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S/레아시스
2023-05-21 00: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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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대화하는 방법

LB7 본편 이전-23절 이후 시점의 데이테스. 데이비트가 테스카틀리포카를 보면서 자신의 욕망에 대해 사색하는 이야기. 아마 이 요약 문구를 보고 생각하신 건 아무것도 안 나올 것 같습니다. 설정날조가 엄청 많습니다.
일본 데이테스 원드로원라이 @Dt_od_ow 참가작입니다. 사용한 주제는 '독점욕', '담배'입니다.

꼭 필요하지도 않은 신을 굳이 소환해 보자는 결심을 했을 때, 데이비트 젬 보이드는 막연히 생각했다. 어떤 모습일까.
물론 신격의 사고구조란 신격이 아닌 인격체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니 예상해 봤자 무의미할 가능성이 높겠지만 그런 계통의 추측은 정신상태를 안정시키고 마음을 고양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컨텐츠다. 그래서 데이비트는 영맥을 찾고 소환진을 그리는 내내 자연사 박물관에 다녀와서 고대생물의 일상생활을 상상하며 잠들던 시절처럼 신에 대해 생각했다. 적어도 인간친화적인 행동원리를 지닌 신격은 아니므로 인간의 모습이 아닐 가능성이 제일 높을 것 같았다. 생물이라면 재규어나 독수리나 뱀. 무생물이라면 거울이나 흑요석. 아니, ‘제 1의 태양’으로 지냈던 적도 있고 식별명칭도 ‘연기나는 거울’ 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기상현상 같은 형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데이비트는 내용물이 어찌되었건 일단은 인류의 범주에 속한다. 테스카틀리포카는 (그가 정한 룰 범위 내에서) 합리적인 신격이고, 인간형 지성체와 함께 행동하려면 같은 인간형 지성체만한 최적해는 없겠지. 그래서 신이 굳이 인간의 모습을 택한다면 어떤 느낌일지도 생각했다. 지금까지 알고 지내온 중남미 출신의 지인들과는 이미지가 영 맞지 않는 상위맥락을 가진 존재였다. 선악의 구분이 없고 분쟁을 관장하는, 케찰코아틀이 빛 쪽이라면 이쪽은 어둠 쪽에 속하는 존재. 이미지화하기 꽤 어려운 조건이었으므로 양심을 잠시 잠들게 하고 조금 전에 만난 카마소츠의 이미지를 빌렸다. 카마소츠가 좀 더 부정적이고 니힐한 방향의 성장을 겪은 것 같은 느낌일지도. 많은 분야를 떠맡아가며 인류에게 신앙과 두려움을 선사해 왔으나, 종국에는 인류에게 멋대로 매도당하게 된 존재다. 그렇다면 좀 인류에게 친화적이지 않은 느낌일지도. 좀 더 공포스러운 느낌일지도. 나름대로 적절한 결론 같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다 틀렸다. 마른 장신 여기저기에 근육을 짜 넣은, 부드럽고 가느다란 금발을 등과 어깨에 늘어뜨린 금방이라도 런웨이에 설 것처럼 스타일이 좋은 피부가 하얀 남자가 어디선가 꺼낸 필터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이는 광경을 지켜보던 데이비트는 어휘를 신중하게 골라서 물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모습이지.”

테스카틀리포카는 선선히 멕시코 억양이 섞인 영어로 대답했다. 어떤 대화에도 위화감 없이 끼어들 수 있을 것 같은 달콤하고 낮은 목소리.

“네가 요구한다면 설명할 수는 있어. 하지만 적절한 형태로 제시되는 의문점들은 인생에 활력을 부여하는 법이지.”

테스카틀리포카는 뼈마디가 도드라지는 손으로 행성포식자의 육체 위에 담뱃재를 털었다. 데이비트는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평범한 인간 남자들은 함께 담배를 피우면서 친목을 도모하는 경우도 있다. 데이비트는 그런 부류의 친목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런 별 필요도 없는 시간을 위해 담배를 피울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데이비트는 쭉 비흡연자였지만 테스카틀리포카가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꽤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밤늦게 거실에서 보던 클래식한 하드보일드 영화에 등장해도 될 만큼이나.
데이비트는 빠르게 결론 내리고 대답했다.

“누군가의 부름에 응해 현현할 때의 단말은 소환자 혹은 관측자가 원하는 형태를 선택한다. 그렇게 생각해도 되겠나?”
“정답. 가령 네가 나를 두려워하고 싶어 했다면 네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모습이었을 거고 나를 유린하고 싶어 했다면 부수는 재미가 있는 방향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었을 거다.”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군.”
“당연하지. 인격체의 욕망은 문장 한두 개로 정리될 만큼 간단한 게 아니야.”

데이비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담배를 입술로 물고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길이가 짧은 상의 밑으로 근육이 잘 잡힌 배와 배꼽과 장골이 그대로 드러났다. 속옷은 입지 않은 것 같았다. 길에서 보면 열에 열은 돌아볼 만한 복장을 별 위화감 없이 소화하는 남자.
데이비트는 잘 매여 있는 넥타이를 괜히 바로잡으면서 자신이 13년간 되도록 사람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인다는 목적을 가지고 옷장을 채워 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최대한의 기능성을 확보하는 동시에 되도록 눈에 띄지 않게. 평범하고 어디에나 흔한 인간처럼 보이게. 이제 와서 그 행동방침에 대한 후회가 밀려온 건 아니다. 인류사회에 숨어 사는 이물의 판단으로는 아주 적절했다. 하지만 그리 즐겁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실은 키리슈타리아나 베릴처럼 눈에 띄는 차림을 위화감 없이 소화하며 눈길을 끄는 녀석들을 꽤 동경했을지도 모르겠다고 데이비트는 생각했다. 그제야 상대에게 돌려줄 대답이 갖춰졌다.

“이제야 이야기해서 미안하지만, 내 계획 속에서 너는 필수적인 존재는 아니다. 네 소환은 충동적인 일이었어. 지금 이 장소에서라면 어쩌면 나도 영령소환이라는 행위를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실행했다. 그랬더니 성공해 버렸고.”
“조금 전까지 내게 떠맡길 일을 굉장히 구체적인 형태로 설명하던 녀석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을 수 없는 발언이군. 그래서?”
“내 행동동기는 ‘선한 일을 하는 것’이지만, 여기서 내가 너를 불러낸 동기는 내 욕망이다. 그러니 지금의 네가 취한 모습에는 아마도 내 욕망의 형태가 크게 영향을 미쳤을 거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눈앞에 서 있는 데이비트를 올려다보았다. 눈썹이 짧고 선이 가늘다. 어떤 식으로 장식하느냐에 따라 인상이 큰 폭으로 달라질 것 같은 얼굴이다. 특이한 머리형, 화려한 속눈썹, 별 생각 없이 바라보아도 집중해서 응시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한 번 보면 쉽게 잊기 힘든 외양 탓에 카무플라주에 서툰 데이비트와 닮은 구석이라고는 없다.
문득 데이비트는 눈앞의 존재가 개념적인 대칭상을 비추는 거울 같다는 착각을 느꼈다. 꼭 ‘연기나는 거울’ 이라는 이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의인화된 욕망을 마주할 기회는 그리 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지성체란 대체로 자기긍정과 이기적인 행동방식으로 자아를 유지한다. 지성체는 생존을 위해 이기적인 선택을 하고, 공존을 이상적으로 여기는 가치관으로 볼 경우 그 선택은 아주 추악하게 느껴질 거야. 그 추악한 모습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더 이상 자기자신을 긍정할 수 없게 되고 생존을 유지할 의욕을 잃게 돼. 그래서 지성체는 자신을 미화하고 합리화하는 방식으로 자기자신을 유지하지. 그러니까 자신을 미화하는 행위는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지성체란 생존을 위해 자기자신과의 싸움을 반복하는 존재다.”
“발언의 의도를 모르겠다. 위로하는 건가?”
“아니. 네가 자신의 욕망을 보고 수치를 느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네 욕망이 반영된 존재에게는 그 사실을 수치스럽게 여길 이유가 없다는 얘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호기심이나 개인적인 욕심 때문에 나를 소환해버린 데는 아무 불만도 없다. 하지만 나를 네 욕망의 형태로 더럽혀 버렸다고 생각했지. 그건 불쾌하다. 사과해라.”

계획 이야기를 하는 동안 다양하게 표정을 바꾸던 테스카틀리포카는 저 말을 할 때는 무표정했다. 하지만 데이비트는 행성포식자의 것이 아닌 적의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분노에서 기인하지 않은 적의란 기묘한 느낌이었다. 개인의 호오를 의미하는 단어로 인류와 신성 사이에서 지켜야 하는 규칙을 위반한 사실을 지적하는 존재. 이해할 수 없는 의사결정과정을 거쳐 탄생한 감정이라는 카무플라주가 덧입혀지지 않은 얼굴. 비가 내릴지 천둥이 칠지 알 수 없는 흐릿하고 차가운 푸른색.
데이비트는 최대한의 진심을 담아 대답했다.

“미안하다. 나는 현대인이고 크리스트교 문화권 출신이라서 신성이라고 하면 고귀하고 더럽혀지지 않은 존재를 연상하기 쉬워. 전승과 출신이라고 자부하기 부끄러운 실수로군. 앞으로는 주의하겠다.”
“요즘 녀석들이 다 그렇지. 알았으면 됐다. 앞으로는 실수하지 마.”
“노력하지.”
“거기선 ‘알았다’고 말하는 거야.”

데이비트는 그 후 일 년간 테스카틀리포카와 함께 지냈고 다양한 방식으로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반영된 자신의 욕망의 형태에 대한 추론에 몰두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서 몇 번 매만지면 기묘한 형태로 세팅되는 곱슬기 있는 머리카락이 비 오는 날 엉망진창으로 붕붕 뜨는 것이 싫었을지도 모른다던가. 나는 처음 만나는 말도 안 통하는 상대와 어깨동무를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사교성을 가지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던가. 나는 굳이 나를 이해하고 공감해줄 상대를 바라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선한 일을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해 왔지만 그것은 사실 지나치게 숨가쁜 시간 속을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기만한 것일지도 모른다던가. 전승과 시절 중남미의 신성들은 우주에서 왔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들었을 때 조금 고양되었던 이유가 사실은 아주 단순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던가. 사실은 나 또한 나와 닮은 존재를 가지고 싶었을 뿐이었을지도 모른다던가. 중남미의 옛 신성에게 그가 한 번도 자신의 그릇으로 고려해본 적 없었을 다른 믹틀란의 주민들보다 자신을 더 닮은 것처럼 보이는 밝은 색 금발을 줄 정도로 이기적이고 처절한 요망이었을지도 모른다던가.
추론과 잡상과 공상을 넘나드는 결론들은 데이비트의 머릿속에서만 맴돌다 끝나는 경우도 있고 데이비트가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말해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테스카틀리포카의 귀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테스카틀리포카의 대응은 상황에 따라 다양했지만 저치는 불성실하고 제멋대로인 것처럼 보이는 태도로 숨기기 힘들 만큼 성실한 성품이었다. 그러니 테스카틀리포카는 항상 자신의 결론들을 귀 기울여 듣고 있을 것이라고 데이비트는 믿었다.
데이비트가 오랜 번민 끝에 역시 맵시 있게 배 부분을 드러내기 위해 속옷을 입지 않는 건 내 욕망은 아닌 것 같다, 그건 네 아름다움을 관장하는 존재로서의 의사결정일 거라고 말한 건 데이비트가 몸에 두 개째의 심장을 심은 뒤 겨우 정신이 들었을 때의 일이었다. 데이비트의 방 싱크대에서 손을 씻던 테스카틀리포카는 뭐라 할 기운도 없어 보이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런 상황에 맨 처음 떠오르는 게 그거냐?”
“아니야. 굉장히 힘들었다. 저걸 네게 언젠가는 말해 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망설이고 있었어. 만에 하나 내가 이걸 이겨내지 못해서 지금 죽게 된다면 말해 둬야겠다 싶어서
“어우, 그래. 알았다. 이제 그만 말해. 이건 신성이 아니라 네 주치의로서의 권고야.”

데이비트는 시키는 대로 침묵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공들여 손을 닦는지 꽤 오랫동안 물소리를 내다가 의자를 끌고 와서 데이비트의 침대 옆에 앉았다. 테스카틀리포카답지 않게 망설이는 것 같았다. 기운도 없고 뭐라고 말문을 열어야 할지도 알 수 없었으므로 데이비트는 테스카틀리포카가 말할 결심을 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너도 관측했을 텐데, 칼데아의 마스터는 그 전함이 추락할 때 한 번 죽었고 내 명계에 들어와서 그쪽의 나와 접촉했다. 그리고 이 세계로 돌아왔어.”
“안다. 소생했을 때의 마력규모와 질량이 조금 달랐어. 63g 정도가 늘어났더군. 네 성격이라면 시련을 내렸겠지?”
“내 의사가 아니야. 그 녀석이 턱걸이여도 싸움 도중에 패배한 전사라는 조건을 만족했기 때문에 하필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던 내 명계로 이끌려와 버린 거야. 만유인력 같은 거다.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도 정확히는 몰라. 이 몸은 거기 있는 나를 영령의 좌를 통해서 복사해서 파견한 단말이니까.”
“예상하고 있었다. 아무튼, 칼데아의 마스터를 살려서 돌려보내 준 건 네 탓이 아니라고 변명하는 건가? 그건 괜찮다. 그 녀석과는 제대로 싸워 보고 싶었어.”
“이 불경한 자식.”

테스카틀리포카가 눈을 흘겼다. 데이비트는 꽤 즐거워졌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기면서 말했다.

“그건 네가 괜찮다니 됐는데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냐. 나는 네 요망에 응하기 위해 이 육체를 만들었다. 그리고 칼데아의 마스터는 네가 속해 있던 집단에, 같은 세계에 소속되어 있다고도 정의할 수 있는 존재다. 지금 이 말을 하는 의미를 알겠나?”
내가 너를 지금의 형태로 관측했기 때문에, 나와 같은 세계의 주민인 칼데아의 마스터도 명계에서 너를 지금의 형태로 관측했다는 건가?”
“그래. 이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다. 미안해. 어차피 별로 열심히 숨기지도 않았지만, 그 녀석이 이미 내 얼굴을 알고 있으면 쓸 만한 패를 하나 뺏긴 채로 행동하는 거나 다름없다고. 젠장, 인도에서도 잘 숨겼는데

데이비트는 조금 놀랐다. 테스카틀리포카가 자기 머리를 벅벅 긁으며 자책을 하고 있다. 데이비트가 아는 테스카틀리포카는 어지간한 실책을 저질러도 저런 태도를 보인 적이 없다. 실책을 저지르면 그건 그거대로 쓸 데가 있다며 뭔가 상식을 벗어난 방식으로 해결하고 더 큰 일을 벌이고는 했다. 이번에도 그래야 마땅하다. 저건 테스카틀리포카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다.
그러고 보니, 칼데아의 마스터가 저 모습을 보았다면 칼데아의 마스터는 자연스럽게 데이비트가 테스카틀리포카를 밝은 색 금발과 푸른색 눈동자와 흰 피부를 지닌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저 육체가 정진정명 멕시코 출신의 현재를 살아가는 인류라면 아무 문제도 없겠지만 저 육체의 내용물이 테스카틀리포카라는 사실은 꽤 치명적이다. 데이비트가 테스카틀리포카의 그릇을 자신의 욕망으로 빚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오래된 신성 테스카틀리포카를 자기들의 알량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악한 신이고 악마라며 매도한 존재들과 비슷한 모습으로 만들고 싶다는 욕망은 아니었다. 칼데아의 마스터에게 그 사실을 해명하지 않는 이상 칼데아의 마스터는 순수하게 의아해할 것이다. 그것만이 안타까웠다.
테스카틀리포카가 불경하다고 말할 부류의 잡상이었으므로 데이비트는 빠르게 그 생각을 그만두었다. 대신 요구했다.

“어렸을 때 아프면 돌아가신 어머니나 아버지가 옆에 앉아서 머리를 쓰다듬어 줬었다. 실책의 보상은 그걸로 갈음하도록 하지.”
“할 수야 있지만, 내가 해도 되는 거냐?”
“? 손은 내 부모님도 너도 똑같이 따뜻하다만.”
“나야 그 정도로 눈감아 준다면 고맙지. 하지만 너는 내게 네 보호자들을 전혀 겹쳐보지 않잖아. 그럼 네가 기대하는 심적 고양감도 딱히 없을 거라고. 아무튼 알았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이 데이비트의 이마를 덮었다. 멋대로 뻗치는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는다. 테스카틀리포카의 손은 데이비트에 비해 조금 차갑다. 광석의 이름을 가졌기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꾸준히 생각해 왔다. 데이비트를 내려다보는 흐릿한 푸른색 눈동자에 연민하는 기색은 없다. 요구받았으니 기대에 응할 뿐이다. 편안하다.
수용성 높은 액체 같은 목소리가 물었다.

“불경한 생각 하지?”
“응.”
“숨길 생각도 없어?”
“말만 그렇게 하는 거 안다. 신화체계는 이제 개인의 취향에 따라 선택되는 소비재가 된 지 오래야. 요즘의 너는 신앙보다는 창작의 모티브나 탐구의 대상이 되는 데 익숙할 거고. 인간이 신에게 불경한 말을 했을 때 받아치는 관용어구 같은 거겠지.”
“네가 내 마스터가 아니었다면 백 년 정도 시발바 바닥에 처박았을 거다.”

찬 손이 질책하는 기색 없이 눈을 덮었다. 차가운 손이 기분 좋게 느껴지는 걸 보니 아직 체온이 떨어지지 않은 모양이다. 테스카틀리포카가 다시 말했다.

“농담이야. 내일부터 열심히 해라. 이겨서 목적을 이뤄. 그리고 틀라위스틀람파로 가라.”
“네 관할은
“아니, 거긴 져야 갈 수 있는 동네라고. 칼데아의 마스터 또 만날 거지? 죽이기 전에 물어보던가.”

테스카틀리포카가 데이비트가 모르는 언어로 뭔가 말하자 바로 졸리기 시작했다. 환자가 쉴새없이 입을 놀리니 뭔가 한 모양이었다. 뭐라 항의하고 싶었지만 생각해 보니 다음날부터는 반강제로 강행군이었다. 테스카틀리포카의 판단이 옳다. 쉴 수 있을 때 쉬어둬야 한다. 그래도 데이비트는 평소에 비해 부정확한 발음으로 말했다.

“네 눈동자 색
“응?”
“그걸 아직 모르겠어. 이제 바빠질 테니까 생각할 틈이 없을 텐데

졸음이 진흙처럼 전신에 달라붙었다. 하나 늘어난 순환기는 상상 이상으로 체력을 많이 갉아먹은 모양이다.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도 끈질기게 생각했다. 일 년간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반영된 욕망에 대해 꾸준히 생각했고 다양한 결론을 내놓았지만 눈동자의 색의 개연성은 아직도 규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는 정말로 최종국면이므로 생각할 기회도 말할 기회도 없을지도 모른다. 데이비트는 체력을 크게 잃으면서 자제력도 함께 잃은 상태였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물었다. 충동적으로 테스카틀리포카를 불렀을 때처럼.
테스카틀리포카는 대답했다.

“뭐야 이거. 보통은 바로 잠든다고. 밤을 관장하는 자로서 좀 자존심이 상했다.”
“대답, 해, 줘.”
“아 진짜. 마음대로 생각해. 세상사 모든 것엔 순서가 있는 거야. 자라면 좀 자.”

의식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데이비트는 억울해했다. 너는 내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잖아. 너의 모든 것이 전부 다 나를 위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잖아.
이 생각은 데이비트의 의식이 불확실할 때 한 것이었으므로 데이비트의 5분에는 남지 않았다. 다음날 테스카틀리포카는 조금 데이비트의 눈치를 보았지만 데이비트는 이유를 모르는 기색이었다. 그래서 테스카틀리포카는 안도했다.


*


“짜식, 빨리도 가네.”

테스카틀리포카는 마련한 자원을 버리는 것도 더하는 것도 없이 꼭 맞게 써버리는 것을 선호했지만 낭비를 해야 할 때는 아낌없이 낭비할 줄 아는 낭비가였다. 믹틀람파 상공에 이문대 믹틀란이 있던 지표 위의 시각정보를 연결하는 호사를 꽤 선선하게 저질렀기 때문에 데이비트는 스톰 보더가 날아올라 다른 공역으로 떠날 때까지 하얀 전함을 오래오래 바라볼 수 있었다.
전함이 남긴 궤적이 하늘에서 사라졌을 때에야 데이비트는 하늘에서 눈을 떼어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담배를 문 채 웃으며 말했다.

“자. 이제 알겠냐?”
“?”
“내 눈동자 색.”
“아.”

데이비트가 믹틀람파에 멋이라고는 없는 동작으로 쿵 소리를 내며 떨어져 테스카틀리포카의 맞은편에 앉았을 때, 데이비트는 일단 주변을 휘휘 돌아보았다. 해온 일의 속성과 체질 때문에 어디에 가도 일단 시간과 장소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들어 있었다. 유능하고 눈치가 빠른 테스카틀리포카는 데이비트가 묻기 전에 대답해 주었다. ‘새벽이야. 여기는 영원히 새벽녘이다.’
테스카틀리포카는 그가 잘 하는 방식으로 빠르게 남이 모르던 사실을 까발렸다.

“자, 너는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대답해 주마. ‘생존 욕구’다.”
……. 여기는 명계 아니었나?”
“그렇지. 하지만 내 낙원은 머무르는 게 메인이 아니야. 나가는 게 전제야. 죽음 이후의 휴식, 그리고 다음 싸움으로의 출발이 내 낙원의 테마다. 대답이 됐나?”

테스카틀리포카는 웃었지만 안개 ─ 아니, 영역의 주인의 속성을 생각하면 연기일지도 모른다 ─ 가 가시성을 낮춰서 잘 보이지 않았다. 테스카틀리포카의 눈동자를 처음 봤을 때 흐릿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흐리멍텅한 것과 거리가 먼 예리한 안광의 소유자인데도. 이제는 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다. 살아있는 욕망은 쭉 그 몸으로 타인의 마음을 비추고 있었던 것이다. 내일로 이어지는 새벽을. 선한 일을 하고 싶다는 목적보다 우선시될 수 없는 좀더 살아있고 싶다는 욕망을.

“나는 내 생각보다 살아 있고 싶어했던 건가?”
“그럴 수도 있지. 부끄러울 건 없어. 인간은 대체로 그래.”
“그런가.”

데이비트는 고개를 숙였다. 얼굴이 조금 붉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턱을 괴고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지금 통보해둘 게 하나 있는데.”
“뭐지?”
“조금 전의 전투로 칼데아 녀석들과의 인연이 확실하게 맺어져 버렸다. 즉, 그 녀석들이 나를 필요로 해서 소환할 경우 그쪽에 불려갈 가능성이 생겼다는 거다.”
“그러고 보니 후지마루는 전투 도중에 항상 임시소환을 했었지너도 그런 식으로 싸우게 되는 건가?”
“그런 느낌이 되겠지. 물론, 그 녀석들이 출력해내는 고스트라이너는 그 녀석들 데이터베이스에 남은 모습을 바탕으로 재현하는 거니 아마 그 녀석들이 불러내는 나는 네가 만들어낸 이 모습일 거다.”
…….”
“싫을 거 안다. 그래도 감수해. 너도 개인적인 이유로 멸망을 일으키려고 했으면 그 정도 책임은 져야지. 억지력 쪽 안건으로 넘어가면 나도 대응하기가 힘들어.”

테스카틀리포카는 남이 자기들끼리 싸우게 부추기는 것이나 남을 바지런하게 돌보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 두 가지를 좋아하는 만큼이나 남을 한 방 먹이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테스카틀리포카는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테스카틀리포카가 알기로, 데이비트는 테스카틀리포카의 그릇에 자신의 욕망이 반영되었다는 사실에 죄책감과 쾌감이 오묘한 비율로 어우러진 정도의 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테스카틀리포카에게 자신의 어떤 요소가 반영되었는지 해명해낼 때마다 즐거워했다. 자신과 비슷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로 안정감을 느끼기도 했다. 테스카틀리포카는 믹틀람파에 칼데아의 마스터가 침입했을 때부터 그 가능성을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혹시 나중에 데이비트가 패배해서 믹틀람파에 올 경우, 이 사실을 들으면 꽤 그 나이대의 젊은 인간답게 삐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얼굴을 꼭 한 번 보고 싶다고 오래된 신성은 심술궂게 생각했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운인지, 데이비트 젬 보이드는 언제나 테스카틀리포카의 예상을 벗어나는 인격체였던 것이다.

“이상하군 ‘책임’을 져야 한다면 내가 싫어하는 일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
“인류사의 생존을 위한 명예로운 싸움이라 자부할 수 있는 소환에 내 욕망의 모습을 하고 응하겠다고? 그건 책임보다는 포상에 가깝다고 생각하는데.”

데이비트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가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테스카틀리포카에게 반영된 것은 자신의 인류의 명예를 지키고 싶다는 선량함이 아니었다. 나와 닮은 것을 가지고 싶다는 자신의 욕망이었다. 그런 욕망으로 빚어낸 그릇에 담겨 인류를 구하는 여정을 떠난다고. 그건 벌충이 아니다. 어떻게 생각해도 포상이다. 오히려 저쪽의 테스카틀리포카가 칼데아의 마스터가 관측한 형태를 취하게 된다면 조금 질투가 났을지도. 그렇게 생각만 하고 말하지는 않았다. 데이비트는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말했다.

“정말 그 정도로 끝인가? 뭔가 더 해야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좀 불안하다만.”
아니, 내가 멍청했다. 나도 참, 우주 차원에서 에고를 발휘하는 녀석을 뭘로 생각한 거람. 하, 나름대로 열심히 숨겼는데. 축하한다. 내가 졌다.”
“? 뭐가?”
“아냐. 기억할 필요 없다. 아, 놀랐어. 네 독점욕구는 진짜 이상한 방향으로 튀는구나

테스카틀리포카는 드물게 기가 질린 듯 힘이 빠진 얼굴로 웃었다. 데이비트는 자연스럽게 테스카틀리포카가 자신이 미처 기록하지 못한 순간에 벌어진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그래서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로, 잘은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 같은데 내가 저런 걸 왜 기록에 안 넣었는지 자책하고, 나중에 반드시 테스카틀리포카를 다그쳐 봐야겠다고, 하지만 여기는 테스카틀리포카의 영역이니 적당히 시발바에 안 떨어질 만한 선을 유지해야 하는데 테스카틀리포카의 속내를 떠볼 방법을 고민해 봐야겠다고 한 번 멸망을 저지르려다 실패한 사람다운 생각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