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B7 본편 이전, 데이비트와 테스카틀리포카가 악천후로 고립된 채 이런저런 잡담을 하는 이야기. 15금 정도 수위의 스킨십 묘사가 있습니다. 둘 다 알몸이고 육체관계가 있었던 전제지만...별로 야하지 않습니다...
일본 데이테스 원드로원라이 @Dt_od_ow 참가작입니다. 주제 '속눈썹' 을 의식하고 썼습니다.
조사차 틀랄로칸에 갔다가 폭우를 만났다. 그 사건 자체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때 테스카틀리포카가 동행 중이었다는 사실은 문제가 된다.
“데이비트, 이건 인정하자. 이건 네 탓이다. 이 동네 기상현상이 범인류사와 비슷하다고 말해줬으면 나도 이 모습 말고 만일을 대비해서 재규어 전사의 모습으로 동행했을 거라고.”
“그건 인정하고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네가 그 정도는 이미 파악했을 줄 알았는데.”
“야. 너랑 난 이 땅의 인류를 해치고 별을 멸망시키러 왔어. 그런 나한테 마야가 친절하게 백업 데이터에 접근할 권한을 줄 것 같아?”
“시도했다가 실패했다는 말로 들리는군.”
“전부터 생각했는데 넌 인격체를 짜증 나게 만드는 데 진짜 천부적인 재능이 있어.”
테스카틀리포카는 평소보다 더 빠르게 말하면서 내 오른손을 잡고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매서운 빗방울을 무시하고 얼굴에 들러붙는 머리카락을 치우고 시야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그래도 인식 가능한 범위를 확대해둔 상태였기 때문에 테스카틀리포카의 얼굴이 조금 파랗고 입술이 하얗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선글라스는 벗었고 나를 붙잡지 않은 손으로는 자기 몸을 감싸듯이 끌어안고 있다. 젖은 셔츠가 몸에 달라붙었는데도 떨지 않는 건 신성으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일 것이다. 폭우를 만난 지 1시간만에 이 꼴이었다.
내 기준으로 150분, 저쪽 기준으로 1개월 정도 동행하면서 알아야 할 것은 다 알았다고 생각했고 테스카틀리포카가 전투형태가 아닌 통상형태로 동행했을 때도 별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다. 썩어도 신령급인데 신체상태의 난조를 막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는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마 신령쯤 되는 물건께서 오른다리를 유지하는 데 권능과 마력을 일상적으로 쓰기 때문에 코스트 절감을 위해 다른 신체부위에는 어떤 대비도 하지 않는 상상 이상의 에너지절약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래서 신체적 내구도는 일반인과 다를 것이 없어서 얇은 옷을 입고 악천후를 만나면 평범하게 컨디션 난조를 겪는다는 사실은 아무리 나라도 예상할 수 없었다.
저쪽은 이문대 믹틀란의 기상현상이 어떤 형태를 취하는지 묻지 않았고 이쪽도 저쪽이 사고나 악천후를 대비해 어떤 대비를 하고 있는지 묻지 않았기 때문에 양쪽 다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최대한 뻔뻔하게 대답했다.
“7시 방향으로 37미터쯤 가면 거주하던 디노스가 얼마 전에 치첸 이차로 떠나서 버려진 동굴이 있다. 조금만 참고 걸어.”
“아니, 찾았으면 말을 해.”
“디노스가 살았던 흔적인지 단순히 지나간 흔적인지 반신반의하고 있었다. 근방 20미터 안쪽의 나무에 디노스가 일상생활을 위해 오랫동안 상처입힌 흔적이 남아 있고, 방에 2주 전쯤 치첸 이차에서 온 연락이 남아 있다. 그래서 방금 확신했어.”
“편리하군.”
“도움은 되지.”
필요최소한의 돌발사태 ─ 가령, 생전에 이런 폭우로 인한 시야방해와 행동의 제약 속에서도 움직일 만큼 피지컬이 좋았던 무지성 디노스의 난입 ─ 에 대한 경계만을 유지하고 인식의 범위를 목적지 방향으로 좁혔다. 전력질주를 할 수 없고 컨디션 난조와 저체온증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저공비행 중인 동행자를 데리고 최고속도로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달하는 루트를 머릿속에 그리면서 다른 생각을 했다. 아, 5시간. 딱 5시간만 빨랐다면. 폭우가 딱 5시간만 빨리 왔다면 테스카틀리포카에게 경솔하게 유적에서 장소의 기억을 읽어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을 거고 그래서 테스카틀리포카가 오늘 써도 되는 분량의 마력을 다 써버리지도 않았을 텐데. 망설임 없이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전투형태로의 이행을 부탁하고 테스카틀리포카의 옆구리에 짐짝처럼 들린 채 귀환하면서 역시 이 복장에는 몸을 찌르는 장식이 너무 많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30미터 바깥의 동굴에 인식범위를 집중해둔 상태로 얕은 웅덩이를 그대로 밟고 지나가려 했을 때, 테스카틀리포카가 내 손을 힘주어 잡고 말했다.
“거기 밟지 마라. 보이는 것보다 깊다.”
“그러냐. 고맙다.”
“대답하지 마.”
고개만 끄덕였다. 한순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고 있다고 과시하며 압박을 주는 것 같다는 착각을 느꼈지만 테스카틀리포카는 피부를 따갑게 때리다가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에 몸서리를 치고 있을 뿐이었다.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저체온증 직전 상태인 테스카틀리포카를 먼저 들여보내고 밖에서 최소한의 방어조치를 했다. 그래도 안에 들어가자마자 테스카틀리포카가 성대하게 기침을 하는 걸 봤을 땐 상당히 놀랐기 때문에 다급하게 물었다.
“보이는 것보다 심각한 상태였나? 너, 그러면 진작 말을!”
“콜록, 아니 그게 아니라! 콜록콜록콜록, 너 내 이름 잊어버렸냐! 밤에 부는 바람Yohualli Ehecatl! 지금은 초저녁이고! 먼지는 하루만에도 몇 밀리미터씩 쌓이고! 내 호흡기 상태는, 푸엣취!”
기침으로 말문이 막히자 내게 삿대질을 하는 테스카틀리포카를 무시하고 방에 있는 가구들을 확인했다. 2주 정도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만큼 깔끔했다. 아하. 이해했다. 방에 들어왔더니 먼지가 수북했고, 그 꼴을 눈 뜨고 볼 수 없었던 테스카틀리포카는 지금 시간대가 초저녁 즈음이라는 사실을 이용해서 가벼운 바람을 일으켜서 방을 청소했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여기는 어중간하게 밀폐된 공간이고 테스카틀리포카는 현재 인간의 육체를 사용하고 있다. 바람의 방향을 조절했는지 내가 들어왔을 때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는 거의 사라진 상태였지만 테스카틀리포카가 들어왔을 때는 방 안이 온통 먼지로 가득한 상태였을 것이다. 거기 바람의 권능을 썼다면 당연히 저렇게 되지. 한 바퀴 돌아간 실수에 측은지심을 품었다가 테스카틀리포카가 상당히 진지하게 살의를 느끼는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테스카틀리포카의 기침이 잦아드는 동안 짐을 뒤적여 고체연료와 라이터를 꺼냈다. 오늘은 당일치기를 할 예정이었지만 만일을 대비하는 경각심은 언제든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한다.
“바람을 사용했다면 어느 정도는 말랐겠지만 일단 그 옷은 벗어. 너는 너무 얇게 입고 다녀서 항상 걱정이었다.”
“라저~. 그런데 너는?”
“벗기는 할 건데, 나는 너보단 두껍게 입고 이런 돌발상황에는 대비하고 있어. 봐라, 이렇게.”
코트에 살짝 마력을 흘리자 순식간에 습기가 날아갔다. 시계탑 시절의 지인이 특허를 낸 물리적인 오염도 마술적인 오염도 어느 정도 선 안에서는 없애주는 술식이다. 재료가 필요하고 영구적이지 않아서 풀리면 다시 걸어줘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필드워크 나갈 일이 잦은 마술사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나는 자주 착용하는 겉옷에만 걸어뒀다.
코트를 벗고 부츠 끈을 풀던 테스카틀리포카의 눈이 대번에 크게 뜨였다.
“그런 게 있으면 말을 하라고! 보고 베끼게 코트 이리 내놔.”
“특허가 있는 기술인데.”
“하지만 걔 죽었잖아?”
“그래도 좋은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너, 오늘 써도 되는 분량의 마력은 다 썼을 텐데. 그냥 자연건조해라.”
“하, 이 선량한 새끼…”
“그런 말 자주 듣는다.”
테스카틀리포카는 홀로 투덜거리긴 했지만 별 말 없이 부츠 끈을 푸는 작업을 재개했다. 테스카틀리포카가 있는 방향에 노숙할 때 쓰는 모포를 던져준 뒤 고체연료로 불을 피웠다. 내가 불 옆에서 코트를 벗고 넥타이를 풀고 니트를 벗을 때쯤 테스카틀리포카는 모포만 두른 채로 방 구석구석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나는 밤새워 책을 읽다가 아버지에게 들킨 기억을 반추하면서 아버지의 흉내를 내어 말했다.
“테스카틀리포카, 적당히 구경하고 불 옆으로 와라. 어차피 내일 오전까지는 여기 있을 거다.”
“몸은 대충 말랐어. 그리고 이 녀석들 집을 찬찬히 관찰해볼 일은 없었단 말이야. 얘들은 너희들이랑 비슷한 데가 많은데 생존의 메커니즘 문제로 생활양상이 좀 달라져서 재미있어.”
테스카틀리포카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말했다. 공룡인류와의 체격차 문제로 테스카틀리포카는 일어서 있었고 몸에 두른 모포가 좀 짧아서 하얀 맨다리와 맨발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나는 눈을 돌려 벗어둔 셔츠를 내려다보면서 바지도 벗을까 고민하다가 이쪽은 비교적 덜 젖은 상태였으므로 벗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래도 불 옆에서 옷을 어중간하게 입은 채로 몸이 마르자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씻고 싶어졌고, 비는 여전히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조금 망설이다가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말했다.
“테스카틀리포카. 잠깐 씻고 올 테니까 불 보고 있어. 혹시 네가 먼저 씻고 싶으면 지금 말해라.”
“대충 말랐으니까 됐어. 그리고 난 씻을 땐 물에 몸 담그는 게 좋다.”
“안 물어봤는데.”
“다음에 이런 일 있으면 알아서 맞춰달란 얘기야. 이 맹랑한 녀석아.”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또 삿대질을 당하면서 바지와 속옷을 벗었다. 근처에 움직이는 생물체가 없는 것을 제대로 확인한 뒤 동굴 밖으로 나왔다. 어둠이 내려앉은 밀림에서 알몸으로 비를 맞는다. 부끄러운 한편으로 기묘한 해방감도 들었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아서 다른 생각에 집중할 만한 여유가 있었다. 나는 반경 100m 안쪽에 인식의 촉각을 곤두세우고 테스카틀리포카가 이 자리에 나처럼 서 있었다면 부끄러움을 느꼈을지 생각하면서 몸을 씻었다.
방 안으로 돌아가자 테스카틀리포카는 시킨 대로 모포를 덮고 불 옆에 앉아 있었다. 무릎을 세운 자세로 앉아서 턱을 괴고 있던 테스카틀리포카가 물었다.
“왔냐?”
“그래. 수건 좀.”
내가 지퍼백에 넣어둔 마른 수건이 내 얼굴을 향해 날아왔다. 얼굴에 맞기 전에 잡아내자 노골적으로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암만 봐도 총 쏘는 것 빼고 뭔가 던지는 건 다 잘 하는 것 같다.
머리카락의 물기를 짜내면서 테스카틀리포카 옆에 앉았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자기 무릎을 끌어안은 자세로 나를 바라보았다. 테스카틀리포카에게서 비 냄새가 났지만 나도 빗물을 뒤집어써서 그런지 나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러자 문득 테스카틀리포카의 뼈마디가 도드라지는 무릎이 시야에 들어와서 습관적으로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다. 낭패다. 시계는 2시간 전 즈음을 가리키며 멈춰 있었다. 지난 주에 시계가 망가졌을 때 연락을 하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브리핑을 하던 NFF 대표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 차고 있던 시계는 디자인과 드문 기능이 마음에 들어서 구입한 물건이었는데 방수 여부를 확인하는 것을 잊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조금 측은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0018시 7분.”
“고맙다.”
“나를 단순계측용 장비로 쓰는 건 그만둘 때가 됐다는 생각 안 드냐?”
테스카틀리포카를 무시하고 가방을 뒤져서 데우기만 하면 되는 보존식 파스타를 꺼냈다. 테스카틀리포카가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예의상 물어보았다.
“먹겠나?”
“그런 영양보급 이외의 의미라고는 없는 물건에 이 육체의 용량을 할애하고 싶지 않아.”
“미트소스 맛인데.”
무시당했다. 나는 내심 분개했다. 물론 보존식 맛이 다 그게 그거지만 그래도 토마토 미트소스 맛있는데.
내가 식사를 데우고 포장을 뜯고 식감이 기묘한 파스타를 씹어먹는 동안 테스카틀리포카는 쭉 나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뭔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하고 있을 텐데 드문 일이다. 또 뭔가 이상한 걸 꾸미고 있나. 내가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테스카틀리포카가 웃었다. 정말 신경 쓰여서 물었다.
“뭐지?”
“별거 아냐. 아, 심심하면 내가 찰치우틀리쿠에 녀석 부추긴 얘기 해 줄까? 날씨가 딱 맞네.”
“싫다. 그보다 그거 재미있자고 하는 얘기가 맞긴 한가? 네 성격상 심술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
“나 하는 게 다 그렇긴 하지. 걔 성격이 우리 쪽 애치고 무던해서 쉽게 멸망 안 시킬 것 같더라고. 그러니 방법이 있나. 울게라도 해야지.”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로 듣기 싫어졌다.”
“재미없는 자식.”
테스카틀리포카가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하품을 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테스카틀리포카 쪽의 어프로치를 거절했으니 이쪽에서 말을 꺼내기로 했다. 마침 고지해둬야 하는 것도 있다.
플라스틱 용기 바닥에 남은 미트소스를 포크 끝으로 긁으면서 입을 열었다.
“믹틀란의 기상현상이나 천재지변은 범인류사와 크게 다르지 않아. 오늘처럼 폭우도 오고, 번개도 떨어지고 지진도 일어난다.”
“분명히 말하는데 내가 방심한 게 아니라고. 지저에 구성한 생태계니까 좀 다를 줄 알았지. 마야가 우리랑 비슷한 계통이라면 나랑 사고하는 방식은 비슷할 거고…아무튼 비 같은 기상현상을 유지하는 이유는 알겠다. 디노스의 생존에 식물은 필수불가결하니까. 천재지변에 대응할 구체적인 방도를 만들어두지 않은 건 디노스의 개체수 조절을 위해서?”
“디노스도 지반의 침하나 지진 같은 데 휘말려들면 죽을 수도 있지만 대체로 조금 부상을 입고 끝이야. 디노스도 난감해지면 ‘태양의 가르침’ 에게 도움을 청하겠지만, 아마 디노스는 대부분 내구력도 출력도 지나치게 높으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거다. 애초에 생존에 그렇게까지 집착하지 않는 녀석들이라 개체수도 범인류사의 인류처럼 간단하게 늘어나진 않고.”
“너라는 악의를 지닌 존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딱히 포식자가 없었다는 거잖아. 완벽하군. 생체기반 인격체로서는 흠잡을 데가 없어. 어이, 의외라는 표정 짓지 마. 이건 생명체와 문명을 디자인하는 존재로서의 의견이야. 세계를 유지하는 데는 이런 계통의 완벽함은 독이야. 잘 만들어진 테라리움 이상의 무엇도 될 수 없어.”
발언을 마친 테스카틀리포카는 드물게 혼자 생각에 빠진 듯 조용히 불을 바라보았다. 나는 다 먹은 보존식 용기를 불에서 먼 곳에 놓아두었다. 날짜가 바뀔 때까지 6시간 정도가 남았다. 오늘 있던 일을 복기하는 작업은 자기 전에 해도 된다. 오늘 한 일과 원래 하려던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하지 못한 일을 내일 혹은 며칠 뒤로 미루는 루틴을 짰다. 그 사고에서 해방되자 몸이 말라서 불 근처에 두었던 속옷과 바지를 다시 입었다. 셔츠 정도는 입을까 했지만 한 번 벗고 보니 입는 게 불편하게 느껴졌고 테스카틀리포카도 뭐라 하지 않았으니 그냥 이 상태를 유지하기로 했다.
여전히 모포 한 장만 두른 상태인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말했다.
“슬슬 네 옷도 말랐을 거야.”
“난 이대로 괜찮아. 그거 외출복이라 불편해.”
“그 복장이 불편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날이 밝을 때까지 시발바 체험 해볼래? 네가 후회하는 꼴을 볼 수 있다면 소화기관이 좀 짧아지는 것 정도는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아.”
“미안하다.”
나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테스카틀리포카가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바로 시발바로 던져버리지 않는 걸 보면 일단 사과로 받아들여 주기는 한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조용해진 테스카틀리포카를 보며 다른 화제거리를 생각했다. 이게 정말로 어려웠다. 나는 스몰톡 화제를 자연스럽게 찾아올 만큼 사회성이 좋은 편은 아니고, 나의 기억용량을 할애해야만 할 만큼 대단한 이야기는 해서는 안 된다. 당장 조금 전에도 기록에 남겨야 하는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믹틀란의 기상현상에 대해 전달했다’는 사건이 하나 생겨났다.
그냥 잊어버리기에는 가치가 있지만 내가 기억하기에는 사소한 사실을 기록할 때 테스카틀리포카의 기억용량에 어느 정도 신세지고 있기는 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대단치 않은 사건에만 가능한 거고 저 특례를 지나치게 남발해서는 안 된다. 테스카틀리포카는 흥미 때문에 내게 왔다. 테스카틀리포카가 나는 모르지만 자기만 기억하는 정보로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언제나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내 고민이 무색하게 먼저 말을 꺼낸 건 테스카틀리포카였다.
“너 뭐 묻고 싶은 거 있어 보이는데 안 물어보냐?”
“그렇게 보였나?”
“넌 표정 변화가 적어서 자기 사고과정이 관찰력 좋은 녀석한텐 다 노출된다는 걸 잘 모르더라. 평범한 인간이나 범인류사 인류에게 익숙지 않은 녀석들은 몰라도 나는 못 속여.”
“너는 신성이라서 자주 잊어버리는 것 같은데 개인에게는 프라이버시라는 게 있다.”
“그리고 나는 그걸 무시해도 되는 입장이지. 자, 말해 봐.”
테스카틀리포카는 기분 나쁘게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고, 테스카틀리포카는 뭔가 할 마음을 먹으면 남이 무슨 소리를 해도 듣지 않고 열중하는 매우 곤란한 부류의 인격체다. 나는 눈을 흘기며 대답했다.
“씻고 들어와서 식사할 때 네가 이상하게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지. 그게 신경 쓰인다.”
“이상하다고 느꼈나?”
“그러면 안 되나?”
“안 되는 건 아니지.”
정보값이 없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테스카틀리포카는 혼자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대답했다.
“너 식사할 때까지 속눈썹에 물방울 큰 거 맺혀 있었는데 알고 있었냐?”
몰랐다.
“그래 보이더라. 아무튼 너 속눈썹 풍성하니까 이해는 가는데, 네가 그 때 이상하게 눈을 안 깜빡이니까 그게 안 떨어지잖아. 그게 좀 신기해서 보고 있었을 뿐이야.”
나는 맥빠지는 숨소리를 냈다. 테스카틀리포카의 입술이 부루퉁한 듯 튀어나왔다. 얼굴이 잘생겼기 때문에 모양새는 좋지만 육체에 들어있는 내용물의 문제로 별로 귀엽지는 않다.
“뭐야, 그 반응.”
“너는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 뭔가 해버리는 타입이라서 걱정하는 거다. 내 예금도 써버리고 후통보했고.”
“아, 그건 잘못했다니까.”
“아무튼 별 것 아니라서 다행이야. 안심했다.”
그렇게 말하자 저절로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나는 비교적 편한 자세로 앉아서 불길을 바라보며 고체연료에 불을 붙인 뒤 경과한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불길이 조금씩 잦아들고 있다. 잔량이 몇 개 있기는 하지만 만일을 대비해 체온을 온존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기분이 크게 나쁘지는 않지만 좋지도 않아 보이는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말했다.
“테스카틀리포카. 좀 더 가까이 와라.”
“응? 불 또 피울 거잖아.”
“네가 옷 입기 싫다고 해서 하는 말이다. 체온을 온존하는 데는 이게 제일이야. 빨리.”
예상과 달리 테스카틀리포카는 별 볼멘소리 없이 내게 다가오더니 몸에 둘렀던 모포를 풀었다. 내가 눈에서 힘을 풀고 있는 동안 테스카틀리포카는 모포를 본인과 내 어깨 위에 덮은 뒤 나와 한쪽 어깨를 붙인 자세로 앉았다. 몸이 말랐음에도 약간 서늘한 피부의 감촉.
고체연료로 피운 불에 눈길을 고정하고, 문득 이 앞에서 체온을 온존하려고 붙어 앉아서 모포를 뒤집어쓴 알몸의 신과 우주에서 온 무언가라는 상황이 굉장히 희극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맥 빠진 소리로 웃었다.
“하하.”
“의외네. 내 알몸 보고 눈도 못 마주치던 녀석이.”
“하?”
반사적으로 고개가 휙 돌아갔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되려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 내 맨살 볼 때마다 눈 피했잖아.”
그랬던가? 그건 그렇다. 하지만 그건 옷을 입지 않은 타인이 옆에 있으면 문명인이라면 당연히 하는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 생각을 언어로 만들기도 전에 테스카틀리포카가 속사하듯 빠르게 말했다.
“아니야. 너 저번엔 안 그랬어.”
“그랬다고?”
“부상자 취급하는 의사나 시체 염하는 장의사 같은 식으로 내 몸을 만진 인간은 네가 처음이었다. 알고는 있냐?”
얼마 전, 테스카틀리포카가 메히코시티에서 벌어질 예정이던 사고를 다급하게 권능을 써서 막은 적이 있다. 마력이 급격하게 빨려 나가 신전 2층 복도에서 쓰러진 채 쇼크로 경련하고 있던 테스카틀리포카의 영상이 기묘하게 명확하게 남아 있다. 날짜가 바뀌기 한 시간쯤 전이었고 내게는 그 일에 할애할 기억용량이 거의 남지 않은 상태였지만 상황은 시급했다. 나는 그 날 테스카틀리포카의 알몸을 봤고 합의 하에 마력공급 용도로 테스카틀리포카와 섹스를 했다. 그 날의 나는 이것저것 생각이 많았겠지만 기억에 남은 건 엉망으로 분절된 이미지들 정도밖에 없다. 뭐 나니까 납득은 간다. 그래도 대부분 잊어버린 걸 보니 나도 그 일을 꽤 부끄럽게 느끼기는 했던 모양이다.
조금 궁금해져서 물었다.
“어느 정도였길래 그러지?”
“나는 일반적인 분위기의 성교로 유도해보려고 정말 애 많이 썼는데 네가 하지만 그러면 옷이 더러워지고 너도 불편할 거라면서 부득부득 날 발가벗긴 것 정도?”
“나답군.”
“그런 너도 패스가 이어져 있는 마스터랍시고 쾌감을 느끼기는 해야 했던 나는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아줬으면 좋겠다. 어?”
테스카틀리포카가 으르렁거렸다. 나는 침묵했다. 그러고 보면 테스카틀리포카는 내게 의식하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회적 언어를 가르치려 드는 버릇이 있었다. 사회적 언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래도 마술사회의 인간들은 대체로 나의 내력을 알고,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나에게서 거리를 둔다. 그래서 머리로는 알지만 큰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했다. 아마 테스카틀리포카와 처음 섹스했을 때도 그런 식으로 생각했을 거고, 사회적 소통에 익숙한 테스카틀리포카 입장에서는 최악이었겠지.
앞서 말했듯이 그 일은 내 기록에는 거의 남지 않았다. 그래도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여기 들어온 뒤로 테스카틀리포카의 맨몸에서 필사적으로 눈을 돌렸고, 조금 전에도 필사적으로 테스카틀리포카의 맨살의 감촉 같은 것을 애써 의식의 무대에서 몰아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한바탕 짜증을 내서 조금 기분이 나아진 것 같은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물었다.
“네 알몸을 보는 게 싫지 않지만 거부감이 느껴져. 나는 너를 보면서 수치심을 느끼는 건가?”
“뭐 그것도 있겠지. 하지만 섹스한 상대를 보면서 미묘한 기분을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야. 네가 태어난 시대의 인류사회는 대체로 성을 터부시하고 성에는 사랑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너야 필요해서 한 짓이었지만 그렇다고 네가 인류사회에서 배운 가치관이 바뀌는 건 아니지. 구체적으로 들자면 수치심, 거부감, 죄책감, 신체적 거리감의 변화에서 오는 감정적 거리감의 변화, 친근감, 파괴충동, 욕망─”
“그만. 산 채로 해부당하는 기분이다.”
“하하!”
진심어린 웃음이었다. 내가 눈을 흘기기도 전에 테스카틀리포카가 내 어깨에 머리를 얹었다. 참으로 부끄럽게도 나는 눈에 띄게 어깨를 들썩였고, 친절하고 위대한 테스카틀리포카는 그것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너는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삶을 동경하면서도 그렇게 살기 위해 지나친 노력을 하지는 않았지. 너는 그럴 만한 삶을 살았으니 이해해. 하지만 나는 너와 앞으로 최소 1년은 함께 지내야 하고, 보다시피 이런 상황이 됐어. 그렇다면 너도 그런 감정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말하고 싶은 게 뭐지?”
“네가 거리가 가깝고 성적인 대상으로 인식하는 상대를 욕망하는 눈으로 보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는 얘기야.”
눈이 마주쳤다. 테스카틀리포카가 밤과 아름다움과 매혹을 관장하는 이의 눈으로 나를 보며 몸을 붙여온다. 또다시 수치심과 죄책감으로 눈길을 돌리고 싶어졌지만 기록에는 남지 않았으나 무의식 영역에는 새겨진 욕망이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여전히 힘들었지만 제대로 묻는 데 성공했다.
“배가 고파졌나?”
“내 눈앞에서 혼자서 뭔가 먹고 나서 하는 말이라고 믿기 힘든 발언이야.”
“미안하다. 너는 꾸준히 내가 먹는 보존식을 싫어했으니까.”
“안심해라. 그건 진짜야.”
테스카틀리포카의 턱을 잡아 올리고 키스했다. 한 발 늦게 아차 싶어서 눈을 감았다. 테스카틀리포카는 탐욕스레 내 입안을 긴 혀로 건드렸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나보다 체온이 낮다. 혀를 얽고 체액을 들이마시면서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체온을 빼앗기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실제로 지금부터 하려는 일의 성질도 그와 비슷하니 틀린 추론은 아닌 것 같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사고를 멈추었다. 자꾸 이러면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딴 생각 한다고 야단맞는다.
입술을 떼고 떨어졌을 때 테스카틀리포카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그럼 네 ‘백업’ 시간까지 같이 시간을 죽여 주마. 감사하게 생각해.”
“받는 건 네 쪽일 텐데…”
“시끄럽다. 그리고 키스할 땐 코로 숨쉬는 거야.”
“응.”
모포째로 바닥에 눕혀진 테스카틀리포카가 게걸스레 다시 입맞춰 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바지 입지 말 걸 그랬다고 혀끝으로 테스카틀리포카의 입천장을 훑으면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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