 지금의 자기자신을 긍정하고 그 죄책감을 해결하고 싶어하면서도, 자기가 그 소년에게 쉽게 용서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거다.”

소년은 한숨을 내쉬며 어른을 흉내 낸 것 같은 말투로 말했다.

“참 내, 어린애한테 너무 많은 걸 바란다니까.”
“동감이다.”
“애초에 말이야, 용서를 빌고 싶다는 이유에서 기인한 거여도 그 아이가 돌아오면 자기가 이룬 모든 것을 주는 걸로 청산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건 단순한 도피에 지나지 않는다고. 바라는 게 개념적이라서 별로 물욕도 없는 주제에. 그런 주제에 내가 자길 쉽게 용서하는 건 너무 자기본위적이라고 생각하지.”

향년 10세의 소년의 모습을 덧입은 13년을 산 향년 23세 청년의 욕망이 말한다. 1년 후 향년 23세가 될 청년의 욕망에 부응한 모습을 입은 신성이 대답했다.

“그 녀석은 자기가 정한 ‘질서’에 크게 얽매이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 정도는 정상참작하자고.”
“그 수단을 생각해야 하는 나는 곤란하다고. 앞뒤가 맞는 주문을 하란 말이야. 뭐그래도 그쪽이 있어서 다행인가.”

앉아 있던 소년이 일어서서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다가왔다. 테스카틀리포카가 앉아 있던 통나무가 사라졌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맥 빠지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무표정한 소년이 테스카틀리포카의 배 위에 올라탔다. 익숙한 고용주의 육체에서 익숙한 굳은살과 13년 분량의 경험치를 빼낸 손길이 몸을 만지는 것을 별 반감 없이 감각하던 테스카틀리포카는 새벽의 하늘을 보면서 물었다.

“그래서 어때. 좀 나쁜 짓 할 기분이 드냐?”
“아니 전혀. 놀라울 정도로.”
“그럼 뭐, 결론 나왔군. 그 녀석은 딱히 죄책감을 해결할 생각이 없구나.”
“응. ‘죄책감을 가진 채로 쭉 괴로워하며 살아간다’야. 진부하게도.”

소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한 손을 올려 소년의 뺨을 만졌다. 소년은 불만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나지만 진짜 낭비가라니까. 고작 몇십 분 분량의 죄책감을 청산할 만한 자기자신의 고통을 얻기 위해서 인격체를 하나 에뮬레이트할 정도의 리소스를 쏟아부었다니.”
“난 상관없는데. 전쟁은 원래 교환비가 말도 안 되는 낭비의 연속이거든? 이런 거 익숙하다고.”
“전쟁신 진짜 싫다.”
“뭐, 봐줘라. 죽은 자의 날이잖냐. 명계가 죽은 자를 위해 있는 것이듯이, 추모는 남겨진 자를 위해 하는 거니까. 그런 복잡한 주문도 받아줘야 하니까 이 일이 힘든 거야.”
“자꾸 잊는 것 같은데 나는 이래봬도 10살이야. 설교는 데이비트 본인한테 해.”

무릎을 툭툭 털며 일어선 소년은 어느 새 다시 생겨난 통나무 위에 앉았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바닥에 누운 채 물었다.

“그래서, 네가 퇴거하기까지 10분 30초 남았다. 퇴거 순간까지 여기에 있어야 그 녀석이 바라던 대가가 되겠지. 뭘 하고 싶지? 캐치볼이라도 할까?”
“걘 당신에게 아빠를 겹쳐보지 않아.”
“칫.”

소년은 간식과 선물이 들어 있는 가방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그 애’ 말이야. 사라지던 날, 아버지의 직장을 견학하고 저녁을 같이 먹을 때 아버지한테 애완동물을 키우고 싶다고 말하려고 했어. 혼자는 외로우니까.”
“흐음.”
“그걸 대신해줬으면 해. 어때.”

연기가 한 번 몰려들었다가 수목 냄새가 나는 바람을 타고 퍼져나갔다. 연기가 사라졌을 때 테스카틀리포카가 있던 자리에는 날렵한 실루엣의, 푸른 눈동자의 검은 고양이가 우아하기까지 한 자세로 서 있었다.
고양이는 모델처럼 당당한 걸음으로 소년의 발치로 다가와 앞발로 스니커즈를 툭툭 쳤다. 소년은 고양이를 안아 올렸다. 고양이는 낮고 달콤한 목소리로 수다를 떠는 대신 ‘야옹’ 하고 울었다.

“진짜 끝까지 뭐 제대로 되는 게 없네. 나는 큰 개를 키우고 싶었는데.”

그래도 소년은 11월 1일이 되는 순간까지 무릎 위에 앉은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믹틀람파의 주거지구의 자택에서 조바심을 느끼며 거실을 빙글빙글 돌고 있는 데이비트 젬 보이드의 고통. 8분 하고도 몇십 초 분량의 2003년에 사라진 소년에 대한 추모. 8분 하고도 몇십 초 분량의 데이비트 젬 보이드의 생애를 위한 필요악.
지구에서 몇십 억 년간 필요악으로 살아온 존재답게, 그 감촉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


11월 1일이 되자마자 돌아온 테스카틀리포카는 별안간 데이비트에게 물건 하나를 내밀었다.

“여. 이거 너 주라더라.”
“응?”
“가능하면 제단 위에 둬 달라던데.”

데이비트가 디노스들의 거주구에 갔을 때 찍은 사진이었다. 항성처럼 웃는 소년 옆에서 점잖은 느낌으로 웃고 싶었지만 실패해서 약간 어색하게 웃는 데이비트가 찍혀 있었다.
한동안 사진 속의 소년의 미소를 관찰하던 데이비트는 익숙한 몸짓으로 데이비트의 자택 냉장고를 뒤지는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말했다.

“얘기는잘 끝났나?”
“뭐 그렇지. 듣고 싶냐?”

테스카틀리포카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태도로 대답했다. 그래도 데이비트는 차이를 알 수 있다. 속내를 읽어낼 수 없는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 저런 상태가 될 경우 데이비트가 캐묻지 않으면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리고 데이비트는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질투와 거부감을 아우르는 싫은 마음이야말로 자신에게 주어질 대가임을 알고 있었다.
데이비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테스카틀리포카는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제단 꾸미는 거 도와줄까?”
“응. 뭐가 들어가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래. 그럼 보자, 네 집에 하얀 천 있던가

죽은 자의 날은 앞으로 이틀 가량이 남았다. 남은 시일 동안은 쭉 소년을 생각하자고, 소년에게 해주지 못한 것을 생각하자고, 소년이 테스카틀리포카와 무엇을 했는지 궁금해하자고, 있는 힘껏 불안해하고 질투를 내자고 생각했다. 남겨진 자가 살아가기 위한 작업을 하자고 생각했다.
항성처럼 웃는 소년의 미소는 허공에서 온 이의 손 끝에 닿기에는 조금 뜨겁게 느껴진다고 데이비트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