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S/레아시스
2023-06-25 06: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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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세계의 벌레들

데이비트가 믹틀람파를 완주한 뒤의 이야기.
CP 요소가 엷습니다. 데이비트가 자신의 전신이 된 존재들에게 갖는 감정, 테스카틀리포카가 그랜드로 소환된 이유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이 있습니다. 후반은 사실상 원작 세계선에서 이어지는 현대 au에 가깝습니다. 어른 데이비트와 소년 테스카틀리포카가 등장합니다.
데이테스 원드로원라이 @Dt_od_ow 참가작입니다. 주제 '해피엔드', '테테오칸의 북쪽', '아버지' 를 빌렸습니다.

아침, 익숙한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나는 문득 휴식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테스카틀리포카를 불러내서 그 사실을 말했더니 별일도 아니라는 듯 ‘그러냐. 그럼 갈까’라며 앞장서서 길을 나섰다. 약간의 얼떨떨함과 아쉬움과 묘한 두근거림을 느끼는 상태로 믹틀람파의 주거지구를 벗어났고, 테스카틀리포카를 따라서 안개가 낀 새벽녘의 황야를 하루종일 말없이 걸었다. 하루종일.
테테오칸 사양의 육체에는 피로도 수면 부족도 없었다. 그래도 역시 한 번에 이만큼 이동했으면 조금은 쉬는 것이 낫다면서 테스카틀리포카가 마음대로 모닥불을 피우고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모닥불 앞에 마주 앉았을 때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물었다.

“뭔가문제가 생긴 거 아닌가?”
“딱히. 테테오칸은 개념적인 공간이야. 입구는 네가 처음에 봤던 그곳이지만, 전사가 지낼 주거지구와 출구는 본인이 가진 염원의 형태대로 구성돼. 그러니까 출구로 가는 길이 이런 형태가 됐다는 건 네가 이만큼의 시간 혹은 공간을 원했다는 뜻이겠지.”
“내가?”
“그래. 너는 항상 하고 싶은 말이 많았잖아. 마침 시간도 공간도 생겼으니 만족할 만큼 해라.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끝에 도달할 거다.”

그래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싫증을 잘 내는 테스카틀리포카는 나의 얼떨떨함도 당황스러운 마음도 아쉬움도 묘한 홀가분함도 전부 성실하게 듣고 맞장구치고 반문하며 나와 어울려 주었다. 그게 일주일째를 맞이했을 때, 어째서 이렇게 길어진 건지 나도 잘 모르겠다고 솔직하게 말하자 이런 답변이 돌아왔다.

“네가 네 존재방식에 가진 의문이 많았기 때문이야.”
“그런가? 빠르게 납득하고 행동방침을 정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납득이 아니라 포기야. 네 기억용량이나 온갖 위험에 처해 있는 지구 같은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네가 만족할 만한 형태로 해명하는 걸 포기한 거지. 인간은 대체로 자기가 하는 일에 필연성을 부여하고 싶어하는 존재야. 그리고 너는 어떤 필연성도 없어 보이는 네 존재방식을 의문스럽게 여겼지. 그리고 운 좋게 사후에 그걸 고찰할 시간이 생겨났어. 이건 인간 학술연구자로 치면 그래, 논문을 발표하는 학술대회 같은 거야. 칼데아의 마스터 앞에서는 무심하고 별 집착도 없는 동경할 만한 인간인 척을 했지만, 너도 내심으로는 네 생애의 결론을 누구에게든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지.”

나 혼자 발표하고 테스카틀리포카 혼자 질문하는 학술대회는 3주 가량 더 이어졌다. 기억하는 양은 적어도 잘못 기억하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자랑거리로 삼고 있었는데 이 여정 동안은 그 자긍심이 무색해질 만큼이나 많은 이야기를 했다. 보다 폭 넓은 ‘선한 일’을 하고 싶어서 시계탑 전승과를 떠난 일이나 그때 묘렌지를 만나러 간 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처럼 꼭 하고 싶던 이야기도 있었고, 솔직히 그다지 하고 싶지 않던 이야기도 있었다. 좋은 일을 한 이야기는 꺼내기 쉬웠고 내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이야기 또한 비교적 꺼내기 쉬웠지만, 나쁜 일을 한 이야기는 여정의 후반부에 산발적으로 튀어나오고는 했다.
그것 또한 안개가 낀 황야를 헤매고 다닌 지 한 달째 되던 날 꺼낸 이야기였다.

“전승과에서 일할 때 봉인지정당한 마술사에게 은혜를 팔고 좀 특이한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네가 특이하다고 할 정도면 드물긴 했나 봐. 뭐였는데?”
“사소하고 인리人理를 구성하는 사건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총 구성성분이 200g를 넘기지 않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좋으니 물건 하나를 처음부터 그 자리에 없던 것으로 해줄 수 있다고 했다. 아예 없애는 건 불가능하지만 다른 장소로 옮겨놓을 수는 있다고.”

세 걸음 정도 앞서서 걷던 테스카틀리포카는 긴 머리카락을 흔들며 뒤를 돌아보았다. 눈을 마주친 상태로 말하고 싶으냐는 뜻이었다. 나는 한 손을 흔들어 거절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나를 등진 채 되물었다.

“그래서?”
“생각했어. 어쩌면 전승과 부지 내에서 일어난 ‘그 일’의 전개를 바꿀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좋지 않은 사건이었다. 지구상에서 두 사람의 존재가 완전히 부정당했다. 단순하게 사칙연산으로 따져도 두 사람이 지구에서 사라지고 한 사람이 태어났다. 불행을 방치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나는 ‘보다 좋은 일’을 하는 것을 테마로 생존을 이어가는 생물이었다.
행동하기에 따라 지구를 구할 수 있는 연구과제를 끌어안고 있던, 그래서 드물게 진심으로 감사하던 봉인지정당한 마술사를 눈앞에 두고 생각했다. 마술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하며 생존하더라도 온갖 위험에 처한 지구를 보호하기는 어려운 일반인 두 사람의 생존. 뛰어난 마술사는 아니지만 최소한 반경 140억 광년 안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파악하고 인류 한 명분의 범주 내에서는 확실히 위험을 방지할 수 있는 나의 생존.

“그래서 거절했다. 말은 고맙지만 내가 개입할 필요가 없는 안건이라고.”
“너답군.”
“내가 그 결론을 낸 게 좋은 일을 하기 위해서였는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어서였는지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결론을 냈지?”
“후자다. 그때 나는 죄 없는 두 사람의 생존보다 지금의 나의 생존을 선택했다. 내가 현생인류와 지구에게 보다 도움이 된다는 건 핑곗거리에 불과했을 뿐이야. 나는 지금의 나로서 살아 있고 싶었다. 나를 잃고 싶지 않았어.”

테스카틀리포카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피를 토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으므로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

“감상 같은 거 없나?”
“별로. 내 가치관 기준으로 보면 좋은 자세지만 너는 그걸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잖아? 이 이야기를 하기까지 오래 걸렸으니 그만큼 큰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고. 너는 지금 자기자신의 삶에 대한 결론 이야기를 하고 있지. 내가 불필요한 감상을 말해 봤자 완성도만 해칠 뿐이야.”
“그걸 다 말해 주니까 네가 미움받는 거다.”
“너무하네. 공정함은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몇 안 되는 미덕이라고.”

테스카틀리포카는 어깨 위로 두 손을 들어 올려 보였다. 나는 침묵했다. 믹틀람파에 도착한 뒤에야 깨닫게 된 저 무심한 태도로 자기 속내를 숨기지 않고 솔직하게 말해서 상대의 부담을 덜어주려 하는 사려 깊음이 고마웠지만, 지금은 그에 걸맞고 적절한 어휘를 찾을 수가 없었다.
5분 정도 마음을 진정시킨 뒤 말했다.

“그래서, 그 즈음부터는 아버지그 사람이 바랐던 형태대로 살아가는 것을 그 둘에 대한 속죄로 간주해도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나는 항상 시간이 없었으니 오래 곱씹을 수는 없었지만.”
“그 사람이라.”
“유전적 공통점을 가지고 있고, 그 당시 갓 발생한 내가 행동방침을 결정하게 해준 존재니까 편의상의 문제로 아버지라고 지칭해 왔지만 엄밀히는 내 아버지는 아니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와 그의 아들이 생물체로서의 삶에 종지부를 찍는 원인을 제공해버린 내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는 건 그 인간도 달갑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군.”

나는 옅게 웃었다. 살아 있는 동안은 이 감정에 쏟을 여유와 리소스가 없었다. 그래서 인생의 끝을 맞이하고도 한참 뒤에야 가능했던 고찰이다. 내가 태어난 지역의 인간들이 인류에게 필연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해온 테스카틀리포카의 땅에는 본래 없던 개념. 인간에게도 우주에서 온 생물에게도 똑같이 부여되는 탄생과 함께 맥동하는 원죄. 온 지구상의 인격체 모두에게 수치심 없이 내 행동은 정당했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적어도 그 둘에게만은 당당하게 고개를 들 수 없는 이유.
테스카틀리포카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가시성을 해치는 안개에 둘러싸여서도 여전히 예리한 눈빛의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물었다.

“네 견해를 듣고 싶다. 아버지는 생물로서의 삶을 빼앗겼지만, 죽음 이후에도 자기가 바라던 것을 이어줄 나라는 존재를 얻었지. 아버지는 결과적으로 해피엔드를 맞이했다고 생각하나?”
“난 ‘대답은 정해져 있고 넌 말하기만 하면 돼’ 식 화법 싫어해.”
“알아. 하지만 나는 네 고객이다. 곧 떠날 고객이기도 하지.”
“뻔뻔하기는.”

테스카틀리포카가 웃었다. 나는 조바심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로 테스카틀리포카와 눈을 마주쳤다. 테스카틀리포카가 물었다.

“인간은 해피엔드를 향해 달려가는 생물이라고 생각하냐?”

대답하지 못했다. 테스카틀리포카도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는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노래하는 것 같은 운율감.

“생명을 가진 인격체란 기본적으로 유한해. 그래서 대체로 삶이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인격체 자신의 가치관으로 판단하기에 좋은 끝을 맞이하는 것이야말로 그 인격체의 성취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 하지만 내 신화체계에서 생명이란 인격체 하나의 가치관이 유지되는 시간 동안만 유지되는 게 아니야. 설령 신화체계의 차이나 피치 못할 사정으로 그 생명체의 삶이 한 번으로 끝나더라도, 생명을 가진 인격체의 생존은 세계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지. 이 별에 ‘무의미한 존재’라는 건 없어. 그게 본인이 납득 할 만한 것이건 아니건,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의미소意味素는 생겨나기 마련이다. 14세기 즈음의 유럽 땅에서 행복Happy은 ‘운이 좋다’는 의미로 쓰였다지. 가치관을 가진 이의 생명이 어찌되었건 운 좋게 의미가 생겨나고 세계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면 해피엔드라고 생각해도 되지 않을까, 라고 테스카틀리포카는 생각한다. ─조금은 위로가 됐냐?”
“별로.”
“칫.”

테스카틀리포카는 혀를 찼다. 나는 웃었다. 공정함을 제 1순위로 생각하는 신성에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위로하는 말을 들었고, 드물게 의표도 찌를 수 있어서 꽤 기분이 좋았다.
테스카틀리포카는 그런 나를 등지고 걸음을 옮기는 대신 나를 보며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더니 혼잣말을 했다.

“이게 네게 제일 큰 악덕이었나 보군. 하긴, 나는 선악이 명확한 세계관의 신성이 아니니까 크리스트교 문화권 출신이랑은 궁합이 별로였을지도 모르겠어
“무슨 얘기지?”
“뭐긴, 너와 나의 이 기나긴 여정도 드디어 끝이라는 거지. 봐라.”

테스카틀리포카가 손가락으로 내 등 뒤를 가리켰다.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끝없는 황야와 지평선을 가득 채웠던 안개가 어느 틈에 사라져 있었다. 테스카틀리포카가 있는 쪽은 지금껏 지겹게 봐온 부옇고 가시성이 낮은 새벽녘의 하늘이었지만 내가 서 있는 쪽의 하늘은 밝았다. 해가 뜬 뒤의 하늘과 새벽의 하늘이 떼어다 붙인 것처럼 내가 서 있는 위치를 경계삼아 공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등 뒤에는어느 틈에 깎아지른 듯한 바닥조차 보이지 않는 절벽이 생겨나 있었다.
나는 식사 도중 벌레를 씹은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왜 하필 절벽이지.”
“추락이라는 형태가 네 안의 ‘죽음’ 이라는 개념을 크게 침식한 영향 같군. 너 내 낙원에 올 때도 추락했었잖아.”

그랬다. 멋이라고는 없는 형태로 쿵 소리를 내며 모닥불 근처에 떨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데 저 신은 이런 쓸데없는 것을 굉장히 잘 기억한다.
나는 한숨을 쉬고 말했다.

“중요할 때는 언제나 내 인식이 문제군.”
“그거야말로 너희들의 진짜 적이라 할 수 있겠지. 자, 아무튼 네 테테오칸 체류는 정말로 여기서 끝이다. 넌 젊은 주제에 온갖 고생을 닥치는 대로 하고 다녀서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걸렸어. 믹틀람파 완주를 축하한다.”

테스카틀리포카가 드물게 순수하게 즐거워 보이는 표정으로 웃으며 박수를 쳐 주었다. 살짝 고개를 숙여서 화답했다. 이제 정말로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은 테스카틀리포카에게 휴식이 끝난 것 같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정말로 그 여정이 끝났고, 이제 떠나는 것만 남았다는 것은 기묘한 기분이었다. 또다시 그 세계로. 모든 것을 인식하는 눈을 가져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힘을 가져도, 고작 몇 센티미터 너머에 있는 개개인의 생각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온갖 간난신고를 겪어야 하는 그 세계로.
황야에서 보낸 한 달 동안 지금까지의 인생과 거기에서 얻은 깨달음과 통찰을 반추해 왔지만 그런다고 깔끔하게 마음이 정리되는 것도 아니었다. 겨우 해냈다는 달성감, 이 뒤 어떤 일이 생겨날까에 대한 기대감, 나는 지금까지의 나와 다른 내가 될 가능성이 높고 나는 그 사실을 인식할 수 없다는 두려움, 그리고 단순히 오랫동안 신세 진 공간을 떠난다는 사실에 대한 아쉬움. 생각해 보면 전부 생전의 나와는 깊은 연이 없던 감정들이었다.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물었다.

“이 뒤에는 어떻게 되지? 다른 세계란 평행세계인가, 아니면 말 그대로 이세계인가? 나라는 인격은 사라질까? ‘바깥’과의 연결은 유지될까?”
“그건 나도 대답하기 힘들어. 예전이면 몰라도 지금은 신화체계의 신성이 바꿀 수 있는 게 많지 않은 인간의 시대야. 이곳을 떠난 뒤에는 너도 인리와 억지력의 관할로 돌아간다. 그러니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건 기존의 데이터에 근거한 추측뿐이야. 아마 네가 걱정하는 ‘그쪽’과의 연결은 고확률로 끊어질 거다. 당장 네가 발생한 메커니즘을 생각해 봐. 지구에 침입한 다음 지구에서 만들어진 지구인 소년의 육체라는 데이터를 사용해서 만든 결과물이잖아. 네가 발생한 시대라면 몰라도 좀 더 예전에는 그 물건이 작동해버릴 가능성도 나름대로 높았을 거고, 육신을 잃고 영혼이 된 뒤에도 외부와의 연결이 유지된다면 지구상에 네 선배 같은 존재들이 몇 더 있어야 맞지. 하지만 너는 혼자잖아?”
“듣고 보니 그럴싸하군.”
“유감이냐?”
“아니.”

진심이다. 나는 인류는 아니지만 지구에서 인류와 함께 살기로 마음먹은 생물이다. 교신이 끊어져도 그 행동방식을 바꿀 생각은 없다. 비상시 동원 가능한 화력이 조금 약해지는 흠이 있겠지만, 지구에서 태어난 생물체로서 생활하는 데는 그게 더 이익이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다. 가 봐. 새로운 영혼을 필요로 하는 세계가 너를 데려갈 거야. 어떤 세계가 될지는 나도 몰라. 범인류사일 수도 있고 전정사상일 수도 있지만 그런 거 너는 신경 안 쓸 거고.”
“내가 다음에 태어난 세계가 전정사상이라는 사실을 알고 전정사상을 잘 성장시켜 범인류사를 쳐부수려고 한다면 어쩌려고?”
“그거야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지. 나는 딱히 범인류사를 지키는 신은 아니야. 적정량의 전쟁과 혼란으로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게 나라는 존재다. 세계를 건너면 기억은 거의 다 휘발되겠지만, 이건 무의식에라도 남겨 주면 기쁘겠다. 나는 남이 나를 뭐라고 불러도 딱히 신경 안 쓰지만, 그래도 무턱대고 악한 존재라고 불리는 건 기분이 좋지는 않거든.”

말을 마친 테스카틀리포카는 나를 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가슴 속이 저릿했다. 이제 정말로 마지막이다. 정말로 이 녀석과 헤어지는 거다. 이를 한 번 악물고, 믹틀람파에 올 때부터 언젠가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말을 하기로 했다. 오래 생각해온 문장이었는데도 입 밖으로 내기가 어려워서 자꾸 말을 고치고 더듬거리게 되었다. 당연했다. 많은 것을 받았다. 너무, 지나칠 정도로 많은 것을 받았다.

“정말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그동안 정말 고마웠다. 네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해내지도, 여기까지 통찰해 내지도 못했을 거야.”
“난 이런 얘기 좋아하는데. 고맙다는 말 들으려고 일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말은 몇 번을 들어도 기분 좋거든.”
“노움 칼데아에서 일을 과하게 시키면 심하게 혹사당하는 녀석들을 몇 명 끌어들여서 기본권을 보장하라고 파업을 해라. 교섭은 후지마루보다는 새로 온 소장이랑 해. 케찰코아틀이랑 싸우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적당한 범위 내에서만 해. 노움 칼데아에 있는 단말에게 그렇게 전해둬라.”
“신경 쓰고 있었냐? 후자는 무리지만 전자는 기억해 두지.”
“만약 또 다시 소환에 응하게 된다면나보다, 네게 잘해주는 녀석에게 가라.”

열심히 준비하고 연습했는데도 마지막에는 우물쭈물거리며 말끝을 흐려 버렸다. 만족스럽지 않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처음부터 하고 싶던 말이다. 내가 한 제안이 재미있다는 이유로 육체를 만들어 지상에 내려오는, 자기가 원하는 것을 위해 움직일 뿐이며 자신은 딱히 인간종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상하게 말하면서도 말없이 지나치게 헌신해버리는 신에게. 살아 움직이는 소비자원이 되어 온갖 불편함과 고통에 시달려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는, 육체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도 원망하는 말 하나 하지 않는 동료에게. 내가 더 잘해줘야 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인류의 가치관으로 이해할 수도 공감할 수도 없으나 인간이 경의를 표할 만하고 인간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일들을 보답 따위 바라지 않고 오랫동안 해온 존재에게.
테스카틀리포카는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별안간 발소리를 크게 내며 내게 다가와 내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이, 마지막까지 불경한 자식.”

그리고 절벽으로 나를 떠밀었다.

“왁!!!!”

당연한 수순으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절벽 위에서 말이 쏟아졌다.

“빨리 가, 이 녀석아! 그리고 엄청나게 굉장한 전쟁을 해서 이기고 죽어라! 다시는 여기 오지 마!”

추락은 빨랐고 테스카틀리포카의 실루엣은 빠르게 작아지며 내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하지만 내게 쏟아지는 말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뭔가 더 말하는 것 같았지만 거리가 멀어서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믹틀람파에서 마지막으로 한 식사의 열량까지 동원해서 절벽 위에 대고 외쳤다.

“네가 이러니까 테테오칸 녀석들한테 언젠가 소멸시켜 버린단 소릴 듣는 거다!!!”

나는 그렇게 테테오칸의 북쪽을 떠나 다음 세계로 갔다. 지금은 다음 세계로 쫓겨났다는 단어 쪽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추락하느라 바빠서 그런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


컴퓨터 앞에 앉아서 업무 도중에 민간차량을 실수로 부순 일에 대한 시말서를 쓰고 있는데, 문을 소리 나게 열고 들어온 부녀자나 어린아이와 잘 대화하는 편이라서 그런 이들이 피해자나 증인일 때 곧잘 교섭에 동원당하는 동료가 내게 다가와서 말했다.

“보이드Boyd. 나 오늘 만나러 갔던 피해자가 너 찾던데?”
“저 말입니까?”
“그럼 ‘금발에 눈동자가 보라색인 형사님’이 우리 부서에 너 말고 더 있어?”

눈에 띄게 머릿결이 푸석해진 동료가 나를 삿대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피로에 찌든 얼굴이었다. 이틀 전, 우리 부서와 이웃 부서가 일제히 동원된 몇 달간의 잠복수사 결과 어린이를 상품으로 팔아넘기던 인신매매단의 아지트를 적발해 일망타진하는 데 성공했다. ‘상품’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동영상으로 중계하며 판매 자체를 컨텐츠로 취급해온 악질이었다. 미성년자 피해자가 아주 많았다. 그래서 저 동료는 사건이 발발했을 때부터 아지트를 습격해 관련자와 실행범들을 전원 체포하는 데 성공한 지금까지 쭈우우욱 피곤한 상태였다.
조금 미안했지만 그래도 되물어보았다.

“잠깐이라도 같이 있어 주시면 안 됩니까? 어린애들은 대체로 저를 무서워합니다만.”
“나도 그 생각 했는데, 너 하나만 오는 게 걔가 증언하는 조건이라고 피해자 님이 말씀하셨다.”
“?”
“가 봐라. 애 쪽에서 요구한 거잖아. 울려도 뭐라고 안 할 테니까 다녀와, 데이비Daybi. 존스가 불쌍하잖아.”

언론발표 뒤 모든 기력을 잃었다며 사무실 한구석의 소파에서 담요를 덮고 자고 있던 팀장의 말. 체포 이후에도 며칠째 뒷수습으로 지친 동료들의 눈길이 대번에 내게 쏠렸다. 이쯤 되면 별다른 수가 없다. 어린애가 내가 무섭다며 우는 걸 보고 올 수밖에 없다.
쓰던 시말서를 저장하고 스마트폰에서 충전 케이블을 뽑아내고 일어섰다. 동료가 자기 스마트폰 액정을 솜씨 좋게 두들기며 말했다.

“애 이름이랑 병원 위치는 메신저로 보내뒀다. 의사랑 먼저 얘기하고 들어가. 그리고, 걔 다리 부상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을지도 모른대. 이건 아직 말하면 안 된다. 패닉할지도 몰라.”
“가엾군요.”
“동감이야. 그래도 장기 단위로 조각조각나서 팔려나가거나 변태성욕자들한테 팔려서 학대당하다 죽는 거보다야 장애를 가지고 사는 게 낫지 않겠냐.”

동료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코트를 입고 경찰 배지를 챙기고 사무실을 나섰다. 말은 험하게들 해도 대부분 좋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140억 광년 안쪽의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시야가 없어도 알 수 있다.
지금의 ‘나’는 미합중국 네바다 주에 있는 라스베이거스 시경의 근무 2년차를 채워 가는 신출내기 형사로, 이름은 데이비트 젬 ─ James의 애칭이다 ─ 보이드Daybit Jam Boyd라고 한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살아계시고 형제는 없다. 퍼스트 네임과 형사라는 직업 외에는 딱히 특별한 점은 없는 평범한 20대 후반의 미국인 남자지만, 10살 때 부모님이 사고를 당한 일을 계기로 자신이 지난번 세계에서 인간의 몸을 입은 우주인으로 태어나 지구를 파괴하려다 죽고 다른 종교의 사후세계에서 지냈던 기억을 떠올리는 데 성공하면서 조금 덜 평범한 미국인 남자가 되었다.
부상당한 부모님의 통원치료에 동행하고, 친한 이웃에게 신세를 지면서 학업을 이어가는 틈틈이 내게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검증해보았다. 마술사들은 신비의 은닉을 목숨처럼 생각하지만 나는 마술사들 사이에서 10년이 넘게 지내왔기 때문에 마술이 행해진 흔적이나 마력이 사용된 잔향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지냈던 세계와 같은 형태의 신비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고, 내가 보내는 교신을 받아줄 지구 밖의 수신처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1년 가량을 이 검증작업에 쓴 뒤,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내가 태어난 세계에 신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고찰하기 시작했다. 분명히 나는 지난번 세계에서 인간 시점에서 보면 지탄받아 마땅한 일을 했다. 인류의 명예를 위해서였다지만 그래도 역시 행성을 파괴하는 건 나쁜 짓이 맞다. 그러니 다음 세계에서 그 인과 때문에 페널티를 받는 것도 딱히 이상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면 좀 더 힘든 삶을 살아야 맞지 않을까. 어째서 부모님이 돌아가시지도 생활에 어려움을 겪지도 않는 상태로 이런 평화로운 세계에 태어났고 지난번 세계의 기억을 가져가는 것까지 허락받았을까.
의문은 곧 해결되었다. 지난번의 나는 140억 광년 안쪽을 보는 시야를 가진 존재였고 지구가 수많은 멸망의 위험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술과 지구 밖의 생물들 같은 신비가 존재하는 세계에서도 전쟁, 기후위기 등 신비 이외의 지구를 멸망으로 끌고 가는 요인은 수없이 많이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신비가 없는 세계에서도 인간의 섭리가 통용되지 않는 지구 밖의 생물의 존재가능성은 0이라 할 수 없으며, 이 불안요소에 지금의 나는 대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외계생물이 등장하는 드라마나 영화를 조바심 때문에 더 이상 즐길 수 없게 된 뒤에야 깨달았다. 확실히 이것은 벌이라고. 가이아가 감히 인류종 따위의 명예를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려 한 내게 내리는 벌이라고.
그때는 한동안 우울해져서 부모님에게 괜찮냐는 말도 자주 들었지만, 나는 고작 그런 자신의 무력함 때문에 정신건강을 망칠 만큼 섬세한 정신을 갖지는 못했다. 나는 기본적으로 긍정적이고 뻔뻔하다. 변명도 수습도 할 수 없는 나쁜 짓을 해서 지구에 찾아온 주제에 이 육체가 만들어지는 원인을 제공한 존재가 바라던 것처럼 선한 일을 하면서 살겠다고 마음먹을 만큼 뻔뻔하다. 신비가 없는 세계의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제일 ‘선한 일’을 하는 존재에 가깝고 가능하면 필드워크 비중이 높은 직업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 결과, 나는 경찰이 되고 말았다. 누가 들으면 진부하다고 비웃겠지만 나는 꽤 마음에 든다. ‘라스베이거스 시경LVMPD이다!’ 라고 외치면서 범인이 사는 집 문을 걷어찰 수 있는 직종이라는 점도 좋아한다.
이번 피해자가 입원한 병원은 우리 서에서 도보로 30분 정도 걸으면 있다. 차를 타면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지만 솔직히 말해서 일을 빨리 끝내 봤자 시말서를 작성하는 것밖에 남은 게 없다. 솔직히 귀찮다. 차라리 느긋하게 이쪽에 시간을 들이는 편이 낫다.
피곤해 보이는 병원 접수처의 간호사에게 다가가서 신분증을 보여주고 말했다.

“수고하십니다. LVMPD의 보이드입니다. 헤스터 존스 형사님께 전달받으셨을 텐데, 가르시아 군이 저를 찾는다고 해서요.”
“아, 들었어요. 이거 받으시고 301호실로 가시면 됩니다. 선생님한테도 알려둘게요.”

간호사에게 출입증을 받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엘리베이터 창문으로 병원 주차장을 내려다보면서 이번 피해자는 얼마만에 울까 생각해 보았다. 나는 딱히 무섭게 생긴 얼굴은 아닌데 어린애들은 묘하게 나를 싫어하거나 무서워했다. 내심 억울함을 느꼈다. 이래 보여도 ‘지난번’ 에는 13살에 죽었는데.
3층에서 내리자 3층 로비에서 왔다갔다하던 초로의 의사가 반색을 하며 내게 다가왔다. 나의 동료는 꼼꼼하다. 일을 남에게 맡길 때 일을 이어받을 사람의 얼굴을 알려둘 만큼.

“보이드 형사님이시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네. 새뮤얼 가르시아 군의 상태를 좀 듣고 싶은데요.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좀.”
“예, 이쪽으로 오세요. 환자가 거의 입을 열지 않아서 저희 쪽도 난처하던 참이었어요.”

빈 입원실 문을 닫고 비밀유지 의무를 준수한 설명을 들으면서 새뮤얼 가르시아라는 소년에 대해 생각했다. 인신매매단 일행이 인터넷에 업로드한 영상을 캡쳐한 픽셀이 열화된 이미지 속에서 무표정하게 카메라 쪽을 바라보는, 조금 긴 흑발의 앞머리로 얼굴 대부분을 가린 흰 피부의 소년. 눈치가 빨랐는지, 우리가 아지트를 습격했을 때 낌새가 수상한 것을 눈치채고 같이 감금된 ‘상품’ 들을 데리고 미리 도망치려다가 브로커들에게 들켜서 본보기로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한쪽 다리에 나이프가 꽂혔다. 피를 많이 흘려서 정신이 희미한 상태로도 우리가 올 때까지 버텼다고 한다.
나는 그 건물에 돌입했을 때 그 애와 친구들을 구하러 가는 대신 브로커들과 총격전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 남한테 들은 얘기다. 동료들에게 저 이야기를 전해듣고 굉장히 강한 아이라고 생각했는데, 입원 뒤 쭉 말문을 닫고 있다가 나를 찾았다는 사실을 듣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꽤 당황했었다. 주치의는 성실한 얼굴로 대답했다.

“책임감이 강한 아이 같습니다. 그때는 자기가 다른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으니 다른 아이들과 함께 있을 때까지는 괜찮았지만, 그 상황이 해소되었으니 그동안 참던 두려움과 불신감이 폭발했을 거예요. 저도 겨우겨우 말을 붙인 거예요. 성인 남자에 대한 경계심이 강해서 지난번에 오신 형사님이라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말이죠. 혹시 그 애를 구출한 게 보이드 형사님인가요?”
“아뇨, 저는 구출 팀에 없었습니다. 저도 그 애가 저를 지명한 이유를 궁금해하던 참입니다. 부상이 영구적으로 남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사실인가요?”
“예. 전망이 좋지 않아요. 칼날이 안 좋은 부분을 건드렸는데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부상 부위가 오염됐는데 곁에 있던 게 어린애들이라 빠르게 대처하질 못했어요. 나이가 어리니까 회복력에 기대를 걸어본다 쳐도 걸을 수는 있겠지만 뛰는 건 어렵겠죠. 그리고, 이 애는 납치된 게 아니라 팔렸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부를 보호자가 없어요. 힘든 일이 많을 텐데

산전수전 다 겪었을 초로의 의사가 마음의 고통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대충 짐작이 간다. 아이의 회복 여부는 불투명하고, 본인은 마음을 닫고 경계를 늦추지 않고, 아이의 버팀목이 되어줄 보호자도 없으니 아주 약간이라도 감정이입이 가능한 상황이라면 굉장히 힘들었겠지.
나는 흰자위가 빨간 눈으로 바닥을 바라보고 있던 아이의 주치의의 손을 잡고 말했다.

“저도 가능한 한도 내에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선생님은 하실 만큼 하셨습니다. 너무 자기 탓을 하지 마세요.”

결국 눈물을 보이는 주치의를 달래는 데 몇 분을 더 쓰고, 아이의 병실 앞을 지키던 경관들과 눈인사를 한 다음 병실 문을 열었다. 1인실 안은 조용했고 전자기기 구동음만이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피해자 소년은 TV도 켜지 않고 창가에 앉아 베개를 끌어안고 창밖을 보며 눈길을 붙박고 있었다. 새뮤얼 가르시아는 열세 살이고 피해자들 중 제일 나이가 많다. 입을 열어줄 경우 반드시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네가 새뮤얼 가르시아지? 늦어서 미안하다. 나는 네가 부른,”
“이 녀석, 왜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해.”

피해자 소년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앞머리에 가려서 눈이 잘 보이지 않지만 지금껏 말문을 닫고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만큼 넉살 좋게 웃고 있다. 한순간 내 인지능력에 대한 의심이 고개를 들었고 자연스레 말문이 막혔다. 소년은 입꼬리를 비틀며 말했다.

“그 표정은 뭐야. 되게 당황한 거 같잖아. 뭐 그래도 너 당황 잘 안 하니까 재밌긴 하다.”
음, 이런 질문 해서 미안하다. 나는 정말 모르겠어서 묻는데 혹시 나랑 닮은 사람을 알고 있니?”

기묘하게 친근한 격의 없는 말투와 태도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잊은 것이건 저 아이가 착각을 하는 것이건. 후자일 경우 아이의 정신건강에는 악영향이 갈 거고 겨우 찾은 활로도 틀어막힐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고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소년이 어떻게 반응했느냐 하면.

“진짜냐! 이 눈썰미 없는 자식아!!”

라면서 베개를 끌어안고 폭소했다. 소년이 한 손을 앞머리 밑으로 넣고 눈물을 연신 닦아내면서 웃음을 멈출 때까지 나는 침대 옆에 선 채로 지금까지 겪어온 일들을 반추했다. 내가 이 애를 본 적이 있었던가. 목소리는 뭔가 익숙한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자주 들었던 목소리는 아니고,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겨우 웃음을 멈춘 소년이 말했다.

“와 진짜, 난 네 이름 들은 순간 네가 바로 달려올 줄 알았는데. 너 은근 눈썰미 없구나? 뭐 얼굴 알려지는 거라도 좀 막아 보려고 이런 스타일링을 유지한 나도 나지만, 이거 하나로 착각하는 너도 심하다 싶어. 이건 연대책임이라고 본다.”
“무슨
“자. 이러면 알겠지?”

소년이 얼굴을 가렸던 앞머리를 조금 걷어올려 한쪽 눈을 드러냈다. 외꺼풀. 눈동자는 옅은 푸른색. 총명해 보이는 눈동자.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 앞머리로 가려져 보이지 않던 눈썹은 일반적인 길이의 절반 정도로 짧고, 머리카락과 다른 색이다. 피부보다 조금 짙은 금색이다.
깨달았다. 나는 이 얼굴을 알고 있다. 단, 지금의 내가 아니라 지난번의 나 쪽이다. 판게아에서 보낸 일 년간의 기억. 일 년간 내가 어떻게 죽이면 좋을까 고민했던 소년. ‘오셀로틀보다 공룡이 멋지니까’ 기꺼이 이문대의 편에 섰던 범인류사의 신성.

“공룡왕.”

소년은 노골적으로 나 들으라는 듯 혀를 차더니 내 눈앞에 대고 손가락을 휘휘 저었다.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삿대질을 견뎠다. 소년은 머리가 나쁜 학생을 떠맡은 근무 태도가 나쁜 과외 선생처럼 말했다.

“야. 쇼쇼아우키靑 녀석이 널 왜 찾아와? 넌 머리 좋은 애가 왜 이럴 땐 머리가 안 돌아가냐? 믹틀란에서 걔랑 내가 썼던 육체, 완전히 똑같은 거야. 출력할 때 연령을 다르게 설정해서 닮은 사람처럼 보였을 뿐이고. 그래도 네 인식능력이면 같은 육체라는 거 눈치챘을 줄 알았는데.”
…….”
뭐야, 화났냐?”

소년은 머쓱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살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때 나는 뒤늦게 정답에 도달해 머릿속에서 나의 멍청함에게 네 눈은 장식이냐, 고작 머리카락 색 하나 바뀐 걸로 뻔히 아는 얼굴을 구분을 못 하냐, 이름과 부상 부위만 봐도 출신지가 뻔하지 않느냐, 같은 식의 욕설을 퍼붓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애가 뭐라고 하는지 잘 듣지는 못했다.
나는 소년을 확 끌어안았다. 그 애는 오른쪽 다리를 다쳤기 때문에 완전히 품에 들여놓을 수는 없었지만 그애를 안심시킬 의도가 아니라 내 충동에서 발로한 행동이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좋았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야, 숨 막혀! 적당히 좀!”
“네 말이 맞아. 내가 눈썰미가 없었다. 미안하다. 너 하면 부드럽고 멋진 금발이었으니까 검은색만 보고 착각했어. 내가 먼저 눈치채야 했는데

발육상태가 형편없는 소년에게 가슴을 두들겨 맞으면서, 진심 어린 친애를 담아 대답한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 테스카틀리포카.”

재회에 13년이나 걸렸다는 사실을 자책하면서 그렇게 말한다.


*


피부색이 더 하얘 보인다는 이유로 멀쩡한 금발을 검은색으로 염색당한 채로 지내는 바람에 본의 아니게 내게 진명을 숨기는 데 성공한 테스카틀리포카가 말한다.

“그러니까 말이야. 믹틀란의 내가 받은 관위冠位는 원래 네 목적을 막기 위해 주어진 거거든? 너는 카마소츠 쪽을 연상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억지력이 내게 토벌대상으로 지목한 건 너 쪽이었어.”
“그랬어?”
“그랬어.”

침대 옆에 앉은 채 테스카틀리포카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상사가 듣고 오라고 한 이야기는 뒷전이 되어 버렸지만 그거야 돌아가기 전까지만 들으면 된다. 테스카틀리포카는 기본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하니 물으면 대답해줄 것이다.
‘이렇게 굴면 남들이 데이비트 녀석을 불러다 줄 테니까’ 의식하고 말문을 닫았다는, 주치의와 내 직장동료에게 여러 가지로 미안한 짓을 하고도 가책 하나 느끼지 않는 듯한 테스카틀리포카는 지금껏 떠들지 못한 것을 만회하겠다는 듯 숨 가쁘게 말을 이었다.

”나는 네 입장에서 보면 억지력이 파견한 이중스파이였던 셈인데. 너도 알다시피 난 억지력이 준 사명보다 네 목적이 마음에 들어서 완전히 너한테 협조했잖아? 결과적으로 넌 실패해서 억지력이 날 파견한 목적은 대충 이루어진 셈이니 아주 대단한 페널티를 받을 필요는 없게 되었어. 그리고 그 결과 내 영기霊基가 보기 좋게 노움 칼데아의 소환식에 등록돼 버렸잖아. 나 말이다, 네가 다음 세계로 간 뒤에도 노움 칼데아에서 엄청나게 부려먹혔거든? 그래서 그 정도면 내 태업의 대가는 다 치렀다고 생각했는데
“가이아에게 밉보였군. 별에 들러붙어 사는 인격체 주제에 별을 부수려고 시도했으니.”
“그 표현 좀 너무하단 생각 안 드냐?”
“내가 지난 세계의 기억을 되찾은 뒤 이것저것 고찰해볼 때 떠올린 표현이다. 기분이 많이 나빴다면 미안하게 됐어.”

테스카틀리포카는 입을 삐죽 내밀었지만 더 뭐라 하지는 않았다.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고 저쪽도 적절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저런 중요한 이야기를 믹틀람파에서도 안 했다. 아마 테스카틀리포카는 굳이 내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겠지만 이건 내게는 그렇지 않은 성질의 것이었다.
아마도 고확률로 멕시코계 이민자 혹은 멕시코인 부모가 책임질 것을 하나라도 줄이려고 아이를 팔아치웠다는 백스토리를 가졌을 새뮤얼 가르시아의 인적사항을 떠올리면서 물었다.

“그래서 널 팔아버린 인간은 누구지? 부모? 보호자?”
“보호자인데, 앙갚음은 됐어. 찾아 줄 필요도 없고.”
“하지만.”
“나는 운이 없지만 내가 겪는 불운이나 불행은 거의 다 내가 스스로 끌어들인 거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고. 가령 이것도 그렇지. 어린것들을 다룰 땐 조용히 남몰래 행동해야 하는 건데, 지금은 몸이 어려서 좀 성급하게 굴었어.”

테스카틀리포카는 쓴웃음을 지으며 오른쪽 다리를 쓰다듬었다. 신비가 없는 세계에서도 테스카틀리포카는 신화적 배경의 영향을 피해 가지 못했다. 나는 우연히 우주 저편에서 왔을 뿐 기억용량과 타인과의 괴리 등 많은 제약을 가졌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대단한 전능감을 느끼는 존재는 아니었지만, 테스카틀리포카는 태생부터 문명을 만들고 돌보는 존재였고 지구에 자리를 잡은 뒤에는 전능신이라는 이명으로 불렸다. 알 수 있다. 침착해 보이지만, 테스카틀리포카는 나 이상으로, 아니, 나 따위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무력한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내가 상정한 것 이상으로 비참하고 끔찍한 기분일지도 모른다는 것.

“아무튼 나는 지난번에 멋대로 군 대가를 치르기 위해 모든 권능을 빼앗기고 평범한 인간으로 전락한 채 이 신비라고는 없는 세계에 유폐당했다는 얘기야. 신성이 인간의 생애 하나 분량의 무력감을 느끼고 돌아간다면 가이아도 화를 풀겠지. 뭐, 조용히 인간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살 생각이었어. 근데, 여기서 우연히 널 발견하는 바람에 들떠 버렸지 뭐야.”
…….”
“갑작스럽게 나타나서 놀라게 만들어서 미안하다. 넌 여전히 잘 하고 있는 것 같아서 한시름 놨다.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너 하고 싶은 대로 열심히 살아. 개인적으로는 엄청난 전쟁을 일으켜주면 더 좋겠다만

테스카틀리포카의 오른손을 양손으로 잡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 쪽을 보는 테스카틀리포카를 보면서, 나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의 테스카틀리포카를 생각했다. 본래의 테스카틀리포카라면 ‘잘 지내고 있군’ 정도 생각만 하고 다른 생각에 골몰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의 테스카틀리포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가 접촉해오기를 기다렸다. 내가 접촉하지 않자 특유의 못된 인간심리에 대한 지식을 동원해서 나를 자기 곁에 불러냈다. 이유는 알고 있다. 신은 몰라도 인간은 고통을 홀로 견딜 수 없는 생물이니까. 고통의 한복판에서 자기가 알던 지성체를 목격한 순간 도움을 청하고 싶어졌을 테니까. 그 지성체가 지난번 생애와의 연속성을 가지고 있을지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나와 만난 뒤에야 내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신으로서의 자기자신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정도로.
그 모든 것을 생각하면서, 테스카틀리포카와 눈을 마주친 채 말한다.

“퇴원하면 입양 수속을 밟아주마. 나랑 같이 살자.”

테스카틀리포카의 눈이 커졌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오기로 과한 제안을 내놓는 상대를 진정시킬 때처럼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야. 나는 그런 부탁을 하려고 네게 온 게
“알아. 그래도 상관없어. 나랑 같이 가. 나랑 같이 살자. 그냥 내가 그러고 싶어서 그래.”
데이비트. 이건 내 악덕이다. 내가 대가를 치러야 하는. 네 선의나 동정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는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꼭 필요하지 않아.”

본래 신성이었던 존재 특유의 기만 능력을 동원해 표정만은 침착하게 유지하고 있지만 지난 생애에서는 140억 광년 안의 모든 것을 보았고 지금은 경찰 일을 하는 사람을 쉽게 속일 수는 없다. 작게 떨리는 손을 힘주어 잡고 지난 세계에서 그림자가 되어버린 남자의 금언을 생각한다. 인간은 벌레가 빛에 이끌리듯 선한 일을 하는 존재라고. 악한 길에 이끌리더라도 결국은 선한 일을 하게 된다는, 인간의 선성을 믿는 인간의 가치관을 생각한다. 그 말을 가슴에 새기고 살았지만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는 실패하지 않았다. 저 말을 쭉 기억하고 있으면, 어쩌면 정말로 선한 존재가 될지도 모르니까. 자기가 생각하는 선행만을 행하는 존재를 뛰어넘어, 자기자신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선한 일을 하는 정말로 선량한 존재로 성장할지도 모르니까.
지금이라면 알 수 있다. 예전의 나는 몰라도 지금의 나는 아버지 앞에 서도 전혀 부끄럽지 않다고. 나 같은 녀석이 당신을 아버지라고 불러도 될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당신의 인생은 해피엔드였다고.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라고.

“테스카틀리포카. 이건 일방적인 선의 같은 게 아냐.”

한때 전능했던 적이 있는, 상처 입었고 겁먹었고 자신의 무력함에 환멸했을 소년에게 말한다.

“나를 택한 게 네 신성을 빼앗을 만큼이나 거대한 악덕이었다면, 내게도 그 악덕을 청산할 자격이 같이 주어져야 맞다고 생각한다.”
…….”
“이 정도로는 부족한가? 더 할까? 네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얼마든지 설득할 용의가 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미안, 육체가 어려서 제어가 안 되네. 잠깐 놔 주라.”

손을 놓기도 전에 테스카틀리포카의 앞머리 밑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경직했다. 믹틀란에서도 믹틀람파에서도 저런 것은 본 적 없다. 깨닫는다. 눈앞에 있는 이것은 정말로 신이 아니라는 것. 신이었던 적이 있는 유한하고 무력한 인간이라는 것.
테스카틀리포카는 어깨를 떨면서 말했다. 뭔가 억누른 듯 명확하지 않은 발음이었다.

“나는 혼란스러운 상태야말로 올바르고 안정적인 상태라고 생각하는 인격이야. 의식하고 일을 망치고 엉망으로 만들어. 그래서 네가 하는 일을 또 실패하게 만들지도 몰라.”
“알고 있다.”
“지난번에는 네 유별난 목적에 내 경향성이 도움이 되었겠지. 하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 의미는 있을지 몰라도 네 삶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지도 몰라.”

그래.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실패하게 될지도 모른다. 결혼도 안 한 독신자에게 양자 같은 게 생긴다니 말이 되는 일이냐며 부모님이 반대할지도 모른다. 겨우 자리잡은 직장을 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실패해도 된다. 행복한 끝이 아니어도 괜찮다. 행복하지 않았더라도 의미가 있는 삶이라면 해피엔드라고 생각해도 괜찮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테스카틀리포카가 알려준 사실이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하고 싶은 일을, 내가 생각하기에 선한 일을 한다. 내가 테스카틀리포카와 함께 싸우고 죽은 것도, 내가 테스카틀리포카와 함께 살아가는 것도 별다를 것 없는 일이다. 빛을 향해 다가가는 벌레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내고 말했다.

“조건이 있어.”
“말해 봐라.”
“저번보다 잘해 줘.”
“응.”
“험하게 굴리지 말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뭐 이상한 유적 조사하러 간다고 갑자기 끌고 나가지도 말고, 다른 별에서 온 녀석의 심장 같은 거 가져오라고 하지 마.”
“보통은 안 한다.”
“진짜로 하지 마.”
“응.”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테스카틀리포카가 웃었다. 문득 테스카틀리포카가 웃는 얼굴을 제대로 보고 싶어져서 멋대로 앞머리를 들췄다가 눈이 새빨개진 테스카틀리포카에게 한 대 맞았다. 기분이 좋았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때 테스카틀리포카도 꽤 기분이 좋았을 거라고 믿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