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S/레아시스
2024-02-25 18: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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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독신자의 사생활

데이테스. 믹틀람파 주민 데이비트가 테스카틀리포카와 한 달간 떨어져 지낸 경위 이야기.
믹틀람파에 대한 날조설정이 많습니다. 디노스 테페우와 신관 부쿠브, 믹틀람파의 선주민인 모브 전사가 몇 명 등장합니다. 다른 주민들의 가치관과 인격의 영향으로 다른 형태로 현현한 테스카틀리포카의 모습에 대한 묘사가 나옵니다.
테스카틀리포카의 등장이 적습니다...
데이테스 원드로원라이 @Dt_od_ow 참가작입니다. 주제 '목욕', '착지 맡긴다' 를 빌렸습니다.

“물리 세계의 인간이 사회적 체계를 만드는 건 사회의 유지 코스트를 줄이기 위해서야.”

창밖의 믹틀람파의 밤하늘은 어두웠으나 그 관리담당의 특성에서 영향을 받아 약간 흐릿한 색을 띠고 있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노래하듯 매끄럽게 개념어가 많은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장골과 엉덩이 위쪽이 전부 노출되는 노출이 심한 슬랙스, 상반신에는 베스트와 코트만 걸친 데이비트가 잘 아는 옷차림이었고 데이비트를 등진 채 다리를 꼬고 앉은 상태였다.

“사회를 유지한다는 건 유지에 방해가 되는 돌발상황을 통제하는 행위야. 하지만 인간의 인식능력은 대체로 유한하니까 돌발상황이 생기면 중간연락책을 거쳐서 대처해야 하지. 거기 있는 인간들의 힘으로 대처 불가능한 천재지변이 발생하면 소방관이나 구조대에 전화를 걸고, 그 사회의 기준으로 문제가 있는 방식의 죽음이 발생하면 경찰에게 전화를 건다. 네게 익숙한 사회는 그런 식으로 꾸려졌을 거야. 그렇지?”
“그렇지.”

데이비트는 자기 침대에 앉아 있었다. 저녁식사를 하면서 하던 논의가 길어져서 자정 즈음에 들어왔고, 자기 방에 돌아와서 목욕을 하고 침대에 누운 채로 두 시간 정도 뒤척이다가 조금 전에 일어나 앉았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다리를 바꿔 꼬고 발언을 재개했다.

“하지만 이쪽에서는 얘기가 다르거든. 믹틀람파는 영역의 지배자의 힘과 인식능력에 너희들의 지식과 인식능력을 공급해서 성립되는 개념적인 공간이야. 예전에 왔을 때 설명했다시피 여기는 내 몸 안이나 다름없고, 거주자가 내 개입이 필요한 돌발상황에 처했을 때도 굳이 물리세계처럼 번거로운 말 전달 게임을 할 필요도 없어. 여기 처음 왔을 때 설명했다시피, 너희는 염원하기만 하면 된다. 여기는 네가 원하는 순간 그 방식으로 개찬된다. 너희가 나를 필요로 하면 그 자리에 내 단말을 보내면 그만이라는 얘기야.”
“기억은 하고 있다.”
“그렇겠지. 기억력엔 자신 있잖아?”

테스카틀리포카가 데이비트를 돌아보았다. 데이비트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잘 아는 데이비트는 이불을 덮은 채로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새벽 2시 14분이었다.


*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있는데 욕실 밖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크립터. 아직 자고 있습니까?”
“아니, 곧 가지. 커피메이커에 들어있는 게 완성됐을 테니까 마셔도 된다.”

방 밖에 들리도록 조금 큰 소리로 대답했다. 나에 비해 무거운 발소리가 부엌 쪽으로 간다. 머리카락에 거품을 내면서 손님이 거실 탁자 위에 올려놓은 물건을 확인했다. 범인류사의 역사서 몇 권과 노트 몇 권이었다. 젖은 머리카락은 나가서 말리기로 정하고 옷을 갈아입고 나갔다. 깃털색이 푸른, 얼굴에 마안살魔眼殺し을 착용한 디노스가 거실의 손님용 탁자 곁의 바닥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내가 사용하는 머그컵에 커피가 담겨 있다. 준비성이 좋다.
의자에 앉아서 물었다.

“오랜만이다. 지난번에 얘기하던 범인류사의 근미래를 그린 창작물과 칸 왕국이 멸절 직전에 사용하던 교통수단에 대한 얘기라면 나보다 나은 녀석을 추천했던 것 같은데, 얘기가 잘 되지 않았나?”
“아뇨, 그건 잘 교섭했습니다. 다른 분들이 접촉하고 있을 겁니다. 오늘 이야기하고 싶은 건 다른 건입니다. 어제 칸 왕국의 멸망 시기의 국민들의 행동에 대한 견해를 이야기했는데

이 디노스는 치첸 이차의 신관 출신이고 아키타입의 지인이기도 하지만 내가 믹틀란에 가기 전에 도시를 떠나 틀랄로칸 근방에 은거했다. 그래서 그 즈음까지는 내 사고 범위에 없던 존재인데, 칼데아의 침입 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칼데아와 함께 행동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얼굴과 성품은 기억에 있었다. 생전의 나는 공들여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은 문장으로 만들어 기억했기 때문에 어지간한 디노스는 내 머릿속에서는 외양과 문장 몇 줄로 축약되고는 했는데, 그런 요인 때문에 아이러니하게 이 디노스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공들인 기억이 남아 있었다. 기묘한 기분이다.
내가 생각에 골몰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디노스는 계속 말했다.

“─그래서 범인류사에서 지내던 분들이랑도 디노스들이랑도 영 시점이 안 맞는 것 같아서, 믹틀란에서 오래 지내봤지만 디노스도 오셀로틀도 아닌 당신이 제일 적절하겠다고 생각해서 의견을 구하러 왔습니다. 괜찮습니까?”
“오늘은 스케줄이 있어서. 아침식사를 하는 동안만이라도 괜찮다면 얘기하고 가라. 원고는 두고 가면 읽어보고 다음에 만날 때 견해를 대답해 주지.”
“오, 고맙습니다.”

믹틀란의 마지막 때, 그러니까 내가 죽고 믹틀란의 ORT가 부활한 뒤 살아있던 디노스와 오셀로틀 대부분이 믹틀람파에 도달했다. 몸이 작은 쪽의 테스카틀리포카가 성공한 건지 칼데아와 합이 잘 맞았던 건진 모르겠지만 내가 믹틀란에서 지내던 시기의 모습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결과였다.
아무튼 그 결과 여기에 도착한 디노스도 오셀로틀도 꽤 고무된 상태였고, 그들은 믹틀란의 모든 것을 기록과 지식으로 남기고 싶어했다. 이 영역의 관리담당인 테스카틀리포카는 자기 라이브러리의 정보가 늘어난다면 대환영이라는 태도였으므로, 이들의 기묘한 믹틀란 역사연구회 모임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이어지는 상태였다. 대부분 지식인인 디노스는 탐구작업에 다른 시각에서의 의견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빠르게 간파했다. 오늘의 손님은 그 중 지식에 제일 탐욕스러운 개체였다. 나는 딱히 적극적이지는 않았지만 믹틀란에서 생활한 적이 있고 범인류사에 대해서도 그럭저럭 잘 알고 있다는 이유로 간혹 디노스나 오셀로틀 일행의 자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도 믹틀란이 그 형태에 도달한 진상이나 칸 왕국의 역사를 탐구하는 작업을 꽤 즐겁게 했기 때문에 나쁘지 않은 경험이었다.
아침식사를 먹으면서 디노스와 칸 왕국 유적의 마지막 마무리를 한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디노스는 대체로 디노스가 아닌 생물이 자멸을 각오하고 오기를 부리는 이야기를 슬프게 여기면서도 좋아한다. 그래서 디노스는 슬픈 표정을 지으면서도 계속 내 이야기를 재촉했다. 자신이 사라진 뒤에도 남겨질 것을 완벽한 형태로 마무리하고 싶었을 거라는 추측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식사를 마칠 즈음에 누군가가 또 거실에 나타났다.

“눈을 뜨자마자 식사도 안 하고 탐구욕부터 채우려 들다니, 네 지식욕에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나보다 디노스가 먼저 반응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왕.”

믹틀란에서는 공룡왕이라고 불렸던 미들스쿨 다닐 나이쯤으로 보이는 소년이 거실 소파에 불량한 자세로 앉았다. 내가 알던 그 개체는 아니다. 믹틀람파의 관리담당인 테스카틀리포카는 고객들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위해 고객 응대용 단말을 하나씩 배정한다. 믹틀람파의 전사들은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자신의 의식과 지식과 인식능력이라는 정보를 제공하고 테스카틀리포카는 그 정보를 토대로 전사가 관측할 자기 단말의 형태를 디자인한다. 보통은 그렇지만, 믹틀란에서 한 번 육체를 입은 테스카틀리포카를 관측한 적이 있는 믹틀란의 주민들이나 나는 예외다. 디노스는 대체로 이 건방진 느낌의 노출이 심한 옷차림의 소년의 모습을, 오셀로틀이나 나는 선글라스를 낀 노출이 심한 옷차림의 중년이라 지칭되는 나이로 접어들기 직전인 청년 혹은 그에 혼재된 이스칼리의 모습을 본다. 이 디노스는 전자다.
나는 소년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소년은 고개를 끄덕여준 뒤 디노스를 보며 말했다.

“너 말이다. 대화 상대가 있으면서 자꾸 부르지 마. 내가 무슨 메모장인 줄 알아?”
“상위맥락을 생략하고 말해도 상관없는 대화 상대가 몇 없거든요. 제가 집에 돌아갈 때까지만 상대해 주십시오.”

이 디노스는 상위맥락을 설명하지 않아도 말을 잘 알아듣는 테스카틀리포카를 대화를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용도로 자주 써먹은 모양이었다. 소년은 코웃음을 치고 내가 내미는 조금 식은 커피를 받았다. 커피를 마신 소년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말했다.

“나는, 아니 ‘테스카틀리포카’ 는 딱히 달콤한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그건 미안하게 됐군. 나는 범인류사 출신이니까 아무래도 네 외양에 얽매이게 된다. 다음에 대접할 일이 있으면 설탕은 그 분량의 반만 넣으마.”
“아니, 넣지 말라고.”

소년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디노스는 원고와 참고서적을 거실 탁자에 놓아두고 돌아갈 채비를 했고 나는 셔츠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 디노스가 디노스도 드나들 수 있는 크기로 개축한 문 쪽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범인류사의 신이 안 보이네요. 처음에는 꽤 자주 붙어 다니지 않았나요?”

물론 이것도 일반적인 호칭이 아니다. 내 몫의 테스카틀리포카의 단말을 디노스들에게 익숙한 호칭으로 부르는 것이다. 나는 소년을 흘깃 바라보았다. 소년은 우리가 하는 이야기에 별 관심 없다는 태도로 디노스가 집필한 원고를 뒤적이고 있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한 태도로 대답했다.

“조금 사정이 있어서.”

내 테스카틀리포카가 안 보인 지 2주일째다.


*


햄버거와 감자튀김이 먹고 싶어져서 시계탑 시절 자주 가던 패스트푸드점을 생각했다가 낯익은 사람과 마주쳤다.

“데이비트 아니냐. 오랜만이네.”
“음.”

믹틀람파는 개념적인 공간이고,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정보만 잘 제공해 주면 염원하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것은 대부분 갖춰진다. 믹틀람파는 기본적으로 주민들을 좋은 상태로 유지시키는 걸 목적으로 기능하는 공간이고, 여기 오는 인격체들은 대부분 사회적 동물이므로 믹틀람파의 주민들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대체로 다른 주민들과 함께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같은 시간에 같은 속성을 지닌 공간을 원할 경우 다른 상대와 마주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남자는 믹틀람파에 드물지만 꾸준히 유입된다는 범인류사 출신의 현대인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무신론자로 자라고, 뼈를 깎는 노력을 한 결과 변호사 자격을 따서 폭력조직의 자문 담당으로 살다가 조직 간의 싸움에 휘말렸다. 적 조직이 보낸 암살자에게 살해당할 때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죽어버렸다. 자기 같은 녀석도 받아주는 교리를 가진 사이비가 아닌 종교는 없을까 한 번 탐구해본 적이 있는데 그때 테스카틀리포카 신앙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딱히 독실하게 믿은 것도 아닌데 죽을 때 이리로 와버렸다고 한다. 이 남자는 평균적인 미국인이라서, 패스트푸드점이나 영화관이나 배팅 센터에 가고 싶어질 때 간혹 마주쳐서 안면을 트게 되었다.
남자는 치킨 한 버켓과 코울슬로와 콜라가 올라간 쟁반을 들고 자연스럽게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핫도그와 햄버거 하나와 감자튀김과 스프라이트가 남아 있는 쟁반에서 햄버거를 두 개째 집어들었다. 남자가 물었다.

“무슨 일 있냐? 표정이 안 좋은데.”
“보통은 모르던데. 좋은 역량이군.”
“내가 뭐 하면서 살았다고 생각해? 그리고 네가 젊으니까 그렇지.”

나이가 많고 사회적 경험치가 많은 상대는 이래서 곤란하다. 조금 망설이다가 솔직하게 상담하기로 했다.

“테스카틀리포카가 여기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알고 있다는 걸 어떻게 생각하지?”
“프라이버시? 의외네. 너 신이랑 꽤 막역하지 않았냐?”

대답하지 않고 입 안의 것을 씹었다. 빵과 고기, 소스, 토마토의 맛에 집중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남자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뭐 내 생전이라면 모르겠지만, 신이 실존하는 세계라니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냐. 신이 나를 유지해주는 시점에 신은 내 방향성을 포용해주기로 결정한 거잖아. 우리 신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싸움을 부추기는 신이고, 이 동네에선 같은 전사를 배제하려 드는 게 아니라면 어떤 욕망이건 대체로 허용되니까. 처음엔 좀 불안했지만 요즘은 별 신경 안 써.”
“하지만 테스카틀리포카가 우리의 욕망을 허용해주는 것과 별개로 개인적으로 수치심을 느낄 수도 있지 않나. 그건 어떻게 생각하지?”
“글쎄다. 애초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느끼는 수치심의 근본도 내가 부끄러워할 만한 일을 남들이 알게 돼서 내 앞날을 망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잖아? 하지만 여기선 위기감을 느낄 필요도 없고.”

남자는 이야기하면서도 착실하게 치킨 버켓을 비워냈다. 나는 탄산음료를 삼키면서 예전에 한 번 본 적 있는 이 남자의 테스카틀리포카를 떠올렸다. 검은 머리카락에 피부색이 검은 미인으로, 전투력이 높고 위험한 느낌이 들고 매력적이지만 어딘가 포용력이 느껴지는 여성이다. 그때 이 남자에게는 미안하지만 나 정도면 꽤 점잖은 사람이라고 느꼈기 때문에 잘 기억하고 있다.
남자가 기분 나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알겠다. 자위하던 도중에 신이 뭔가 욕정이 생길 만한 모습으로 코앞에 나타나기라도 했냐?”
“그건 지나치게 품위 없는 비유라고 생각한다.”

나는 진실을 말했지만 상대가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남자는 ‘나 때는 말이야’ 라는 관용어구를 인간의 형태로 구현화한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네 경우엔 그 누나, 아니 아저씨가 신보다는 참견 잘 하는 집주인처럼 느껴지는 것도 이해는 가는데.”

믹틀람파에 인간종이 아닌 인류가 대량(이라고 해 봤자 수효는 몇 백도 안 되겠지만)으로 유입되고, 이 사건의 발단에는 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디노스들과 오셀로틀들이 숨기지도 않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 낙원에서 내 이야기는 나름대로 유명하다. 내가 발생한 원인 이야기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내가 테스카틀리포카를 인간의 몸에 가둔 채 불러내서 믹틀란을 멸망시키려 한 이야기는 다 알려져 있다. 테스카틀리포카가 현역이던 시대의 전사들은 현대인은 불경한 녀석이라며 나와 일정 거리를 두었지만 현대에 가까운 시대의 전사들은 자기 취향의 전사가 자기 존재를 알고 있으면 아무나 막 데려오는 신인 줄은 알았지만 저런 것도 세이프냐며 탄성을 내뱉고는 했다. 시계탑 때도 나는 나름대로 유명인이었지만 여기서는 좀 다른 방식으로 희한한 녀석으로 알려졌다. 생전부터 신을 군수물자 겸 룸메이트 취급한 녀석으로 말이다.
남자가 몇 마디를 더 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남자는 그 동안 혼자서 결론을 내렸는지 비운 쟁반을 들고 일어서면서 말했다.

“사정은 잘 모르겠다만 적당히 합리화하고 살아. 너도 들었겠지만, 신이 여기는 살면서 쌓인 거 머리 식히면서 내려놓고 자기 자신이 다음 싸움을 해도 괜찮겠다고 납득해야 떠날 수 있는 곳이라고 그랬잖아. 신이 너 지켜보는 거 부끄러워하면 여기 생활 힘들어진다. 그래서 제대로 된 휴식을 제공할 수 없다면 신도 좌시할 수 없으니 너를 더 신경 쓰게 되고 그리고
“알고 있으니까 그만 가 주겠나?”

남자는 다 안다는 듯 끄덕이며 내 어깨를 토닥이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테이크아웃을 할 걸 그랬다.


*


다른 지성체가 참견하지 않는 장소에서 머리를 식힐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에 잠에서 깨어나면 뭔가 보기 좋고 발로 뛰면서 조사하는 맛이 있는 장소이기를 바라면서 잠든 뒤 깨어났더니 그랜드 캐니언에 주차된 차 안이었다.

…….”

운전석에 앉은 채 이 영역의 지나친 친절함에 대해 잠시 고찰한 뒤 차 안에서 빠져나왔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항상 애용하는 카고 바지에 코트 차림이었다. 어쨌든 머리를 비우는 데는 몸을 혹사시키는 게 좋다.
협곡을 이루는 절벽, 모래, 자갈, 동식물, 끊임없이 색을 바꾸는 하늘과 구름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감각하고 기록하면서 ─ 믹틀람파의 내 육체는 테스카틀리포카의 힘으로 유지되기 때문에 통상적인 인체의 저쟝용량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내 기억 데이터도 온전한 형태로 보존할 수 있다. 일반적인 전사 열 명을 유지할 수 있는 리소스를 사용해야 하는 결점이 있기는 하지만 ─ 걸었다. 데이비트 젬 보이드의 전신이 된 소년이 어른이 되면 운전면허를 따서 꼭 가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장소(를 중남미의 신이 자기 영역에서 섬세하게 재현한 공간)에 죽은 뒤에 찾아오게 되었다. 내 안에 남아있을지도 모르는 10세 소년이 여기에 온다면 기뻐해 줄까, 혼자 생각했다.
10분 정도 걷다 보니 절벽 끝에 도달했다. 건너편의 단애절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지금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일몰까지는 아직 먼 하늘을 보면서 말했다.

“착지 부탁한다, 테스
“아니, 크립터 네가 왜 여기서 나와?!”

낯익은 목소리였다. 반사적으로 절벽 밑을 내려다보았다. 치첸 이차에서 몇 번 본 익룡 형태의 디노스와 테스카틀리포카 시대의 중남미 양식으로 몸에 장신구를 두른 인간 여자가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둘 다 구면이다. 난감해졌다. 저 디노스는 비행능력은 있지만 오셀로틀이나 나를 굉장히 싫어하고, 바로 내려가기는 난감한 상황.
여자가 내 속내를 읽어낸 것처럼 말했다.

“그대로 뛰어내려! 위대한 테스카틀리포카께서 받아주실 테니까!”

몸을 수그려 충격을 줄이는 자세로 아래로 뛰어내렸다. 몸이 이내 따뜻한 털에 파묻혔다. 무엇인지는 알고 있다. 몸길이가 4m 정도 되는 털이 검은 재규어다.
내가 고개를 들자 재규어가 아버지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냐.”
“음. 고맙다.”
“감사인사는 저 애한테 해야지.”

뒤따라 다가온 여자가 웃었다. 여기 올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여도 테스카틀리포카의 시대에 믹틀람파에 온 고참 전사 중 하나다. 귀족 출신도 전사 출신도 아니지만 금전을 노리고 집에 침입해 자기 가족을 죽인 괴한의 얼굴을 봐버렸다. 살아남는 길도 있었겠지만 가족의 원수를 갚기 위해 굴하지 않고 싸웠다. 하지만 전투기술도 모르는 평범한 여자에게는 역부족이라 괴한에게 살해당했고,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전사의 위업으로 인정받아 믹틀람파에 왔다. 자기가 죽은 이후의 세계의 문물을 좋아하고 호기심이 많다. 슬슬 떠날까 마음먹을 즈음이면 새로운 탐구대상이 나타나서 다시 눌러앉는 걸 반복해온 테스카틀리포카 신의 골칫거리들 중 하나라고 본인 입으로 자기소개를 했었다.
거대 재규어, 그러니까 그녀에게 배정된 테스카틀리포카의 단말은 하품을 하면서 곁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디노스의 날개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부쿠브 이 친구가 멋진 곳을 날고 싶어 하길래 말이야. 내가 여기서 가본 장소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곳을 안내해주던 참이었지.”
“아니 그게 아니라! 범인류사의 디노스는 어떻게 살았을지 궁금하니까!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라고 들어서 탐구 차원에서 따라왔을 뿐이다!”

디노스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이 디노스는 디노스답지 않게 사적인 욕망이 강한 개체인데 그래서 이것저것 나쁜 생각을 하고 음모를 꾸미지만 묘하게 희극미가 있어 잘 놀림당하고 남의 페이스에 잘 휘말려든다. 나는 남을 놀리는 걸 좋아하진 않고, 내 계획에 도움이 되어주었으므로 더 놀려먹을 생각은 들지 않아서 선선하게 말했다.

“그랜드 캐니언은 비행하면서 관광하는 게 제일이라고 들었다. 현명한 선택이군. 적당히 즐기고 가라.”
“그러니까 단순히 놀러 온 게 아니라
“데이비트는 같이 안 갈 거니? 부쿠브가 등에 태워줄 수도 있는데.”
“조금 걸으면서 혼자 생각하고 싶어서. 그래도 제안해 줘서 고맙다.”
“네 테스카틀리포카 신이 요즘 안 보이던데 그 일이니?”
“다들 그 이야기만 하는군.”

한 달째 내 테스카틀리포카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못한 건 아니고 안 한 거다. 내 생활은 테스카틀리포카가 없어도 별로 불편하지 않고, 오셀로틀들이 관측하는 테스카틀리포카의 단말은 내가 아는 형태와 이스칼리의 형태가 섞여 있으니 주변인들도 별 신경 안 쓸 줄 알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혼자 고민에 골몰해서 다른 사람들이 말을 옮기고 옮겨 내 이야기가 다 퍼질 거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여자가 말했다.

“그거, 테스카틀리포카 신을 신앙하지 않는 사람이 믹틀람파에 오면 다들 한 번씩은 겪는 거니까 너무 걱정하진 말렴. 테스카틀리포카 신을 신보다는 말이 통하는 인격체로 생각하면 많이들 그렇게 되더라.”
“그래도 뭐, 이해가 가는군. 왕께서는 가끔, 아니 자주 디노스를 곤란하게 하셨지. 필시 보이지 않는 동안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걱정되는 것 아니냐.”

디노스가 끼어들어 말했다. 저 디노스는 치첸 이차에서 신관장을 맡고 있었고 마지막 때 푸른 쪽 테스카틀리포카를 등에 태우고 싸웠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꽤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시달렸으리라. 테스카틀리포카의 트러블메이커 행각에 시달리는 거라면 나도 꽤 일가견이 있다. (본인이 들으면 누가 할 말이냐며 역정을 낼 것이다) 논점이 좀 다른 발언이지만 공감이 갔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가 다시 말했다.

“나는 말이야, 죽을 때 더 이상 싸워줄 사람이 없으니까 맞서 싸웠거든? 그래도 내심으로는 내가 의지할 만한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나 봐. 그래서 내 테스카틀리포카 신은 이렇지.”
“그냥 네가 오셀로메를 좋아할 뿐이잖니.”
“어린애 앞에서 제 내면에 대해서 너무 솔직하게 말하지 말아 주세요.”
“고작 30년 남짓 산 녀석이 늙은 척하기는.”

디노스가 재규어와 여자의 대화에 끼어들어 투정 부리듯 말했다. 나는 조금 웃고 여자에게 물었다.

“당신의 생활에, 테스카틀리포카의 수호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처음 왔을 땐 좀 그랬지만 요즘은 안 그래. 여기서 이것저것 하면서 이것저것 알게 됐고, 기억에 남지는 않겠지만 다음 세계에서는 지난번 세계처럼 그냥 죽지는 않을 자신이 있거든.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냥 여기서 호기심을 채우는 게 즐거우니까 늦장을 부리는 거랄까. 그게 다음 세계로 가기 전에 내가 극복해야 할 과제인 것 같아.”

여자가 재규어에게 눈을 찡긋했다. 재규어는 코웃음 같은 소리를 내더니 협곡 저편으로 가 버렸다. 재규어의 꼬리에 달린 낯익은 칼날 같은 형태의 장식에 눈길을 고정하고 있자니 디노스가 말했다.

“치첸 이차에 왕이 나타났을 때, 사실 정말로 위대한 존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쓸모는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신관의 발언이라 생각할 수 없는 발언이군.”
“네가 할 말이냐?”

그건 그렇다. 일단은 신관 노릇을 했었는데 도시에 거의 머무르지 않아서 거의 다 잊어버렸다. 디노스가 말했다.

“이런저런 일이 있었고, 우리 믹틀란은 결국 멸망했다만, 지금도 비슷하게 생각한다. 왕은 번거롭고 곤란하지만 그래도 곁에 있으면 쓸모 있고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존재야.”
…….”
“너는 믹틀란에서 범인류사의 신을 물건처럼 썼다고 들었다. 그러면 잘 알겠지. 그러니 보고 있으면 우울해지는 꼴로 다니는 건 슬슬 관둬라. 믹틀람파에 사는 디노스를 대표해서 부탁하마.”

디노스는 인간으로 치면 혀를 차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면서 여자와 함께 사라졌다. 나는 혼자가 된 것을 확인한 뒤에야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보니 이제 숨이 멎을 만큼 멋진 풍광에도 집중할 수가 없었다.


*


라이브러리에 들렀다가 저녁을 먹고 들어와서 샤워를 하고 있는데 누가 샤워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테스카틀리포카였다.

“여, 오랜만이다.”
“응.”

테스카틀리포카는 샤워실 문을 닫고 문에 팔짱을 끼고 기대어 섰다. 나는 샤워기 옆에 선 채 바디워시를 샤워볼에 붓고 거품을 냈다. 하던 일에 집중하는 평소의 나처럼 보였지만 실은 테스카틀리포카와 눈을 마주치기 싫어서였다. 침착하게, 천천히 말을 골라서 말했다.

“그 날 디노스들이랑 얘기할 때, 극저온으로 온 빙하기 때문에 인류가 멸망 위기에 처하는 범인류사에서 만들어진 영화 얘기를 했다.”
“《The Day After Tomorrow》?”
“그래, 그거.”

칼데아에서 한 상영회에서 본 작품이었다. 칼데아는 남극대륙에 있었으니 상영회 참가자들은 생각보다 영화에 크게 몰입했고 큰 소리로 감상 이야기를 했다. 나는 어차피 그런 부류의 영상물을 기억에 자세히 남길 수 없기 때문에 그리 열심히 관람하지는 않았지만, 도서관에 머무르며 책을 태워서 살기 위해 발악하던 등장인물들이 서로 몸을 붙이고 꼭 붙어있는 장면이 묘하게 인상 깊게 느껴져서 그날 분량의 기록에 넣었다.

“너, 너만 모르지 꽤 감상적이라니까.”
“알고 있다.”
“그래서 내게 한 달이나 축객령을 내린 이유가 그거냐?”

손을 멈추고 테스카틀리포카를 돌아보았다. 테스카틀리포카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웃고 있다. 장난질과 고약한 농담을 좋아하지만 남의 진심을 비웃지 않는다. 그래도 조금 두려워서 말했다.

“어차피 너는 다 알고 있잖나. 알면서
“하지만 너는 굳이 말하고 싶다고 생각해서 나를 불렀지. 그래서?”

무자비하다. 그래도 이럴 때는 나쁘지 않다.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날, 내 방에 돌아와서 그날 한 이야기를 복기하던 도중에 그 장면이 떠올라서. 내가 혼자서 누워 있다는 걸 상기했다가.”
“흐음.”
“누군가와 함께 한 이불을 덮고 자고 싶다고 생각했어. 그랬더니 네가 나타났다.”

차라리 믹틀란에서 물리적인 마력공급에 의존하던 생활의 영향 때문에, 익숙한 상대인 테스카틀리포카와 섹스를 하고 싶었다던가, 뭐 그런 비교적 솔직한 욕망이라면 이만큼 부끄럽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혼자서도 자기 앞가림을 하면서 살아왔다는 자부심이 있었고, 테스카틀리포카에게 훌륭한 전사로 인정받은 사실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믹틀란에서 테스카틀리포카를 사용할 때도 꼭 필요한 일에만 신중한 방식으로 사용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혼자서 자는 게 허전하다는 어린애 같고 사소한 이유로 테스카틀리포카를 불러내는 건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인정받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것 같아서. 내가 혼자서 아무 문제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완성된 개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들켰는데, 테스카틀리포카가 그 사실을 최대한 내 자존심이 상처받지 않을 방식으로 해명해주려 애쓰는 것 같아서.
그 날은 바로 테스카틀리포카를 쫓아냈다. 밤은 뜬눈으로 지샜다. 그 뒤로 한 달간 나의 테스카틀리포카 없는 생활을 했다. 내 무의식이 테스카틀리포카를 부르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견딜 수 없었다. 믹틀람파에서 많은 사람을 사귀었지만, 그 누구도 테스카틀리포카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다른 주민들의 테스카틀리포카를 볼 때마다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다.

“그런 이유가 있었어. 자, 이제 후련한가?”
“별로. 인격체는 복잡해. 자신의 모든 것을 터놓고 드러내거나 인정받고 싶어하는 한편으로 자아를 지키고 싶어하고 사생활을 보장받고 싶어 해. 너는 조금 인식능력과 연산능력이 뛰어난 개체일 뿐 인격체로서는 다른 녀석들과 다르지 않아. 여러 번 겪은 일이야.”
“위로하는 건가?”
“사실을 사실 그대로 말하는 것뿐이야. 아무튼 너는 그래서 상처입은 자존심을 나를 호출하지 않고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다고 증명하는 걸로 회복하려고 했지만, 그 이상으로 내가 없는 생활을 견딜 수 없게 돼 버렸고. 아니, 친구도 많으면서 진짜.”
“누가 너를 대신할 수 있다는 거야.”
“뭐, 당연하지.”

테스카틀리포카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나는 말했다.

“내게도 나는 남들과는 다르니까, 나는 좀 더 특별하고 성숙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싶은 욕망 정도는 있었던 것 같다.”
“그러냐.”
“하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았어. 남들이 내 문제를 먼저 파악하고 배려하게 만들어 버렸다. 그것도 너와의 문제로. 그렇게 생각했더니 문득 지금까지 이런 짓을 한 게 전부 바보 같아졌어.”

사실은 테스카틀리포카를 저녁 식탁에 부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식사를 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미뤄서, 결국 샤워를 할 때에야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분명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자기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힘으로 유지되는 인격체들의 프라이버시와 자신의 방식을 동시에 납득시켜 주기 위해 언제나 노력하고 다 보여도 눈을 감아주는 친절하고 자비로운 패자의 낙원의 관리담당이니까.
그래서 나는 말했다. 테스카틀리포카가 다 아는 사실을. 뻔뻔하게.

“사과는 안 하겠다. 잘못한 것도 아니고.”
“무엄하긴.”
“목욕을 도와줘. 그리고 내 침대에서 자고 가라.”
“그러지, 뭐.”

나는 테스카틀리포카가 내 머리를 감겨 주는 동안 몇 번 졸았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내 실내복을 입은 테스카틀리포카의 가슴에 얼굴을 처박고 있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그다지 부끄럽지 않았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