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B7 본편+서번트 유니버스 기반의 수수께끼 시공의 데이테스.
데이비트와 테스카틀리포카가 상호이해에 도달하지 못하는 이야기입니다.
케찰코아틀이나 테노치티틀란, 보다임이 조금 등장합니다. 이런저런 설정날조가 많습니다. 그래도 해피엔딩.
믹틀란파의 호칭을 믹틀람파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오기가 아닙니다.
꽤 예전에, 낙원에 온 전사가 이렇게 말했었다.
“네게 더 잘해주고 싶었어.”
2017년은 고단한 해였다. 서기 2천년대에 갓 돌입했을 즈음에는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신의 시대는 오래전에 끝났고, 나와 동료들 ─ 장본인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치겠지만 ─ 을 신앙하는 방식은 인간의 시대와 합이 잘 맞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들은 정보량이나 악명 하나는 어느 신화체계의 신성에게도 꿀리지 않을 만큼 가지고 있었으므로 세계의 뒷면으로 떠나거나 신앙을 잃고 사라질 일도 없었다. 그래서 나를 신앙하지는 않아도 나의 존재를 알거나 나의 세계경영방식과 합이 맞는 전사를 잊을 만하면 낙원에 맞아들이면서 소일하며 지냈었는데, 2017년에는 그동안 잘도 편히 지냈다며 비웃듯이 일거리가 휘몰아쳐 들어왔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굉장히 이상한 목적과 힘을 모두 가진 인간이 하나 발생했고, 그 인간을 막기 위해 더욱 이상한 목적을 가지고 일어선 전사가 있었다. 전사는 자신의 필요 때문에 나를 불러냈고, 나는 억지력에게 전사를 저지하라는 목적과 필요도 없는 왕관冠位을 하나 부여받은 채로 전사에게 불려갔으나 개인적인 흥미가 솟아서 전사를 저지하는 대신 전사의 편에 섰다. 내가 하는 일이 으레 그렇듯이 전사는 온 힘을 다한 끝에 패배해 믹틀람파에 왔다. 전사의 목적은 억지력의 요망대로 무위로 돌아갔지만 나는 근본적인 임무를 방기한 책임을 져야 했다. 결국 나는 억지력에게 페널티를 받은 채 이상한 목적과 힘을 가진 인간의 야망을 저지하려는 인간 집단에게 고스트라이너境界記錄帶로서 부려먹히게 되었다. 문제는 걸물 전사가 하나 발생하면 그와 적대하는 전사도 발생하는 법이기에 그 즈음의 믹틀람파 또한 드물게 대성황이었다는 데 있다.
낙원을 꾸리고 체류자의 상태를 체크하면서 동시에 영령의 좌를 거쳐 물리공간에 파견한 단말이 보내오는 데이터를 받고 피드백을 하고, 단말에게 추가적인 리소스가 필요할 경우 조금 더 개입한다. 기실 해야 하는 일의 수효나 강도만 따지면 내가 첫 번째 태양이던 무렵이나 다섯 번째 태양의 시대를 시작할 즈음에 비하면 코웃음이 나는 수준이었다. 고단한 해였지만 정말로 지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내 기준이고, 존재 규모와 사고 규모가 인류 스케일인 인격체의 시점에서 보면 달랐던 것이다.
어쨌든 그 말에 그즈음의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말치고는 알기 쉬운 편이군. 사회적 스킬이 하루가 다르게 느는 것 같아서 보기 좋다, 형제.”
“행성을 파괴하기로 마음먹은 시점부터 페널티는 감수할 생각이었다. 그런 일에는 익숙하고 각오도 했어. 하지만 네게도 페널티가 가는 건 꽤 속이 쓰리군.”
“무슨 새삼스러운 얘길 하는 거야.”
나는 코로 웃었다. 나는 전사의 개인공간에 있는 2인용 소파에 누워 있었고 방 주인인 전사는 1인용 소파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전사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전사가 약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팔짱을 바꿔 끼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전사는 웃음기 없는 소리로 다시 말했다.
“너를 부른 뒤로 너를 무리시키지 않았던 적이 없었지.”
“나는 원래 그런 식으로 지내왔어. 네 삶의 형태도 비슷한 느낌이었지. 그 공통분모가 네가 뻔뻔하게 나를 지명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군.”
“사실관계 이야기가 아니야, 테스카틀리포카. 이건 내 마음의 문제다.”
“마음이라.”
나는 천장을 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전사는 뭘 줘도 군말 없이 받아들이는 재미없는 인간처럼 보였지만 생각보다 잘 질리는 성격이었으므로 전사의 의식과 무의식을 함께 검토해서 디자인된 방에는 조그만 패턴이 불규칙하게 반복되는 벽지가 붙어 있었다. 전사는 생존시간에 비해 보유한 정보량이 매우 적은 별종이었으므로 믹틀람파에서 얻는 정보를 무엇이든 스펀지처럼 소화해 나가는 어린아이 같은 경향성의 소유자였지만 간혹 이런 식으로 내 허를 찔렀다. 전사의 취향을 반영해 꾸민 방은 기묘하게 전사의 성품을 닮아 있었다.
전사의 발언은 계속된다.
“네가 믹틀란에서 테테오칸의 북쪽 이야기를 했을 때, 그쪽에서는 너도 믹틀란에서 지내던 시기에 비해 여유로워질 거라고 생각했어.”
“뭐 믹틀란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면 네 예상대로 되었겠지. 최근의 테테오칸은 어디든 다 한가하거든. 조금 늦게 왔다면 네가 믹틀람파를 전세 낼 수도 있었을 거다. 네가 그 땅에서 발생한 이문異聞의 가능성에 뛰어들어서 오셀로틀이나 디노스 녀석들을 잔뜩 데려오지만 않았다면 말이야.”
“역시 내 탓이군.”
“정말, 네 탓을 할 생각은 아니었으니 믿어다오.”
진심어린 난처함을 담아 대답했다. 전사는 조금 텀을 두고 대답했다.
“…너는 신이란 원래 독자적인 행동방침을 위해 일방적으로 베풀고 일방적으로 빼앗는 존재이니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 대신 공경하라고 말했지만, 인간은 은혜를 받으면 보답을 하고 싶어하는 생물이다.”
“네 인간관은 언제 봐도 지나치게 긍정적이라니까. 인간을 근본적으로 카테고리 바깥에서 보고 있어서 그런가? 아무튼, 그래서 부탁하고 싶은 게 뭔데?”
배에 힘을 넣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이 마주쳤다. 전사는 조금 망설이다가 오래 알고 지낸 가까운 사람 혹은 나나 알아볼 정도로 미세하게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말했다.
“너를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싶다.”
“와우.”
“네가 인류사에게 페널티를 받는 것도 언제나 무리를 하는 것도 지금의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면 그 정도는 해야 수지가 맞는다고 생각해.”
나는 다리를 꼬고 앉았다. 지금 생각하면 꽤 다양한 방식으로 놀라움을 선사하는 전사였다. 그래서 웃지 않으려고 꽤 노력했다. 내 입장에서는 웃을 만한 발언이었지만, 진지한 전사 앞에서 웃으면 실례니까.
“자신과 접촉하는 존재들이 모두 인간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너희들의 나쁜 버릇이야.”
“네게는 희로애락도 선호도 있으니까 착각하기 쉬워.”
“착각인 건 알고 있나?”
“알고 있어. 이건 어디까지나 내 욕심이다.”
그 대답이 뻔뻔하고 스스로의 분수를 잘 아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응답책임을 질 때는 진지하게 했다.
“알겠냐, 데이비트. 나는 너희들과 비슷한 가치관을 가진 것처럼 보일 뿐 정말로 비슷한 생물은 아니야. 너희들이 꾸리는 사회를, 세계를 유지하기 위해 너희들과 비슷한 모습과 비슷한 감정을 가졌지만 그뿐이다. 나는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디자인된 인격이야. 나는 내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냐. 내 행동방침은 내 유용성의 증명이다. 내가 이 세계에 있어 유용한 존재일 때 나는 고양감을 느끼고 이 별에서의 보다 긴 생존을 보장받는다.”
“유용성.”
“네가 여기에 도달했다는 게 네가 모든 것을 바쳐 싸웠다는 증거다. 너는 충분히 잘했어. 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역할을 한 거야.”
나는 무의미한 행동을 꺼리는 존재는 아니다. 이문에서 전사와 일할 때도 개인적인 호기심으로 거의 무의미할 것이 명백한 행동에 호흡기 하나를 바쳐버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주체가 믹틀람파의 체류자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믹틀람파는 언젠가 반드시 떠나야 하는 낙원이다. 그러므로 체류자가 휴식을 하기는커녕 마음고생을 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믹틀람파의 존재의의와 어긋나고 관리 담당인 나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행동이다. 그래서 상당히 진심으로 충고했다. 애초에 내게 존재하지 않는 기능을 내게 요구하는 무의미한 짓은 그만두는 게 낫다고.
“너는 나를 믹틀란에서 만나서 나를 네가 비호해야 할 존재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난 네 상상 이상으로 잘 만들어진 존재니까 그런 측면에서는 안심해도 좋아. 그러니까 나를 위해 뭔가 더 하고 싶다는 생각은 그만하고, 좀 더 시간을 쓸데없이 쓰면서 다음 세계에서 지난번 이상으로 엄청난 전쟁을 할 궁리나 해두라고.”
“테스카틀리포카.”
전사는 조금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서 제멋대로 연민하는 기색을 느꼈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그게 네 상냥함이고 자비라는 사실을 안다. 하지만 그건 내 시점에서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과 같아.”
나는 침묵했다. 그건 그랬다.
“너는 네 존재의의를 유용성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는데, 그 견해에는 나도 동의한다. 나는 일반적인 인간보다 할 수 있는 게 많은 존재고, 기왕이면 내가 네게 좀 더 유용한 존재였으면 좋겠어. 분명 너를 신앙해온 존재들도 같은 생각을 했을 거야. 세계를 돌리는 일을 하는 네게 유용한 존재가 되고 싶으니까 목숨을 바칠 수 있었을 거야.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너는 어디까지나 내 관리하에 있는 존재야. 유용성을 찾고 싶다고 말해도 결국은 내 손 안쪽에 있는 상태고, 근본적으로 따지면 내 원맨쇼나 다름없다고.”
“그렇다면 네 선글라스는 어떻지? 그건 지금이야말로 정말 아무 유용성도 없는 물건이다.”
“…….”
믹틀란에 갓 현현했을 때, 한 번도 사용해본 적 없는 색소가 옅은 몸에 익숙지 않아 꽤 곤욕을 치렀다. 따가운 믹틀란의 태양도 괴로움의 요인 중 하나였는데, 어느 틈에 전사가 NFF의 여우에게 부탁해 구해준 물건이었다. 꽤 도움이 되어서 믹틀란에 있는 동안에는 쭉 쓰고 다녔는데, 익숙해지는 바람에 내 무의식이 이 물건을 이 단말을 이루는 구성품으로 간주해 버렸다. 그래서 전사가 구입한 선글라스는 지금까지도 내 얼굴에 걸쳐진 채 나를 코너로 몰아가는 상태였다.
나는 다시 침묵했다. 전사는 말을 이었다.
“알려다오. 좀 더 알고 싶어. 네가 행복이라고 느끼는 게 무엇인지. 순간이어도 좋고 감정이어도 좋고 물건이어도 좋다. 내 손으로 가능한 범위 내의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고 싶어.”
돌이켜 보면 그 전사는 항상 그랬다. 선량하지만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때는 항상 제멋대로였고, 설명을 자기 위주로 했고, 무서울 만큼 당당하고 뻔뻔했다. 나는 그 점을 몹시 난감하게 여겼지만 꽤 마음에 들어하기도 했다. 그래서 설득을 재개할 때 상정한 것보다 조금 많은 말을 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경험상 그런 짓을 했을 때면 꼭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는데도.
“인격체의 인식이란 결국 개인의 인격과 인식에 얽매이게 돼 있어. 이 세계의 이치도 이와 같다. 이 별에 절대적이고 전 인류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개념은 없다. 인간종이 살고자 하는 의지로서 만들어낸 억지력조차 완전한 의견의 합치를 보지 못한다.”
“네 장광설은 항상 뜬금없는 타이밍에 나오는군.”
“필요한 설명이니까 하는 거야. ─네가 내게 나의 행복을 주문할 경우, 네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테스카틀리포카가 행복해지는 방법’ 이 아니다. ‘테스카틀리포카의 행복’ 의 정의 쪽이지. 그런데 그걸 생각하는 건 주체인 내가 아니라 너지. 여기서 모순이 생겨난다.”
“…….”
“데이비트. 그 개념이 네 머릿속에서 나온 시점에 답은 정해져 있어. 네가 나의 행복의 청사진을 그리더라도 그건 네가 네 가치관으로 생각한 결론이야. 내게도 오차 하나 없이 온전한 행복으로 작용하지는 않을 거고, 그건 네 요망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테스카틀리포카는 생각한다.”
오기 같은 거였다. 아니, 오기가 맞다. 전사는 근본적으로 먼 별의 바다에서 온 나의 동류였지만 지구에 오는 수단으로 선택한 육체의 영향으로 얻은 인류에 대한 애착 탓에 인류 카테고리에 속한 존재가 되는 것을 선택했다. 그 시점에 전사에게는 나의 공정함과 자비를 누릴 의무가 생겼다. 나는 담당하는 분야가 많은 신격이고 지배하는 행위에 익숙하다. 그러므로 비호할 대상이 선을 넘는 것을 반길 수 없었다. 설령 그것이 대상의 애착에서 비롯된 것이더라도.
그 전사는 이해력이 좋고 빠르게 통찰하며 피드백하고 생각을 곧바로 실행하는 전광석화 같은 존재였다. 그건 그때의 내게 행운이었을까, 불운이었을까.
“네가 나를 그렇게까지 힘주어 만류하는 건 네가 유용성의 증명을 위해 살아가는, 세계를 유지하는 사명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인가?”
“이 녀석아, 내가 이렇게 친절하고 성실하게 완곡해서 거절해줬는데 그렇게 사실대로 말하는 거 불경한 짓이야. 알아?”
“미안하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거 진짜 불경한 발언이었어.”
“만약에 언젠가, 인간이라는 종이, 세계가, 더 이상 네 손이 필요 없는 존재가 된다면. 네가 유용성의 증명을 위해 살아갈 필요가 없다면. 그러면 내가 생각하는 너의 행복에 대한 견해에 설득당해줄 의사가 있나?”
“하?”
나는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전사는 성실하게 교섭을 이어갔다.
“나는 내 의견을 언어로 만드는 데 서툴러. 지금의 내 역량으로는 너를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도 이해했다. 그렇다면 시간을 두고 설득하고 이해시킬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저기 있잖아. 너 지금까지 내 말 듣기는 했냐? 그게 네 인식에서 태어난 개념인 이상 그건 나에게는 온전히 그런 개념으로 기능하기는 힘들 거라니까?”
“그러면 내 인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가 되어줘. 너는 나보다 할 수 있는 게 많으니 가능할 거다. 한때 내 서번트였던 적도 있었으니 별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너 지금 무슨 말 하고 있는지 이해는 하고 있어?!”
차라리 청혼을 받는 게 낫겠다. 분쟁을 관장하는 자로서 온갖 이상한 인격체를 다 지켜봤다. 이해 불가능하며 공포스러운 신을 지배하고 싶어하는 존재도 잊을 만하면 나왔다. 하지만 순수하게 좀 더 심도높은 이해행위를 위해 신을 자신에게 종속된 존재로 만들고 싶어하는 녀석은 처음 보았다. 이문에서 보낸 1년을 통해 나는 전사가 한 번 마음 먹으면 넌더리가 날 정도로 끈질기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학습한 상태였다. 그래서 빠르게 대처수단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결국 대답했다. 대답하고야 말았다.
“젠장맞을, 그래! 알았다! 교섭 성립이다! 내가 신성으로서의 역할을 마친다면, 그때 너와 공통되는 경향성을 지닌 존재가 다시 나를 찾아온다면 네 것이 되어주마!”
“진심인가?”
“제안한 건 너거든? 왜 네가 당황하는 건데?!”
총명한 용모의 전사는 정말 드물게 멍청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거렸다. 나는 평정을 잃은 표정을 유지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뭐 정말로 평정을 잃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딱히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그냥 뻔한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이다. 전사는 특별한 태생과 별난 생애를 살아간 탓에 인류치고는 많은 힘과 많은 정보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딱 그것뿐이라는 사실을. 믹틀람파에 상처자국을 내려놓고 홀가분해진 영혼에 이번 생애의 전사의 기록은 남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기적이 일어나서 전사가 그 기록을 자신의 것으로 간직하더라도 이 전사가 전사였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으며, 전사의 자기자신마저 불사를 만큼 처절한 생애가, 데이비트 젬 보이드라는 식별기호를 지닌 경향성이 어쩌면 이 별이나 이 세계가 끝을 맞이하는 날까지 우주에 남아있을 가능성은 낮다는 사실을. 나는 약속을 지키는 존재지만 저 약속이 지켜질 확률은 낮고, 이룰 수 없는 목적을 지닌 존재는 지켜지지 않을 약속에 눈을 빼앗겼을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기만에 익숙한 존재고 인류라는 종을 지식으로는 알지만 궁극적으로 이해할 수는 없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전사가 기쁨을 억누르는 것 같기도 하고 울음을 참는 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해도 큰 감흥을 느끼지는 못했다.
“고맙다.”
“좋아, 교섭 성립. 그럼 다음 세계로 갈 때까지는 이상한 생각 하지 마라.”
“그래. 반드시 너를 찾아가겠다. 그러니 기다려 줬으면 좋겠어.”
“미리 말해두지만 나는 이런 알량한 계약 하나로 널 특별취급할 생각 없어. 네 소원을 이룰 방법은 스스로 생각해라.”
“네 그런 성실함, 나는 좋아한다.”
뭐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기만에 성공했고, 전사의 정신건강은 지켜졌고, 무엇보다 아끼는 전사가 웃고 있다. 사명의 대가로는 충분하다.
전사는 믹틀람파 거주자들이 평균적으로 보내는 체류기간보다 조금 짧은 시간이 지난 뒤, 생각보다 오랜 시간을 지체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사람처럼 바쁘게 다음 세계로 떠났다. 나는 테테오칸 입구에서 전사의 등을 떠민 뒤 다시 할 일을 하러 돌아갔다.
그 정도의 무게감이었다.
*
“진심이냐, 연기 나는 거울!!”
권속의 등에서 뛰어내린 케찰코아틀의 말.
“너 말이야, 남의 영역에 드나들 거면 적어도 통보는 하고 와. 예절이라는 개념 잊어버린 거 아니냐?”
방문자가 나타나는 바람에 별안간 낙원의 입구로 끌려 나온 내가 한 대답.
케찰코아틀은 한동안 할 말이 많은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멋대로 모닥불 맞은편에 앉았다. 나는 한 손으로 턱을 괴고(오늘의 케찰코아틀은 인간 모습을 한 나와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대답했다.
“물론 진심이야. 그런 중요한 의사결정 할 때는 기만한 적 없다고.”
“그럼 다들 당황할 거라는 사실도 예상하지 않았어? 그거 굉장히 너답지 않은 결정이니까, 야야우키黑 테스카틀리포카.”
“우리 상황도 이쯤 됐는데 좀 솔직해지자. 지금까지처럼 잡무를 떠맡아줄 포지션이 필요한 것뿐이면서. 쇼쇼아우키靑나 틀라틀라우키赤 녀석은 떠나고 싶어하니 그 녀석들한테 부탁하던가.”
“잡무 좋아하네. 없던 트러블도 만드는 포지션이겠지.”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케찰코아틀은 주인의 눈치를 살피던 권속에게 눈짓했다. 케찰코아틀과 같은 이름을 가진 권속은 날개를 치며 믹틀람파의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케찰코아틀과 나만 남았다. 나는 모닥불을 보고 있었고 케찰코아틀은 나를 보고 있었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케찰코아틀의 그 정공법으로 직진하는 성품을 쭉 꺼려 왔다. 남이 조용히 넘어가고 싶어하면 좀 모르는 체하고 조용히 넘겨줄 수도 있지 않냔 말이다. 물론 나는 남이 조용히 넘기고 싶어하는 일을 그냥 넘어가 준 적이 없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아마 케찰코아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리라. 딱히 맞춰줄 생각은 없었겠지만.
결국 케찰코아틀이 먼저 말했다.
“너 예전부터 이 별이랑 잘 안 맞았잖아.”
“대립하는 가치는 같을 수 없으니까. 네가 빛나는 역이라면 나는 덜 빛나는 역. 네가 인류에게 긍정당한다면 나는 부정당하는 역. 그런 느낌이지.”
“시답잖은 잡담은 됐어. 이유가 뭐야? 왜 여기 남으려는 거야?”
케찰코아틀은 진지한 얼굴이었다.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2017년이라는 미증유의 위기 이후에도 인류는 어찌어찌 생존을 이어갔다. 안 좋은 방향으로 멈춰서기도 하고 좋은 방향으로 폭주하기도 했다. 눈을 감았다 뜨면 태양이 바뀌던 시기처럼 화끈한 멸망은 볼 수 없었지만 애초에 그런 걸 보려고 사는 삶도 아니다. 테테오칸에는 꾸준히 새 고객이 왔고 억지력의 긴급요청도 잊을 만하면 왔다. 그런 시시한 업무에 시달린 지 몇만 년쯤 지났을 때, 여느 때처럼 제멋대로 느릿느릿하게 전진하던 인류는 갑작스레 독립을 선언하고 분가하는 자식처럼(이런 비유가 떠오르는 걸 보니 나도 지구 생활이 좀 길었던 것 같다) 별의 바다로 뛰쳐나갔다. 지닌 것을 대부분 인류에게 내주고 만 별이 슬슬 임종을 선택하기 직전에 벌어진 일이다. 지구의 영향권에 남아있던 신성들은 대부분 인류라는 무자비하고 낭비벽으로 가득 찬 생물군집이 임종을 맞이하는 행성이 청구하는 응보책임에서 벗어날 가능성은 낮다고 점쳐왔기 때문에, 그들이 더 늦기 전에 자신들의 손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몹시 기뻐했다. 다소 싱거운 결말이었지만, 우리들의 역할은 상당한 성취감과 그와 비슷한 정도의 얼떨떨함을 남긴 채 싱겁게 끝나 버렸다.
지구 같은 촌구석 별에 자리를 깔고 앉았다가 신대가 끝난 뒤에도 영락한 채 지구에서 아득바득 버텨온 신성들은 대체로 호기심이 많고 끈질긴 성품이었으므로, 자기들이 비호해온 인간들마냥 별의 바다를 궁금해하거나 혹은 고향을 그리워했다. 많은 신성들이 인간들과 함께 혹은 인간들처럼 별을 떠나갔다. 인간이 하는 생각이 다 비슷하듯 신이 하는 생각도 다 비슷비슷해서, 테테오칸에 모여 살던 동료들 또한 모성母星의 근황도 궁금하고 새롭게 문명을 일구게 할 생명체를 찾아보고도 싶다면서 이주와 관련된 논의를 시작했다.
혼자서 생각하고 싶었기 때문에 회합에는 나보다 교섭할 때 유도리가 있는 쇼쇼아우키를 대신 보내고 믹틀람파를 한 번 돌아보았다. 꽤 규모가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있을 것도 필요 없는 것도 잔뜩 있었다. 반드시 여러 번 쓸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지만 한 번 쓰고 손댈 일이 없어진 시설도 있고 별 생각 없이 만들었는데 요긴하게 썼던 시설도 있었다. 근면함은 나의 성품이 아니라 습성에 속했으므로 신경 쓸 틈이 없었지만 새삼스럽게 나도 제법 열심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연쇄적으로 생각해 버린 것이다.
“평소랑 비슷해. 내가 잘 부리는 변덕이야. 난 지금까지 좀 지나치게 열심히 일했고, 그러고 보니 앞으로도 계속 열심히 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것뿐이다.”
“…….”
“깃털 달린 뱀, 거울Tezcatl 좀 봐. 너 지금 살아 돌아온 시팍틀리를 본 것 같은 얼굴이다.”
“그거 혹시 말장난이야?”
“아니야.”
케찰코아틀은 이마를 짚었다. 나는 팔을 조금 벌려서 상체를 지탱하고 다리를 꼬았다. 케찰코아틀이 말했다.
“너는 대체로 미움받는 포지션을 차지하는 개체였고, 항상 시키지도 않은 짓에 열심이었지. 나는 너를 싫어하고 앞으로도 싫어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나와 다른 녀석들이 네 존재를 신화체계 내부에 허용해온 건 그게 네 관리자로서의 근면함이고 네게 악의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칭찬이냐?”
“네 본질에 대한 얘기야. 우리들은 모두 변했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지. 하지만 너는 언제나 시스템으로서의 존재의의에 충실했다. 그건 우리들에게 주어진 제일 근본적인 사명이고, 그래서 우리는 네가 우리 신화체계에서 제일 힘 있는 신이라 불리는 걸 인정하기로 한 거야.”
“코아틀, 아니. 이스타우키白.”
“대답해, 거미. 여기 남겠다고 결정한 건 네 기능이야, 네 욕망이야?”
인류는 천천히, 꾸준하게 지구를 벗어나고 있다. 머지않아 지구는 빈 별이 될 것이다. 그래도 도태되는 인간은 있으리라. 모든 인류가 지구를 벗어나고, 지구가 지성체의 요람으로서의 역할을 진정한 의미로 마치는 데는 어느 정도의 세월이 더 필요할 것이다. 지금까지 보내온 세월에 비하면 찰나에 불과하겠지만 아마도 그렇게 되겠지.
케찰코아틀이라는 신성은 항상 이렇다. 그렇게 서로 죽고 죽여대는 나날을 보내왔고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아니, 그런 나날을 보내왔기 때문에. 관리개체로서 모든 역할을 마친 존재가 욕망대로 행동할 몇 안 되는 기회를 의무를 위해 저버릴 생각인지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언제나 내가 ‘그 따위로’ 사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는 것이다.
나는 여상스레 대답했다.
“코아틀. 나는 너나 다른 녀석들처럼 인간종을 사랑하지 않아. 그건 옛날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달라지지 않을 거야. 이건 내가 선택한 이치고 규칙이다. 나는 이 별에 마지막으로 남은 인간을 보듬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그건 규칙 때문이 아니야. 내 욕망에 이 별이 아직 필요하기 때문이야.”
“욕망?”
“그게 말이다. 생각해 보니 내가 믹틀람파를 몇 년을 꾸려왔는데 내가 여길 써본 적이 한 번도 없더라고.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이게.”
깃털 달린 뱀은 드물게 눈썹을 양쪽으로 늘어뜨린 채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테테오칸의 관리자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기분 나쁘다고 평하는 웃음을 띄우고 말했다.
“그동안 신세 많았다. 넌 근본적으로 새대가리지만 뭐, 필요 없는 존재는 아니었다고 생각해.”
이 존재에게는 많은 것을 배웠다.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는, 그러면 다음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세계는 몇 번의 멸망 정도로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확신. 지긋지긋하고 기나긴 끝이 보장되지 않는 투쟁과 그 사이에서 태어나는 약동. 나라는 존재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지만, 그렇기 때문에 역시 지금도 싫다. 그런 존재와의 이별에 구질구질하고 감성적인 언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이 별에서 끝난다. 케찰코아틀은 이 별에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이 대화로 알아야 할 사실은 그것뿐이다.
케찰코아틀은 대답하지 않는다. 나는 실없이 웃으며 대답한다.
“그보다 너희들, 전쟁 없이도 세계를 꾸릴 수 있겠어? 잘 좀 해라, 진짜.”
그 뒤의 의사결정은 어이없을 만큼 빠르게 이루어졌다. 틀라틀라우키와 쇼쇼아우키는 콧노래를 부르며 떨어져 나갔다. 오랫동안 함께해온 갑작스럽고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경향성이 다른 충동에서 해방되는 것은 묘한 기분이었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내가 담당하던 영역을 남들에게 인수인계해야 해서 떠나는 동료들보다 내 쪽이 정신이 없었다.
그리고 출항 전야, 모두가 틀라위스틀람파에 모여앉아 연회를 벌일 때 메츠틀리아판이 머뭇거리며 찾아왔다. 너는 조금 질척거리는 것만 고치면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메츠틀리아판은 조금 망설이다 대답했다.
“그게 아니라, 오라버니는 이렇게 보여도 성실한 성품이시니…”
“너 이제 떠난다고 말 아무렇게나 한다?”
“…아닙니다. 별일 없다면 됐습니다.”
“응?”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메츠틀리아판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그간 수고 많으셨다는 말을 한 뒤 적당히 엉망이 된 연회장 한켠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제야 메츠틀리아판의 저 소녀처럼 보이는 그릇을 어디서 처음 봤었는지 기억해 냈다. 공룡인류와 유인원이 활보하는, 그리운 냄새가 나지만 내 기억과 다른 좌표에 존재하는 이문의 땅.
“아.”
나는 기본적으로 다차원적인 존재고 동시에 많은 생각과 의사결정을 한다. 하지만 그즈음에는 이런저런 측면을 분리하고 관장하던 분야를 인수인계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평범한 인격체 스케일로 존재규모를 줄인 상태였다. 그래서 과부하를 줄이기 위해 의사결정을 할 때 보유하고 있는 모든 데이터를 고려하나 그것을 모두 지각하지는 못하는 상태였다. 그래서 조금 미안한 얘기지만 그 때까지 잊고 있었다. 이문의 땅의 발언권을 훔쳐내서 나를 불러낸 불경한 전사를.
정말로 난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구에 남는 의사결정을 할 때 그 시답잖은 약속이 어느 정도 우선순위를 차지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 생각에 골몰하는 바람에 그 날 연회에서 꽤 감성적인 얘길 많이 들었는데 열심히 떠올리지 않으면 기억이 안 나게 되어 버렸다. 본인이 올 수 없는 상황인데도 불경한 짓을 하다니 이건 정말 드문 재능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 뒤 50년 정도 한산해진 지구와 테테오칸을 만끽했다. 마지막 인간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본 뒤에는 유카탄으로 갔다. 내가 기억하는 모습은 남지 않았으나 땅은 나를 알아보고 반겨주었다. 도시가 있었던 자리에서 잠을 청했다. 비몽사몽한 상태로 지켜지지 않은 약속에 대해 생각했다. 내 예측은 들어맞았다. 전사는 인간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나는 딱히 낙담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사소한 것으로 낙담하는 기능은 갖춰둔 적도 없고, 남이 내 기대를 저버리는 것은 아주 흔히 벌어지는 일이었다.
지구에서 몇십억 하고도 몇만 년을 살아왔지만 인간의 마음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나는 좋아할수록 미움받는 성질이었지만 그 성질 때문에 상처받은 적은 없다. 남에게 미움받아도, 남이 기대를 저버려도 딱히 슬프지 않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슬프지는 않다.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느 쪽을 기대해 왔을까? 전사가 약속을 지키는 것? 지키지 못하는 것?
잘 모르겠다.
‘마지막 사고치고는 지리멸렬하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잠들었다. 참으로 나다웠다.
*
[제안: 항로 변경]
“음?”
읽고 있던 브리핑 서류에서 눈길만 위로 끌어올렸다. 지난 시즌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활약하고 2계급 특진한 데까지는 참 좋았는데, 하필 그때까지 애지중지하며 탔던 쾌속정 아크엔젤 호가 수리 불가능 판정을 받을 만큼 완벽하게 폭산해 버렸다. 남의 우주선을 얻어 탈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근처 행성에서 아무 중고품 샵이나 들어가서 중고 우주선을 수소문했다. 그게 시발바 호와의 만남이었다. 아크엔젤 호보다 오래된 모델이지만 AI의 성능은 아크엔젤 호와 비교불가능하다며 중고 우주선 딜러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어느 정도는 딜러의 말재간에 넘어가 구입한 거였지만 시발바 호는 괜찮은 배였다. 승차감도 좋았다.
나는 브리핑 서류를 쥔 채 되물었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업무를 시작하려면 서류를 한 번은 끝까지 읽어놓아야 했다.
“최단거리 항로를 입력한 걸로 알고 있다. 잔여 연료량도 딱 맞게 계산했는데.”
[긍정. 제안: 항로 변경]
“?”
의아해졌다. 이렇게 빠르게 고장이라고? 관제 AI의 성능은 아크엔젤 호보다 이쪽이 더 낫다고 했던 것 같은데.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시발바 호의 관제 AI는 변경된 항로를 표시했다. 우주선을 새로 뽑는 바람에 돈이 별로 없어서 출장지까지 워프를 하는 대신 변방 성계를 가로질러 항행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있는 장소는 태양계. 서번트 유니버스 이전의 시대, 서번트의 발상지 중 한 곳이지만 지금은 별로 볼거리는 없는 역사유적 취급받는 성계다.
액정에 표시된 이름을 읽는다.
“유적행성 미들 어스….”
[긍정]
“꽤 오래된 유적지 아닌가? 침입이 금지된 구역이라면 조금.”
[확인: 금지 규정 딱히 없음, 보유자원이 거의 다 고갈된 무인행성]
팔짱을 끼었다. 뭐지. 분명 제안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도 기묘하게 항로 변경을 강요하는 듯한 분위기는 대체 뭐지. 나는 출장지의 위치와 AI가 제안한 변경된 항로를 다시 한 번 체크했다. 저 행성에 들를 경우 일정이 하루 정도 딜레이되고, 나는 현장에는 행동 개시 하루 전에 도착하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었다. 평소의 내 의사결정 방식을 따른다면 이 제안은 무시하는 게 맞다. 하지만 동료들에게 풍문으로 들은 적이 있다. 요즘 AI는 몰라도 좀 예전에 나온 AI에는 가까운 미래를 어느 정도 예지해 탑승자가 새로운 시즌의 시발점이 될 사건에 휘말려드는 것을 방지하는 기능이 딸려 있었다고, 하지만 유니버스 주민들은 보통 대체로 새 시즌의 메인 사건에 휘말려들어 눈에 띄고 싶어하기 때문에 이 기능은 자연스럽게 없어지는 추세가 되었다고.
고민했다. 시발바 호는 혹시 그 즈음에 나온 구형 AI인가. 그렇다면 시발바 호의 인공지능의 말을 따라야 하는가. 하지만 나는 업무 중인데. 결국 다시 물었다.
“제안을 한 이유를 알고 싶다.”
[운명력]
“운명력?”
개념은 알고 있다. 서번트 유니버스의 기반이 된 각 행성의 신화나 전설, 실제로 벌어진 사실들을 계승한 현재 유니버스를 살아가는 서번트들에게 구시대에서 내려온 ‘전승’ 이 영향을 미치는, 구시대의 서사라는 개념이 실재에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어리둥절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2시즌 전쯤 은하경찰에 들어간 포리너와 캐스터 멀티 클래스를 보유한 신출내기 서번트로, 유명한 전승을 지닌 존재도 여기저기 ‘운명력’ 이 작용할 정도로 연이 깊은 서번트가 생길 정도로 대단한 활약을 한 존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의 마지막 부분에서 조금 활약했지만 그뿐이다.
혹시 내가 모르는 사이 원한 같은 걸 샀나?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하려던 순간이었다. 충격과 함께 선체가 크게 흔들렸다.
[경고, 우주 데브리와 충돌. 손상률 3%…]
한 발 늦게 이머전시 콜의 소음과 비상등의 붉은색 빛이 선체에 가득 차올랐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상황이었지만 참기로 했다. 나는 혼자였으므로 들어 줄 사람도 없고 기운만 빼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침묵을 유지하면서 데미지리포트 화면을 띄웠다. 충돌한 물체가 좀 안 좋았던 모양이다. 3%였던 손상률은 5%, 7%, 수순을 밟으며 차근차근 올라가고 있다. 불시착 가능한 거리에 있는 행성은 조금 전 AI가 추천했던 유적행성 미들어스밖에 없었다. 나는 비명처럼 외쳤다.
“이게 ‘운명력’이라는 거냐?!”
AI는 대답이 없었다. 다급하게 수동조종 모드를 켜고 항로를 바꾸었다. 태양계는 까놓고 말해 변경 깡촌이다. 구조요청을 할 리소스를 잔존하려면 조금이라도 선체의 손상을 줄이고 불시착해야 했다. 결국 다급하게 외쳤다.
“비상착륙 가능한 지점을 3개 이내로 리스트업해서 불러라!”
[검색 완료. 네바다-에어리어 51, 유카탄 반도, 그레이트브리튼 섬.]
“제일 가까운 곳은?!”
[확인 완료. 유카탄 반도]
“좋다, 비상착륙 가능한 좌표를 서치해─”
[30초 후 대기권에 돌입합니다]
“젠장!!!!”
결국 대기권에 돌입할 때는 있는 대로 욕을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새 시즌을 시작하기에 나쁘지 않은 장면이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운명력’ 이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두근거림을 잊을 정도로.
*
각성은 갑작스러웠다.
“?”
안개로 가득 찬 어슴푸레한 아이스블루 색 하늘이 맨 처음으로 눈에 들어왔다. 세기가 싫어질 정도로 오랫동안 보아온 낯익은 여명黎明의 색을 띠고 있었다. 12천상의 북쪽…이 아니다. 애초에 12천상은 내가 잠들 장소를 정한 시점에 내 손으로 해체했다. 이제 없다. 여기는 유카탄이고, 내가 오랫동안 머물렀기 때문에 이 장소가 내 개념에 침식당했다는 사실을 빠르게 깨달았다.
“아니 그건 그렇다 치고. 이게 무슨…”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시각, 폐호흡, 후각, 머리, 직립보행을 하나 직립보행과 잘 맞지 않는 다리와 팔 두 개씩. 인간형 육체였다. 그것도 당황스럽다. 남들이 자주 오해하는 사실이지만 나는 인간형 육체에 큰 애착이 없다. 내가 제일 큰 애착을 가진 나왈은 재규어고, 내가 본의 아니게 잠에서 깨어났다면 그 모습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제일 높다. 그런데도 이렇게 되었다면 답은 자명하다. 인간형 지성체가 나를 관측했거나, 그에 상응하는 이상사태가 벌어졌다는 뜻이다.
멀리서 뭔가 날아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혼란스러워졌다. 일단 뭐든 해야 하는데 내가 잠든 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일단 정신을 조금 집중해서 안개를 걷어냈다. 주변의 지형에는 큰 변동이 없다. 생물체의 기척도 식물이나 동물 외에는 느껴지지 않는다. 잠들기 전에 바랐던 대로 이 별은 잘 방치되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말이다.
귀를 찌르는 소음은 점점 가까워져 왔다. 진원지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하늘에서 뭔가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있는 방향으로.
“또 운석이냐!!!!!”
내가 피하기 무섭게 접근한 물체는 잠이 덜 깬 내 청각에 대한 악의라는 착각조차 느껴지는 굉음과 함께 지면과 충돌했다. 나는 속절없이 지면의 충격에 휩쓸렸다. 권능이 있으면 우습게 피할 수 있겠지만 이 육체는 인체이기 때문에 마술이 아니라 권능을 쓸 때면 육체를 물리적으로 소모해야 한다. 크게 다치진 않을 것 같다는 결론이 나와서 그냥 중력에 굴복해서 쓰러지는 것을 선택했다. 꽤 아팠다. 뭐든 버틸 방법이 필요해서 있는 대로 혼잣말을 했다.
“여기 터가 안 좋은 거 아냐?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추락이나 충돌 같은 거. 그런 계통의 저주를 받았는데 우리들만 몰랐다던가? 젠장, 아니면 우리가 추락한 게 개념적으로 안 좋은 영향을 미쳤다던가…”
분진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나는 조심조심 몸을 일으켜서 추락한 물체를 관찰했다. 잘 보니 물체는 문명적인 흔적이 엿보이는 조형이었다. 내 눈에 익숙한 것과는 개발계통이 많이 다르지만, 내 지식범위 내에서 저것과 제일 비슷한 형태를 취하는 물건은 소형 우주선과 제일 비슷했다. 별의 바다로 떠난 인류의 소산물.
“…잠깐.”
문득 지금 내가 들어있는 육체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굴에 스치는 긴 머리카락을 한 움큼 붙잡았다. 부드러운 직모. 가느다란. 금색의.
오한과 닮은 감각이 엄습한다. 그에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푸쉬식 하는 소리와 함께 우주선의 출입구로 추정되는 것이 열린다.
금발의 인간 남성형 지성체는 혼이 나간 듯한 표정으로 데이비트를 바라보았다.
데이비트는 굉장히 난감해졌다. 묘렌지나 보다임에게도 몇 번 지적받은 사실이었지만 데이비트에게는 명백하게 사회적 스킬이 부족했다. 경찰이라는 직종에는 어느 정도의 사회성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데이비트는 저런 식으로 당황한 존재를 대하는 데는 서툴렀다. 시발바 호에서 내리기 직전, 가까운 곳에 인간형 서번트 반응이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거나 유적지를 연구하는 별난 연구자려니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안개가 많이 끼는 지역에 적합하지는 않은 노출도가 높은 복장 같은 것을 보면 서번트는 확실하지만 연구자 같지는 않다. 데이비트는 조금 망설이다가 얼마 전 승진하면서 받아낸 권한으로 상대가 보유한 스킬을 몰래 체크했다. 대마력, 진지작성, ■■의 지혜, ■■의 관리자, 신성.
머릿속에서 조용하지만 확실한 소리가 울려퍼졌다.
‘망했다.’
아카데미 시절, 유니버스의 역사 시간에 배웠다. 다양한 세계선의 인류종이 별의 바다로 떠나 서번트 유니버스의 기틀을 마련했을 때, 인류와 함께 부대끼던 신성들은 대부분 인류종을 따라 별을 떠났지만 간혹 별에 애착을 품어 떠나지 않고 별을 자신의 무덤으로 정하는 타입의 신성도 있었다고. 그리고 데이비트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저 존재의 육체조성은 서번트보다는 ‘인간’ 에 가깝다. 스스로 휴면기에 들어간 별의 원생생명체를 본의 아니게 깨워버린 것이다. 시말서감이다. 혹시 위험한 존재일 경우 시말서로 안 끝난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비트에게 직감 스킬은 없지만, 막연한 감이었다. 막연히 저 존재는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기묘한 안도감. ‘운명력’ 이라는 말의 두근거림과 다른, 묘한 성취감 같은 것.
그 표정으로 데이비트를 멍하니 바라보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너 말이야.”
조금 낮은 목소리지만 발음이 좋다. 어디에나 잘 녹아드는 미온수 같은 느낌이었다. 데이비트는 대답했다.
“아, 네.”
“웬 존댓말이야. 어색하게.”
“예?”
“뭐냐, 역시 모르나.”
남자가 별안간 입가를 가리고 쿡쿡 웃기 시작했다. 데이비트는 멍청한 표정으로 남자를 보았다. 남자의 발화는 실패했다. 하지만 남자는 기분이 나쁜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즐거워 보였다. 즐거운 표정으로, 노래하듯이 입을 열었다.
“이건 약속을 지킨 걸로 봐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군. 오기는 왔어. 그런데 뭐 때문에 왔는지는 모르지. 기억도 못 하고.”
남자는 다시 전사를 생각한다. 뭐라도 더 해주고 싶다고, 행복이라는 개념을 이해하게 해 주고 싶다는 꿈 같은 이야기를 하던 전사를 생각한다. 약하고 덧없는, 존재의 본질을 간직하지도 못하고 존재의 기원만을 조금 공유하는 존재만을 남긴 과거의 전사를 생각한다.
사실은 말이다, 데이비트. 나는 네 말을 처음 들은 순간부터 알고 있었어. 나는 이렇게 생겨먹은, 인간과 서로 이해할 수 없는 인격체야. 네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아. 마치 인류로 살기로 마음먹고 인류 틈에서 그렇게 노력한 네가 끝까지 인류에게 공감할 수는 없었던 것처럼. 내가 몇십억 하고 몇만 년 하고 몇천 년이 더 흘러도 역시 인간의 마음은 잘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뭐, 봐줄까.”
이렇게 마음이 들뜨니까.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네가 여기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내가 너와의 신의를 지켰다는 사실이 이렇게 즐거우니까. 그러니까 조금 관대하게 굴도록 하자. 약속은 지켜진 걸로 하자.
남자가 자세를 고쳤다. 데이비트는 무심결에 숨을 삼켰다. 중요한 순간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대로 들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든다.
“자, 다시 한 번 자기소개다. 나는 테스카틀리포카. 이 별에서 꽤 오랫동안 신성으로 지냈지만 지금은 은퇴했다. 클래스는 룰러나 버서커.”
“그…초면에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공존 가능한 클래스 적성인가?”
“견문이 좁구만. 너 경찰이라며? 뭐 됐어. 나도 요즘 상황은 좀 지켜봐야 알겠으니까. 아무튼, 좀 갑작스런 얘기지만 이 시간부로 네 소유물이 되어주마.”
“아 그래, 소유물…어? 무슨?”
소년 같은 인상을 주는 청년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뜬 눈으로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믹틀란에 갓 현현했을 때 가끔 보던 표정과 비슷했다. 그래서 테스카틀리포카는 꽤 즐겁게 웃었다. 장대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재시작이라고. 더 이상 시스템으로 살 필요 없는 여정의 시작에는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뭐 그건, 지금은 그리 중요한 얘기는 아니고. 보아하니 리소스는 우주선 수리에 필요한 거지? 그거야 쉽지. 조달해주마. 대신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음…뭐가 뭔지는 일단 설명이 필요할 것 같지만 그건 고맙다. 내게 가능하다면 어떻게든 해주마. 뭐지?”
“선글라스.”
“?”
“이 육체, 보다시피 색소가 옅어서 강한 빛에 약하거든. 그러니까 선글라스. 어울릴 만한 걸로 잘 골라와라. 그럼 일단 상태 좀 볼까.”
테스카틀리포카는 데이비트의 어깨를 툭 치고 시발바 호로 다가갔다. 데이비트는 멍청한 표정으로 테스카틀리포카가 친 어깨를 감싸며 모종의 동물적인 육감을 느꼈다. 묘하게 가슴이 뛰는, 데이비트가 지금까지 겪어본 감정들과 대조해 보면 위기감에 제일 가까운, 어쩌면 이 사건으로 지난 시즌보다 더한 일을 겪을지도 모르겠다는, 어쩌면 나는 지금 내 인생을 바꿔놓을 만큼 터무니없는 것을 주워버렸을지도 모르겠다는 기묘한 예감이었다….
<덤>
“데이비트 젬 보이드, 귀환했다. 오랜만이다, 보다임.”
“오, 데이비트. 이번에는 안 죽고 귀환했구나? 다행이다. 그런데 그쪽은 누구야? 못 보던 서번트네?”
“나도 잘 모르겠다. 변경 유적행성에서 접촉사고가 났는데 어쩌다 보니 동행하게 됐어. 출입용 ID 등록이 필요한데 필요한 서류 일람을 가르쳐줘.”
“? 네가 잘 모르겠다니 드문 일도 다 있네. 단말기 쪽에 보내 둘 테니 확인해줘. 아, 그렇지. 반갑습니다. 저는 키리슈타리아 보다임. 괜찮다면 진명을 가르쳐주세요.”
“어이쿠, 낯익은 얼굴이군. 너 같은 것도 행성 밖으로 내보내다니 지구인류의 담력도 참 대단하다니까…”
“?”
“뭐 별로 중요한 건 아닌가. 아무튼 나는 룰러 테스카틀리포카. 이 녀석의 소유물이다. 잘 부탁해.”
“?????”
“보다임, 이 녀석 말은 깊게 생각하지 말고 들어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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